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신전에는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전설이 있다.
태초의 신께서는 인간을 너무나도 아끼고 사랑해 그들을 보호하기로 결정했고, 그래서 중앙대륙에는 인간만 살 수 있게 만들었다.
다만 다른 세계의 존재에게까지는 자신의 힘이 닿지 않으니 그들을 조심하라 일렀다. 그 존재가 바로 마족이다.
마족은 이따금씩 세계를 넘어와 인간을 학살했고, 농락했다. 그 까닭으로 마족은 모든 인간들의 적이자 악이었다.
다행인 건 세계를 오가는 것에는 매우 큰 힘이 들므로 마족들은 마계에서, 인간들은 인간계에서 산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마족이라고?’
드한의 턱이 덜덜 떨렸다.
처음 다이몬 백작가를 의심하기 시작했던 건 교황이었다.
교황과 신전은 북부에서 불순한 기운이 느껴진다며 다이몬 백작가를 예의주시했다. 그 명령에 따라 유리엘과 드한은 백작가의 주변을 살폈다.
그때까지만 해도 드한은 백작가의 일원들이 마족, 혹은 마족과 가까운 무엇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일까?
그들이 자신을 구해 주었을 때부터?
신께서 저버린 생명을 거두어 주었을 때부터?
눈덩이처럼 꽁꽁 뭉쳐져 있던 의심은 따뜻한 친절 한 번에 사르르 녹아 없어졌고, 어느 순간부터 드한은 그들을 ‘마족’이라 의심하는 것 대신 ‘생각보다 다정한 사람들’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랬기에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정말…… 마족이었어.’
벽을 타고 주르륵 내려앉은 드한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2년 전, 마을이 멸망했을 때가 떠오른다.
천애 고아였던 자신을 돌봐 주던 어른들, 그런 자신과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 아낌없이 베풀어 주었던 형 누나들.
모두가 죽어 나갔던 그 순간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들은 어떤 목적이 없었다.
마을을 약탈해 물자를 빼앗아간다거나 하는 그런 행위조차 하지 않고, 그저 죽이기만 했다.
어른들을, 형 누나들을, 친구들을.
그렇게 모두가 죽어 나간 피의 땅 위에 살아 있는 건 드한뿐이었다.
그는 왜 자신이 살아남았는지 알지 못했다.
그 이유를 고민할 틈 자체도 없었다.
일단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 한다는 생존본능만을 품은 채 살아남았다.
그런 그에게, 신관은 말했다.
-마족이란다.
-이런 극악무도한 짓을 벌일 존재는 마족밖에 없지.
그때부터 드한은 마족을 경멸했다.
종자 신분에서 벗어나 어엿한 신관이 되면 성기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모든 마족을 섬멸하기 위해서.
그런데…….
‘어떡하지?’
자신이 죽여야 하는 명확한 존재가 바로 눈앞에 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이미 사르르 녹아 없어진 눈덩이처럼 흐려진 의심은 그에게 살의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더군다나 세키나는…….
드한은 질끈 눈을 감아 내렸다.
이래서는 안 된다.
아니, 뭐가 맞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렇게 혼자 끙끙 앓고 있을 수는 없다…….
드한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유리엘 님.’
그를 찾아가 답을 구하면 되리라.
그렇게 판단을 내린 드한이 서둘러 숙소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바로 그때였다.
“어딜 가려고요?”
익숙한 목소리.
아서였다.
드한은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다정다감한 음성이라고 생각했던 지난 시간과는 달리, 지금은 지나치게 날카로우며 소름 끼치기만 했다.
마족임을 알았기 때문일까.
드한은 등 뒤로 감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얼굴이 희게 질렸네요. 이러다 쓰러지면 어떡하려고.”
그런 드한에게 천천히 다가온 아서는 생긋 웃으며 드한의 어깨를 붙잡았다.
“저랑 잠깐 얘기 좀 할까요?”
