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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님이 만드는 파멸엔딩 (38)화 (39/149)

38화

“드한! 언제 왔어!”

유리엘은 언제 침울해했냐는 듯 환히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겨우 묶어둔 머리칼이 흐트러졌지만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눈앞의 드한만 바라볼 뿐.

“저도 방금 왔습니다. 어쩐지 이곳이 이상해서 둘러보고 있었는데, 마침 신관님이 계셨군요.”

고작 5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예의 바른 말투다. 유리엘은 희게 웃으며 드한에게 다가갔다.

“너도 느꼈구나……. 기뻐…….”

그는 두 손을 모았다.

“다른 신관들에게 말해봤자…… 잘 모르니까…… 내가 이상하다고 하니까…….”

드한은 그런 유리엘의 허리춤을 툭툭 두들겨 주었다.

15살인 유리엘에 비해 한참 작은 드한이었지만 그 태도만큼은 조숙하다. 유리엘은 드한의 눈치를 살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는 뭘 느꼈어……? 나는…… 환수의 흔적이 느껴져서…….”

“저도 같은 걸 느꼈습니다.”

드한은 바다색 눈동자를 차게 식히며 허공을 응시했다.

마계의 정령, 환수의 흔적.

누군가 의도적으로 지워버리려고 한 듯 흐려지고 있다.

만약 환수의 흔적이 그대로 있었다면 이 정도의 의심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손을 탄 것이 느껴진 이상 이대로 둘 수 없었다.

“대신관님께 보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으응……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의기소침해하는 말투와는 달리 유리엘의 얼굴은 밝아져 있었다. 드한은 그를 응시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드한은 참 대단해……. 난 드한 나이에 그러지 못했는데…….”

드한은 북부성 신전 대신관의 종자다.

원래는 서부의 보육원에서 살고 있던 아이였는데, 2년 전 갑자기 마을을 침입한 도적 떼에게 보육원이 불타버리고 난 후 자발적으로 신전에 들어왔다. 사제가 되기에는 너무도 어려 종자로 두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드한이 왜 신전에 왔는지 몰랐지.’

유리엘은 맞잡은 두 손을 더 꼬옥 잡으며 생각했다.

‘도적 떼가 마족이었다니…….’

마족에게 가족과도 같은 친구를 잃은 드한.

얼마나 슬프고 힘들까?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던 유리엘은 그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다행히도 드한에게는 신성력의 재능이 있었고, 그 덕분에 유리엘은 드한을 돌봐줄 수 있었다. 때때로 드한이 자신을 돌봐주는 것 같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말이다.

“저는 강제로 각성한 것과 다름없으니까요. 신관님이 부러워하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 미, 미안해. 괜한 일을 떠올리게 했어…….”

“아뇨. 괜찮습니다. 그 일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는 거니까요.”

드한은 여상히 대꾸했다.

도적 떼로 위장한 마족 무리에게 모두를 잃었던 그 날.

드한은 자신도 꼼짝없이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모두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숨이 끊어질 것이라고.

하지만 아니었다.

눈을 뜨니 아침이었고,

눈을 뜨니 혼자 남았다.

자신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어안이 벙벙할 때, 그의 귓가에 신성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의 아이야.

-나의 뜻을 이어받아 모든 악을 섬멸하거라.

신에게 선택받은 것이다.

결과로 그의 몸에는 전과 비할 바 없이 엄청난 신성력이 흘렀고, 덕분에 그는 몸을 지킬 수 있었다.

‘조금 더 일찍 힘을 주셨다면.’

그랬다면 친구들을 지킬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아쉬움이 있었으나 감히 신의 뜻에 반기를 들 수 없는 법. 드한은 신의 말씀대로 행동했고, 그 행동의 결과를 찾기 위해 북부성 신전까지 흘러 들어갔다. 마족이라는 뜬소문이 많은 다이몬 백작가의 곁에 있기 위하여.

드한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백작가가 마족이라면, 마족 소굴이라면…….

‘지켜봐야 돼.’

간사하고 간악한 마족.

그들은 결코 인간을 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인간은 움직이는 인형,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니까.

‘내가 신의 뜻을 완전히 이어받을 때.’

그때 그들에게 복수를 하리라.

나의 모든 울분과 슬픔을 담아서.

드한의 눈이 번뜩였다.

“어, 어린애가 이렇게 무서운 표정 하면 안 돼…….”

깜짝 놀란 유리엘이 호들갑을 떨며 드한의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제야 표정이 풀어진 드한은 숨을 크게 들이켜며 정신을 집중했다.

“환수의 흔적, 다이몬 백작가일까요?”

유리엘은 흡! 숨을 멈췄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만약 아, 아니라면 여기 사는 사람들이겠지…….”

환수의 흔적이 느껴진 것뿐 아니라 흔적을 지운 것까지 느껴진 지금.

백작가의 일원 혹은 백작령의 주민을 의심하는 게 당연하다.

한데 왜일까?

왜, 드한은 자꾸만 다이몬 백작가가 마족이라는 확신이 드는 걸까?

그는 앙상한 손을 꽉 주먹 쥐었다.

“드, 드한. 나는 모르겠어…….”

이때, 유리엘이 떨며 말했다. 드한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뭘 모르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마족이나, 인간이나……. 다 잘 모르겠어……. 그냥 너무 무섭고, 두려워…….”

그래. 그는 무서웠다.

만나본 적도 없는 마족을 상상해야 하는 것도, 상상 속 괴물과 싸워야 하는 것도, 그러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것도, 모두 다 무서웠다.

