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유리엘은 정말 아슬아슬한 차이로 아서의 검격을 피했다.
그러면서 그는 직감했다.
나는 죽는다고.
이건 어떻게 비벼 볼 수도 없을 만큼의 거대한 실력 차이였다.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자신이었지만 눈앞의 이 남자는 이길 수 없다. 이건 확실했다.
“되게 잘 피하시네요.”
아서는 살짝 짜증이 났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검을 고쳐잡았다.
“저 몰래 나온 거라서 빨리 들어가 봐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쉽게 죽어주시면 안 될까요?”
아서는 마기를 쓰지 않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마기뿐 아니라 마법도 쓰지 않고 있었다. 유리엘이 신관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인간계에 오면서 마기를 덜어냈다고 해도, 마법을 인간에 맞춰 변환시켰다고 해도, 이놈은 고위 신관에 필적하는 놈. 혹시라도 들킬 수가 있었다. 이놈을 죽인다고 해도 흔적이 남을 수도 있겠지.
그래서 아서는 그저 검 한 자루로만 유리엘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인간을 상대하는 데에는.
아서의 갈색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도는, 바로 그때였다.
“자, 잠깐만요!”
주저앉은 유리엘이 두 손을 활짝 펼치며 외쳤다.
“그, 왜, 왜 저를 죽이려고 하시는 거, 겁니까?”
아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인간들은 참 신기하다.
왜 죽는 이유를 물어보는 걸까?
살면서 죽어도 될 이유를 단 하나도 만들지 않았다고 자부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은 언제까지나 평온하게 살다가 늙어 죽으리라 망상하고 있는 것인가? 어느 쪽이건 참으로 오만하다.
“그냥요.”
그래서 그는 환히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죽는 데에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냥 죽는 거지.”
유리엘의 얼굴에 핏기가 빠졌다.
틀렸다. 눈앞의 이 남자는 대화하고자 하는 의지가 전혀 없다.
비겁하지만 목숨을 구걸해 보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내던진 유리엘은 다시 목청을 틔웠다.
“자, 잠시만요!”
“잠깐 엄청 찾네.”
“지금 주, 죽을 수 없습니다!”
“그럼 내일은 죽어도 됩니까? 헛소리를 하고 있어.”
심드렁한 아서를 향해 유리엘이 소리쳤다.
“아, 아니요! 지, 지금 아이를 잃어버렸는데, 제가 여기서 죽으면 그, 그 아이도 죽게 됩니다. 제, 제발 아이를 먼저 찾으면 안 될까요?”
드한을 찾아야 한다.
자신을 따라 이곳까지와 눈보라에 길을 잃어버린 아이. 그 아이를 찾지 못하고 죽어 버리면 자신은 결코 신의 곁으로 가지 못 하리라.
유리엘은 기도하듯 두 손을 꽉 맞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이만 구해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아서의 검 끝이 살짝 아래로 향했다.
“애가 몇 살입니까?”
“다, 다섯 살입니다.”
“하아…….”
아서는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애초에 그는 이 신관 놈이 세키나에게 감히 덤볐다 해서 죽여 버리고자 온 것이다. 그만큼 아서는 세키나를 아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어린아이를 좋아했다. 아이에게 약했다.
아서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후 유리엘의 앞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다섯 살짜리 애기를 잃어버리는 게 말이나 됩니까? 이 눈보라 치는 곳에서? 어쩌다 잃어버린 겁니까?”
“그, 그게 여, 여기 갑자기 마, 마물이 나와서…….”
“신관이라는 인간이 마물 하나 때문에 아이를 잃어버려요? 그냥 죽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애, 애만 찾고요!”
유리엘은 아서의 마음이 바뀔까 싶어 서둘러 말했다.
“제, 제가 여, 여기 평지는 다 둘러봤거든요……. 그런데 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기, 저 협곡 아래로 떨어진 게 아닐까…… 하는데…….”
그는 저만치 있는 협곡을 가리켰다. 아서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저기 떨어졌으면 죽었을 것 같은데요.”
“아, 안 죽었을 겁니다!”
유리엘은 손을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 아이는 시, 신의 가호를 받고 있어서…….”
하?
아서는 콧방귀를 꼈다.
“신관들은 참 신의 가호가 만능이라고 생각한다니까요. 절대 아닌데.”
“……뭐, 뭐라 하셨습니까? 바람이 너, 너무 세서 못 들었습니다.”
“아무 말 안 했습니다.”
쯧 혀를 찬 아서는 유리엘의 멱살을 잡고 일으킨 뒤 협곡 쪽으로 다가갔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협곡.
평범한 아이가 떨어진 것이라면 당연히 죽었을 테지만, 유리엘의 말대로 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아이라면 다치긴 했어도 죽진 않았을 거다.
다만 이렇게 추운 날씨가 문제인데…….
아서는 힐끗 유리엘을 내려다보았다.
