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악마의 발자국.
쿠라마의 위로 거대한 분홍빛이 드리웠다. 그것은 분홍빛으로 형태를 이룬 발이었다. 다섯 개의 발가락과 뒤꿈치는 갈고리 같은 모양이었다.
쿠우우우우우우우웅-!
분홍빛의 거대한 발이 쿠라마를 짓밟았다. 거대한 발은 펑, 하고 터진 뒤에 곧바로 사라졌다. 쿠라마는 그 자리에 쓰러져있었다.
알리사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하지만 쿠라마는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쿠라마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알리사를 향해 소리쳤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알리사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정색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아직 정신 못 차렸어? 너와 나의 격을 그렇게 몰라?”
알리사는 쿠라마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쿠라마는 주먹을 쥐며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쿠라마는 알리사의 기세에 눌려있었다. 알리사는 쿠라마의 코앞에 다가갔다. 알리사는 매서운 눈으로 쿠라마를 노려보며 말했다.
“방금 공격으로 널 죽이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어. 같은 클랜의 일원이 될 수도 있으니까 살려둔 거야. 알아? 주제를 알고 까불어.”
쿠라마는 분한 듯이 이를 갈면서도 덤벼들지 못했다. 이미 몸은 힘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제임스가 말했다.
“끝난 것 같군요.”
제임스는 강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당신의 클랜에 들어가기 위해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않나? 결정을 내려야지?”
강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지.”
강우는 쿠라마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쿠라마, 아직은 네가 알리사를 이기는 건 무리인 것 같다.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니까, 알리사가 들어오는 것에 대해 이의 없지?”
강우는 알리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알리사, 우리…….”
도날드는 매서운 눈으로 강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도날드가 소리를 치려 할 때였다.
“인정 못해-!”
강우의 말허리를 자른 것은 쿠라마였다. 모두의 시선이 쿠라마에게로 옮겨졌다. 미츠하시가 쿠라마에게로 다가가 타이르듯이 말했다.
“누님, 우리 클랜에 도움이 되면 받기로 했잖…….”
쿠라마가 두 눈을 번뜩이며 미츠하시를 노려봤다. 미츠하시는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미츠하시가 물러선 것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쿠라마의 두 눈에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이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서였다.
쿠라마는 강우의 앞으로 다가갔다. 강우는 아무 말 없이 쿠라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쿠라마가 말했다.
“결정해.
“이미 결정했잖아.”
쿠라마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강우와 눈을 마주쳤다.
“아니, 나야, 저 여자야. 결정해.”
“뭐?”
“저 여자를 클랜에 받는다면, 나는 나가겠어.”
안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쿠라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쿠라마는 안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쿠라마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강우를 쳐다봤다.
“어서 결정해.”
“나는 클랜에 있어서는 개인적인 감정을 두지 않아. 알리사가 전력에 큰 보탬이 될 것은 분명해. 그러니까 알리사는 우리 클랜원으로 받아들인다.”
쿠라마는 여전히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눈을 깜빡였다간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흐를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래, 알았어. 몇 년이나 알고 지냈고……. 얼마 안 됐지만, 클랜을 처음 만들 때부터 함께 했던 나보다! 전투력 좀 높은 저 여자가 중요하다 이거지?”
강우는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런 게 아니잖아. 넌 지금…….”
쿠라마가 강우의 말허리를 잘랐다.
“됐어. 난 나간다.”
쿠라마의 뺨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강우는 쿠라마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려보려 했다. 하지만 쿠라마는 강우의 손이 닿기 전에 몸을 돌려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미츠하시와 안나가 쿠라마에게 다가가 말렸다. 쿠라마는 미츠하시와 안나를 뿌리쳤다. 쿠라마는 입구 앞에 멈춰 서서 강우 일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냥 나가는 게 아니야. 다음에 만날 때는 적이다.”
미츠하시와 안나는 멍하니 쿠라마의 뒤를 바라봤다. 핫도그 역시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쿠라마를 쳐다봤다.
쿠라마가 빠져나가기 전, 강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쿠라마.”
쿠라마는 걸음을 멈춘 채 가만히 서있었다. 강우는 쿠라마의 뒤에다 대고 말했다.
“잠깐의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나를 적으로 돌리겠다는 거냐?”
쿠라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우는 씁쓸한 표정으로 쿠라마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나는 지금도 네가 이해되지 않아. 너무 갑작스럽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건 배신이야. 너가 나뿐만 아니라, 모두를 배신하는 거라고.”
쿠라마는 강우 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렸다. 쿠라마는 중얼거리듯 아주 작게 말했다.
“네가 날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런 건 상관없어. 너와 같은 목표를 두고, 함께 나아간다는 것이 좋았으니까. 하지만 다른 여자가 너를 채가는 걸 옆에서 보고 있을 자신은 없어.”
강우는 쿠라마의 말을 전부 들은 것은 아니지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강우는 ‘알리사와 내가 지금 사귀는 것도 아니잖아.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돌아와.’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쿠라마가 말했다.
“일에 있어서 사사로운 감정은 들어가지 않는다고? 애초에 우리……. 아니, 클랜 엑시큐션(집행)은 몬스터보호협회에 원한이 있어서, 감정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거잖아. 너도 그 여자에게 끌리고 있는 걸 알아. 부정할 수 없을 거야. 또 보게 된다면 적이다. 난 이제 너희가 싫으니까.”
쿠라마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트레이닝실을 떠나버렸다. 강우 일행은 모두 당혹스러움에 멍하니 있었다.
갑작스런 쿠라마의 탈퇴선언, 그것도 모자라 적대감을 잔뜩 표출하고 가버렸다. 미츠하시는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다시……. 누님은 다시 돌아올 거야.”
안나가 말했다.
“그럴 거 같지는 않던데…….”
