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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님이 만드는 파멸엔딩 (107)화 (108/149)

107화

“……소멸이여?”

세키나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고 싶어 반문했다. 하지만 르카이츠의 변함없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저가 들은 게 제대로 된 것 같았다.

“그래. 소멸.”

르카이츠는 으드득 이를 갈았다.

“그 개자식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신.

그놈의 신.

그 때문에 입은 피해를 말하자면 나흘 밤낮을 지새워도 모자랄 것이다.

신은 스스로를 모두의 어머니라고 칭했으나 마족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진정한 어머니라면 그들이 위험에 닥쳤을 때에 손을 뻗어 주어야 하지 않은가.

하지만 신은 그들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인간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행여나 인간들이 다치기라도 할까, 멸망하기라도 할까 언제나 전전긍긍하는 모습만을 보여 주었다.

신은 인간을 위한 존재일 뿐이다.

자신들과 같은 이종족을 위한 이가 아니라.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신은 자신의 기척을 지워 버렸다. 그 어디에서도 신을 찾을 수 없었다.

르카이츠는 신이 드디어 이 세상을 떠나 버린 것인가, 싶었지만 그놈이 인간들에게 보여 주었던 경이로운 사랑을 떠올리며 그건 아닐 것이라 확신했다.

그렇다면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것인데, 왜?

르카이츠는 신을 찾을까 고민했었지만, 자신의 힘을 되찾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으므로 잠시 뒤로 미뤄두었다. 그러기를 수년이었다.

그러다 지금. 바로 이 순간.

신의 기척을 느낀 것이다.

르카이츠는 등줄기를 따라 돋은 소름을 가라앉히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너는 그 기운이 익숙해 보이던데.”

그는 덜덜 떨고 있는 세키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게 숨기는 것이 있느냐?”

세키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시스템과 르카이츠가 이렇게 사이가 나빴단 말인가?

‘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니, 애초에 신의 존재를 르카이츠가 알고 ‘사이가 나쁘다’고 표현할 만큼 상호 교류가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세키나는 조심스레 르카이츠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골랐다. 여기서 말을 잘못했다간 자신과 시스템과의 관계가 들킨다.

단지 그것뿐이면 대충 둘러대기라도 할 텐데, 그것도 아니다.

자칫하단 자신이 여러 번의 환생 회귀를 했다는 걸 들킬 수도 있고, 그러다가 인간이라는 것까지 알려질 수도 있다.

‘내가 인간인 걸 알면…….’

이제껏 뭘 해내 왔든 죽게 되겠지.

당연한 일이다.

그냥 인간이라는 것만으로도 죽을 만한데, 마족들에게 감쪽같이 사실을 숨기고 젠체하며 살았었으니까. 세키나를 예뻐하던 마족들은 큰 배신감을 느낄 것이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생각하니 돌연 씁쓸해졌다. 이번 생에서야 그나마 평범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 모든 게 거짓말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니.

‘후우.’

씁쓸한 마음이 올라오려는 걸 빠르게 흩뜨린 세키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고 있는 르카이츠와 시선을 맞댔다.

“업써여.”

세키나는 단호히 말했다.

“저눈 보쓰의 부하인데, 보쓰한테 숨기는 게 이쓰면 안 대져.”

숨기는 거 오지게 많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말했다간 뭔 일이 터질지 모르는데. 일단 잡아떼는 게 상책이다.

“신의 기운이건 머건, 저는 진짜 몰라여. 갑짜기 상황이 그러케 대버린 걸 어캐여.”

르카이츠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비틀린 입꼬리에서 차마 숨기지 못한 경멸이 묻어 나온다.

“나는.”

그는 세키나의 두 눈을 올곧게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멈춰 있던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라 생각했다.”

“…….”

“그토록 이기적이고 저들밖에 모르는 마족들을 변화시킨 것이 바로 너니까.”

세키나는 침묵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키나 역시 일정 부분 동의하는 부분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세키나는 더더욱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자신은 이들에게 너무나도 많은 거짓말을 해 왔으니까.

거짓말로 인해 얻어낸 호의…… 이를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 변화가 거짓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

“너는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세키나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이번에야말로 평범한 애정을 받고 싶었는데, 그조차도 불가능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

세키나가 르카이츠에게 납치를 당한 후, 유리엘은 방 안을 초조하게 배회했다.

세키나가 휙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아니.

한이라 불린 저 남자가 가지고 온 상자 속의 물건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키나가 했던 말.

-황태자의 시신이라 생각해떤 거는 황제여따는 말이야. 지굼의 황제는 황태자인 거구.

-요건 흑마법이야.

믿고 싶지 않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항변하고 싶다.

흑마법이라니! 황제 폐하가 이미 명을 달리하셨다니! 황태자 전하가 그것을 주도했다니! 말도 안 돼! 그건 아니야!

