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성하께서는 다이몬 백작령에 신전을 짓기를 희망하십니다.”
젠장맞을.
리아트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한숨을 길게 뱉었다.
‘역시 죽였어야 했다.’
군단장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그놈이 드러누워 있을 때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신전이 들어설 부지의 값은 충분히 치를 예정이고, 북부의 난민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크게 만들 계획입니다. 백작령의 기근을 생각하면 충분히 승인할만한 사항이라 생각됩니다.”
지랄하고 있다.
우리를 감시하려고 신전을 세우는 게 뻔한데, 뭔 핑계를 저렇게 늘어놓는단 말인가?
리아트는 살짝 초조해졌다. 신전이 세워지고 신관 놈들이 오게 되면 지금처럼 느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으니까. 감시당하고 있는 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 전처럼 행동하겠는가? 그러다 꼬리라도 잡히면 곤란해진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리아트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르카이츠를 쳐다보았다. 자신보다 더 화가 나 있을 거라 예상하면서.
그런데…….
‘웃고 계셔?’
르카이츠의 입술이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더군다나 그의 얼굴은 여유로웠다. 마치 이런 상황을 예상한 것처럼 말이다.
‘역시 우리의 주인……!’
리아트는 벅차오름을 깊게 느끼며 초조함을 가라앉혔다.
“희한한 일이로군.”
그런 리아트 쪽으로 전혀 시선을 두지 않고 오로지 유리엘만 쳐다보던 르카이츠가 입을 열었다.
“그간 백작령은 있는 듯 없는 듯 방치하고 있지 않았나?”
“그건…….”
“마물이 나타나 지원을 요청해도 변변찮은 성기사만 보내주었고.”
“……신의 뜻을 받드는 기사는 모, 모두가 대단한 이들입니다.”
“마물과 대치하자마자 검을 내던지고 도망간 이가?”
4년 전 일어났던 일.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기에 유리엘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이 척박한 북부에 처박혀 백날 마물을 상대하고 있다 한들 그대들은 우리를 배제하지.”
르카이츠는 술잔을 들어 올려 가볍게 손목을 흔들었다.
“그대들이 우리를 어떤 식으로 의심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 시답잖은 소문이 가득하더군.”
“소문은 수도 귀족들이 떠드는 것, 것뿐입니다!”
“그래서? 자네들은 그 입을 단속할 힘이 없다는 뜻인가?”
유리엘은 허벅지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꽉 붙잡았다. 그것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부족했으니까.
“우리는 많은 것을 해 주었네.”
르카이츠는 살짝 삐뚤어지게 팔꿈치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방문 요청도 응해 주었고, 때때로 주제넘게 간섭하는 행위도 묵과해 주었지.”
“……그, 그러셨지요.”
“한데 신전이라. 무교인 이들이 대부분인 이곳에서.”
“…….”
“속셈이 훤히 보이는군.”
유리엘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다.
그래. 예상한 반응이다. 그러니 물러서면 안 된다. 어떻게 해서든 뜻을 밀어붙여야 한다!
“신전을 짓고자 하는 데에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저 북부를 헤매는 이들의 쉼터가 되어 주기 위해서입니다.”
“항상 말은 그럴듯해.”
이는 신전 전체를 업신여기는 말로 여겨질 수 있었다. 그래서 내내 눈치를 보고 있던 신관들이 말을 얹었다.
“저, 지금 조금 격양된 것 같습니다만…….”
“교황 성하께는 저희가 말을 잘 해 놓겠습니다. 유리엘. 너도 그만하거라.”
유리엘은 으득 이를 깨물었다.
그만할 수 없다. 성하께서 맡긴 일인데 어떻게 빈손으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이 다이몬 백작령은 여러모로 많은 것들이 찝찝했다. 아까 전 발견한 흔적도 그러하고, 이들의 느낌도 그러하고……. 결코 넘어갈 수 없었다.
번쩍 고개를 들어 올린 유리엘은 르카이츠와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르카이츠의 입술 끝이 비식 올라갔다.
“포기하지 않은 눈인데.”
“전, 저는 성하의 말씀을 따를 뿐입니다.”
“지금 거절하면 계속 찾아와 귀찮게 한다는 뜻이로군.”
“부정하지 못하겠습니다…….”
르카이츠는 들고 있던 잔을 더 빙빙 돌리며 살짝 침음을 흘렸다. 마치 고민하고 있다는 듯.
“두 가지 조건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신전 부지의 값을 두 배로 받겠네.”
이 정도는 예상한 바다. 유리엘은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기부금은 모두 우리 쪽으로 넘겨야겠어.”
“……!”
신전은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곳이다. 한데 그걸 다 넘기라니?
유리엘의 눈동자가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만약 유리엘이, 교황이 다이몬 백작을 마족으로 의심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면 어찌 신을 모욕할 수 있냐고 호통을 쳤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이곳을 돌아보지 않았겠지.
하지만 그들은 이미 의심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의심하고 있는 이상 감시를 해야 했고, 그렇기에 이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유리엘은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조만간…… 공문을 보내겠습니다.”
