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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거-38화 (38/195)

38화

김현태가 말을 이었다.

“이번처럼 내가 자네의 계좌를 알아내는 일? 내가 임의로 알아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지. 자네가 누군가에게 말해주지 않는 이상 절대 알 수가 없네. 그리고 자네의 정체만 숨긴다면, 자네의 계좌가 누구의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게 되는 거야. 자네는 익명의 계좌로 누구에게든 안전하게 돈을 입금 받을 수 있게 되는 거지.”

강우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제 계좌를 알기 이전이 문제죠. 제가 누군지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누가 알려준 겁니까?”

“자네가 집행자인 걸 알고 있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나?”

강우에게 짚이는 사람은 단 한 사람, 한소영이었다. 강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없습니다.”

“확실한가?”

강우는 아무런 대답도 않았다.

‘짚이는 사람은 한소영밖에 없는데… 하지만 나한테 사비를 입금할 만큼 호의적이고, 그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어도 누군가에게 내가 집행자라는 걸 알릴 것 같지는 않았어.’

김현태가 말했다.

“애초에 경호를 뽑는 건 내 목숨을 책임질 사람을 뽑는 거야. 게다가 아까 말했지만, 누군가 직접적으로 내 목숨을 노리고 있을 때 내가 아무나 고용할 리가 없지 않은가?”

김현태는 자신이 강우를 고용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김현태는 자신의 직속비서가 자리를 비운 사이, 확실하게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김현태의 성격상 아무나 쉽게 믿지 못했다. 김현태는 그나마 가장 믿음직한 국가기관인 예거 파티 측에 의뢰를 했었다. 하지만 예거 파티는 개인의 신변보호를 위해 움직일 수는 없다며 김현태의 의뢰를 거절했다.

김현태는 블랙마켓에서 활동하는 이들을 포함해 예거 클랜들과 프리랜서 예거들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제법 믿음이 가는 예거들은 터무니없이 비싼 금액을 요구해왔다. 김현태는 돈 계산에 관해서 굉장히 철저했다. 자신이 소비를 할 때 그 만큼의 가치를 지니지 않았다면 절대 내줄 수 없다는 게 지론이었다. 즉, 경호를 대가로 1,000만 겔드를 요구한 예거가 1,000만 겔드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여기면, 그 돈을 내주고는 절대 고용하지 않았다.

반면, 액수가 합리적인 예거들은 믿음이 가지 않았다. 범죄자들은 당연히 제외 대상이었고, 뒤가 조금이라도 더러운 사람들 또한 제외했다.

그러던 중 김현태의 눈에 강우가 들어왔다. 복면을 뒤집어쓰고 활동하는 것이 마치 히어로라도 되는 것처럼 김현태의 호기심을 자아냈다. 강우는 퍼플 헤드 클랜과 레드 헤드 클랜을 무너트렸다. 그것은 조직폭력배들을 물리친 것과 다름없는 정의로운 행동에 가까웠다. 복면을 뒤집어쓰고 활동해 다른 사람들의 접근, 특히 당시에 김현태를 노리고 있는 유족들이 접근해 교섭을 할 수 있는 가능성도 거의 최저였다. 김현태는 강우에 대해 조사해 원래의 신상정보까지 확보했고, 인간관계마저 굉장히 좁은 것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강우가 지난 세월을 잉여처럼 보낸 것이 김현태의 입장에서는 선택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김현태는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자네가 정체를 숨기고 활동한 게 큰 이유 중 하나였어. 유족들이 자네와 교섭을 할 여지조차 없지 않은가? 뭐, 보통은 유족들이 접근을 해도 그 정보를 내게 가지고 와서는 돈을 더 요구했겠지. 하지만 자네는 그럴 일조차 없지 않겠는가?”

“겨우 저 하나를, 고작 2시간 동안 고용하자고 그 노력을 하셨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별로 노력 안 했어. 나는 말 한마디만 했지. 자네를 조사하라고. 그 다음은 보다시피… 이렇게 됐네.”

강우가 물었다.

“그래서 저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았습니까?”

“아, 그건 생각보다도 훨씬 간단했지.”

김현태가 뒤를 향해 손짓을 했다. 한 여자가 김현태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자는 검은색 치마정장을 입고 있었다. 여자는 김민지였다.

강우는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김민지?”

김현태가 말했다.

“자네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건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야. 내가 자네의 스위스은행 계좌를 만드는 걸 도와주고, 또 나한테 자네의 복면이나 복장에 대한 문제점들을 해결할 방법도 갖고 있지. 뭐, 그 부분이야 자네도 구할 수 있는 거지만, 꽤 비싼 거라 나쁘지 않을 거야.”