유리엘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바보 같지? 나, 나보다 한참 어린 네 앞에서 할 말은 아닌데…….”

희미하게 웃는 유리엘을 바라보며 드한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유리엘은 고위 신관이다.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신관이 된 그는 타고난 신성력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고위 신관 자리를 차지했다.

나이가 조금 더 있었다면 대신관까지 노려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유리엘은 대단한 이였다.

그런데 왜 이런 걱정을 한단 말인가?

내게 유리엘만큼의 신성력이 있었다면, 유리엘만큼의 힘이 있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드한은 입술을 짓씹었다.

“아니요.”

어린아이 같은 생각은 하지 말자.

유리엘을 질투해 봤자 돌아오는 건 없어.

그렇게 단호히 자신의 마음을 정리한 드한이 냉정히 대답했다.

“저는 2년 전에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겁이 없는 거예요. 무서울 게 없으니까.”

“드, 드한…….”

“하지만 신관님은 그러지 않죠. 무서운 게 당연한 겁니다. 창피해하지 마세요.”

“…….”

유리엘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그는 흘러내린 백금발 머리칼을 귀 뒤로 꽂으며 재차 미소 지었다.

“어린아이한테 위로를 받네…….”

나름 연장자인 티를 내겠다고 드한의 머리칼을 헝큰 그는 드한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저녁…… 같이 먹으러 갈까? 백작가에.”

원래라면 종자인 자신이 갈 수 없는 곳이다.

만찬에 초대받은 건 신관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유리엘이 자신을 데리고 가는 거라면 괜찮은 일.

백작가의 일원을 직접 보고 싶었던 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습니다.”

유리엘의 얼굴이 환해졌다.

“으, 응! 소, 손 꼭 잡아!”

“네.”

“가, 가자!”

유리엘은 드한의 손을 꼭 잡은 채 골목길을 빠져나갔고, 드한은 거듭 뒤를 돌아보며 남아있는 환수의 흔적을 더듬었다.

이번에야말로 마족을 찾아낼 수 있기를, 그리 바라면서.

***

신전에 돌아가지 않은 신관들이 뭘 하고 있느냐는 말에 아서는,

-싸우고 있던데요.

라는 대답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일어난 걸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리아트가 사람을 시켜 나를 불렀기 때문이다.

‘귀신이야, 뭐야.’

꿍얼거렸지만, 그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었다.

몰래 마왕성을 빠져나간 것에 대해 혼이 나야 했고, 고맙다는 말도 전해야 했으며 마왕에 대한 이야기도 슬쩍 캐봐야 했으니까.

그래서 얌전히 시종을 따라간 나는 리아트의 집무실 문을 똑똑 두들겼다.

“리아…… 아니, 삼쫀. 저 와써여.”

“들어와라.”

마법을 쓴 건지 문이 조금 열렸다. 나는 그 틈을 밀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리아트는 외알 안경이 아닌 일반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그의 하얀 머리카락이 더 푸석푸석해 보였다. 그의 앞에 산처럼 쌓여있는 서류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보이는 것이리라.

“잘 잤느냐?”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여전히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인 리아트가 물었다.

“넹. 나흘이나 자쓰니까여. 잘 잤져.”

“아주 자랑이군.”

내 여상한 대꾸에 리아트는 헛웃음을 뱉었다.

“내가 널 혼낼 거라는 건 알고 있지?”

“우웅…… 넹.”

난 손을 꼼지락거리며 리아트의 눈치를 살폈다.

일단 고맙다고 말하는 게 먼저겠지?

그래서 난 그가 앉아있는 책상 쪽으로 오도도 뛰어갔다.

“근데 혼나기 전에 말하께여. 고마어여, 삼쫀.”

“뭐?”

“삼쫀 아니어쓰면 마왕님 앞에서 나 주것을 듯. 고마어여, 지짜.”

리아트의 시선이 그제야 서류에서 떼어졌다. 그는 나를 가만히 주시했다.

“네가 잘못 알고 있구나. 마왕님은 그렇게 무자비한 분이 아니다. 내가 가지 않았어도 넌 살았을 거야.”

“……그때 저 지짜 디지는 줄 알았는데여.”

“그건 네가 저항했기 때문이지.”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너는 마왕님의 기세를 받아보려고 하지 않았느냐?”

그랬다.

메르데스의 눈동자에 비친 마왕의 흔적을 흘리며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었다.

살아야 했으니까.

“우움. 그랬쬬?”

리아트는 재차 헛웃음을 뱉었다.

“그게 문제였던 게다. 메르데스 놈처럼 눈 뜬 채로 기절했으면 멀쩡했을 거다. 마왕님은 그만큼의 배려는 하는 분이니.”

“아하. 내가 살라고 해떤 행동이 사실은 나 죽일 판단이었따?”

“그렇지.”

“담부턴 그케 하께여. 휴, 디질뻔.”

난 일부러 식은땀을 닦는 척을 하며 웃었다. 그러자 리아트의 얼굴도 덩달아 풀어졌다.

“구래도 마왕님이 저보고 잼따고 해짜나여. 그것만으로도 난 성공한 거 가튼데.”

“…….”

하지만 내가 말을 하자마자 또다시 리아트의 얼굴이 굳었다.

“하아……. 그래. 그게 문제인데.”

그는 펜을 휙휙 돌리다가, 펜촉을 내게 향하게 들어 올렸다.

“너.”

“넹?”

“오늘은 진짜 죽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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