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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님이 만드는 파멸엔딩 (73)화 (74/149)

73화

15. 딱히 죽이고 싶은 건 아니야

휘이잉.

바람이 불어온다.

설산의 눈을 싣고 날아온 바람은 세상의 바닥을, 세상의 인간을, 세상의 만물을 훑다 결국 하늘로 솟구친다.

마왕성의 첨탑.

북부의 바람을 모조리 모으고 있는 바로 그곳에, 르카이츠가 앉아 있다.

르카이츠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이몬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영지를 내려다본다. 다이몬의 이름을 달고 있는 영지를 관찰한다. 다이몬의 이름을 초석으로 쓰고 있는 영지를…….

이곳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나의 것은 여기에 없다.

나의 것은 이미 사라졌고, 사라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에 르카이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힘을 빼앗기고, 마계를 빼앗기는 와중에도 그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르카이츠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청명함과는 거리가 먼 뿌연 하늘을 올려다본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하늘은 르카이츠에게 더한 갈증을 내려주었다.

“여기 계셨습니까. 한참 찾았습니다.”

갑작스러운 목소리였지만 르카이츠는 놀라지 않았다.

그는 대답 대신 제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 1장로, 노딜 다이몬을 쳐다보았다.

“이 늙은이를 이렇게 고생시키시면 어떡합니까. 언제 가나 모를 몸인데, 최대한 아껴주셔야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군.”

르카이츠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이 안 된다니요. 며칠 내 날이 궂다고 무릎이 아파서 혼났습니다.”

노딜은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르카이츠의 눈치를 살폈다. 오랜 시간 르카이츠의 곁을 지켜온 그였기에 르카이츠의 눈만 보아도 심리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은 꽤나 혼란스러워하고 계시는군. 노딜은 씁쓸한 미소를 내뱉었다.

“혹시, 보셨습니까?”

“무엇을?”

“아이들이 영지에서 뛰어놀고 있던 것을요.”

아이들, 이라 하면 호문쿨루스를 말하는 걸 테다. 이를 알아챈 르카이츠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잘 컸더군요.”

애초에, 노딜은 호문쿨루스를 만드는 것을 반대했다.

마족도 충분히 자존심을 억누르고 인간 사회를 배운다면 인간과 어울릴 수 있다면서.

하지만 다른 장로들은 반대했다. 르카이츠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족은 지극히도 이기적인 종족. 결코 인간들과 어우러질 수 없다.

분명 주머니 속 송곳처럼 툭 튀어나오게 될 테고, 마족임을 들킬 것이다. 그런 위험부담은 애초에 버리는 게 나았다.

그래서 호문쿨루스가 만들어졌고, 노딜은 그들을 자신의 아이가 생긴 것처럼 돌보려 했다. 거기까지는 르카이츠도 눈을 감아 주었다. 다만 문제는 폐기되는 호문쿨루스가 생기면서부터이다.

노딜은 호문쿨루스도 생명이니 그들을 죽이면 안 된다는 입장이었고, 반대하는 장로들은 그렇게 따지면 마물도 생명이고 인간도 생명일지언대 당신은 무엇이 그리 떳떳하느냐 주장했다.

결국 노딜은 포기했고, 성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더 이상의 관여는 하지 않는 게 모두에게 좋겠다면서.

이런 노딜이 의견을 낸 것은 세키나라는 호문쿨루스가 생기면서부터이다.

세키나를 지지하겠다는 성명.

이는 단순히 세키나 하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노딜이 다시 호문쿨루스를 보호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르카이츠는 기나긴 한숨을 뱉으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노딜.”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들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버리실 생각입니까?”

“나는 나의 것을 지키기에도 벅차다. 여기서 더 늘릴 수 없어.”

이미 많은 것을 잃었다. 수많은 마족을 잃었고 마계를 잃었다. 앞으로 계속 잃을 일만 남은 상황에서, 지켜야 할 것을 늘릴 수 없었다.

그래. 르카이츠는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지키지 못할까 봐, 버거울까 봐.

“마왕님.”

노딜은 그런 르카이츠를 쳐다보며 쓰게 웃었다.

“선대께 물려받은 것이 아닌, 마왕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것이 있었습니까?”

“…….”

“이제는 진짜 마왕님의 것을 만들 때입니다.”

르카이츠는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나의 것, 을 만들라고.

내 것인 줄 알았던 것을 다 빼앗긴 상황인데 여기서 무엇을 더 하겠는가.

“쓸데없는 소리를 해.”

