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드한의 성격이 변한 이유는 알겠다.
원래 살고 있던 보육원이 도적 떼에게 습격당해 폐허가 됐기 때문이겠지. 그런 끔찍한 일을 겪고 전과 같이 지내기에는 힘들었을 테고.
‘서쪽 던전에서 티아라를 가지고 왔다고 했으니까…….’
드한의 마을을 습격한 도적 떼는 마족일 가능성이 높았다.
여기까지 예측을 하니 새로운 궁금증이 생겼다.
‘대체 왜?’
드한과 마족이 부딪히기에는 너무 이른데.
원래 게임에서는 내가 죽으면서부터 드한이 각성을 하고 마족과의 대립이 시작되는데…….
‘내가 없어서?’
내가 시스템의 말대로 ‘새로운 게임’에 속하게 되고, ‘히든 캐릭터’가 돼서?
그래서 드한을 각성시킬 사건으로 도적 떼를 넣은 건가?
‘어느 정도 맞는 거 같아.’
이렇게 생각하니 앞뒤가 맞았다. 그러면서도 드는 생각이 있다. 바로,
‘게임 개졸렬해.’
게임이 정말 유치하리만큼 졸렬하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야만 각성하는 캐릭터 너무 진부하지 않은지? 지금 쌍팔년도인지?
‘드한만 불쌍하게 됐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드한과 다신 마주치지 않겠다는 다짐이 더 견고해졌다.
‘이미 날 의심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 최대한 그놈과 멀리, 아니, 아예 머릿속에서 지우게끔 눈에 안 띄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혹시라도 다시 보게 되는 상황이 생기더라도 빠르게 자리를 떠야지.
이렇게 생각을 결론 내린 나는 귀를 틀어막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 쫑알쫑알 떠들고 있는 쌍둥이를 쳐다보았다.
“어, 세키나! 이제 우리랑 얘기할 거야?”
메르데스는 날 보자마자 해맑게 외쳤지만, 파르데스는 아니었다. 그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날 흘겨보았다.
“앞에 우리가 있는데 귀를 막아 버리는 건 뭐야.”
“미아내. 생각할 게 쫌 이써꺼든. 글구 너네 시끄러서.”
“미안하다는 말이랑 욕이랑 같이 해도 되는 거냐?”
파르데스는 헛웃음을 뱉으며 내 머리를 헝클었다.
“그건 그렇고, 아까 걔는 뭐야?”
드한을 말하는 것이리라. 난 으쓱 어깨를 올렸다.
“나두 몬라. 구냥 인사만 해써.”
파르데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한테 귓속말했잖아. 뭐라고 했어?”
“우움. 별 내용 아니어써.”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해 줄 수 없었으니 대충 둘러댔다. 적당히 넘어가 주길 원하면서.
“……이상해.”
하지만 파르데스는 만만치 않았다.
“너 뭐 숨기고 있는 거 같은데.”
파르데스는 날 샅샅이 관찰하며 의뭉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메르데스에 비해서 파르데스가 똑똑하긴 하다. 메르데스는 이게 뭔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지 않은가.
같은 5살인데 드한과 파르데스는 어른스럽고, 메르데스는 애새끼 같은…… 아니지. 메르데스가 딱 이 나이대에 맞는 건가? 쓸데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너 지금 딴생각하고 있지?”
“앗. 들켜따.”
“너 진짜…….”
파르데스가 인상을 와락 찌푸리는 그때였다.
“형아! 세키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
우물쭈물해 하고 있던 메르데스가 나섰다. 내 어깨를 끌어안은 메르데스는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외쳤다.
“세키나는 나 도와줬단 말이야. 세키나 덕분에 나 많이 안 혼난 거야. 알잖아?”
“6시간이나 첨탑 꼭대기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잖아?”
“그건 약과지. 진짜 혼났으면 난 죽었을 테니까. 안 그래?”
“……그건 그렇지만.”