안나는 속으로 ‘예시로 든 감정도 말이 안 되잖아. 연애감정이랑 인류의 존망이 걸려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단체에 가진 원한을 비교하는 건 말이 안 되지.’라고 생각했다. 안나는 눈썹을 잔뜩 찡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쿠라마는 우리 클랜장이 저 알리사란 여자랑 사랑에 빠지는 것 같아서 나간 거네. 고작 그런 거 때문에…….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 전부를 적으로 돌리겠다니…….’
알리사가 강우에게 다가와 팔짱을 꼈다.
“우리도 갈까?”
강우는 굳은 표정으로 팔을 빼내며 말했다.
“미안, 지금은 이러고 있기 좀 그렇네.”
알리사는 눈썹을 찡그리며 투정을 부렸다.
“뭐야, 설마 방금 그 여자에게 마음이 있던 거야?”
“그런 게 아니야. 다만, 훌륭한 클랜원이자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
알리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우의 신경에 거슬리기 싫었기 때문이다. 강우는 씁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좋아하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갈 줄이야. 쿠라마는 분명히 더 강해질 수 있는……. 훌륭한 전력이었는데. 이렇게 탈퇴를 선언하고, 적으로 돌릴 줄은 생각도 못했어.’
강우는 쿠라마가 빠져나간 입구를 보며 생각했다.
‘어차피 적이 될 거라면……. 차라리 지금…….’
알리사가 강우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지금 뭔가 나쁜 생각하는 거 같은데?”
강우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
“뭐? 아니야.”
강우는 입구에서 눈을 돌렸다.
‘이런 일로 죽일 수는 없지. 의리파인 미츠하시는 물론이고, 안나도 반발이 거셀 테니까. 죽이고 싶지도 않고. 가능하면 마주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도날드가 강우에게 다가와 말했다.
“결국 너는 내 딸을 클랜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거냐?”
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안 그래도 클랜원 하나가 줄었는데, 당연한 거 아니겠어? 이렇게 일을 벌인 이유가 애초에 뭔데?”
도날드는 두 눈을 부릅뜨고 강우를 노려봤다. 강우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긴장감이 넓은 트레이닝 룸을 가득 채웠다.
도날드는 알리사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알리사, 절대 생각을 바꾸지 않을 거냐?”
알리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없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어. 나는 이 순간만을 기다리며 살아왔으니까. 내가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집행자 덕분이고.”
도날드는 이를 악 물고 강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어쩔 수 없지.”
도날드가 두 눈을 번뜩이며 말을 이었다.
“죽이는 수밖에.”
알리사가 도날드 앞을 막아섰다.
“뭐하려는 거야?”
도날드는 알리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원망해도 어쩔 수 없다. 네가 저런 놈을 따라나서는 것보다는 낫겠지.”
“내가 클랜에 들어가는 게 왜 그리 문제가 되는 건데?”
“저 놈은 블랙마켓 출신이야. 지금 저 클랜도 정식으로 예거 클랜협회에 속해있지 않아! 말이 좋아 클랜이지, 그냥 블랙마켓의 능력자들이 모인 범죄자 집단이란 말이다!”
미츠하시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봐, 범죄자 집단이라니? 우리는 몬스터보호협회와 목숨을 걸고 싸웠어.”
도날드는 눈썹을 잔뜩 찡그린 채 말했다.
“범죄자가 어쩌다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 번 했다고 죄가 씻어지는 건 아니다. 그리고 너희들의 뒷조사는 이미 끝났다.”
도날드는 미츠하시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네놈은 원래 몬스터보호협회 일본지부에 속했던 놈이 아니던가? 그것도 과격파에 말이지. 넌 지금 당장이라도 체포해야 될 정도야.”
도날드는 강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네놈은 말할 것도 없지. 너는 기록을 세웠더군.”
강우는 미간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기록?”
“그래, 기록보유자다. 내가 확인한 것만으로도 여태까지 임무를 수행하면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게 한 것이 너다. 이상할 정도로 임무를 함께 수행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강우는 도날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임무를 달성할 능력도 안 되면서, 남에게 기댈 생각으로 일을 맡으니 죽는 거다. 내 손으로 죽인 게 아니라, 모두 사고일 뿐이었다. 내 손으로 직접 죽인 경우는 거의 없어.”
“죽이긴 죽였다는 거 아닌가?”
강우는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게 당신이 할 소리야?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죽이겠다며? 그리고, 능력자들끼리의 전투는 죽음에 이르러도 정당방위의 범위가 넓은 거 몰라? 대부분 경미한 처벌조차 안 받지. 애초에 모두 단속을 한다는 게 불가능하니까. 나를 죽이려 달려드는 놈들을 그럼 그냥 놔둬? 예거 파티 서열 1위씩이나 되는 사람이 그걸 모르는 건 아니지?”
“그 입 닥쳐라.”
알리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빠,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여태까지 말했잖아-! 너는 지금 범죄자 집단에 속하려 하는 거다!”
강우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저씨, 그럼 왜 최후의 10인에 지원할 때 우리를 그냥 놔둔 거지?”
도날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강우를 노려봤다. 강우는 턱을 들고, 조롱하듯 구겨진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몬스터보호협회와 10대10 대결에 예거 파티 소속은 거의 내보낼 생각이 없던 거지? 전력을 최대한 아껴놓기 위해서 말이야. 우리 같은 놈들을 달콤한 미끼로 유혹하고, 10대10 전투에서 다 죽어나가길 바랐겠지. 그런 혜택 따위는 보지 못하게.”
도날드는 눈썹을 잔뜩 찡그린 채 강우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추천과 선작 부탁드립니다.
저의 신작 '소시오패스 : 두 개의 삶'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소시오패스도 금일 중 업데이트 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