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먼저 입을 뗀 것은 강우였다.
“심상치 않아.”
쿠라마는 주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응. 뭔가 있는 것 같아.”
쿠라마는 피를 뒤집어쓴 나무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일단 저쪽으로 가보자.”
강우와 쿠라마는 최대한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빨간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나무는 유난히 커다랬다. 기둥은 둘레가 10m는 족히 될 것 같았고, 기둥의 길이만 10m 이상, 나뭇가지까지 친다면 20m는 돼보였다.
강우는 나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쿠라마는 나뭇잎의 피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오래 된 거 같지는 않아.”
강우는 나무 기둥에 손을 가져다 댔다.
“감이 안 잡히네….”
강우와 쿠라마가 고민에 빠져있을 때였다.
쿠득, 쿠드드득, 쿠드득.
강우가 손을 댄 나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우와 쿠라마의 시선이 나무에 집중됐다. 강우는 나무 기둥에 대고 있던 손을 뗐다.
촤라락! 끼이익.
나뭇가지들이 줄기처럼 늘어나 강우와 쿠라마를 향해 뻗어 나왔다. 나뭇가지들은 강우의 왼쪽 손목과 목, 오른쪽 발목을 휘감았다. 쿠라마는 뒤로 몸을 날려 간신히 피해냈다.
강우는 줄다리기를 하듯 나뭇가지와 힘겨루기를 하며 말했다.
“이게 뭐야?”
나무는 나뭇가지들로 강우를 묶은 채 문자 그대로 일어났다. 굵었던 기둥의 양 옆이 갈라졌다. 갈라진 부분은 뿌리부터 뽑아들어 양팔이 됐다. 가운데 부분의 뿌리들 역시 땅에서부터 뽑혀 나와 두 다리가 됐다. 손가락과 발가락들은 모두 무수히 많은 굵은 뿌리와 잔뿌리들이 얽혀 자유롭게 움직였다.
나뭇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들은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머리카락이나 다름없었다. 나뭇가지들 바로 아래 기둥에 구멍이 생겨났다. 위쪽의 두 구멍은 눈과 같았고, 아래쪽의 커다란 구멍은 입이 됐다.
강우와 쿠라마의 앞에 나타난 몬스터는 이성 하급부터 삼성 하급까지 그 강함이 다양한 ‘시그라’였다. 시그라는 말 그대로 나무 괴물과 같은 모습이었다. 주로 등급이 나뉘는 기준은 크기였는데, 일반사람의 키와 비슷한 작은 것부터 지금 강우와 쿠라마 앞에 있는 시그라처럼 거대한 것까지 다양했다.
시그라는 기본적으로 내구력이 뛰어났으며, 양팔과 양다리는 물론, 모든 뿌리들과 나뭇가지들, 줄기, 개중에는 나뭇잎까지 모두 공격과 방어가 가능해 굉장히 까다로운 몬스터였다. 또한 거대한 입은 바위도 부술 만큼 강력해 웬만한 능력자들도 한 번 물리면 돌이킬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시그라의 약점은 나무답게 불이었다.
시그라는 나뭇가지를 더 뻗어 강우의 사지를 모두 붙들었다. 시그라는 강우를 *거열형에 처하듯 사지를 찢어내려 잡아당겼다. 사지는 물론, 목까지 몸에서 뽑아내려 했다.
“크윽!”
쿠라마는 전신에서 주황색 빛을 뿜어내며 소리쳤다.
“조금만 참아!”
“참긴 뭘 참아!”
강우는 턱을 붙이고, 양팔을 확 잡아당겼다. 투둑, 나뭇가지가 끊어져버렸다. 강우는 곧바로 오른손을 옮겨 목에 감겨있는 나뭇가지를 뜯어냈다.
쉬리릭, 휘릭.
시그라가 강우의 양 발목에 묶인 나뭇가지를 확 잡아당겼다. 강우의 몸이 거꾸로 들렸다. 강우는 상체를 세워 양 발목에 묶인 나뭇가지를 뜯어내려 했다.
휘리릭!
나뭇가지들이 뻗어와 강우의 양팔과 몸통을 휘감았다. 강우는 짜증난다는 듯 몸부림치며 “아, 진짜!”라고 소리쳤다.
