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와…… 아까 얻어맞은 데보다 더 아파. 마음이 아파.”
한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나 그래도 오빠 소리 못 들을 나이는 아닌데…….”
“아조씨.”
“……나 울어도 돼?”
“대꼬, 계속 말해 바. 아조씨가 암살 길드 부길드장이었따고?”
생긴 건 정말 깜찍하고 귀여운데, 냉정하기 짝이 없는 아이다. 어째 유리가 생각나네. 한은 코를 훌쩍였다.
“있었어. 저기 남쪽에. 그러다 지쳐 가지고 도망쳐 나온 거야.”
세키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남쪽의 암살 길드가 있었나?
게임상 그런 내용은 없었던 거 같은데…… 나중에 설정집을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세키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아조씨를 저 넘들이 데리고 가려고 온 거구?”
“그렇지.”
“왜?”
“글쎄. 내가 알고 있는 게 좀 많아서?”
“멀 알고 있는데?”
세키나의 질문에 한은 검지손가락을 까딱이며 눈을 찡긋거렸다.
“그거 말 안 하려고 도망쳐 나온 건데 여기서 입을 열까. 배를 갈라도 말 못 해.”
“구랭. 어쩔 수 업디.”
“……이렇게 빨리 포기한다고?”
“길드 내 정보가 어케 관리대는 지는 나도 알아. 한 번 입 다문다고 하면 절대 말 안 하는 것두 알고 이꼬. 시간 낭비 하기 싫어.”
“…….”
이것 봐라.
한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구럼 아조씨가 여기 있는 건 쟤네가 어케 아랐대?”
“그것도 글쎄…… 모르겠네.”
그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뭐, 됐어. 내가 여기 있는 게 알려졌으니 더 이상 머무를 순 없겠지.”
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쌍둥이가 소리쳤다.
“뭐? 그게 무슨 말이냐?”
“이곳을 떠난다는 말이냐?”
“안 된다. 눈이 그치면 나에게 승마를 알려주기로 하지 않았나.”
“……나도 알려 달라.”
투정 부리는 쌍둥이를 보며 한은 작게 미소 지었다.
사실, 이곳은 꽤 마음에 들었다. 될 수 있는 만큼 오랜 시간 머물고 싶었다. 그래서 경비대니 뭐니 우스운 일도 하면서, 더더욱 이곳에 정을 붙였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된다.
도망치는 자는 결코 정착할 수 없으니까.
“안 돼. 내가 여기 있으면 너희가 위험해져.”
그래서 한은 단호히 말했다. 내가 좋아한 이곳, 그리고 아끼는 아이들만큼은 위험에 빠뜨릴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쌍둥이의 표정이 조금 오묘했다.
“그거 진짜 기분 나쁜 말인데.”
“위험해? 누가?”
“여긴 위대한 다이몬 백작이 있는 곳이야.”
“과연 어느 존재가 우리를 위협할 수 있지?”
쌍둥이는 표정 근육을 싸늘하게 굳히며 말했다.
그러자마자 한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챘다.
“너……. 아니, 너희…….”
한의 입이 쩍 벌어졌다.
“푸하하! 아, 진짜 골때리네. 역시, 입고 있는 옷이 또 때깔이 좋다더니.”
그는 폭소하며 쌍둥이를, 그리고 세키나를 쳐다보았다.
“너네 다 백작님 자식들이냐?”
쌍둥이는 살짝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한은 더더욱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아, 그렇게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게 백작가 아들내미여서 그랬던 거구나. 어쩐지.”
“그건 우리가 인간 세…….”
“어어. 마자. 이넘들이 아주 귀하게 커 가지구 멀 잘 몰라쓸 거야.”
세키나는 쓸데없는 말을 하려는 메르데스의 입을 틀어막고 앞으로 나섰다.
“어쨌거나 저넘들은 우리가 처리해 주께. 우린 다이몬이니까.”
한은 그렇게 하라는 듯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자신이 저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다이몬에서 해 주는 것이 훨씬 더 깔끔할 테니까.
