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캘빈은 마왕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부단장은 멍청한 놈이 아니다. 필시 그렇게 행동한 이유가 있을 터.
-그들에게서 반역의 냄새라도 맡은 모양이지.
그리 말을 하는 르카이츠의 입꼬리는 비스듬하게 올라가 있었다. 평소 표정을 만드는 이가 아니었기에, 캘빈은 르카이츠가 지금 이 상황을 기꺼워한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려진 명령.
-그들을 만나 보거라.
-그들이 새로운 신전의 새가 되는 것도 좋겠지.
새, 라고 한다면 세키나가 기획해 신전 측에 전달한 장식품을 말하는 것이다. 녹음 기능과 영상 공유 기능이 있는 마법 물품.
유리엘 신관을 이용하란 말인가?
여기까지 유추해낸 캘빈은 쿵쿵 뛰는 심장을 도저히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건 실로 오랜만에 겪는 재미있는 일이었으니까!
고고한 신관 놈을 타락시켜 끌어들인다고? 훗날 그 신관에게 우리의 정체를 밝힌다면 그놈의 표정이 어떠할까?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온몸이 짜릿했다.
“머야. 왜 그런 변태 가튼 표정을 짓고 이써. 징그럽게.”
아차.
상념을 지운 캘빈은 멋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왕님은 제게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단지 제 추측으로 행동하는 것이지요.”
“그게 먼…… 아니, 아니. 잠깐만. 말하지 말아 바.”
세키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머리를 굴렸다.
아서는 갑자기 유리엘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건 다 계산하에 일어난 일이다. 아서가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백작가의 일원이 그들을 구해 주는 그림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때 아서가 했던 말.
-신을 믿는 자들이 신에게 버림받고, 마족에게 구원받은 것이. 나중에 저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떨까요? 신을 원망할까요? 우리를 찬양할까요?
유리엘의 믿음에 금을 내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판이란 뜻이다.
그런고로…….
‘두뇌 풀가동!’
세키나는 번쩍 눈을 올려 떴다.
“그 신관이 배신하길 바라는 거지? 첩자 역할을 하게끔 만들라구.”
“정답이에요!”
어느새 다가온 아서가 세키나의 목을 그러안으며 생긋 웃었다.
“역시 세키나 님. 정말 총명하시네요. 어떻게 이런 분이 세상에 나타났는지 몰라.”
정답을 맞힌 것까지는 좋은데, 그 내용이 조금 탐탁지 않았다.
유리엘. 유리엘이라…….
세키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될 껄…… 걔는 절대 안 될 껄…….”
그 중얼거림에 캘빈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렇게 확신할만한 이유가 있습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유리엘 그놈은 사실 게임에서 용사에게 힐을 넣어주는 친구로 설정이 돼 있어서 배신 같은 건 절대 안 할 거라고 말할 순 없지 않은가. 세키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어?’
그러다 뭔가 번뜩이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용사를 배신하지 않게 설정이 되어 있는 것뿐이잖아?’
그럼 드한과 함께 신을 저버리면? 신전을 배신하면?
‘그래도 되는 거 아닌……가?’
이쪽은 가능할 것 같았다.
이미 한 번 그의 신앙에 돌을 던져 물결을 일으켜 놓았으니 그걸 파도로 만들어 보는 것도 시도해 볼 법했다.
“다시 생각하니까 가능할 꺼 같기두……?”
세키나는 턱을 매만지며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근데 그…… 종자를 옆에 둬야 하 꺼야. 그 꼬맹이 업쓰면 걔는 오지도 않을껄.”
“아,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서가 덧붙였다.
“그 신관, 종자를 끔찍하게 아끼긴 했거든요. 자긴 죽어도 되는데 그 종자는 죽으면 안 된다고. 살려달라고.”
참 잔인한 내용인데도 말을 하는 아서의 표정은 뭔가에 취해 있는 거처럼 들떠있었다. 세키나는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아써. 너 진짜 걔 주기려고 해써?”
아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세키나를 보며 방긋방긋 웃을 뿐.
“왜 대답이 업찌?”
“그럼 그 둘을 변절시키는 걸 목표로 두고 행동할까요?”
“왜 내 말을 씹찌?”
“저보다는 캘빈이 가는 게 낫겠네요. 그 신관은 저를 무서워할 테니까요.”
“아써?”
“하하하.”