쿠라마가 전신에서 주황빛을 뿜어내며 시그라에게 접근했다.
휘리리릭, 텅! 텅! 텅! 텅!
시그라의 나뭇가지들이 쿠라마를 향해 날아들었다. 나뭇가지의 끝은 마치 송곳처럼 뾰족하게 변해있었다. 쿠라마는 지그재그로 날아드는 나뭇가지들을 피했다. 빗나간 나뭇가지들은 단단한 바닥을 두부처럼 푹푹 뚫고 들어갔다.
쿠라마가 오른쪽 주먹을 치켜들고 시그라의 몸통을 노렸다.
터엉!
뒤로 날아간 것은 쿠라마였다. 시그라가 왼팔을 크게 휘둘러 쿠라마를 쳐냈다. 쿠라마는 재빨리 왼팔을 들어 직접적인 타격은 면했지만, 뒤로 5m 이상 날아갔다.
강우는 양팔을 확 잡아당겼지만, 나뭇가지가 끊어지지 않았다. 시그라는 나뭇가지 길이의 여유를 둔 채 강우를 붙들고 있었다. 시그라는 강우를 자신의 입으로 옮겼다.
쿠라마가 크게 소리쳤다.
“물리면 끝이야!”
강우는 왼손으로 왼쪽 손목에 휘감겨 있는 나뭇가지를 잡은 뒤, 오른팔을 확 당겼다. 강우는 오른손도 왼쪽 손목을 묶고 있는 나뭇가지를 붙들었다. 강우는 밧줄을 타고 오르듯 양손으로 나뭇가지를 빠르게 잡아당겼다. 양 발목을 감은 채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나뭇가지들이 투툭, 끊어졌다.
강우는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감고 있는 나뭇가지를 뜯어버린 뒤, 오른쪽 손목에 감긴 나뭇가지도 왼손으로 뜯어냈다. 강우는 양손을 몸통에 휘감긴 나뭇가지로 옮겼다.
터엉!
시그라가 오른쪽 팔을 강우를 향해 크게 휘둘렀다. 강우는 무방비 상태로 시그마의 오른쪽 팔에 얻어맞았다. 강우는 둘둘 말은 신문지로 공중에서 내려쳐진 파리마냥 내동댕이쳐져 바닥에 튕기며 날아갔다.
쿠라마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강우를 쳐다봤다. 강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이 나무새끼! 죽여버리겠어!”라고 소리쳤다.
쿠라마는 강우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뒤, 곧바로 시그라에게 시선을 옮겼다. 쿠라마의 뒤쪽에서 주황빛 날개가 나와 활활 타올랐다.
터엉!
쿠라마가 시그라에게 뛰어들었다. 시그라는 쿠라마를 두려워했다. 쿠라마의 타오르는 주황빛 날개 때문이었다. 시그라는 양팔과 나뭇가지들을 모두 쿠라마를 향한 채 빈틈을 노렸다.
텅!
시그라를 향해 뛰어들던 쿠라마가 오른발을 바닥에 내리찍어 갑작스레 멈췄다. 쿠라마의 오른발은 바닥을 파고들어 발목까지 파묻혀있었다. 쿠라마가 양 주먹을 꽉 쥔 채 팔을 치켜들었다. 쿠라마의 뒤쪽으로 활활 타오르던 날개가 잦아들며 양팔을 휘감았다. 주황빛이 쿠라마의 양팔을 휘감은 채 활활 타올랐다.
시그라는 다급하게 삐죽하게 세운 나뭇가지 수십 개를 쿠라마를 향해 뻗었다.
쿠화아아악!
쿠라마가 양팔을 크게 휘둘렀고, 주황빛 불길이 치솟았다. 주황빛 불길은 나뭇가지 끝을 모두 태워버렸다. 시그마는 나뭇가지들을 움츠리며 “크카오아어….”하며 기괴한 울음소리를 냈다.
쿠라마는 바닥에 박힌 오른발을 빼내며 시그라에게 뛰어들었다. 쿠라마는 순식간에 시그라의 코앞에 다가서있었다. 시그라는 다급하게 양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양팔 끝의 뿌리들은 오므라들어 거대한 주먹처럼 변해있었다. 시그라는 두 주먹을 쿠라마를 향해 찍어 누르듯 뻗었다.
쿠아아아아아아아앙!