르카이츠는 더 설전을 벌이는 것보다 자리를 피하는 것을 선택했다.

뒤돌아 내려가려는 르카이츠를 향해 노딜이 말했다.

“다시 설산으로 가실 겁니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가서 마물을 죽일 것이다.

새 발의 피라는 것을 안다.

마계에 더 많은 수의 마물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했다. 마계를 지켜내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설욕이었다.

“마왕님을 도울 아이가 있을 겁니다.”

노딜은 멈칫거리는 르카이츠를 향해 말했다.

“혼자 이겨내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바람이 분다.

더 높이, 높이, 하늘까지.

치솟는 바람을 느끼며, 르카이츠는 자리를 떠났다.

***

“야. 고양아.”

방으로 돌아온 세키나는 곧바로 고양이를 찾았다.

“넌 환수자나. 환수면은 따른 애들보다 오래 살았꼬, 듣는 것뚜 많코, 아는 것도 많치? 넌 위대한 존재니까. 그치?”

눈을 번뜩이는 세키나를 보며 고양이는 털을 곧추세웠다.

-……갑자기 왜 이러느냐?

그간 캘빈에게 저를 맡기고 가끔씩 놀아주기만 했던 세키나가 아니었는가. 그런데 이렇게 눈을 희번득하게 뜨며 달려오니 섬찟했다.

세키나는 그런 고양이를 보며 씨익 웃었다.

“이게 먼지 아라?”

그리고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개다래나무야.”

고양이가 환장한다는, 개다래나무.

시장을 샅샅이 뒤져서 구해왔다.

“이거 만지고 싶찌? 비비고 싶어서 죽게찌?”

고양이의 꼬리가 팍 솟구쳐 빳빳해졌다.

-내놔라악!

“내 질문에 대답해 주면 주께.”

-빨리, 빨리! 내놔악!

발버둥을 치는 고양이를 내려다보며 세키나는 기세등등하게 웃었다.

“대륙 남쪽에서 유명한 암살 길드를 알구 이써?”

한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자신이 기억하지 못할 뿐 게임 내용에 있으리라 생각했다.

어차피 설정집을 보면 나올 거라 판단해 더 캐묻지 않았던 것도 있다.

그런데 설정집을 아무리 뒤져봐도 그런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설정집이 일부여서 그런 건가? 아니, 그러기에는 남부 대륙에 대한 설명이 있는 페이지가 있었다. 보통이라면 거기 적혀 있어야 했지만 내용이 없었다.

이는 다시 말해 게임 내에서 언급된 정보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 세키나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다.

단 하나,

스스로를 ‘위대한 존재’라고 칭하며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이 고양이의 머리를 터는 것 빼고.

“빨리 말해 바. 말하면 주께.”

-잠깐! 생각하고 있다!

“5초 안에 말 안 하면 이거 불태우 꺼야. 하나, 둘…….”

-하, 하이럼!

고양이는 재빨리 소리쳤다.

-하이럼이다! 분명! 지금은 없지만 옛날에 있었어!

“하이럼…….”

-말했으니 내놓거라! 어서!

개다래나무를 던져 준 세키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팔짱을 꼈다.

길드명을 들어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그래서 다시 고양이에게 물어봤다.

“걔네가 머 했는지 알고 이써?”

-아웅, 너무 좋다. 냄새가 좋다. 기분이 좋아진다.

“너 대답 안 하면 뺏눈다.”

-가만히 둬라!

고양이는 캬악 하악질을 하며 개다래나무를 꽉 껴안았다.

-그놈들이 한 짓…….

잠깐 기억을 더듬는 듯 머뭇거리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황제를 암살하려 했다.

세키나는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귀를 한 번 후벼 본다.

“……머라고? 황제?”

-그래. 그러다 애꿎은 황태자를 죽였어. 그 뒤로 추적을 피해 뿔뿔이 흩어졌다고 알고 있다.

“황태자를 주겼다고? 진짜?”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느냐?

“오…….”

어쩐지 엄청난 걸 물어 버린 느낌이다. 세키나는 히죽히죽 올라오는 입꼬리를 간신히 잡고 다시 물었다.

“그럼 그거, 누가 사주한 건지는 아라?”

-그걸 알고 있는 놈들은 다 죽었다.

“오호라.”

한이 도망친 이유.

그리고 한을 북부까지 쫓아오는 인간들.

모두 다 한 가지의 답을 말해 주고 있었다.

“개중에서 안 죽은 넘 하나 있는 거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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