강우는 잠시 김민지를 노려보다가 김현태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

김현태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내가 자네를 제대로 봤어. 눈치도 있고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다 이 정도 짐작은 할 거 같은데요.”

“그런가? 하하하하.”

김현태가 말을 이었다.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 혼자서 하는 건 아니고, 내 직속비서와 함께 하게 될 거야. 이번 일만 도와주면, 스위스은행 계좌를 만드는 것도 도와주고, 자네의 복면과 복장 문제도 해결해주지. 그리고 보수도 5,000만 겔드를 주겠네.”

5,000만 겔드라는 말에 강우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김현태의 말이 끝나자마자 직속비서인 남자가 말했다.

“회장님, 그건….”

김현태가 손을 살짝 들어 올리자 직속비서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김현태는 다시 강우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자네의 정체에 대해 절대로 발설할 일이 없을 거란 약속도 하지. 사실 자네의 정체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있지도 않고 말이야. 뭐, 자네에게 나쁠 건 하나도 없지 않은가?”

“제게 선택권이 있긴 합니까? 제 정체에 관심은 없지만, 제가 정체를 드러내는 걸 싫어하는 건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걸 퍼트려서 제가 싫어하는 상황 정도는 만드실 수 있겠죠.”

김현태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맞아. 그래서 어쩌겠다는 건가?”

“당연히 합니다. 다만, 무슨 일인지는 들어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지금 이 자리에서 얘기하긴 곤란하네. 내일 따로 만나서 하지.”

“그러죠… 그럼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는 겁니다.”

“그건 걱정하지 말게. 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어제 만났을 때 내가 했던 말 다 잊었나? 사람들에게 진실하게 다가가는 것, 그것이 내 성공비결이라네.”

김현태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럼 내일 내가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

“아니요, 장소를 알려주시면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 편히 쉬게나.”

강우가 몸을 돌리는 김현태에게 말했다.

“한 가지 더요.”

“뭔가?”

“제 복면과 복장에 관한 건 무슨 말입니까? 문제점을 해결할 방법이라뇨?”

“그건 자네가 일을 무사히 마쳤을 때 알게 될 걸세. 아마 마음에 들 거라고 생각되네. 마음에 안 든다고 해도, 그냥 되팔아도 꽤 돈이 될 거야. 그럼 내일 보지.”

김현태는 남자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김민지는 걸음을 옮기면서 고개를 돌려 강우를 바라봤다. 강우는 눈썹을 잔뜩 찡그리며 김민지를 노려봤다. 김민지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채 자리를 떴다. 강우는 김민지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 개씨팔년….”

강우는 주먹을 꽉 쥔 채 집으로 들어갔다.

강우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있는 힘껏 집어던지려 치켜들었다. 강우는 전신에 힘만 잔뜩 준 채 집어던지지 않았다. 옷가지가 들어있는 가방일지라도 강우가 있는 힘껏 던졌다간 건물이 무너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강우는 이를 악 물며 생각에 잠겼다.

‘싹 다 죽여버릴까?’

강우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봤다.

‘그냥 나 자신인 걸 까발리고 다녀?’

강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뒤 다시 거울을 쳐다봤다.

‘내 복면과 복장의 모습을 감출 수 있다는 건 뭐지?’

강우는 침착함을 되찾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강우는 우선 김현태를 만나보기로 결정했다. 우선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김현태와 김민지 등 몇몇을 죽이는 것이 크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강우는 아까 김현태와 만났을 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지는 못했다.

김현태는 이름만 들으면 아는 기업의 회장이었다. 그런 사람을 죽이는 것은 파장이 클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강우가 용의선상에 오를 것 또한 분명했다.

아무리 시체를 잘 처리한다 해도 꼬리가 밟히기 쉬웠다. 자칫 잘못했다간 평생 쫓기는 몸 혹은 교도소에서 썩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김현태가 예거이기만 했어도 그냥… 아니지. 그 측근이라는 놈은 예거인 것 같던데… 같이 연관이 돼있으면 상관없는 거 아닌가?’

강우는 양손 깍지를 끼며 생각했다.

‘그리고 나라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죽일 수 있어.’

강우는 김현태의 제안에 대해 생각했다.

‘5,000만… 그리고 스위스은행 계좌에 복면을 커버할 수 있다는 물건….’

강우는 턱에 손을 가져갔다.

‘그냥 잡아서 협박을 한 다음에 뺏어도 되는 것이긴 한데… 아니지. 그래서는… 그냥 강도잖아. 사실상 김현태가 나한테 큰 피해를 준 것도 없고….’