시그라의 두 주먹이 쿠라마에게 닿기 전이었다. 쿠라마가 뛰어올라 시그라의 몸통을 양 주먹으로 때렸다. 쿠라마의 두 주먹이 시그라에게 닿는 순간이었다. 쿠라마의 양팔을 휘감고 있던 주황빛이 두 주먹으로 옮겨져 응축됐다. 폭발이 일어났고, 주황빛 화염이 시그라의 몸통과 왼팔에서 타올랐다.
“쿠아어코아…!”
시그라는 고통스러운 듯 울부짖으며 몸을 크게 움직였다. 쿠라마는 바닥에 착지해 시그라를 올려다봤다. 시그라는 쿠라마를 밟으려 발을 높게 치켜들었다.
콰앙! 빠직, 빠지지직.
강우가 옆에서 날아와 시그라의 몸통에 발차기를 먹였다. 강우의 발차기에 시그라의 몸통이 으스러지며 옆으로 넘어졌다.
쿠웅!
쿠라마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 강우를 쳐다봤다. 강우는 씩 웃으며 “뭘 그렇게 놀래? 내가 안 도울 거라 생각했어? 고맙다는 말은 됐으니까, 빨리 마무리나 짓자고.”라고 말했다. 쿠라마는 “그래.”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쿠라마가 놀랐던 것은 강우가 구해줘서가 아니었다. 쿠라마는 이미 강우를 동료라 생각했고, 당연히 서로를 도우며 싸운다고 생각했다.
쿠라마가 강우에게 놀란 점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시그라에게 무방비로 맞아 날아갔을 때, 벌떡 일어난 것도 놀라웠지만, 곧바로 시그라를 쓰러뜨릴 정도로 강력한 공격을 할 수 있다는 점이 더욱 놀라웠다.
두 번째는 그 파괴력이었다. 시그라에게 실제로 피해를 크게 준 것은 쿠라마였다. 쿠라마가 만들어낸 화염은 시그라의 몸통 왼쪽 부분 30% 이상과 왼팔의 대부분을 까맣게 태워버렸다. 하지만 물리적인 타격은 전혀 주지 못했다. 화염만이 피해를 입힌 것이었다.
강우는 달랐다. 순수한 물리적인 타격, 발차기로 시그라의 몸통을 으스러트린 것이다. 시그라의 껍질은 불에 굉장히 약했지만, 물리적인 공격에 대한 내구력은 엄청나게 강했다. 강우는 그런 시그라의 껍질을 으스러트린 것이다.
쿠라마는 모르고 있었다. 강우는 온 힘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강우는 줄곧 힘을 조절하고 있었다. 언제나 힘을 조절하며 싸우고 있었다. 강우는 최무훈에게 전투기술을 배웠을 때부터 줄곧 트레이닝을 받을 때의 힘, 순수 파워로만 따졌을 땐 이성 상급 랭커 정도의 힘만으로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강우는 실수를 하곤 했다. 간혹 자신도 모르게 힘 조절을 실수해 삼성 하급 정도의 힘을 쓰곤 했다. 주로 냉정을 잃었을 때 혹은 급박할 때였다. 시그라를 쓰러트린 지금도 그랬다.
쿠라마는 강우를 보며 생각했다.
‘공격력에 치중된 순수 파워타입인가? 미노타우로스를 잡았다고 했을 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이미 이성 상급에서는 한참 벗어났어. 삼성 하급에서도 수준급이다.’
시그라가 왼손을 바닥에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불에 타버린 왼팔에 체중이 실리자 퍼석, 퍼서석, 팔의 일부분이 후드득 바닥에 떨어졌다.
시그라는 완전히 일어나 “쿠아오아아!”하고 포효했다. 강우는 양 주먹을 꽉 쥐며 “끝내자.”라고 말했다. 쿠라마는 몸에서 다시 활활 타오르는 주황빛 날개를 뻗어냈다. 쿠라마는 시그라를 올려다봤다.
‘불이 주특기인 능력자가 있었다면 정말 간단했을 텐데. 이성 중급만 돼도 혼자 잡을 수 있겠어.’
강우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마 삼성 하급 이상인 거 같은데…. 불을 쓰는 능력자라면 이성급이어도 혼자 녀석을 잡겠어. 상성이란 게 확실히 중요하구만….’
