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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님이 만드는 파멸엔딩 (124)화 (125/149)

124화

서둘러 수도로 돌아온 르카이츠는 아서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마자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아서가 보였다. 그를 보자마자 르카이츠는 순간 섬찟해졌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황실에서 세키나를 찾는 이유가 혹 좋지 않은 일 때문인가? 만약 그렇다면 황실을 모두 다 뒤엎어 버리…… 아니,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르카이츠는 순간 머쓱해졌다.

이제껏 세키나를 가장 많이 의심해 왔던 게 누구였던가? 아이를 믿지 않고 내버려 두어 다치게 만든 게 누구였던가?

그래놓고선 뒤늦게 걱정하는 꼴이라니. 르카이츠는 스스로가 꽤나 한심하게 느껴졌다.

“부단장.”

헛웃음이 새어 나오는 입가를 정돈한 르카이츠가 아서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인지 자세히 말해 보도록.”

“아, 마왕님.”

아서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는 듯 살짝 굳은 얼굴로 턱을 당겼다.

가까이서 더 자세히 보이는 그의 심상찮은 표정은 잠깐 풀어졌던 르카이츠의 마음을 다시금 긴장되게 만들었다. 르카이츠는 여느 때보다 진중한 눈으로 아서를 쳐다보았다.

“그게…….”

아서는 후우 숨을 들이켠 후, 어깨를 활짝 펴고 말을 이었다.

“황후가 세키나 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황후?”

생경한 단어에 르카이츠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황실, 황제, 황후…… 아, 황제의 부인.

이제야 기억이 난다. 애초에 마계에는 그런 말이 없었으니 헷갈릴 만하지.

“그런 인간이 있기는 하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예. 인간은 뭐 우리 관심 밖이니까 그럴 수 있죠.”

아서는 으쓱 어깨를 올렸다.

“어쨌거나 그 황후가 세키나 님을 보고 싶어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게 참 애매하단 말이지요.”

“뭐가 애매하다는 거지?”

아서는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봉투를 쭉 내밀었다.

“단순한 티타임 초대장입니다. 뭐, 수도 귀족 인간들 사이에서는 절대 무시하면 안 되는 무시무시한 편지인 건 맞습니다만, 우리가 뭐 보통 귀족 인간입니까? 그냥 나 몰라라 하고 북부로 돌아가도 괜찮지요.”

맞는 말이다.

어차피 북부는 황실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다. 설사 그들의 말을 무시한 게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난다 해도 병사를 이끌고 올 수도 없을 거다.

북부는 북부. 애초에 다이몬 백작가의 공간이었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르카이츠는 잘 이해가 안 됐다.

“그런데 뭐가 문제라는 거지?”

“참석자에 황자가 있습니다.”

“……음?”

뭐. 그래서 어쩌라고.

르카이츠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겨우 갈무리하며 아서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 성년도 안 된 남자아이를 동석시키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

“와, 그 눈치로 지금까지 마왕직 잘 유지했네.”

“속마음을 너무 대놓고 말하는군.”

“앗, 죄송.”

절대 반성하지 않는 얼굴로 대답한 그는 책상을 탕 치며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어쨌든, 그놈을 티타임에 부른 이유는!”

이유는?

“세키나 님과 이어 주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뭐라고?

“황제에게 버림받은 끈 떨어진 황후 입장에서 우리는 길 가다 주운 금덩이 같은 겁니다. 어, 얘네는 신전이 뭐라 해도 멀쩡하네? 어, 얘네는 황실 지원 안 받아도 잘 사네? 어어, 그럼 나도 슬쩍 끼어 볼까? 이거라고요, 지금!”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아서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던 르카이츠는 천천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뒤늦게나마 대충의 상황을 이해한 그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황자와 세키나를 약혼시키려 한다는 말인가?”

“그럴 속셈이 가득하다는 뜻이죠!”

“우매한 인간 주에에 어딜 감히……!”

콰직!

르카이츠가 딛고 있던 마룻바닥이 움푹 파였다. 순간적으로 힘을 절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 숙소 떠날 때 돈 좀 들겠는데.”

아서의 중얼거림을 뒤로하고, 르카이츠는 으드득 이를 갈았다.

