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그들을 죽이는 건 내게 쉬운 일이었다.
난 강했고, 그들은 약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 게임 세계에 묶여있는 희생양 캐릭터였고,
그들은 각자의 삶을 사는 진짜 사람이었다.
그들이 흘린 피는 생생했고, 그들의 비명은 명백했으나 나는 아니었다. 나는 죽어도 죽은 게 아니었고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그저 주인공의 성장을 위한 발판일 뿐이었다.
“▒▒아! 살려▒!”
“그▒▒!”
“왜▒▒ 제▒▒!”
그만두고 싶다.
모든 걸 그만두고 싶어.
하지만 끝낼 수 없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이 지긋지긋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알고 있다.
이 삶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는 거.
시스템에 나온 것처럼 얌전히 살다 죽는 것만 하면 된다는 거.
내 손에 의해 죽은 이 사람들은 시스템이라는 강자에게 덤비지 못하는 내가 만만한 약자를 짓밟은 것이라는 거.
이런 내가 역겹고 징그러움과 동시에, 허무함이 밀려왔다.
그만, 그만, 그만.
제발 누가 도와줘. 제발.
“▒▒▒▒▒!”
영지민들의 피 웅덩이 속에서 미쳐있던 내게 뻗어진 건, 구원의 손길이 아닌 차디찬 창끝이었다.
그대로 나는 황실로 끌려가 재판에 회부되었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때에 나는 어쩌면 타살이야말로 이 지긋지긋한 반복을 끝낼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껏 자살은 항상 실패해 왔으니 용사를 제외한 누군가를 통해 죽어 보자고. 그래서 난 사형일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고대하던 사형식은 치러지지 않았다.
밧줄에 매달린 건 내가 아닌 다른 이였으며, 내 목에는 밧줄 대신 족쇄가 채워졌다.
족쇄의 열쇠를 쥐고 있는 건 내가 처음 보는 이였다. 게임에서도, 지난 생에서도 본 적 없던 이.
-영혼의 그릇이 정말 크구나. 이 정도면 ▒▒에 필적하겠어.
난 그의 제물이었다.
너무나도 위험하고 잔인해 천 년 전에 사라진 흑마법을 부활시키기 위해 쓰인 제물.
그는 나를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지하실에 감금했고, 검은 액체를 매일같이 주사했다. 그럴 때마다 피부가 타들어 가는 것을 느끼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아파, 아파, 너무 아파. 왜 나는 이렇게 항상 아파야 돼? 왜 이렇게 죽어야 하고, 왜 이렇게 의미 없는 삶을 살아야 하고, 왜 이렇게, 불쌍해야 돼?
나를 제물로 바친 그자를 죽일 수도 있었다. 난 그만큼의 힘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럴 수 있노라는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다. 난 너무나도 지쳤고, 낡았고, 모든 걸 다 그만두고 싶었으니까.
-그래! 이제 다 준비가 됐다! 이제 그분을 모셔올 수 있게 됐어!
태양의 따사로움을, 하늘의 청명함을, 바람의 상쾌함을, 달빛의 서늘함을 떠올릴 수조차 없을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피로 만들어진 소환진 안에 내던져진 나는…….
-제 손을 잡으십시오!
용사를 만났다.
그는 날 가둔 이를 쓰러뜨렸고, 지하실에서 나를 꺼내주었다.
그래.
그는 구원자였다.
이 지옥보다도 끔찍한 나날에서 나를 꺼내준 천사.
하지만 동시에,
-어, 어? 왜, 왜……!
나를 죽이는 악마이기도 했다.
그가 날 구해준 날은, 내가 잊고 있던 세상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되었던 날이었으며 동시에 나의 15번째 생일이었다.
-안 돼! 제발, 제발 눈을 뜨세요! 이렇게 끝날 순 없습니다!
흐려지는 시야 너머로 울고 있는 드한을 보고 있자니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너는 왜 나를 사랑하지?
이 세계의 법칙대로 나를 사랑하게 된 건가?
그럼, 나는…….
-널 왜 사랑하지?
그렇게 5번째 삶이 끝났다.
***
6번째 생을 시작할 때.
나는 흑마법을 발동했다.
이름도 모를 그 연구자 놈이 옆에서 하도 읊어댔으니 내가 배우지 못할 리 없다.
‘기억 봉인 마법.’
그래서 모든 기억을 묶어버렸다.
끔찍한 과거를 잊어버리게.
