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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님이 만드는 파멸엔딩 (89)화 (90/149)

89화

18. 찾았다, 봉 4호!

마왕, 르카이츠는 깊은 고민에 빠져있다.

마계의 주인인 그가, 혼돈을 부르는 존재인 그가, 불변하는 존재인 그가 고민하고 있는 것이라면 틀림없이 심상찮은 일이리라.

르카이츠는 깊은 한숨을 뱉으며 두 손을 깍지 껴 이마에 대었다.

아무리 생각을 곱씹어 보아도, 아무리 고민을 해 보아도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르카이츠는 재차 한숨을 뱉으며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시야에 마르틴의 멱살을 잡고 있는 리아트가 들어왔다.

“아니, 이 빡대가리 놈아! 세키나한테는 그런 게 안 어울린다니까!”

“나, 똑똑하다. 빡대가리라고 하는 리아트가 더 멍청하다. 세키나에게는 이게 최고다.”

“아니라고! 세키나에게 잘 받는 색이 뭔지도 모르면서!”

“세키나는 뭐든 어울린다.”

르카이츠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려 천장을 쳐다보았다.

이 새끼들은 왜 내 앞에서 호문쿨루스의 옷에 대해 설전을 펼치고 있는 거지.

혹시 내가 뭘 잘못했나. 그래서 이 새끼들이 일부러 이런 난리를 피우는 건가.

르카이츠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마왕님! 마왕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나는 핑크색이 좋다.”

“아! 아니라고!”

하지만 이건 현실이었다.

고작 호문쿨루스 어린아이에게 입힐 옷을 고르기 위해 멱살 잡고 싸우는 고위 마족이 있는, 이게 바로 현실이라는 말이다.

르카이츠는 또다시 한숨을 길게 뱉으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대체 그걸 왜 고민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아무거나 입혀서 내보내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아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럴 수 없지요! 세키나 님이 수도에 가실 때 입는 건데! 북부 촌놈이라고 무시당하면 어떡합니까!”

“마왕님, 너무 안일하다. 매정하다.”

“…….”

마왕으로서의 내 위엄은 어디 간 것일까.

얘네 분명히 나한테 충성을 바치지 않았나.

살짝 서러워지려고 하네……. 르카이츠는 관자놀이를 꾹꾹 지압했다.

“이번에는 정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황태자 살해 사건의 진상을 밝히러 가는 것이니까요.”

“한인가 뭔가 하는 인간이 잘 알아보았다.”

그렇다.

세키나가 한에게 맡긴 ‘황태자 죽음에 대해 알아 와라’는 일에 대한 진척이 보이는 와중이다.

황태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흑마법이 얽혀있다는 심증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흑마법에 대해 알아내면 루치페르를 추적할 수 있고, 그를 찾게 되면 그의 목적과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될 테니까.

또한 봉인된 마왕의 힘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세키나의 수도행을 격렬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옷의 색깔로 싸우고 있는 건 이상하긴 하지만, 어찌 됐든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 호문쿨루스가 무엇을 입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그곳에 가 무엇을 알아낼 수 있느냐는 거지.”

르카이츠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이제껏 이것저것 옷을 고르며 신나 있던 리아트와 마르틴이 조금 차분해졌다. 여기서 더 했다간 마왕님이 정말 화를 낼 수도 있었으니, 자중하는 게 맞았다.

크흠. 리아트는 헛기침을 뱉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루치페르 놈이 뭘 계획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되면 참 좋을 텐데요.”

“계획, 짐작 간다.”

마르틴이 말했다.

“다시 천마 전쟁 일으킨다. 그놈은 분명 그럴 거다.”

“하지만 천족들은 그때 거의 죽었는데?”

“죽은 루치페르도 살아났다.”

“그건 그렇지만…….”

리아트는 미간을 좁히며 고민에 빠졌다.

제아무리 호문쿨루스에 빠져 있는 마족이라 해도 어쨌거나 그들은 마왕군의 주축이 되는 이들. 그 무엇보다 마왕의 안위와 마계의 존속에 사활을 걸고 있는 이들이다.

“단서가 하나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리아트의 힘없는 중얼거림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바로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르카이츠는 눈을 가늘게 뜨며 닫혀 있는 방문을 노려보았다.

자신의 방에 함부로 찾아올 만한 이가 없는데, 누가 온 것인가? 르카이츠는 한쪽 눈을 살짝 찡그렸다.

“들어와라.”

그러자 문이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율리안의 얼굴이 보였다.

“율리안 님?”

리아트가 눈을 크게 올려 떴다. 그 역시 율리안이 마왕의 방까지 온 것이 당황스러운 모양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여기까지?”

“어, 음…… 그게요.”

율리안은 눈치를 살피며 방 안으로 한걸음 발을 내디뎠다.

