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알리사가 강우를 보며 말했다.
“결국 내가 지금 이렇게 될 수 있던 건 네 덕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평생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야. 침대 위에서 살다가 침대 위에서 죽었겠지.”
강우는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로 날 사랑한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나?”
“아니, 난 널 사랑해. 난 내 자신을 알아. 나는 평생 친구 하나 없이 살아왔어. 덕분에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할 시간은 넘치도록 있었지.”
알리사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강우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널 실제로 보는 순간 알 수 있었어. 너는 내가 상상한 것보다 더 좋은 사람이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냥……. 느낌? 그리고…….”
강우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널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어.”
“그건 사랑이 아니야. 그냥 연예인을 좋아하는 것처럼……. 그런 거잖아.”
알리사는 강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가볍게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난 널 사랑해. 내가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사람인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이제야 말하네. 고마워.”
강우는 알리사와 두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이거 완전 사이코 아니야?’
강우는 어색함에 얼버무리듯이 말했다.
“아니, 난 한 것도 없는데…….”
“네가 그렇게 블랙마켓에서 활동한 것 자체가 나한테는 큰 도움이 됐으니까. 네가 아니었으면 몬스터의 심장을 먹을 생각도 못했을 거야. 아니, 이렇게 살아있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알리사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삶에 의욕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거든. 다 네 덕분이야. 진짜 말 그대로 삶의 활력소였거든.”
강우는 알리사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만나보지도 않은 사람 때문에 그렇게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되고, 그 사람에게 반한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알리사의 말이 거짓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알리사가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뭘?”
“날 너희 클랜에 넣어줄 거야?”
강우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대답했다.
“뭐, 너라면 전력에 큰 보탬이 되겠지. 뒤통수를 칠 타입도 아닌 거 같고.”
“당연한 거 아니야? 나는 널 사랑한다고.”
강우는 멋쩍음에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래, 그래……. 일단 나는 찬성이야. 하지만 아직 설득해야 될 사람도 남아있고 하니……. 일단 들어가자.”
알리사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강우와 알리사는 다시 도날드의 사무실로 향했다. 도날드는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강우를 노려봤다. 미츠하시가 강우를 보며 물었다.
“형님, 어떻게 하기로 했어?”
강우는 씩 웃으며 말했다.
“나는 알리사가 우리 클랜에 들어오는 것을 찬성한다.”
도날드가 두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네놈……. 그 말 후회 없겠나?”
도날드는 당장이라도 강우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강우는 갑자기 공격을 해올 것에 전혀 대비하지 않은 채 도날드를 쳐다봤다. 알리사가 강우의 앞으로 서며 말했다.
“아빠, 이러지 마. 나 진짜 화낼 거야.”
도날드는 미간을 찡그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알리사, 지금 본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저런 남자 때문에! 이 아비를 가로막는 것이냐?”
“나는 이 남자를 따라갈 거야. 아빠가 무슨 짓을 해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도날드는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듯 그저 양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 물었다.
쿠라마가 말했다.
“나는 반대야.”
모두의 시선이 쿠라마에게로 옮겨졌다. 쿠라마는 알리사를 노려보며 말했다.
“난 저 여자가 우리 클랜에 들어오는 게 싫어. 믿을 수도 없어. 게다가 저 여자를 받아들이면 예거 파티를 커다란 적이 생기는 거야. 저 여자 하나가 예거 파티를 적으로 만들 만큼 가치가 있어?”
강우가 말했다.
“알리사는 충분히 강해. 우리 클랜에 들어오면 많은 보탬이 될 거다. 그리고 이런 일로 예거 파티 전체가 적으로 돌아서지는 않아.”
강우는 도날드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 남자의 측근들만이 적이 되겠지. 뭐, 명분을 붙여서 전체를 적으로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뭐 어때서? 예거 파티에서 우리를 상대할 수 있는 예거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리 많지 않을 걸?”
강우의 자신감은 힘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강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클랜 엑시큐션(집행)은 아직 소규모이지만, 그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소수정예.
특히 클랜장인 강우는 십성급으로 누구도 함부로 덤벼들 수 없었다.
강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여론을 꽤나 신경 쓰는 거 같던데, 자기 딸이 속한 클랜을 공격하려면 그것도 참 일이겠네. 그치?”
