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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님이 만드는 파멸엔딩 (108)화 (109/149)

108화

황실을 우리 편으로 만들자고?

유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방금까지 황태자가 흑마법을 이용해 황제인 척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떻게 황실을 우리 편으로 만든다는 말인가?

유리엘은 지극히 당황했지만, 아서는 되레 멀쩡해 보였다. 그는 평소와 같이 평온한 표정으로 세키나를 대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세키나 님?”

“무쓴 말이긴. 우리 편으루 만들면 댄다는 뜻이디.”

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거지……? 유리엘은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아서는 익숙한 듯 으쓱 어깨를 올렸다.

“저희 같은 범인들은 그 말뜻을 잘 모르겠거든요. 그러니까 더 설명해 주시면 안 될까요?”

“흐음.”

세키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나를 애 다루듯이 하쥐?”

그야 애니까요……. 유리엘은 코를 훌쩍였다.

“머, 나는 똑똑한 애니까 설명해 줄 쑤 이찌.”

“와아. 우리 세키나 님 최고다.”

“영혼이 업써 보이는디.”

“착각입니다.”

세키나는 아서를 살짝 흘겨보다가, 이내 고개를 바로 하고 턱을 들어 올렸다.

“지굼 황실에는 3황자가 이써. 걔를 우리 편으로 만들면은 대.”

유리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그…… 3황자님은 어, 어리신데요……!”

“몇쌀?”

“여, 여덟 살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나눈 세 쨜인데.”

너도 충분히 어려……. 가끔 제 나이로 안 보이는 것뿐이지…….

유리엘은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삼켰다.

“걔가 몇 쌀이건 중요하디 않아. 중요한 거눈 3황자의 엄마가 황후라는 거디. 거기다 공작가 딸이구.”

세키나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3황자, 베니타의 어머니 다이애나는 아르디 공작가의 외동딸이다.

전대 황후가 죽은 이후에 황제와 결혼을 했기에 황제와 다이애나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그러나 황실과 혼약을 맺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었기에 다른 이들은 기뻐 축복해 주었다. 다이애나의 친가, 아르디 공작가를 빼면.

아르디 공작은 다이애나의 결혼 의사를 듣고 일주일을 앓아누웠다고 한다. 애지중지 키운 외동딸을 나이도 많고 성격도 더러운 황제 놈에게 보낼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결혼을 밀어붙였고, 그녀는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그게 벌써 10년 전의 일이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말이 있질 않은가. 그렇게 반대를 하던 아르디 공작은 어쩔 수 없이 다이애나의 편을 들어 주었고, 다이애나는 제국의 제일가는 여인 자리와 제국의 제일가는 가문의 비호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 3황자 베니타는 황태자가 되지 못했다. 전대 황후의 자식이 이미 황태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다이애나의 권세가 높다고 한들 황태자를 폐위하고 어린 베니타를 앉힐 수는 없는 노릇.

어쩔 수 없이 기회만 보고 있던 와중, 황태자가 죽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다이애나는 곧바로 베니타를 황태자로 즉위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황제가 허락해 주지 않았다.

불과 전날 밤까지 베니타의 즉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이가 말이다!

다이애나는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고, 결국 황제와 냉랭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정보를 종합해 본다면, 세키나의 말은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었다.

“황후도 느끼고 이쓸 걸. 황제가 이쌍하다는 걸. 하디만 그걸 어케 밝혀내지 몬 하니까 참고 있는 걸 꺼야.”

“흐음.”

아서의 눈이 반짝였다.

“황제가 사실은 황태자라는 증거를 주고, 그 대신 3황자와 황후의 손을 잡자?”

“구러치. 황제를 몰아내구 3황자를 황제로 세우는 걸루.”

“그렇게 되면 우리는요?”

아서의 질문은 ‘우리 같은 마족은 어떻게 되는 거냐.’이다.

세키나는 씨익 웃었다.

“우리눈 보다 편하게 돌아다닐 쑤 이께찌.”