하지만 유리엘은 눈앞에 들이밀어 진 사실을 부정할 만큼 멍청한 이가 아니었다.

“하아…….”

유리엘은 긴긴 한숨을 내뱉었다.

“저, 저, 아, 아서 님.”

그리고 창틀에 기대앉아 먼 산을 보고 있는 아서를 향해 다가갔다.

“저, 저, 쉬시는데 죄, 죄송하지만…… 여, 여쭐 게 있습니다만.”

아서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는 무심한 시선으로 유리엘을 훑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씀하세요.”

꿀꺽. 유리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저, 정말…… 흑, 흑마법일까요?”

그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아, 아니…… 세, 세키나 님을 믿지 못하는 건 아, 아니지만, 이런 일이 생겼다면 교, 교황청에서 모, 모를 리가 없을 것 가, 같아서…….”

아서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신관님이 이미 결론 내린 생각이 있지 않나요?”

“네, 네?”

“교황청 역시 황실과 결탁했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

“아닌가요?”

유리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맞다.

아서가 말한 대로, 유리엘은 이제 교황청을 의심하고 있었다. 부정하고 싶어도, 이건 생각은 배덕하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해 봐도, 정황상 그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 그…….”

유리엘은 숨을 토해낸 후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사실이라면…… 교, 교황님도…… 시, 신관님들도…… 전, 전부? 전부 그, 그런 걸까요?”

“그건 모를 일이죠. 확인해 봐야죠.”

아서는 태연히 대꾸했지만, 유리엘은 갈수록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있는 중이었다.

“마, 만약 저, 정말로 교황청이 그, 그렇게 된 거라면…….”

그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며 눈을 올려 떴다.

“도, 도와주실 건가요?”

“…….”

얼마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유리엘은 초조한 낯빛을 한 채 아서를 응시했다. 아서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그런 유리엘을 직시하다가, 이내 재차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저희가 왜 그래야 하죠?”

유리엘의 두 눈이 커졌다. 하지만 아서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 그렇잖아요. 황실에서 우리를 대접해 주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겨우겨우 대접받으려 하니 교황청에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반대를 하고. 설마 기억 못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 그건……!”

이건 어디까지나 사실이다. 다이몬 백작가는 황실에서도, 교황청에서도 모두 다 견제를 받으며 세월을 보내왔으니까.

“우리를 도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이들을, 왜 저희가 도와야 한다는 거죠?”

“…….”

유리엘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물론 다이몬 백작가를 핍박하는 데에 자신의 지분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그 역시 다이몬 백작가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과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일정량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지금 그에게 도와달라 말을 하는 이 순간도 너무나도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

저가 힘이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강했더라면 이들에게 부당한 호의를 비춰달라 하지 않았겠지. 그리고 이들을 돌보았겠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은 나약한 인간일 뿐이고, 그렇기에 누군가의 도움으로써 함께 살아가야만 했다.

유리엘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고, 턱을 당겼다.

“아, 아이들을 위해서요.”

그는 한 글자 한 글자 최선을 다해 진심을 욱여넣으며 말했다.

“시, 신전은 아이들을 많이 보호하고 있어요. 그 아, 아이들이 자, 잘 살 수 있게, 어, 억울한 죽음을 겪지 않아도 될 수 있게…… 해야지요. 그, 그게 어른들의 역할이니까…….”

“…….”

“부, 부당한 대우를 바, 받으셨던 것은 꼬, 꼭 변상해 드리겠습니다. 사, 상황이 정리되면 반드시……!”

아서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리고 떠올린다.

자신의 아이들을.

세상의 그 어떤 존재보다 가장 사랑스러웠던 아이들을.

잠시 눈을 감은 채 지난날을 떠올리던 아서는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유리엘을 쳐다보았다.

“저도 아이가 있어요.”

“……네?”

“아이를 책임지는 건 어른들의 역할이죠. 그런 아이들을 죽이는 것도 결국 어른들이지만.”

“그, 그건…….”

“그래도 노력은 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유리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 감사합니다……!”

이렇게 설득이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역시, 다이몬 백작가는 정말 좋은 이들이다. 지난 시간 그들을 의심해 온 스스로가 너무나도 부끄러워졌다.

“다만 어떻게 해야 할지가 고민인데.”

그런 유리엘을 뒤로하고 아서는 팔짱을 낀 채 고민했다.

그때였다.

“해결 방법을 찾으신다묜 내가 알려 주는 게 인지상정!”

쾅! 하고 문을 박차며 뛰어온 세키나가 두 손을 허리춤에 올린 채 음하하 웃었다.

“세키나 님?”

깜짝 놀란 그들을 뒤로하고, 세키나는 부러 더 크게 웃으며 말했다.

“황실을 우리 편으로 만들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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