강우는 주먹을 꽉 쥐며 시그라를 올려다봤다.
‘내 능력은 녀석한테도 잘 먹힐까?’
강우는 자신의 주먹으로 시선을 옮기며 스스로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아직 능력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니…. 뭐, 그래도 여태까지 아예 능력이 없는 줄 알았는데, 있다는 걸 안 게 어디야….’
쿠라마가 크게 소리쳤다.
“뭐하고 있어?”
강우는 고개를 들었다. 강우의 위로 시그라의 오른쪽 주먹이 날아들고 있었다.
“이런 젠장!”
강우는 양손을 들어 방어했다.
쿠웅! 쿠쿠쿠쿠쿠쿠쿠쿠.
강우는 마치 운석을 받아내듯 시그라의 주먹을 양손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쿠라마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역시 파워타입이야.’라고 생각하며 시그라를 향해 뛰어갔다. 쿠라마는 강우를 향해 “잠시만 잡고 있어!”라고 소리친 뒤, 시그라의 타버린 왼팔 쪽을 향해 뛰어갔다.
시그라는 타들어간 왼팔을 치켜들어 쿠라마를 향해 휘둘렀다. 쿠라마는 자신의 몸집보다 커다란 시그라의 주먹에 맞섰다.
쿠라마는 활활 타오르는 주황빛을 휘감은 오른쪽 주먹으로 날아오는 시그라의 주먹을 맞받아쳤다.
쿠우우우우우웅!
시그라의 주먹과 쿠라마의 주먹이 맞부딪쳤다. 주황빛 화염이 시그라의 왼팔을 휘감았다. 이전의 공격으로 타들어갔던 부분은 마치 불이 붙은 숯처럼 달아올랐다.
퍼석.
숯처럼 달아올랐던 부분이 부서지며 검은 재와 잿빛 재가 휘날렸다.
쿠웅.
시그라의 왼팔은 몸에서 떨어져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쿠라마는 도약해 시그라의 몸통을 향했다. 시그라의 나뭇가지들이 쿠라마에게로 뻗어나갔다. 하지만 나뭇가지들은 쿠라마에게 닿지 못했다.
시그라는 강우를 찍어 누르려 휘둘렀던 팔을 거둬 쿠라마 쪽으로 뻗었다. 하지만 이미 쿠라마는 시그라에게 바짝 다가와있었다.
쿠라마가 활활 타오르는 주황빛을 품은 왼쪽 주먹을 시그라의 몸통에 날렸다.
파아아앙! 화르륵!
시그라의 몸통에 불이 붙었다. 쿠라마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바닥에 착지했다. 시그라의 나뭇가지들이 불이 붙은 부위로 모여들었다. 나뭇가지들은 서로가 서로를 꼬아 불이 붙은 곳을 덮어버렸다.
쿠라마의 화염이 꺼졌다. 시그라는 나머지 나뭇가지들을 길게 빼며 모았다. 꽈배기처럼 꼬인 나뭇가지들은 조금 짧지만, 새로운 팔이 됐다.
쿠라마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시그라를 올려다봤다.
“뭐 이런…. 여태까지 내가 봐왔던 그 어떤 시그라보다도 더….”
시그라는 성큼성큼 쿠라마에게로 다가왔다.
터엉!
쿠라마의 시선이 소리가 난 쪽으로 옮겨졌다. 강우가 바닥을 세게 차 높이 뛰어올랐다. 강우는 그대로 시그라의 머리 위로 향했다.
평소라면 나뭇가지들 때문에 시그라의 머리 위를 노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시그마는 나뭇가지들을 모아 불을 끄고, 떨어져나간 왼팔을 보완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자신의 목을 노리는 독이 돼버렸다.
강우는 오른쪽 주먹에 체중을 실어 시그라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그 힘은 순간적으로 강우가 평소에 사용하는 힘을 넘어선, 삼성 하급의 힘이었다. 순수 힘으로 치면 삼성 하급 중에서 최고에 가까운, 삼성 중급을 넘볼 수 있는 위력이었다.
떵! 쩌저저저저저저저저저적.
*거열형 :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매고 수레를 끌어서 죄인을 찢어서 죽이는 형벌.
(소나 말을 이용하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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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과 선작 부탁드립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