대답을 피하는 아서를 흘겨보던 세키나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이들과 자신은 종족이 다르다. 나의 도덕적 잣대를 마족에게 들이댈 수 없다. 이들에게 있어 인간은 다른 종족, 다시 말해 인간과 벌레만큼의 큰 간격이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세키나는 아서에게 더 뭐라고 하는 걸 포기했다.
“머…… 내가 할 쑤 있는 건 업쓸 수도 이써. 일딴 걔네 만나러는 같이 가깨. 종자 넘은 내가 구해 준 거니까 생색도 낼 겸.”
“좋습니다.”
캘빈은 엄지손가락을 으쓱 들어 올리며 씨익 웃었다.
시간은 어느새 저녁.
가벼운 식사를 하고 잠을 청하기에 딱 좋은 시각이다.
그래서 세키나는 하품을 길게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캘빈을 쳐다보았다.
“머해? 안 나가구?”
대화를 하는 내내 고양이의 털을 빗겨주고 있던 캘빈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되겠습니까?”
그의 시무룩한 얼굴을 보며 세키나는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방해되는데…….”
“그, 조용히 있겠습니다. 그냥 저기 구석에서 고양이와 함께 있기만 하겠습니다.”
“아니. 그것뚜 방해대.”
“그럴 수가.”
캘빈은 마치 나라 잃은 장군처럼 좌절했다. 세키나는 씨익 웃으며 그에게 구원의 동아줄을 내려주었다.
“구럼 아예 옆방에서 사는 건 어때?”
“……옆방이요?”
“웅. 고양이 지나다닐 쑤 있게 벽을 작게 뚫어 노으면 대잔아. 그러케 하면 아침저녁으로 고양이 볼 쑤 이쓸 텐데. 눈 뜨면 있꾸 눈 감을 때도 있꼬 그럴 텐데.”
“…….”
냐앙,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캘빈의 귓가를 맴돌았다.
더러움, 깨끗함, 불결, 청결, 청결, 청…… 귀여운 거. 고양이.
“짐을 옮겨오겠습니다.”
캘빈은 충성 경례를 한 뒤 재빨리 방을 빠져나갔다.
“냐아앙.”
고양이는 캘빈이 떠나자마자 폴짝 뛰어 소파에 앉아 그루밍을 시작했다. 마치 네놈이 있든 말든 알 바가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쟤 정보수집 하는 넘이라고 하지 안아써?”
“네, 맞아요.”
“근데 저러케 맹해?”
“그게 캘빈의 매력이죠.”
“…….”
세키나는 내뱉고 싶은 말을 애써 참았다.
‘마왕군 안 망한 게 신기하네…….’
***
덜컹덜컹.
여관의 허술한 창문은 폭풍과도 같은 눈보라에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창문이 흔들릴 때마다 유리엘은 흠칫거리며 어깨를 떨었다.
무섭다. 이곳은 무서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떠날 수는 없었다.
다이몬 백작령은 텔레포트 진 자체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고, 눈보라 때문에 마차가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리엘은 꼼짝없이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이곳에 있어야 했다.
‘하아…….’
유리엘은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도망치고 싶다.
빨리 신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나를 죽이려던 그 사람이 언제 올지 몰라. 난 언제 죽을지 몰라. 죽고 싶지 않아…….
‘신이시여. 부디 저를 구원…….’
기도를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려던 유리엘은 문득 감았던 눈을 올려 떴다.
자신을 죽이려던 그 남자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신관님. 기억하세요.
-신의 응답은 없습니다.
-당신들의 목숨을 구해 준 건 저예요.
그 남자는 자신을 살려 주었다. 드한도 살려 주었다. 그리고 우리 둘을 안전한 영지까지 옮겨 주었다.
말대로, 나를 구해 준 건 그 남자였다.
‘신께서는…….’
날 구하고자 했는가?
불경한 생각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한 번 생겨난 의심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심장이 뛴다. 신성력이 차올라야 하는 손끝에는 냉기밖에 남아있지 않다.
“신관님.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막 씻은 듯 머리가 젖어 있는 드한이 방으로 들어왔다. 드한은 유리엘의 창백한 안색을 발견하고 서둘러 그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유리엘은 드한의 얼굴을 보자마자 와락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하지만 참았다. 아니, 참아야 했다.
“……아니. 괘, 괜찮아.”
그는 고개를 저은 뒤,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탁자에 앉아 가지고 왔던 짐꾸러미를 뒤적거렸다.
“교황님을…… 뵈어야겠어…….”
신전 영상구에 신성력을 불어 넣으며, 유리엘은 끊임없이 기도를 올렸다.
부디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