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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님이 만드는 파멸엔딩 (113)화 (114/149)

113화

흑마법의 흔적이 아닌, 흑마법 그 자체가 있다는 건 꽤 엄청난 일이다.

루치페르 이 미친놈이 신성한 신전에서 금지된 마법인 흑마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거니까.

‘돌겠네, 진짜.’

세키나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앞이 깜깜하군요.

네? 이게 제 미래라고요? 하, 젠장…….

“세키나 님?”

이때, 드한이 말을 걸었다.

“왜 그러십니까?”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드한을 보고 있자니 열불이 올라왔다. 세키나는 하아 한숨을 터뜨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넌 암 것두 몰라서 조케따.”

“네?”

“아냐…… 구냥 대가리가 꽃밭인 게 부러어 가디고.”

욕인데.

욕했는데, 지금.

졸지에 욕을 얻어들은 드한은 뺨을 부풀리며 세키나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세키나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를 대했다.

“근디 교황은 왜 너 부른 거래?”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드한은 언제 토라졌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일전부터 제게 관심이 있으셨던 것 같기도 하고요.”

세키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케찌. 당욘히 널 지켜보고 이써쓸 거야.”

“네?”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를 보며 세키나는 헛웃음을 뱉었다.

아니, 진짜 모른다고?

“왜 그케 놀라? 널 지켜보고 이써따는 거, 몰라써?”

“……네?”

“너는 왜 ‘네’밖에 못 해? 짱 나.”

드한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이제 말하는 것 가지고도 뭐라고 하네. 서러워서 살겠나, 진짜.

드한은 더더욱 토라진 표정을 한 채 입을 비죽거렸다.

“세키나 님이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만 계속하셔서 그렇습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흐음.”

세키나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사실, 드한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할 만하다.

우리가 마족이라는 걸 알게 된 것도 놀라운데, 거기다 더해 교황이 전부터 너를 노리고 있었다는 둥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둥…… 말을 하니 혼란스럽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말해 줄 수 있는 게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사실 여기는 게임 속 세상이란다. 너는 게임의 주인공이야! 주인공에게는 고난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너는 지금까지 개 같은 상황을 겪어온 거란다! 지금 등장하는 교황이 너를 조종하는 실체야!

……라고 말할 순 없지 않은가. 하하하.

세키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웅. 나도 몬라. 대부분 나두 모르디.”

그러고는 드한의 소매를 쭉 잡아당겼다.

“내가 알고 있눈 건…….”

그리고 홀의 정중앙 계단을 직시했다.

“지금 나오는 새끼가 아아주 나쁜 새끼라는 거디.”

새하얀 대리석 계단을 밟으며 내려오고 있는 이.

교황의 탈을 쓰고 있는 저자.

세키나는 루치페르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

루치페르는 이른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정확히 말하면, 나쁘지 않았다.

불쾌함을 느끼지 않고 눈을 뜨게 된 아침은 매우 오랜만이었으므로 그는 전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신전 곳곳을 돌아다녔다.

죽은 인간들에게 마물을 욱여넣어 살아 있는 송장으로 만들어 놓은 걸 구경하기도 하고, 그러다 결국 꽥 죽어 버린 인간들을 보며 깔깔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즐거움은 얼마 가지 않아 휘발되었다.

“쯧. 쓸모있는 것들이 없니.”

바로 죽어 나간 인간들 중 ‘천족의 그릇’이 될만한 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루치페르는 강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족 전체와 전쟁을 일으켜 승리할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아무리 마왕의 힘이 봉인돼 있고 마족들의 힘이 전과 같지 않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집요함을 잘 알고 있는 루치페르로서는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천족을 부활시켜 제 곁을 지키게 하고 싶었는데.

‘그릇, 그릇이라…….’

중앙선 신전에 있는 놈들이 하나같이 나약한 것인가? 제대로 된 놈이 없는 것인가? 그래서 이렇게도 그릇을 찾기 어려운 것인가?

‘그렇다면…….’

북부, 서부, 남부. 모든 곳을 더 뒤져 볼까.

