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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님이 만드는 파멸엔딩 (58)화 (59/149)

58화

북부 협곡의 가장 밑바닥.

이곳은 유물이 숨겨져 있는 비밀공간이다. <용사 키우기>의 원래 시나리오였다면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뒤쯤 드한이 이곳을 발견하고 유물을 가진다.

그래서 세키나는 아무 걱정 없이 이곳에 온 것이었다.

드한이 유물을 가져가기 전에 자신이 가로채기 위해서.

그랬는데…….

“니가 여기 왜 이써……?”

드한이 있었다.

그것도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드한이.

“너…… 주것니?”

세키나는 엉금엉금 드한에게 다가가 그의 코 밑에 손을 대봤다. 숨이 느껴지는 걸 보니 다행히도 죽지는 않은 거 같았다.

“하. 개놀랬네.”

가슴을 쓸어내린 세키나는 드한의 몸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야. 인나 봐. 이케 추운데 정신 잃으면 너 진짜 주거.”

“……쿨럭!”

드한은 잔기침을 하며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오. 눈 떴당.”

“너……! 으윽……!”

드한은 벌떡 몸을 일으키려다가 통증이 느껴진 모양인지 다시 드러누워 버렸다. 그러면서도 눈은 감지 않는다. 세키나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당신이 여기 왜 있습니까?”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나두 놀랐따구.”

“저는…….”

드한은 자꾸만 흐려지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으며 대답했다.

“유리엘 님과 있다가 마물의 공격을 받고 이곳으로 떨어졌습니다. 다행히도 가호가 있어서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군요.”

“이게 크게 안 다친 거라구? 툭 치면 디질 거 같이 보이는데.”

“……곧 유리엘 님이 오실 테니 기다리면 됩니다.”

드한은 재빨리 세키나의 몸을 살폈다. 자신처럼 어딜 다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자의로 내려왔다는 건데…… 왜? 드한은 뒤죽박죽 엉키는 정신 속에서도 상황을 이해해 보고자 노력했다.

“세키나 님은 여기 왜 계십니까?”

“산책하다가 발 헛디뎌서 떨어져써.”

“……그걸 믿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시죠?”

“맞는데.”

뻔뻔한 세키나의 얼굴을 보며 드한은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이 꼬맹이는 정말 이상하다. 마치 뭔가를 다 알고 있는 듯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그게 또 밉지가 않아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드한은 헛웃음을 뱉으며 눈꺼풀에 힘을 풀었다.

“더 말하고 싶은데 제가 지금 열이 나서, 눈 좀 감고 있겠습니다.”

“그러다 잠들면 너 주거.”

“안 죽습니다. 저는 절대 안 죽어요. 죽을 리 없습니다.”

“같은 말 계속 하눈 거 보니까 갈 때 된 거 가튼데.”

“…….”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 입이 열리지 않았다. 자꾸만 감기는 눈은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드한의 정신이 서서히 멀어지려 하는, 바로 그때였다.

“으악! 차가워!”

세키나가 바닥에 깔려 있는 눈을 뭉쳐 드한의 옷 속으로 집어넣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추우면 잠 깨자나. 쫌만 버티고 이써 바. 잠들면 디진다.”

세키나는 드한에게 다시 한번 눈을 내던진 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키나가 이곳에 온 이유는 이 바닥 어딘가에 있을 이글루 속 유물을 찾기 위해서다. 게임 속에서 이글루는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었으므로, 그곳으로 드한을 옮기면 적어도 얼어 죽지는 않을 거다.

‘진짜 안 보이네.’

깊은 바닥인지라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세키나는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디며 공간을 더듬거렸다.

‘여기서 쟤가 죽으면 안 돼.’

메인 퀘스트, <게임의 파멸엔딩을 향하여!>는 ‘마왕의 손으로 용사를 죽여야만’ 성립이 된다.

여기서 용사가 죽어 버리면 말짱 도루묵이 된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세키나 자신도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지.

‘그리고…….’

이전 생에서 드한은 세키나의 손에 의해 죽었다. 죽어갈 때 그의 표정이 어떠했던가? 생명의 끈을 놓을 때에 그는 어땠었나? 아직도 가끔씩 그의 얼굴이 떠오르는데, 꿈자리 뒤숭숭해질 일을 또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양심의 가책 때문에 이러는 거야.’

절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고, 세키나는 암시하듯 중얼거리며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찾아따.”

딱딱한 벽이 느껴졌다. 벽을 따라 걸으니 게임 속에서 봤던 이글루가 나타났다. 이제 여기에 드한을 두면 될 것 같은데, 문제는 드한이 쓰러져 있는 곳과 이곳과의 거리가 꽤나 멀다는 거다.

‘그래도 드한이 일어나있으면 올 수 있는 정도니까.’

그렇게 생각한 세키나는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야야. 드한. 나 저기 머 찾아써.”

그리고 누워있는 드한의 팔을 잡아당겼다.

“절로 쫌만 가면 쉴 수 있는 곳이 있…… 너 자냐?”

“…….”