마법을 쓸 순 없다. 하지만 마법을 쓰지 않고서는 이 깊은 협곡을 내려갈 방법이 없다. 미간을 짚은 채 고민하던 아서는 이내 유리엘의 등을 툭 쳤다.
“그럼 그쪽도 떨어지는 건 어떨까요? 신의 가호인지 나발인지 때문에 안 죽을 텐데.”
“저, 저는 그만큼 가호가 가, 강하지 않아서요……. 주, 죽을 수도…….”
“진짜 쓸모가 없네.”
이런 놈이 고위 신관급이라니. 참 신전에도 인재가 없다 싶다.
“일단 여기 있으십시오. 경비대원들을 불러오겠습니다.”
이놈을 구하기는 싫었고, 영지로 돌아가 자신의 외출이 들키는 것도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섯 살짜리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생각한 아서가 발을 틀려고 할 때였다.
“……어?”
유리엘은 협곡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올라오고 있는 무언가를 보게 되었다.
“저, 저기요. 저, 저거 뭐죠?”
그의 말에 아서도 함께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마자 볼 수 있었다.
“어어?”
“엥?”
저보다 훨씬 큰 남자아이를 안은 채 둥둥 떠서 올라오고 있는 세키나를.
***
세키나는 원래 유리엘이 드한을 찾으러 올 때쯤 맞춰 돌아갈 생각이었다.
니샤에게 줄 유물도 챙겼으니, 텔레포트 스크롤을 이용해서 자리를 떠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아무리 기다려도 유리엘이 안 온다는 거였고,
-열이 너무 나는데?
드한의 몸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는 거였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가진 스크롤은 텔레포트 진과 플라이 마법 두 개뿐.
텔레포트 진을 쓰면 미리 입력된 마왕성 별관으로 이동이 되겠지만, 용사인 드한을 그곳에 데리고 가는 건 안 되는 일이었다. 마기를 숨기지 않고 마구잡이로 방출하며 다니는 마족들이 태반이었으니까.
그럼 남은 방법은 플라이 마법을 써 협곡을 올라간 뒤에 구조요청을 하는 것뿐이었다.
‘이놈은 대체 왜 여기 나자빠져 있어서 날 이렇게 개고생시키는 거지?’
드한을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든 세키나는 둥둥 떠오르며 이를 부득 갈았다.
‘나중에 백 배로 돌려받을 거다. 진짜 진짜 진짜로.’
그렇게 해서 겨우 협곡을 올라왔는데,
“……아써?”
정말 예상하지 못한 인물. 아서가 있었다. 그 옆에는 유리엘이 있었고.
“드한! 세상에!”
유리엘은 세키나에게 안겨있는 드한에게 손을 뻗었다. 나 지금 이놈 안고 올라오느라 개고생해서 식은땀 나는 거 안 보이냐? 나부터 부축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 양심 없는 신관 새끼가……!
“세키나 님. 이쪽으로.”
욕이 혀끝까지 닿았던 세키나를 폭 안아준 건 아서였다. 세키나는 드한을 유리엘에게 던지듯이 넘겨 준 후 아서의 목을 그러안았다.
남들이 본다면 퍽 다정한 사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드한의 귓가에 속삭이는 세키나의 말은 전혀 다정하지 않았다.
“너 유리엘인가 저넘 주기려고 여까지 온 거야?”
“……아니라고 하면 믿어주실 건가요?”
“하하하.”
“헤헤헤.”
“장난하냐!”
찰싹! 세키나는 아서의 가슴을 세게 때렸다.
분명 유리엘을 상대할 때에는 표정이라 할 만한 것이 없는 냉정한 얼굴이었건만, 세키나의 앞에 있는 아서는 다른 사람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딴판이었다.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세키나의 등을 토닥였다.
“아우, 아파요. 그래도 저는 세키나 님을 생각해서 한 행동인데.”
“너 이씨, 신관을 적으로 돌리면 어케 대는지 알면서……!”
“그것보다 세키나 님의 복수가 먼저인 걸요.”
“나 안 주겄고, 안 다쳤으니까 복수할 것도 업써!”
이들의 대화를 건너 들으며 유리엘은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세키나도 만난 적이 있으니 상황을 짐작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으리라.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저, 저…….”
유리엘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저, 정말 궁금하지만, 그보다 지금 드, 드한이 너무 아파해요. 여, 영지로 돌아가면 안 될까요? 부탁입니다…….”
그의 부탁에, 세키나는 다시 한번 아서의 목을 그러안으며 말했다.
“아써. 너 여까지 어케 와써?”
“마법이요.”
“돌아갈 때 마법 쓰면 안 대게찌?”
“네. 쓰면 바로 들킬 걸요.”
“그럼 우리 어케 돌아가?”
“음…….”
아서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다가, 개구진 미소를 입가에 걸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신의 기적을 믿어볼까요?”
“……머?”
“정말 신의 가호를 받고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저 아이를 살리려고 뭔가의 일이 생기겠죠.”
아서의 반쯤 떠진 눈이 쓰러져 있는 드한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