“그러니까 세키나한테 더 뭐라고 하지 마. 또 그러면 내가 화낼 거야!”
메르데스의 외침에 파르데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메르데스는 날 더 꼬옥 껴안았다.
“세키나. 고마워. 너 덕분에 살았어!”
“우웅.”
그래. 당연히 고마워해야지.
하지만 이걸로 끝내서는 안 됐다.
난 고개를 뒤로 젖혀 메르데스를 거꾸로 쳐다보았다.
“군데 말이야.”
“응?”
“그 말이 끝인 그야?”
“어, 어어?”
“내가 나오디 말라고 했눈데 몰래 나오구, 가마니 있떤 환수 건드려서 폭주시킨 걸로도 모자라서 인간한테 들키기까지 했눈데 고작 말 한 마디루 끝낸다구?”
“그…….”
메르데스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내가 어린 호문쿨루스니 대충 지나갈 거라 생각한 모양이지. 하지만 절대 난 그렇게 지나갈 수 없었다. 날 개고생시킨 대가는 치르게 해 줘야 했으니까.
“나, 음. 머리 박을까?”
“웅. 제대로 박아.”
“넵.”
쿵! 메르데스의 정수리가 바닥에 꽂혔다. 난 팔짱 낀 채 그런 메르데스를 지그시 응시했다.
“이걸로 끝이 아니야. 난중에 내 부탁을 들어조야 할 거야.”
“그건 걱정하지 마! 나는 이제 세키나가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구랭. 하디만 머리는 계속 박고 이써.”
“넵.”
파들파들 떨고 있긴 하지만 자세가 안정적이다.
‘환수를 처리했을 때에도 꽤 실력이 괜찮았지.’
어느 정도 경지인지 봐 보려고 시킨 건데, 나쁘지 않았다.
‘나중에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겠어.’
난 킬킬 웃으며 생각을 읊조렸다.
“그런데, 세키나.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머? 머리는 떼지 말구 말해.”
“으응……. 아니, 무튼 그때 말이야. 너 환수를 손도 안 대고 멈추게 만들었잖아. 그거 어떻게 한 거야?”
뭘 말하는지 알 거 같다.
거리에서 환수가 폭주했을 때, 덤벼들려던 환수를 내가 튕겨냈던 걸 얘기하는 거겠지.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하나? 잠시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파르데스가 끼어들었다.
“뭐? 그런 일이 있었어? 그건 나도 신기한데.”
파르데스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정령은 힘으로 다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니잖아. 계약을 하지 않은 상태면 다룰 수가 없을 텐데 어떻게 한 거야?”
“우움.”
뭐라고 말해야 할까.
전생에서 계약했던 정령왕이 알려준 팁이라고 사실대로 말할 순 없으니 적당히 이야기해 줘야 할 텐데…… 그러기에는 파르데스의 눈이 너무 반짝거렸다. 세계의 비밀을 캐낸다는 연금술을 배우고 있는 놈이니 각종 지식에 목말라 하고 있는 것이리라.
“정령은 꼭 계약해야 다룰 쑤 있눈 건 아니야.”
뭐, 이 정도는 말해줘도 괜찮겠지 싶어 입을 열었다.
“대부분은 정령을 특뼐한 존재라구 생각하는데, 아니거든. 정령도 우리랑 똑가태. 힘이 센 넘한테 고개 숙이고, 약한 넘들한테 으스대지.”
난 검지를 들며 말했다.
“중요한 거눈 기세야.”
“……기세?”
“웅. 상급 정령부터는 안 대겠찌만, 그 미만은 기세만으로 제압이 가능해.”
“어! 그러고 보니까 그때 세키나 눈이 완전 무서웠었어!”
메르데스의 호응에 난 눈을 찡긋해주었다.
“그때 일부러 마력을 실었꺼든.”
마법도 쓰지 않고 소환술도 쓰지 않아 남아도는 마력을 쓴 것뿐이다.
이런 게 가능하려면 나만큼의 마력이 있어야 할 텐데, 요 쌍둥이는 그러지 못하겠지.