도날드는 나지막이 말했다.
“네놈……. 죽인다.”
알리사가 미간을 찡그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빠!”
그때 주황빛이 번쩍였다.
펑-!
주황빛을 머금은 화염이 알리사를 덮쳤다.
사신의 소매.
분홍빛 커튼 같은 것이 화염을 걷어냈다. 알리사를 공격한 것은 쿠라마였다. 제임스는 남색 빛의 검끝을 쿠라마에게로 겨눴다.
“네년……. 무슨 짓이냐?”
강우가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짓이야?”
쿠라마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말했다.
“나는 저 여자가 싫어.”
알리사가 말했다.
“왜 싫어하는데?”
“그건…….”
쿠라마는 힐끗 강우를 본 뒤, 다시 알리사를 노려보며 말했다.
“알 거 없잖아-!”
강우가 쿠라마의 앞을 막아섰다.
“무슨 짓이야?”
“너야말로 뭐하는 거야? 네가 아무리 클랜장이라도! 클랜원을 받아들이는 걸 이렇게 마음대로 해서는 안 돼!”
“그래서 지금 뭐하자는 건데? 애초에 네가 반대한 이유는 예거 파티를 적으로 돌린다는 거 때문이었잖아. 그런데 알리사를 죽이면 저 아저씨가 죽을 때까지 쫓아다닐 걸?”
쿠라마는 자신의 행동이 모순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쿠라마는 그저 알리사가 싫었다. 여자의 질투였다. 강우와 다른 일행들도 그런 쿠라마의 마음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을 입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러는 순간 상황이 아주 웃겨질 뿐만 아니라, 자존심과 질투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인 것이 공식적으로 되는 순간 쿠라마는 더욱 견디기 힘들어질 테니까.
강우가 타이르듯이 말했다.
“이쯤 해둬.”
강우는 알리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괜찮지?”
알리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강우는 알리사에게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너도 좀 참아주고.”
강우가 알리사를 배려한 것이 쿠라마의 심기를 또 건드렸다. 쿠라마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시험해야겠어.”
강우가 쿠라마를 보며 말했다.
“뭐?”
“내가 시험해야겠다고. 저 여자가 그렇게 강하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면 나도 더 이상 반대하지 않겠어.
쿠라마의 임기응변이었다. 나름대로 명분이 있는 시비였다.
강우는 더 이상 달래봐야 소용없을 것을 알았다.
“좋아. 그럼 둘이 붙어봐.”
도날드가 말했다.
“누구하고 누가 싸운다는 거냐?”
알리사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건 그냥 스파링 같은 거야. 끼어들지 좀 마.”
도날드는 우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저 쿠라마라는 여자가 어느 정도 결정권을 쥐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럼 저 여자가 알리사를 이기고, 반대하면 되는 거잖아? 그럼 자연스레 저 빌어먹을 놈의 클랜에도 들어가지 않고. 알리사가 위험할 일은……. 뭐, 여차하면 내가 끼어들어도 되고.’
알리사가 쿠라마와 눈을 마주치면서 말했다.
“여긴 사무실이니까 장소를 옮기자.”
쿠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앞장서.”
강우는 알리사의 반응이 의외였다. 생각 이상으로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알리사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강우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반드시 강우와 함께하겠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알리사도 쿠라마가 강우에게 마음이 있음을 눈치 채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다른 여자도 좋아한다니,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강우도 조금 생각을 하고, 알리사의 행동이 이해가 됐다.
‘하긴, 나에겐 끝도 없이 친절했지만, 다른 사람에겐 꼭 그렇지도 않았지.’
알리사가 앞장서 걸음을 옮겼다. 제임스는 알리사의 옆에 바짝 붙었다. 제임스는 뒤를 경계하고 있었다. 쿠라마는 제임스를 향해 말했다.
“뒤에서 기습을 하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 긴장 풀라고.”
알리사의 뒤로 쿠라마가 따라갔다. 나머지 사람들도 전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가장 뒤쪽에서 걸음을 옮기는 것은 강우와 핫도그 그리고 도날드였다.
도날드는 걸음을 옮기며 나지막이 말했다.