그의 말에 르카이츠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잔을 가볍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곳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지, 기대하겠네.”
***
만찬을 끝내고 나오는 길.
유리엘은 자신의 말과 행동을 되짚으며 좌절에 빠졌다.
내가 조금 더 당당한 이였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보다 밀어붙일 수 있었을까?
다 내 잘못 같다. 나는 제대로 해내는 게 없다. 쓸모없는 놈, 바보 같은 놈……. 유리엘은 코를 훌쩍였다.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덕분에 좋은 시간 보냈습니다.”
“예. 그건 그렇고 아까 전에 마셨던 술을 조금 보내주십사 하는데…….”
함께 온 신관들은 이런 유리엘의 마음을 전혀 알아주지 못했다. 그저 자신들이 처먹을 술, 그리고 술통과 함께 올 뒷돈을 생각하고 있을 뿐.
‘배덕한 이들이 더 당당하구나.’
유리엘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예. 근시일 내로 전달드리겠습니다.”
백작의 보좌관이라는 이가 대답했다.
그는 키가 작고 왜소했지만 태도만큼은 매우 당당했다. 말투도, 표정도, 눈빛도, 모두 다.
그런 그를 수하로 두고 있는 백작은 또 어떠한가? 홀로 마물을 상대할 수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듯, 그 기세가 다른 이들과는 달랐다. 마치 교황 성하를 처음 알현했을 때 느꼈던 압도적인 기운이었다. 물론 그보다는 더 탁하고, 어두웠지만…… 어찌 됐든 말이다.
‘나만 잘하면 되는데.’
그게 참 힘들 것 같다.
유리엘은 스스로의 무력감을 짓씹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였다.
“안냐세여!”
난데없이 어린아이가 불쑥 튀어나왔다. 연보라색 머리카락을 댕강 묶고 반짝이는 티아라를 차고 있는 아이. 유리엘 뿐 아니라 다른 신관들도 깜짝 놀랐다.
“저눈 세키나라고 해여. 막내예여.”
“어, 어어……. 안녕?”
“넹. 반가워여.”
스스로를 소개한 아이는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리아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왜 그케 바여, 삼쫀. 전 삼쫀이 두고 간 거 가꼬 왔눈데.”
리아트는 갑자기 나타난 세키나를 보고 살짝 당황하다가, 이내 잊었던 것을 떠올리고 아차 소리를 뱉었다.
“아. 그렇지. 잘 왔다.”
세바스찬에게 명령해 두었던 마법 물품. 신전을 감시할 용도로 만들라고 했지.
마왕의 방문과 세키나의 혼절 때문에 깜빡 잊고 있었다. 리아트는 슬쩍 르카이츠의 눈치를 살피다가 세키나의 등을 툭 떠밀었다.
“네가 직접 전달하겠나?”
“아, 넹.”
세키나는 들고 있던 검은 벨벳 상자를 신관에게 쭉 내밀었다.
“저희 영지 제일 가눈 조각가가 만든 거예여. 요기 백작령에서만 볼 쑤 있는 새예여. 항쌍 둘이 붙어 다니는 애들이라 두 개를 만들어 봐써여. 글구 얘네는 태양 아래에서 빛나눈 애들이라 창가에 두는 게 조으실 거예여. 갠차느시면 열어서 보세여.”
세키나의 허락하에 신관들은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마자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 오오……!”
상자 안에 있는 건 바로 금으로 만든 새 조각상이었기 때문이다.
딱 봐도 이건 도금이 아니라 전체가 금이다. 정교한 세공과 품질을 보건대 만만찮은 돈이 들었을 터.
신관들의 눈이 번뜩였다.
“이거, 참. 고맙습니다. 이렇게 저희를 생각해 주실 줄이야.”
“예. 감사합니다.”
자신도 처음 보는 장식품에 호오 감탄하던 리아트가 대답했다.
“별말씀을 하십니다. 추후에 이곳에 세워질 신전에 이 선물이 놓인다면 참 기쁘겠습니다.”
당장 돌아가 이걸 팔아 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던 신관들은 살짝 뜨끔했지만 이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몇 번 보여주고 나중에 팔아치우면 되겠지. 그들은 서로 시선을 섞으며 킬킬거렸다.
세키나는 상자를 아주 귀중한 것인 듯 껴안는 신관을 보면서 속으로 웃었다.
‘하나는 영상 공유, 하나는 도청.’
저걸 통해 신전을 감시할 수 있으리라.
‘드한도 확인해 볼 수 있고.’
여기까지 생각한 세키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선물도 전달했으니 자신은 자리를 빠지는 게 좋은 모양새였으니까.
그런데 그런 세키나의 발목을 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저……. 저기…….”
백금발의 신관. 유리엘이었다.
“이 아이에게서…….”
유리엘은 흐읍 숨을 크게 들이킨 후 말했다.
“사악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파아앗!
그리고 그의 손에 빛나는 창이 만들어졌다.
“……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