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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님이 만드는 파멸엔딩 (88)화 (89/149)

88화

시스템창의 내용을 읽자마자 세키나의 시야가 암전되었다.

그리고 사지가 결박된 듯이 손발을 움직일 수가 없어졌다.

하지만 정신만큼은 또렷했다. 마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환영만 지켜보라는 듯이 말이다.

그래서 세키나는 두 눈을 똑바로 뜬 채로 휙휙 장면이 바뀌고 있는 환영을 올곧이 직시했다.

첫 번째 장면은 전쟁이었다.

전쟁의 선두에 선 이는 세키나가 잘 알고 있는 존재, 마왕이었다. 그는 얼마 전 던전에서 발견했던 창을 높이 든 채 앞서 달려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마왕의 창에 찔려 하늘 높이 들어 올려진 존재가 있었다. 피에 절어 있는 금발을 축 늘어뜨리고 있는 그는 세키나가 모르는 얼굴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키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루치페르.’

그리고 다섯 번째 삶에서 세키나를 구렁텅이 속으로 밀어 넣고 짓밟았던 존재.

‘흑마법사.’

이를 인지하자마자 장면이 바뀌었다.

세키나의 첫 번째 삶, 이곳이 게임 속 세상인 줄도 모르고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살다 드한의 연인이 되어 죽었던 때.

세키나는 죽어있는 자신의 시체와, 제 시체를 끌어안으며 엉엉 울고 있는 드한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제삼자의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는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방금 전 장면에서 보았던 루치페르가 곁에 서 있던 것이다.

루치페르는 그녀의 죽음을 확인하자마자 비죽 웃으며 드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엉엉 울고 있는 드한은 그의 존재를 아예 느끼지 못한 듯했다. 그리고 루치페르의 손이 드한에게로 뻗어진다.

그와 드한이 맞닿게 되려는 바로 그때.

세계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방해 전파를 받은 것처럼 지지직거리며 세계가 뒤엉켰다. 분노하는 루치페르의 얼굴을 끝으로, 두 번째 장면이 끝이 났다.

그 뒤로 세 번째 장면, 네 번째 장면, 다섯 번째…… 내내 똑같은 내용이 나왔다.

환생 회귀한 세키나가 죽고, 드한이 슬퍼하고, 루치페르가 이번에야말로 성공이라며 웃다가 결국 세계가 무너지고…….

이 환영은 내게 뭘 알려 주려는 걸까. 무슨 뜻을 담고 있는 걸까.

세키나는 장면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생각에 빠졌다.

그때였다.

띠링!

[SYSTEM]

‘루치페르 아가토’는 천마 전쟁에서 패배해 죽었습니다.

하지만 ‘흑마법’을 이용해 다시 살아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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