***
르카이츠는 눈을 똘망똘망하게 뜬 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세키나를 향해 헛웃음을 뱉었다.
처음 보았을 때까지만 해도 세키나는 겁에 질린 어린양과 같았다. 저의 마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 버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전에 세키나를 만났을 때보다는 마기를 줄여 대하고 있긴 하지만 그러해도 충분히 무리가 갈 텐데, 세키나는 아무 일이 없다는 것처럼 굳건하게 두 다리로 서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신기하군.’
이 호문쿨루스는 대체 무엇이 다르기에, 이렇게 신선한 모습만 보여 주는 것일까.
그리고 이 호문쿨루스는 대체 무엇이 다르기에…….
‘우리와는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걸까.’
르카이츠는 마족들이 이기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 역시 그러한 태도로 살아왔으니까.
하지만 인간계에 내려온 지금. 인간들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있는 지금.
르카이츠는 마족들에게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인간들은 아무 이유 없이 서로를 돕는다. 아무 이유 없이 곳간을 열어 주는 경우도 있고, 아무 이유 없이 적선을 할 때도 있다.
물론 인간들 역시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를 죽이거나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기저에 깔려 있는 이기심의 척도는 마족과 차원이 다르다.
마족은 전쟁 중 곁에 있던 이가 죽더라도 낄낄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였으니까.
그래서 천마 전쟁에서 그토록 많은 수의 피해자를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추후 또 루치페르와 대립해야 하는 때까지 뭔가의 변화를 가져야 한다고도 생각이 들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힐끗, 르카이츠는 세키나를 내려다보았다.
‘이 호문쿨루스가 필요할지도 모르겠군.’
세키나를 중점으로 마족들이 서서히 바뀌고 있으니 말이다.
르카이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목숨을 바쳐 다른 이들을 구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라.”
세키나가 말한 계획.
마계 연결 통로를 연 후 블랙 스피넬을 이용해 마기를 담아 나오자는 것.
그렇게 마기를 반출해 마족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엄청나게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들 모두 물 한 모금 못 마신 채 사막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느낌일 테니까.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고려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세키나의 안전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물들은 세키나를 끌고 가려 했다.
그들에게 붙잡힌다면, 그래서 마계로 끌려가게 된다면 세키나는 결코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
아마 죽게 되겠지.
호문쿨루스의 죽음 따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르카이츠였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달라져야 했다.
르카이츠는 세키나를 똑똑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죽음은 내가 막아 주겠다.”
“…….”
헐.
뭐야.
세키나는 팔뚝에 돋은 소름을 쓸어내리며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갑자기 왜 이래? 뭐 잘못 먹어서 아픈가?
그간 냉랭하다 못해 얼음장 같았던 마왕이 이런 말을 하다니.
“그, 갑짜기 왜여?”
세키나는 의심을 지우지 않은 얼굴을 들어 올렸다.
“절 막 이용한다거나 구런 뜻인가여?”
르카이츠는 헛웃음을 뱉었다.
“네가 쓸모있는 것 같아 한 말이다.”
그러고는 툭, 아무렇지 않게 말을 뱉었는데 세키나는 그에 깜짝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쓸모’를 인정받은 거였으니까!
그전까지만 해도 세키나는 막연한 짐작만 있을 뿐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막연히 ‘내가 필요하니 안 죽이겠지?’ 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었단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쓸모가 있다’고 말해 주다니!
‘이제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돼!’
세키나는 꺄르륵 웃으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구거, 제가 조타는 말인가여??
그러고는 르카이츠의 주변을 뱅뱅 돌았다.
“제가 기여워 보인다는 뜻? 예뿌다는 뜻? 지켜주고 시픈 보호본능을 일으킨다는 뜻?”
“…….”
“절 엄청나게 아껴 주겠따는 뜻?”
살아생전 처음으로 들어 본 말에, 르카이츠는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