“그, 세키나가 가져온 걸 운반해야 해서요.”

가져온 것?

운반?

무슨 말이지?

마왕과 마족 둘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때에, 율리안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마자 방 한 가운데에 얼음덩어리가 쿵! 내려왔다.

느닷없이 얼음덩어리? 대체 무슨 생각…… 어?

“……어?”

“어어?”

마르틴조차 몸을 벌떡 일으켜 얼음덩어리로 다가갔다.

리아트와 마르틴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투명한 얼음은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보여 주었으니까.

이 안에 있는 건…….

“고거, 루치페르의 시체예여.”

마왕의 창에 가슴이 뚫려 죽었던 그 모습 그대로 냉동돼 있는 루치페르의 시체였다.

……단서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이건 과한데.

리아트와 마르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세키나가 루치페르의 시체를 가져온 이유는 단 하나다.

시스템을 엿 먹이기 위해서.

이제까지 시스템은 세키나를 도왔다. 하지만 그 도움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세키나는 시스템이 자신에게 감추고 있는 것이 많다고 생각했고, 그 감추는 것 중 일부에 자신의 ‘환생 회귀’가 포함돼 있노라고 확신했다.

만약 시스템이 모든 상황을 다 설명해 주고 세키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면 세키나는 기꺼이 그를 도와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스템은 그러지 않았다. 투비컨티뉴고 나발이고 장난을 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세키나는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결심했다. 모든 걸 알아낼 거라고, 저를 둘러싼 이 거지 같은 상황들을 파악할 거라고. 그러고 난 뒤에 시스템에게 주먹을 꽂아줄 거라고.

루치페르의 시체는 그 과정의 곁가지다.

세키나는 이걸 봐도 아무 생각이 없다. 자신과 싸운 놈이 아니고, 저를 괴롭혔던 흑마법사의 얼굴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마족들은 어떨까?

마왕은 어떨까?

그들은 이 시체를 보고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세키나는 마물을 이용하면서까지 땅을 파서 시체를 가지고 온 것이었다.

세키나는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얼음 주변에 모여있는 리아트와 마르틴을 쳐다보았다.

“이 뻔뻔한 낯짝 다시 보니까 또 죽이고 싶은데, 제가 이상한 걸까요?”

“한 번만, 더 때리고 싶다.”

그들은 주먹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역시, 세키나의 짐작이 맞았다. 시체를 보자마자 이렇게 반응하다니.

뭔가를 더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세키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반짝였다.

그때였다.

“우웅?”

갑자기 세키나의 몸이 둥둥 떠올랐다.

졸지에 뒷목이 잡혀 허공에 뜨게 된 세키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제게 마법을 쓴 마왕을 쳐다보았다. 마왕, 르카이츠는 평소보다 더 심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그…… 화났나?

내가 잘못했나?

세키나는 살짝 당황했다.

“너.”

르카이츠는 세키나를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숨 참아라.”

그게 무슨 말…… 이냐 묻기도 전에 엄청난 마기가 폭발하듯 튀어나왔다.

세키나는 다행히도 천장 가까이 매달려 있는 덕분에 마기에 온전히 노출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피부가 따끔거리고 눈이 시큰했다. 인간의 몸으로 감당하기에 버거운 마기 농도인 것이다.

이걸 알고 르카이츠는 세키나를 허공에 매단 것인가? 세키나는 놀란 눈으로 르카이츠를 내려다보았지만, 르카이츠는 얼음덩어리에만 시선을 고정할 뿐 세키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세키나! 괜찮으냐?”

“아기, 다쳤나?”

대신 리아트와 마르틴이 세키나를 안아 들었다.

그들은 세키나의 팔과 다리를 이리저리 펼쳐서 보다가 이내 괜찮다는 걸 확인한 뒤 한숨을 뱉었다.

“아니, 마왕님! 이렇게 만들 거면 미리 경고를 하셔야지요!”

“아기, 다칠 뻔했다. 큰일 날 뻔했다.”

그들은 꿍얼거리며 르카이츠에게 핀잔을 했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반쯤 녹은 얼음덩어리를 지그시 내려다볼 뿐.

얼음덩어리 속에 있는 시체를 보았을 때, 르카이츠는 그놈의 분신이겠거니 생각했다. 그 영악한 놈이 북부의 빙벽에 제 몸을 감출 리 없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이것은 그놈, 루치페르가 맞았고, 더 나아가 그놈 특유의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 말인즉슨,

“아직 그놈과 연결돼 있다.”

이 몸을 자극하면 그놈도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는 뜻.

“재미있게 됐어.”

르카이츠는 씨익 입꼬리를 찢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어디 한번 고문을 시작해 볼까.

르카이츠의 붉은 눈동자가 사납게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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