당장에라도 황실로 쫓아가 빌어 처먹을 인간들의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니, 참는 것이 아니라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 이 상황에서의 결정권자가 누구인지부터 떠올렸다. 르카이츠는 떨리는 숨을 뱉으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했다.

“일단 세키나를 불러와라.”

황실을 치는 건 그 뒤로.

르카이츠의 눈이 번뜩였다.

***

“아하.”

일련의 이야기를 다 들은 세키나는 흐음, 하고 입을 모으며 잠깐 고민했다.

황실, 황후, 황자…….

이 세 가지를 조합해 나오는 그림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음. 나쁘지 안은데여?”

정확히 말하면 꽤 괜찮았다.

실제로 황실을 이쪽 편으로 만들어 보자 생각하고 있던 와중이었으니까.

물론 황자가 유리엘보다 유약하다고 해서 잠깐 보류해 놨었지만…… 이 기회에 안면을 터놓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세키나는 활짝 웃으며 아서와 르카이츠를 바라보았다.

“일딴 그쪽에서 원하는 게 먼지 알아야 할 것 같기는 한데여, 머. 예상대는 경우의 수가 몇 개 업써서 준비하고 갈 쑤 이쓸 거 같아여.”

“경우의 수?”

르카이츠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어떤 반응이 나올지 예상이 된다는 말이냐?”

“넹.”

“말해 보거라.”

“머…… 젤 유력한 건…….”

세키나는 무심히 귀를 후비적거리며 말했다.

“약혼이겠져?”

“푸흡!”

목이 막힌 듯 차를 마시던 아서가 그대로 찻물을 뿜었다.

“콜록! 콜록!”

사레에 걸려 몇 번을 캑캑거리던 그는 눈물을 훔치며 벌떡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야, 약혼이요? 아, 아니! 걔네가 아무리 미쳤다고 해도 그 정도까지는……!”

“멀 그케 놀라고 그래. 아써도 알자나. 걔네가 나랑 황자랑 마냥 소꿉놀이 하게 부른 거게써? 먼가 이유가 이쓰니까 부른 거디.”

세키나는 으쓱 어깨를 올렸다.

“귀족 인간들은 10살 대기도 전에 약혼하고 그러는 경우 만타고 들어써.”

“…….”

물론 아서도 추측했던 이유이긴 했다. 세키나를 불러오기 전까지 그도 르카이츠와 그런 이야기를 했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세키나 입으로 듣게 되자 충격적인 건 사실이었다.

아서는 입을 몇 번 뻐끔거리다가 뒷목을 잡고, 그러다 다시 한숨을 내쉬고, 이마를 짚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그럼 세키나 님은…….”

“난 상관 업는디?”

세키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해따가 나중에 무르면 대지. 약혼하면 그쪽이랑 더 친해질 쑤 이쓸 테니까 우리한테도 조은 거구.”

“하. 하하하. 하하하!”

아서는 기가 찬 듯 고개를 뒤로 젖히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안 됩니다!”

그간 아무리 세키나의 의견을 절대적으로 존중해 왔다고 해도, 이번 건 아니다.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저희는 세키나 님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겪게 둘 수 없어요. 인간과 약혼이라니요. 하하하. 미친 XX들이 진짜 뒈지려고……! 아주 잡아서 산 채로 XX해서 X하고 XXX해 버릴까 보다!”

이게 바로 그러데이션 분노인가.

그를 지켜보던 세키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나 지짜 갠찬타니까. 말한 거처럼 이참에 황실이랑 친해지묜 모두한테 조은 거니까…….”

“그만.”

이때, 내내 침묵하고 있던 르카이츠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북부로 돌아간다.”

아하. 북부로 돌아가는…… 뭐라고?

“지금 당장.”

“……넹?”

르카이츠는 세키나의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모른 체하고는 목 뒤를 붙잡았다. 어, 어어?

“먼저 갈 테니 따라오거라.”

“네에?! 아, 아니! 그게 무쓴 말……!”

“빨리 가십쇼. 저희는 천천히 가겠습니다.”

“쟘깐……!”

파앗!

텔레포트 마법의 빛이 세키나와 르카이츠를 휘감았다.

세키나가 눈을 뜬 순간.

“오…….”

휘이이잉!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북부의 설산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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