내가 게임 캐릭터라는 것, 용사의 연인 역할로 고정돼 죽는 운명이라는 것, 지난 생에서 쌓아온 지식들.
이를 제외하고 모조리 다 봉인해 버렸다. 이번에는 제발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라며 말이다.
“그래놓코선 다시 떠올린 내가 레전드져?”
휴우우우.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눈을 올려뜬 나는 길게 한숨을 뱉었다.
90년간의 모든 기억이 한꺼번에 몰려오다 보니 숨이 턱턱 막혔다. 나도 모르게 절로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슬픔과 고통이었다.
“울디 말쟈. 갠차나. 이제 나아질 쑤 이써.”
나 자신을 다독거리며 크흥! 코를 훌쩍였다.
“아무도 날 사랑하디 않아. 나만 날 사랑할 쑤 이써. 내가 나를 구하는 거야. 구니까 울디 마. 할 쑤 이써. 갠차나질 거야.”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지끈거리던 두통이 가라앉고, 가빠지던 호흡이 규칙적으로 변했다.
이렇게 안정이 찾아오자 나는 평소만큼의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흑마법.’
5번째 회차의 내 몸을 통해 실험했던 그 마법에 대한 기억.
‘찾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
“…….”
발코니의 난간에 걸터앉아있던 니샤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쏴아아-
휘몰아치는 바람이 니샤의 긴 머리칼을 흐트러지게 만든다.
-들었어? 들었어?
-방금 들었지? 나도 들었어!
-불쌍해, 불쌍해!
바람 정령들의 속삭임은 니샤의 뾰족한 귀를 통해 몸 안으로 들어온다. 니샤는 천천히 눈을 감아 내렸다.
보좌관 리아트가 이상한 마족을 데리고 세키나를 찾아간 것을 알게 됐을 때.
니샤는 곧바로 바람 정령을 날려 세키나에게 붙여두었다.
리아트와 같은 고위 마족들에게는 정령의 존재를 들킬 수 있지만, 세키나에게는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
그래서 세바스찬이라 불린 그 이상한 마족과 세키나와의 첫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너 흑마법 썼냐?
흑마법.
마족에게조차 금지된 마법.
도서관의 모든 책을 읽은 니샤조차도 아주 단편적인 것만 알고 있는데, 고작 3살짜리 호문쿨루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그 뒤로 더 알아내고 싶었지만 방음 마법에 의해 막혀 버렸다. 하지만 니샤는 굴하지 않고 세키나의 뒤를 쫓았다. 도서관까지 말이다.
그래서, 알아 버렸다.
-아무도 날 사랑하디 않아. 나만 날 사랑할 쑤 이써.
불쌍한 호물쿨루스의 외로움을.
-내가 나를 구하는 거야. 구니까 울디 마. 할 쑤 이써.
바다 한복판에 놓인 철새의 위태로움을.
-갠차나질 거야.
뭐가?
곁에 있었다면 물었을 테다.
대체 뭐가 괜찮아질 거냐고.
이 상황이?
우리의 존재가?
어차피 쓰고 버려질 말로 창조되었다는 그 사실이?
‘……우습네.’
니샤는 허공에 뻗었던 손을 거두며 낮게 웃었다.
저 호문쿨루스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 걸까?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모르겠다.
배워본 적 없고, 경험해 본 적 없으니 살피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니샤는 궁금해졌다.
“그 애 옆에 있으렴.”
니샤는 바람 정령을 한 번 더 날렸다.
“나도 괜찮아지고 싶으니까.”
쏴아아-
재차 바람이 불어왔다.
니샤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바람결에 묻혀 날아가 버렸다.
***
한참 훌쩍거리다가 도서관을 나온 나는 호기롭게 다짐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내 삶을 찾겠다고.
더 이상 괴롭지 않겠다고.
그러니까 지금 계획대로만 진행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세키나 님! 나오셨어요?”
일단 도서관에 있던 빨간 머리 마족이 나를 붙잡은 것부터가 계획에 없던 일이었고,
“아, 맞다. 이거! 보좌관님이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놈이 내게 내민 종이 한 장도 상정하지 못한 거였고,
“여기, 신전 방문 일자와 인원이요. 혹시 몰라 확인하라고 하시던데요!”
그 안에 적힌 내용은 더더욱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
종이를 보자마자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시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드한 아가토>
용사의 이름이 적혀있었으니까.
“얘가 왜 여기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