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13. 못된 계모에게 죽었으므로 환생해서 복수하려 합니다
-너야말로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이 몸이 보았을 때 이 공간에서 가장 약한 존재는 너다.
-넌 인간이니까.
세키나가 인간이라는 걸 알아차린 존재는 이 고양이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세키나는 너무나도 놀랐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알았지? 아니, 어떻게 해야 하지? 세키나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이 몸은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에 알아챈 것이다. 그리 겁먹지 않아도 된다.
세키나는 일단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고양이 앞에 쪼그려 앉아 눈을 마주쳤다.
“너 환수 찌꺼기잔아. 근데 먼 위대한 존재야. 장난까냐?”
-위대한 힘을 받았으니 위대한 존재가 된 것이지.
“……구거 마왕 얘기야?”
-그렇다.
“그런데 마왕은 내가 인간인 거 몰랐눈데.”
고양이는 탁, 탁, 꼬리로 바닥을 치며 말했다.
-그의 힘이 돌아온다면 알게 되겠지.
“…….”
-그 전에 이 몸이 입을 열면 알게 될 수도?
세키나는 팔랑거리는 고양이의 꼬리와 씰룩거리는 수염을 멍하니 보면서 생각했다.
“움. 결심해써.”
그리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널 내쫓기루.”
-뭐?
“나가. 나가! 나가악!”
고양이에게 그대로 달려든 세키나는 어떻게 해서든 고양이를 내쫓으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가볍고 유연하기로는 고양이가 제일이었다.
-이 험상궂은 날씨에 연약한 고양이를 쫓아내다니, 너는 참으로 비도덕한 인간이로구나.
어느새 창틀에 앉은 고양이는 앞발로 얼굴을 세수하며 말했다. 세키나는 으득 이를 갈았다.
“내 정체 가지구 협빡하는 너는 머 도덕적이구?”
-이 몸은 그래도 된다.
고양이는 눈을 보다 크게 올려 뜨며 말했다.
-귀여우니까.
아오 씨.
귀여운 건 사실이니까 맞는 말이긴 한데, 아니 그래도 너무 얄미운 거 아닌지? 세키나는 주먹을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약속하지.
다시 세키나의 발치로 다가온 고양이는 세키나의 발등을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삼시세끼 식사와 간식을 보장하고 매일 3번 이상 털을 빗겨 준다면 네 정체는 밝히지 않도록 하겠다.
뭐가 그렇게 디테일하고 까다로워.
세키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구럼 내 사역마가 되어죠.”
-싫다. 그런 같잖은 계약을 하고 싶지는 않으니. 힘이 쌓이면 이 몸은 떠날 것이니 그때까지 내 수발을 들어라.
미간을 좁힌 세키나는 뒷목을 매만지며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그케 챙겨주기만 하면은 딴 데 가서 떠들지 않게따는 거지?”
-그래.
“하쒸, 난 기찬은데.”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고양이를 어떻게 챙겨주나?
나 말고 그런 걸 해 줄 만한 이가 있으면 좋겠는데…… 세키나는 팔짱을 끼고 생각해 보았다.
그때였다.
“세키나 님!”
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 아서에게 맡길까? 아서라면 잘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음?
‘오호라.’
아서의 뒤에 있는 캘빈은 주춤거리며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세키나는 그의 뺨에 올라와 있는 홍조와 반쯤 벌어진 입을 보자마자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찾았다, 내 봉 3호.’
저놈, 고양이 좋아한다고.
***
캘빈은 결벽증이다.
마왕을 제외한 다른 이들과 접촉하는 것도, 말을 섞는 것도,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싫다. 모두 더러우니까. 찝찝하니까!
그나마 아서만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는데, 아서를 오래 봐 온 결과 자신만큼은 못하더라도 그럭저럭 깔끔한 놈이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캘빈은 심각한 결벽증이고, 마족도 싫어하는 판국에 호문쿨루스를 곁에 둘 순 없었다. 그런데,
“……짐승?”
호문쿨루스 더하기 짐승이다.
그것도 걷기만 해도 털이 줄줄 빠진다는 고양이.
캘빈의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소름이 끼치다 못해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털이 날아다니는 공기가 더럽다. 여기 계속 있다간 나도 더러워질 거야! 캘빈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캘빈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냐앙?”
귀여워.
“냥?”
너무 귀여워.
그런데 손을 댈 수 없다. 손을 대는 순간 자신은 더러워질 테니까.
캘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뭐하냐?”
아서는 그런 캘빈을 한심하게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게, 캘빈은 오른손을 내밀고 왼손으로는 그 오른팔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쳐 있는 놈. 아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만지자마자 씻어라. 그럼 되겠지.”
“……넌 천재냐?”
캘빈은 엄지손가락을 들어준 후 곧바로 고양이에게 뛰어갔다.
“하, 한 번만! 한 번만 배를!”
하지만 고양이는 캘빈을 피해 폴짝폴짝 뛰었고, 캘빈은 고양이를 쫓아 복도를 내달렸다.
쯧쯧. 아서는 혀를 차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키나에게 다가갔다.