그래서 난 사실대로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거였다.
“정령을 힘으로 굴복시킨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방향인데.”
파르데스는 입가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생각이 정리된 모양인지 씨익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세키나. 넌 정말 똑똑하구나.”
“웅. 글치.”
“그래. 그러니까 시험에서 소환술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던 거겠지.”
“……머?”
잘못 들었나 싶어 반문했다.
하지만 잘못 들은 게 아닌 모양이다.
“살살해. 일찍 죽기는 싫으니까.”
이런 말을 하니까.
‘설마.’
난 달려들듯이 파르데스에게 가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어? 뭐 하는 거야?”
“가만 이써바!”
파르데스의 손을 잡은 순간.
난 아주 익숙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세세하고, 무겁고, 어쩌면 공포에 가까운 듯한 이 기운은…….
‘마왕의 힘.’
변절한 호문쿨루스에게서나 얻을 수 있는 건데?
‘오호라.’
난 파르데스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찾았다. 내 봉 2호.
***
“북부라 해서 술이 다양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상품이로군요!”
“맞습니다. 독하면서도 향이 있는 게, 먹을수록 맛이 나네요.”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을 들이켜는 신관들을 보며 리아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신을 모신다는 놈들이 술독에 빠져있는 꼴이란.
인간 놈들은 언제나 이렇다. 겉으로는 고결한 척, 떳떳한 척을 하지만 속내는 시꺼멓다. 아무리 마족이 이기적이고 무감하다고 한들, 이타적이고 감정을 느끼면서도 더러운 짓거리를 하는 저들이 더 타락한 종족이 아닌가. 리아트는 물로 입술을 축이며 생각했다.
‘그래도 봐줄 만한 놈은 있군.’
리아트는 유리엘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는 아까 전 쫓겨난 종자 놈을 걱정하기라도 하는지 식당 문 쪽을 계속 힐끗거리고 있었다. 술은 당연히 입에도 대지 않고 말이다.
‘저놈은 예의주시해야겠어.’
느껴지는 신성력이나, 경건한 태도 같은 것이 리아트의 심기를 자극했다. 리아트는 애써 짜증을 꾹꾹 누르며 르카이츠를 비스듬하게 바라보았다.
지고한 마왕은 인간 놈들과 자리를 함께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그에게 있어 인간은 죽인다는 선택지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마계에서 피난을 온 지금, 어쩔 수 없이 장단에 맞추고는 있다.
‘한계인가.’
르카이츠의 굳은 입매를 눈치챈 리아트는 슬쩍 시계를 본 후 다른 신관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희에게 만찬을 제안한 이유가 있을 텐데요.”
리아트의 말에 한껏 술을 들이켜고 있던 신관들이 흠칫했다.
“아니, 뭐…… 온 김에 안면을 트는 게 어떤가 싶어서 제안한 것입니다.”
“그렇죠. 같은 북부인들끼리요.”
머쓱해하며 웃는 꼴을 보니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고작 안면 트는 것을 위해 이 자리를 만들었다고? 리아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때였다.
“아…… 아니요.”
내내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유리엘이 손을 들었다.
“이 자, 자리에서 요청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래서 방문 요청을 드린 거, 것이고요…….”
“유리엘!”
서로 합의가 된 것이 아닌지, 다른 신관들이 그를 막았다.
“지금 진중한 대화를 하고 있지 않느냐.”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조용히 하거라.”
흠칫. 그들의 적의에 유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태생이 유약하고 소심한 그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의 생각을 주장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해야 할 말은, 저의 생각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우리의 신을 위하여 해야 할 말.
유리엘은 마음을 가다듬고 또 가다듬은 후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 교황 성하의 뜻입니다.”
떨지 말자. 말 더듬지 말자. 주눅 들지 말자.
지금의 나는 신의 사자니까.
유리엘은 두 눈에 부릅떠 힘을 주었다.
“성하께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