세키나는 저들을 아서에게 넘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감옥 내 부조리로 악명이 높은 놈이니 저놈들도 알아서 잘 캐내 줄 수 있겠지.
“어쨌든.”
세키나는 한을 가리키며 말했다.
“넌 여기 계속 살아야게써.”
한은 시선을 떨어뜨리며 낮게 웃었다.
그래도 될까, 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된다,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곳은 다이몬 백작령. 변경백의 칭호를 빛내고 있는 북부 최전선.
백작가가 친히 자신을 보호해 주겠다는데 거절할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한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럼 감사하지.”
“그래! 넌 내게 승마를 가르쳐야 한다!”
“내게도 알려 줘야 한다.”
“알았어, 쌍둥이들. 이 형아가 다 알려 줄게.”
키득키득 웃으며 대답하는 한에게 세키나는 작게 속삭였다.
“난중에 부르면 와. 몰래.”
한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이 어린애들 사이에서 가장 어려 보이는 아이.
그런데 개중 가장 상황판단 능력이 뛰어나 보인다.
‘흐음.’
쌍둥이도 만만찮았는데 그보다 더한 애가 나타나다니. 이거 참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말을 툭 던졌다.
“백작님 얼굴이 궁금하네. 자식들을 이렇게 잘 키워놓고 말이야.”
그러자마자 아이들의 표정이 싹 굳었다.
“안 될걸.”
“너, 백작님 보면 죽는다.”
“응. 바로 죽어.”
“…….”
뭐, 보면 돌이 된다는 괴물 메두사라도 돼?
한은 식은땀을 흘리며 피식피식 웃었다.
그리고,
드한은 그런 그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아. 개피곤해.
캘빈에게 인간들을 넘긴 세키나는 하암 하품을 하며 눈을 찡그렸다.
잠깐 나와서 드한만 보고 들어가려던 계획이 아주 야심 차게 실패했다.
다 저 쌍둥이 때문이었다.
‘들어가면 패준다…….’
후우. 세키나는 숨을 몰아쉬며 뻐근한 어깨를 돌렸다.
“더, 덕분에 조, 좋은 시간 보냈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그리고 인사하는 유리엘을 쳐다보았다.
“전 암것도 안 했눈데여, 멀.”
“그, 그래도…….”
머뭇거리던 유리엘은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치며 세키나에게 말했다.
“아! 저희가 이곳에 다시 올 때 고양이를 데리고 올 거예요!”
그걸 왜 말하지? 세키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여, 영애도 고양이를 키운다고 해, 해서…….”
“아.”
캘빈 놈이 유리엘에게도 고양이 이야기를 한 모양이다. 세키나는 피식 웃었다.
“넹. 기대하께여.”
“……네!”
주먹을 꽉 쥐며 대답하는 유리엘을 뒤로 하고, 세키나는 드한을 쳐다보았다.
“나 간다. 다음에 바. 오늘 고생해써.”
드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러다가 갑자기 뒤돌아 가려던 세키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세키나 님.”
엥. 뭐야.
세키나는 눈을 깜빡이며 드한을 쳐다보았다.
“세키나 님은 세계가 당신을 위해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으십니까?”
오늘, 세키나는 정말로 대단했다.
자신은 앞뒤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 하고 달려들다가 얻어맞기나 했는데, 세키나는 그 거한들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열심히 송곳을 휘둘렀다. 그러면서도 정보를 쏙쏙 빼내고, 쌍둥이를 다루고, 한이라는 암살 길드의 무서운 사람까지도 제 편으로 만들었다.
이 모든 게 드한에게는 정말 대단해 보였다. 세키나야 말로 세계의 사랑을 받는 존재 같았다.
“아까 제게 물어보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그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했고요.”
“으응. 그치?”
“그런데 세키나 님은요?”
드한은 다시 한번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세키나는 조금 당황했다.
드한이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너는 이 게임의 주인공이라고요. 세계의 주인공은 바로 너. 난 아니고.
“나는…….”
난처해지는 바로 이때.
띠링!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SYSTEM]
저는 당신만을 위한 시스템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