“세키나 님. 저거 그거죠? 그때의 환수 찌꺼기?”
“우웅. 맞아. 군데 고양이라서 다루기가 힘드렀는데.”
세키나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캘빈인가 먼가 하는 쟤를 옆에 두면 대 꺼가타.”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키나와 아서의 얼굴에 같은 표정이 피어올랐다.
“마, 말랑말랑 젤리…….”
노예를 구했으니 저놈을 마구잡이로 부려 먹어주겠다는 표정이.
***
“크흠!”
캘빈은 잔기침을 뱉으며 몸의 긴장을 풀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잘되지 않았다. 제 허벅지에 고양이가 올라와 있었으니까!
‘이게 바로 무릎냥이…….’
고양이가 떠나고 나면 바지가 털로 범벅이 될 테지만, 갈아입으면 된다. 쓰다듬으면 손이 오염될 테지만, 씻으면 된다. 그런 건 고양이의 귀여움 앞에서는 모두 다 사소한 문제가 된다.
“저, 그, 제가 일단 세키나 님을 찾아온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엥?”
세키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고양이 볼라고 온 거 아니어써?”
“저도 그런 줄 알았어요. 세 시간 동안 고양이랑만 놀아서.”
“크흠! 아닙니다!”
캘빈은 손을 저으며 부정했다. 그리고 다시 표정을 정돈하며 세키나를 직시했다.
“일단, 세키나 님이 왜 협곡에 가 계셨는지부터 이야기를 들어야겠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신전의 종자와 무슨 대화를 했는지도.”
고양이한테 물리고 있으면서 진지한 표정을 지어봤자 하나도 무게감이 없는데……. 세키나는 에휴 한숨을 뱉었다.
드한에게는 산책 중 발을 헛디뎠다고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마족들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애초에 거짓말을 들킬 게 뻔하고, 이런 사소한 일로 의심을 사는 것도 사양이었으니까.
“유물 찾으러 갔어써. 그 아래에 있눈 거 같아꺼든.”
“네?!”
캘빈의 눈이 커졌다.
“그, 그 유물의 힘 같은 게 느껴지십니까?”
“우웅. 가끔씩.”
힘이 아니라 게임의 기억과 설정집을 통해 알게 되는 것들이지만 그것까진 굳이 말할 필요 없으니 설명하지 않았다.
“그 유물은 어디 있습니까?”
“니샤한테 줘써.”
“네? 유물을 니샤 님한테요? 그런 건 곧장 리아트 경에게 보고를 올렸어야 했는……!”
“그거 주고 고양이 얻어온 건데.”
“잘하셨습니다.”
바로 의견을 철회한 캘빈은 환히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쯧쯧, 세키나는 재차 혀를 찼다.
“그럼 신전의 종자와는 무슨 대화를 하셨습니까?”
“우움.”
세키나는 오른손에 턱을 괴며 대답했다.
“별말 안 해써. 내가 가쓸 때는 거의 죽어가구 이썼거든. 그냥 냅둘까 했는데 혹씨 우리 영지에서 생긴 일이라구 피해올까 바 구해준 거야.”
캘빈의 눈이 가늘어졌다.
유물 때문에 협곡에 갔다는 것까지는 믿을 수 있다.
그런데 그 협곡에서 신전의 종자를 ‘우연히’ 만났다고? 계획하에 그곳에서 만난 게 아니고?
여러모로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캘빈은 다소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세키나를 내려다보았다.
“믿어도 되겠습니까? 거짓이라면 세키나 님은 폐기를 면할 수 없을 겁니다.”
세키나는 피식 웃었다.
“얼굴에 고양이 수염 붙이고 있는 넘이랑은 말 안 할래.”
“크흠!”
민망해진 캘빈은 얼굴 전체를 만지며 고양이 수염을 떼어 냈다. 하지만 그걸 버리지는 않는다. 고양이 수염은 소중한 거니까. 안주머니에 수염을 고이 넣은 그는 재차 입을 열었다.
“신관과 종자는 아직 영지에 있습니다. 여관에서 숙박하고 있지요. 폭풍이 불고 있는 날씨라 아직 돌아가지 못한 듯합니다.”
“구래서? 나보고 가 보라고?”
“네.”
씨익 웃는 캘빈을 보며 세키나는 미간을 좁혔다.
“가기 실타 하면 안 데꼬 갈 꺼야?”
캘빈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향했다가, 다시 올라와 세키나에게 향했다.
“함께 가셔야 합니다.”
이건 거의 협박이다.
안 가면 뒤진다, 를 돌려 말하고 있는 거란 말이다.
“머, 상관은 업는데.”
귀찮은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못할 것도 없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세키나는 궁금해졌다.
왜, 그들을 만나야 하지?
그리고 왜, 그들을 살려 두고 있지?
세키나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마왕님이 내린 명령이 정확히 먼데?”
캘빈은 순간 움찔거렸다. 세키나의 표정이 흡사 마왕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위대한 마왕님과 이런 하찮은 호문쿨루스를 비교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순간적으로나마 비슷해 보였다.
크흠. 캘빈은 재차 잔기침을 뱉은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