강우는 마음을 굳혔다.

‘계속 고민해서 뭐하냐. 우선 만나보고 결정하자. 일이 어렵지 않으면 해준 다음 보상을 받는 거야. 그쪽 입장에서 굳이 내 정체를 까발리는 게 대단한 일도 아니고, 굳이 하려고 하진 않을 거야. 그리고 일이 정말 아니다 싶으면 그땐… 최악의 경우엔 싹 다….’

강우는 김민지를 떠올렸다. 김민지만 아니었어도 강우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강우는 휴대폰을 들어 김민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민지는 혼자 있는 듯 했다. 강우는 만나자고 했지만, 김민지는 거절했다.

“어차피 내일이면 보게 될 거야.”

김민지는 김현태의 비서 겸 경호원으로 취직해있었다. 김현태가 사람을 풀어 강우에 대한 정보를 캐낼 때 정보원은 김민지에게까지 접촉했다. 김민지는 강우가 집행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여러 가지 조건을 붙여 정보를 팔았다. 김민지는 예거로 활동할 때와 실수입의 차이도 그리 크지 않은데다가 위험부담도 없어 매우 만족한다고 했다. 김민지는 강우에게 네 덕분이라며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강우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김민지는 짜증 섞인 말투로 얼른 끊으라고 했다.

“한 가지만 묻자. 어떻게 알았지? 퍼플 헤드 클랜과 레드 헤드 클랜을 무너트린 것으로 추측한 건가? 넌 처음부터 나를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 줄 알았지. 확실한 것도 아니고, 내가 추측하는 정보를 김현태 회장님이 샀겠어? 애초에 네가 집행자일 거란 생각 따윈 하지도 않았고.”

“그럼 대체 어떻게 안 거야?”

김민지는 한소영에게서 알게 됐다는 말만을 남기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강우는 휴대폰을 책상 위에 올려놓은 뒤 침대에 누웠다.

‘한소영도 다시 한 번 만나봐야겠군….’

강우는 내일을 위해 잠을 청했다.

다음 날이었다. 강우는 김현태에게서 연락을 받고, 준비를 했다. 강우는 복면을 뒤집어쓰고, 복장을 갖춘 채 집을 나섰다. 복면의 뺨 부위에는 여전히 구멍이 나있었다.

강우는 진실생명보험 본사의 회장실에서 김현태를 만났다. 회장실 입구에는 김민지가 정장 차림으로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강우는 김민지를 노려봤다. 김민지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강우가 회장실로 들어섰다. 회장실에는 김현태가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김현태의 바로 옆에는 비서실장이 양손을 모으고 서있었다.

김현태는 강우가 반가운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서 오게나. 앉게.”

김현태는 자신의 건너편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강우는 의자에 앉자마자 물었다.

“일이라는 게 뭡니까?”

김현태는 강우에게 부탁할 일에 대해 설명했다.

진실생명보험에겐 이십여 년 이상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는 기업 안심생명보험이 눈에 가시거리였다. 김현태는 진실생명보험을 완전히 찍어 누르고 싶었다. 이십여 년 동안 라이벌이었던 만큼 앞으로 이십여 년 이상 쫓아오지 못할 만큼 격차를 벌리고 싶었다. 김현태에겐 이에 관련된 계획이 있었다.

김현태는 옆에 서있는 비서실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는 여기 안 실장과 같이 어떤 일을 좀 해주면 돼.”

“어떤 일이라는 게 뭡니까?”

“자네가 할 일은 별거 없어. 계획에서 중요한 부분은 안 실장이 다 할 거야. 자네는 시간만 좀 끌어주면 돼. 약간의 경범죄, 무단침입, 필요에 의해서 약간의 폭력만 행사하면 되네.”

강우는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저보고 범죄를 저지르라는 겁니까?”

“자네가 시간만 끌면서 별다른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경범죄에 무단침입 미수 정도로 끝나겠지. 그리고 그것들을 저지른다고 해서 경찰서에 갈 필요도 없고 말이야.”

강우는 안 실장을 한 번 쳐다본 뒤 말했다.

“저 사람이 하는 일은 대체 뭔데요? 제가 연관되는 일인데 어떤 건지는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지. 자네는 모르는 게 낫지. 모르는 상태에서 가담하면, 최악의 경우에도 자네는 내가 앞서 말한 경미한 일들에만 책임을 지면 돼. 기껏해야 벌금형이지.”

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선작과 추천 부탁드립니다.

많은 분들이 우려를 남겨주셔서 한 줄 남깁니다만, 이번 만큼은 결코! 주인공 호구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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