루치페르의 붉은 혓바닥이 입술을 쓸었다. 신전을 더 뒤져 본다는 말인즉슨 그만큼의 신관을 죽인다는 뜻이었으니 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이란 말인가!

그는 다시금 상기된 기분을 느끼며 곁에 있는 이, 얼마 전 겨우 부활시킨 자신의 오른팔이자 책사인 버추스에게 명령을 내렸다.

“조만간 북부에 갈 거니 준비하렴.”

버추스의 노란 눈동자가 차게 식었다.

“그 북부…… 말씀이십니까?”

그는 살짝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곳에는 마족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

버추스의 걱정을 모르는 게 아니다. 하지만 루치페르는 그깟 것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아니, 신경을 쓰되 그런 놈들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고 당당히 외치고 싶었다.

“그러니 더더욱 가 줘야지. 가서 비웃어 주어야지! 승기를 잡았다 생각하고 나태하게 굴었던 놈들 앞에 당당히 서 주어야지. 그리고 말해야지. 너희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이야!”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그 르카이츠 놈의 얼굴에 절망이 깃드는 것을, 그 건방진 마족들이 하나하나 죽어 나가는 꼴을 머릿속에 그리기만 해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리고 죽여 버릴 거란다. 아, 한 번에 죽이지는 않을 거야. 최대한 오랜 시간을 들여서 충분히 고통을 느낄 수 있게끔 만들 거야. 재미있지 않겠니?”

루치페르는 기괴하게 웃으며 깔깔거렸다.

버추스는 그런 그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루치페르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다시 말해 자신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만…….

“위험하실 겁니다.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여러모로.

“르카이츠 놈의 힘은 예전부터 짐작이 불가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봉인이 됐다고 해도…….”

말을 잇던 버추스는 흠칫거리며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루치페르의 시선이 전에 없이 날카로워졌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루치페르 님의 힘을 낮잡아 본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단지 저는 걱정이 되어.”

고개를 푹 숙인 버추스는 입술을 자근자근 씹었다.

이 제멋대로인 루치페르는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조심을 해야 했다. 이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수를 하다니. 버추스는 적어도 손목 하나는 잘리겠구나,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니,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단다.”

돌아온 대답은 의외로 다정했다.

“네 말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래. 네 말이 맞지. 그놈이 아무리 약해졌다 해도 마왕이니까. 지금의 내가 이길 수 있느냐 하면 확답을 못 하지.”

루치페르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버추스의 턱 끝을 들어 올렸다.

“나도 참 나로구나. 이제는 더 이상 교만하게 굴지 않겠노라 결심했거늘! 또다시 오만한 태도로 목숨을 내던질 뻔했어. 아니, 아니. 그래서는 안 되지.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목표를 이루어야지!”

탁, 하고 손가락을 튕긴 그는 표정을 싸늘히 굳혔다.

“서부로 가자꾸나.”

“……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안도의 숨을 내쉬는 버추스를 뒤로하고, 루치페르는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깔았다.

‘마왕.’

그놈을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다는 마음을 꾸역꾸역 집어넣으며.

***

그리고.

루치페르는 자신이 점찍어둔 세계의 주인공, 드한이 도착했다는 말에 당장 메인홀로 뛰쳐나왔다.

드한을 이용해 해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드한은 혼자가 아니었다.

유리엘인가? 아니, 아니다. 드한보다 다소 작은 체구의 여자아이가 서 있다.

루치페르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으음, 설마.”

그의 눈이 곡선을 그리며 접혔다.

“설마, 맞니?”

루치페르는 입술을 쫘악 찢어 올리며 새하얀 이를 드러냈다.

“내 생각이 맞니?”

그 모습이 퍽 괴기했지만, 세키나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은 쓰였지만 두렵거나 하는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웅. 안뇽?”

세키나는 여상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다이몬 백짝가의 막내, 세키나라구 해.”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똑똑히 밝혔다.

“만나서 반가어! 보고 시퍼써!”

넌 천족이냐?

난 마족인 척하는 인간이다.

어디 한번 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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