세키나는 재차 드한의 코밑에 손을 대봤다. 아까보다 미약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숨이 느껴진다.

“이대로 두면 죽게찌…….”

하아아. 내 인생.

드한의 팔을 붙잡은 세키나는 그를 질질 끌며 앞으로 나아가 보려 했다.

하지만 세키나는 3살짜리 어린아이였고, 드한은 5살 치고 몸집이 큰 아이였다.

현실적으로 세키나가 드한을 끌고 갈 수 없었다.

‘으으음.’

드한을 내팽개치고 잠시 까딱거리며 고민하던 세키나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하급 마물 소환진 발동.’

중얼거리자마자 손바닥에서부터 마나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일전과 똑같이 바닥에 소환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소환진 한가운데에서 검은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올라왔다.

-쿠에에엑!

마계 기준 하급 마물이 소환되었다. 새까만 털로 뒤덮여 있는 개 모양의 마물이다.

이 정도면 자신과 드한을 옮기기에 큰 문제가 없으리라.

-쿠웨엑!

세키나는 그 마물의 팔을 툭 치며 입술에 검지를 댔다.

“시꺼! 쉿! 입 다무러!”

-……꿰에.

마물은 소리를 작게 뱉으며 우왕좌왕했다.

일전에 소환했을 때에는 세키나도 정신이 없어서 마물이 멋대로 날뛰었었는데, 지금은 세키나의 목표가 명확하다 보니 그러지 않았다.

세키나는 쓰러져있는 드한과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얘랑 나 쫌 저까지 옮겨 조.”

-꿰…….

“깨어날 때까지 옆에 좀 이써 주라. 추어.”

-에…….

“옆에 좀 붙어 바. 얼어 디지겟네.”

-엑…….

이글루로 옮겨 온 세키나는 마물의 몸에 찰싹 달라붙은 다음 드한을 그 옆에 눕혔다.

“너 털이 대게 복슬복슬하다.”

-꿰엑…….

“어어, 너가 머라 해도 난 몬 알아들으니까 구냥 말 하디 마.”

세키나는 웅얼거리는 마물을 툭툭 치며 대꾸했다. 그때, 세키나의 옆에 누워있던 드한이 살짝 뒤척거렸다.

“으음…….”

뺨이 붉게 달아올라 있는 걸 보니 열이 나고 있는 듯했다. 세키나는 자연스럽게 드한의 이마에 손을 댔다. 자신의 손이 차가우니까 열을 식히는 데에 효과적일 것 같아서.

잠들어 있는 드한은 싸가지 없어진 성격을 상상하지 못할 만큼 순수하고 어린애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떠한 고난도 겪어보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용사의 기본 외모 설정이 그렇다. 힘들고 지치고 괴로워도 특유의 자신감과 해맑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세키나는 그런 용사, 드한을 좋아했다.

“이러케 이쓰니까 옛날 생각나네.”

세키나는 드한의 앞머리를 넘겨주며 그의 눈가를 콕 찔렀다. 드한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때도 요런 표정이었눈데.”

세키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드한이 여기 있는 것은 다른 시스템이 인도한 것일 테다.

세키나가 먼저 유물을 발견하면 드한에게 해가 되니까.

다시 말해, 드한이 시나리오대로 행동하면 ‘용사의 연인’인 자신이 죽고, 자신이 시나리오대로 행동하면 ‘마왕에게 죽어야만 하는’ 드한이 죽는다.

뭘 어떻게 해도 절대 이어질 수 없는 사이라는 거다.

-나는 네 가족이 되고 싶어.

-좋은 부모가 없더라도, 좋은 부모가 되어 줄 순 있잖아. 좋은 가족을 만들자. 우리는 할 수 있어.

-사랑해.

“하아아아…….”

날이 추워서 그런가. 감성적이게 되네, 사람이.

세키나는 뒷목을 긁적거리며 드한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너는 기억 몬 하겠찌만. 내가 기억하니까 대써.”

그리고 그의 이마를 재차 쓰다듬어주었다.

“그럼 댄 거야.”

세키나의 외로운 중얼거림이 협곡 안을 메아리쳤다.

***

“드한! 내 목소리 들려? 들리면 대답해 줘!”

유리엘은 쌓인 눈을 푹푹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유리엘은 신전을 올릴 만한 부지를 찾기 위해 드한과 함께 다시 이곳으로 왔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궂은 날씨와, 느닷없는 마물의 등장에 그만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그 와중 드한을 잃어버리기나 하고.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드한을 찾을 수 있지?

드한은, 살아있겠지?

유리엘의 유리멘탈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그때였다.

휘이잉! 눈보라가 한쪽으로 휘몰아쳤다. 유리엘은 갑자기 가려진 시야에 눈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로 지척에 누군가가 서 있다.

거리에서 마주친다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칠 만큼 평범한 외모의 사내였다.

하지만…….

‘무서워.’

기백에 압도되는 것만 같았다. 숨통을 옭아매는 기운에 유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어, 저 아무것도 안 했는데.”

남자는 생긋 웃으며 유리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이제부터 할 거기는 하지만요.”

남자, 아서의 검이 유리엘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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