“쿠라마라는 여자가 이기길 바라는 게 좋을 거다. 알리사가 너희 클랜에 들어가겠다는 순간, 예거 파티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니까. 그리고 알리사가 조금도 다치지 않아야 될 거다. 알리사가 다치면, 너희는 그냥 부상을 입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강우는 조롱하듯이 말했다.
“알리사가 져야 되지만, 다쳐서는 안 된다고? 바라는 게 많은 아저씨구만.”
“그 여유도 지금뿐이다.”
“일단 결과가 나오면 얘기하자고.”
도날드는 당장이라도 강우를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꾹 참고 있었다.
‘네놈은 이번 일이 그냥 지나가도 가만히 놔두지는 않을 테다.’
강우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아저씨하고는 언젠가 붙게 되겠지. 가능하면 지금 바로 죽여 두는 게 편할 텐데…….’
강우의 시선은 알리사의 뒷모습에 고정돼있었다.
알리사가 걸음을 옮긴 곳은 예거 파티 뉴욕지부 건물 내의 트레이닝 시설이었다. 천장과 벽, 바닥이 티타늄으로 돼있는, 대련을 하기에 충분한 공간도 마련돼있었다.
알리사는 그곳으로 들어서자마자 쿠라마를 노려보며 분홍빛을 뿜어냈다.
“그럼 바로 시작하지.”
쿠라마는 매서운 눈으로 알리사를 노려보며 말했다.
“죽어도 원망하지 마라.”
제임스가 쿠라마를 보며 말했다.
“저희 아가씨가 질 거란 생각도 안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을 땐……. 내가 당신을 죽일 것입니다.”
강우가 말했다.
“누가 죽이고, 죽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알리사는 차가운 눈빛으로 쿠라마를 보며 말했다.
“다들 착각을 해도 단단히 하는 것 같은데…….”
퍼엉-!
알리사의 주변으로 분홍빛이 퍼져 나갔다.
“걱정해야 될 건 저 여자라고.”
쿠라마는 전신에서 주황빛을 뿜어냈고, 등 뒤로는 활활 타오르는 날개 여덟 개가 뻗어 나왔다.
쿠라마는 처음부터 전력으로 부딪쳤다.
쌍화룡.
쿠라마가 양손을 뻗었고, 두 마리의 화룡이 알리사를 향해 날아들었다.
사신의 양손.
알리사의 등 뒤에서 분홍색 뼈들이 튀어나왔다. 뼈만 있는 커다란 두 손은 각각 화룡의 목을 움켜쥐었다.
퍼어엉-!
쌍화룡은 곧바로 터져서 사라졌다.
사신의 양손이 화룡을 터트리는 사이, 쿠라마는 모든 날개를 몸에 휘감고 불태우며 알리사에게 달려들었다.
화호의 앞발.
쿠라마가 오른쪽 주먹을 휘둘렀고, 불타는 호랑이의 앞발이 알리사를 덮쳤다.
알리사는 사신의 손을 움직여 화호의 앞발을 막아냈다. 쿠라마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주작의 활.
쿠라마가 불꽃으로 된 활을 당겼다. 날아가는 화살은 타오르는 주작이 되어 알리사를 향해 날아갔다.
사신의 소매.
하늘거리는 분홍빛 장막이 타오르는 주작을 막아냈다.
쿠라마가 왼발을 앞으로 강하게 내딛으며 왼쪽 주먹을 휘둘렀다.
현무의 권.
거대한 불덩어리가 알리사를 향해 날아들었다. 알리사는 눈썹을 찡그리며 오른손을 위로 휘둘렀다.
악마의 손톱.
불덩어리의 중앙부터 거대한 짐승의 발톱이 할퀸 것처럼, 분홍빛의 흔적이 생겨났다.
퍼어엉-!
불덩어리는 그 자리에서 흩어지며 사라졌다.
쿠라마는 이를 악 물고 전신을 불태우며 알리사에게 튀어나갔다.
불타는 유성.
쿠라마는 자기 자신이 최대의 공격력을 지닌 불덩어리가 되어 알리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알리사가 가볍게 오른발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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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과 선작 부탁드립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1. 아직까지 진짜 헝거나 하터는 등장한 적이 없습니다.
2. 저의 신작 '소시오패스 : 두 개의 삶'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