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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님이 만드는 파멸엔딩 (41)화 (42/149)

41화

처음 이 게임에 빙의했을 때가 떠오른다.

다시 말해, 여기가 게임 세상인 걸 모르고 있던 때.

그저 한국에서의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던 당시의 나는 새로운 삶을 얻었다는 사실에 마냥 기뻐하기만 했었다.

그래서 새로 만난 부모가 날 별로 좋아하지 않아도, 언니 오빠가 날 싫어해도,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해도 괜찮았다. 어쨌거나 전생보다는 좋은 삶이었으니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사랑을 해 보고 싶어졌다. 사랑하고, 아파해 보고, 그러다 평생을 약속하고…… 남들과 같이 평범하게 살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너무나도 손쉽게 사랑에 빠졌다. 그 사랑이 짜놓은 판이었다는 것을 전혀 모른 채.

-드한이라고 불러주세요.

감히 어떻게 표현할 수조차 없을 만큼 화려한 금발, 비취빛 해안가 같이 반짝거리는 바다색 눈동자,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다는 듯한 당당한 표정, 매너 있는 태도…… 모든 것이 내가 상상해 왔던 이상형 그 자체였다.

나는 그날로부터 그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마음을 꼭꼭 눌러 담아 편지를 쓰기도 하고, 몰래 저택을 빠져나와 그와 데이트를 해 보기도 하고, 신전 기도실에서 몰래 입을 맞추기도 하면서, 그렇게.

드한과 평생을 함께 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커서 누군가와 결혼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내가 죽기 전까지는.

내가 독이 든 차를 먹고 죽어가던 순간과 피를 토하는 나를 끌어안으며 엉엉 울던 드한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 피로 범벅이 된 그의 얼굴은 여전히 그린 듯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드한의 얼굴을 4번이나 더 보았고, 마지막에는 그가 죽는 모습까지 보았다.

그래서일까?

그래서,

‘아……. 짜증 나네.’

이렇게 짜증이 나는 걸까?

난 온실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드한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를 알아보자마자 짜증이 솟구쳤다. 가슴이 답답했다. 화가 났다. 표정 관리가 안 될 만큼.

‘아마 5살일 거야.’

나이 차이가 2살이었으니까.

어린 드한은 처음 보는 건데…….

‘어째 쟤는 어릴 때도 얼굴이 똑같냐.’

그래서 더더욱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내 손에 의해 죽어가던 드한의 얼굴이 생생했으니까.

“제 이름을 어떻게 알고 계시는 겁니까?”

이런 내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할 드한이 물었다. 난 그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 채 대답했다.

“보고서 보고 아라써. 개중에 어린 애는 너밖에 업쓰니까 불러본 거구.”

변명이지만 납득할 수 있을 법한 말이다.

그래서인지 드한은 더 말을 하지 않고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기만 했다. 난 그의 시선을 피했고 말이다.

“백작님께.”

드한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이렇게 어린 따님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만. 제가 무례를 저지르기 전에 알아채서 다행입니다.”

어째 말투가 5살이 아니라 25살 같다. 메르데스랑 동갑인데 이렇게 어른스러울 수 있는 거냐.

‘드한이 원래 이랬나?’

전에는 다정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였는데.

‘어릴 때라 이런가.’

난 쩝 입맛을 다셨다.

“엉. 구니까 쫌 나갈래? 나 혼자 있고 싶꺼든.”

드한과 같이 있다간 옛날 생각이 더 날 것 같아서 한 말이다. 그런데 예상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건 곤란할 것 같은데요.”

“머?”

“나가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식당에서 쫓겨나 여기로 온 거라서요. ……정말 나가라고 한다면 가겠지만 이런 추운 날 온실 밖으로 내쫓을 분은 아니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

확실히 이상하다.

아무리 드한의 어린 시절을 모른다고 해도 이건 정말 이상하다.

내가 알고 있는 드한은 상냥하고, 배려심 깊었으며, 손해를 보더라도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였다.

하지만 지금 이놈은…….

‘싸가지가 없는데?’

인상을 찡그렸다.

“모야. 성격이 왜케 변해써.”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드한의 눈이 번뜩였다.

“절 알고 계십니까?”

아차. 실수했다.

난 그의 날 선 눈빛을 피하며 말을 돌렸다.

이놈이 이런 싸가지 없는 성격이 된 이유가 분명히 있을 테니 그걸 알아보기 위해서.

“니가 지금 종자로 있눈 건가? 중앙 신전에서?”

“아니요. 북부성 신전에 있습니다.”

“……북부?”

“네.”

게임 스토리상, 이놈이 살던 곳은 서부다.

서부성 신전에 종자로 들어가는 것부터가 어린 시절 시작인데…… 왜 갑자기 북부에 있는 거지? 성격뿐 아니라 내용이 달라진 것 같았다.