지금처럼 황실에 치여 북부로 내쫓겨 있는 게 아니라, 수도에 들어올 때도 눈치를 보며 조심할 게 아니라, 당당하게 대륙 이곳저곳을 누비며 힘의 봉인을 풀고자 노력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서는 세키나와 비슷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은 생각 같습니다.”

그들은 서로 낄낄거리며 음흉하게 웃었다.

그때였다.

“이, 일단……!”

잠자코 듣고 있던 유리엘이 손을 번쩍 올리며 말했다.

“화, 황자님의 의, 의사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세키나와 아서의 미간이 좁혀졌다.

“머래.”

“뭐라는 겁니까?”

하, 그들은 콧방귀를 꼈다.

“당연히 황제가 대고 싶게찌. 황자로 태어났는디 칼도 못 뽑아 보다가 디질 거 아닌 이상.”

“그…….”

물론, 세키나의 말은 맞다. 본디 인간의 욕망은 끝을 모르고 하늘 높이 나아가는 것이니까.

하지만…… 세상에는 그러지 않은 인간들도 있다…….

“화, 황자 저하는…….”

유리엘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조, 조금 유, 유약한 분이십니다만…….”

세키나는 눈을 크게 뜨고 아서를 쳐다보다가, 다시 유리엘을 보며 물었다.

“너보다? 그럴 수가 있나?”

“…….”

사람 면전에서 그렇게 깎아내리는 거 아닙니다.

유리엘은 상처받은 마음을 부여잡으며 대답했다.

“그, 제, 제가 유, 유약하다 마, 말할 정도면 어, 얼마나 시, 심한지 아실 수 이, 있지 않으실까요.”

“어…… 음.”

“…….”

세키나는 눈가를 벅벅 긁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서와 세키나의 눈이 마주친다.

“그…….”

그들은 동시에 같은 말을 했다.

“다른 방법을.”

“따른 방법을 찾아보까?”

재빠르게 태세를 전환하는 그들을 보며 유리엘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그건 찰나였다.

아니, 이 사람들은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

“어머니!”

3황자, 베니타는 연푸른 머리칼을 한껏 휘날리며 황후, 다이애나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하지만 곧바로 들어가지는 못한다.

우아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는 다이애나의 맞은편에 다른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은 다이애나는 느긋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있을 때는 뛰지 말라고 하지 않았니.”

“어…… 아, 네. 죄송합니다……!”

베니타는 꾸벅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그리고 다이애나의 맞은편에 있는 숙부를 향해 인사했다.

“숙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예, 황자님. 여전히 기세가 좋으십니다.”

뼈가 담긴 말 같았지만…… 베니타는 애써 모르는 척을 했다. 다이애나를 다시 바라본다.

“그래. 무슨 일이니?”

다이애나의 감청색 눈동자가 베니타의 면면을 훑었다. 그 날카로운 시선에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지만, 떨쳐낸 그는 조심스럽게 다이애나에게 다가갔다.

“저어, 방금 정원에 다녀왔어요. 거기서 어머니를 닮은 꽃을 봐서…….”

그는 등 뒤에 숨겼던 화관을 꺼내 다이애나에게 내밀었다.

“이런 걸 만들어 봤어요.”

남색 국화와 물망초로 얼기설기 만든 화관이었다. 보기에는 형편없었지만, 아이가 어미를 생각해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만든 것이라 하면 감동을 받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다이애나의 입가에 야트막한 미소가 맺혔다.

“그래. 고맙구나.”

“……네!”

베니타의 양 뺨에 불그스름한 열이 올라왔다. 그는 기쁜 얼굴을 하고 있다가, 이내 다이애나와 숙부 사이에 놓인 차가 식지 않은 걸 보고 재빨리 말했다.

“그, 그럼 저는 돌아가 볼게요! 역사 공부를 할 시간이라……!”

“그래. 오늘도 열심히 하렴.”

“네!”

힘차게 대답한 베니타는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그런 아이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다이애나는, 손에 쥐고 있던 화관을 꽉 움켜쥐었다.

탁, 하고 문이 닫힌 순간.

“쓸모없기는.”

냉소적인 말과 함께 화관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쓸데가 없어.”

다이애나의 구두 굽이 여린 꽃잎을 짓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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