아니, 아니다. 그냥 이번 회차에서 이놈이 서부가 아닌 북부에서 태어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난 그에게 슬쩍 시선을 둔 채 물었다.

“너 원래 어디 살았눈데? 고향이 어딘데?”

드한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내내 무표정이던 그의 입가가 피식 비틀렸다.

“일반적인 백성들은 거주지를 옮기지 않죠. 고향이라는 말도 잘 하지 않고요. 그런데 영애께서는 마치 제가 북부에 살지 않았던 걸 알고 계셨던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어어. 음.”

“다시 묻겠습니다. 절 알고 계십니까?”

뭐야.

얘 5살 주제에 왜 이렇게 똑똑해.

난 왜 이렇게 멍청하고.

‘드한을 보고 너무 당황했어.’

원래의 나였다면 이런 상황 자체를 안 만들었을 텐데, 나도 모르는 새에 많이 동요한 모양이다.

‘난감해졌네.’

지금 어떤 말을 해도 변명으로 들릴 것 같고.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고 도망가기에는 의심을 살 것 같고.

‘어떻게…….’

그때, 정말 예상하지 못한 이들이 온실로 들어왔다.

“세키나! 여기 있었구나!”

“왜 별관에 없고 여기 있어? 여기 뭐 볼 거 있어?”

쌍둥이였다. 메르데스와 파르데스.

와, 살았다.

난 그들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나 구냥 여기 구경하고 이써써! 노을이 예뻐서!”

“별관에서도 충분할 텐…… 이 새끼는 뭐야?”

파르데스는 살짝 머금고 있던 웃음을 완전히 지운 상태로 드한을 직시했다. 드한은 그제야 날 뚫어져라 보던 눈을 거두고 고개를 까딱였다.

“북부성 신전 소속 종자입니다.”

쌍둥이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신전 놈이라고?”

“그런데 여기 왜 있어? 세키나한테 뭐 할 말 있어?”

“아니요.”

드한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할 말은 제가 아니라 세키나 님께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이 새끼 이상해……. 난 으으 진저리를 치며 소리쳤다.

“아니! 업는데! 업써! 너 빤니 꺼져!”

내 외침에 파르데스가 지금이라는 듯 말을 보탰다.

“야. 세키나가 꺼지래잖아. 당장 꺼져.”

“……네.”

드한은 꾸벅인 후 발을 돌렸다. 그제야 나는 드한이 이 추운 날 마왕성을 떠돌아야 한다는 걸 인지했고, 그래서 입을 열었다.

“그, 식땅 옆에 사용인 방이 이써. 거기서 만찬 끝나길 기다리면 대 꺼야.”

반쯤 돌려진 드한의 옆얼굴에 설핏 미소가 서렸다.

“감사합니다. 알려주셨으니 저도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겠네요.”

성큼 다가온 드한은 누가 막을 새도 없이 내 어깨를 잡고 귓가에 속삭였다.

“야! 너 뭐야! 뭔데 세키나한테 붙어!”

“미쳤냐?”

쌍둥이의 손에 의해 떨어진 그는 나를 향해 생긋 웃고 정말로 자리를 떠났다.

“저 새끼 진짜 뭐야?”

“종자라고? 종자 새끼가 저렇게 차분해?”

쌍둥이는 드한의 뒷모습을 보며 씩씩거렸지만, 나는 그들을 보살필 겨를이 없었다.

-서부 출신 보육원에서 자랐습니다.

드한이 속삭였던 말을 되짚어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적 떼에게 습격당해 폐허가 된 그곳에서요.

그 도적 떼. 분명 마족이다.

대체 게임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지?

***

쏴아아-

차가운 겨울바람이 휘몰아친다.

온실을 등지고 걸어가던 드한은 문득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얼핏 보면 온실의 투명한 유리벽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온실 안에 있을 ‘세키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세키나를 보자마자, 드한은 자기도 모르게 웃어 버릴 뻔했다.

가뜩이나 작은 아기라 가만히 있어도 귀엽게 보이는데, 빵실빵실한 뺨을 실룩이며 꼼지락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여운 것과는 별개로 드한은 마침 잘 됐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백작가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는데, 저렇게 어린아이라면 분명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겠지 싶어서.

하지만 생각보다 경계심이 짙었다.

아니, 그보다 마치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내가 나타나서 놀란 것인가? 드한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분명히 나를 알고 있었어.”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고 왜?

의문을 이어가던 드한은 지금 더 고민해 보았자 쓸모없다는 생각을 하고 다시 발을 틀었다.

“어차피 또 볼 테니까.”

곧 다시 보게 될 거다.

그는 이곳에 또 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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