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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님이 만드는 파멸엔딩 (128)화 (129/149)

128화

르카이츠는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일단 수도에서부터 심히 짜증이 나 있던 그였다.

약혼이라니? 생판 얼굴도 모르는 놈과…… 라고 하기에는 일단 종족의 차이도 있군. 어쨌거나, 약혼이라는 허무맹랑한 말을 세키나가 입에 올렸을 때부터 르카이츠는 은은하게 화가 나 있었다.

세키나를 끌고 북부로 돌아오고 나서야 그나마 화가 가라앉은 르카이츠는 이제 자리에 앉아 곰곰이 자신을 돌이켜 보려고 했었다.

왜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됐는지,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문제가 아닌지.

한데 그러지 못했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성의 분위기를 보자마자 늙은 장로들이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으니까.

 ‘감히.’

그래. 정말 감히였다.

이번 일은 다른 누구도 아닌 르카이츠 자신이 직접 나선 일이었다. 그에 힘입어 호문쿨루스 세키나는 루치페르 놈의 흔적을 뒤쫓았고 그놈의 거처까지 폭발시켰다. 이것만으로도 세키나는 충분한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었다.

한데 장로라는 것들이 이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해서 이딴 추잡한 수를 쓴다고?

이가 부득부득 갈렸다.

르카이츠는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않은 채로 계단을 올랐다. 2층에 다다르자마자 2장로 빈센트와 4장로 카르테가 대화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르카이츠는 그 즉시 마기를 분출시켰다.

“쿨럭!”

“마, 마왕님?”

그들은 르카이츠의 마기를 맞닥뜨리자마자 바로 반응을 보였다. 빈센트는 방금 전 기침으로 흘러나왔던 피를 손수건으로 닦으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마왕님을 뵙습니다.”

납작 엎드려 있는 카르테와 달리 빈센트는 두 다리를 세우고 서 있는 상태였다. 이는 빈센트가 전대 마왕 때부터 생을 이어온 오래된 마족이기 때문도 있거니와 지금의 마왕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르카이츠는 개의치 않았다. 마왕이라는 자리는 누군가의 인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재미있는 일을 벌이고 있더군.”

르카이츠는 다소 무심한 듯, 그러나 속에 담긴 분노를 감추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빈센트의 어깨가 움찔거린다.

“합당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는 더 주눅 들지 않았다. 마치 발악을 하듯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그 호문쿨루스가 더 이상 기고만장해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마왕님께서 나설 일이 아니십니다.”

퍽 건방진 말이었다.

그러나 르카이츠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보좌관에게 허락을 받았나?”

리아트를 뜻하는 것이다. 호문쿨루스를 만들어낸 리아트.

빈센트는 입 안쪽 살을 자근자근 씹었다. 그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었으니까.

“그, 보, 보좌관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습니다.”

내내 엎드려 있던 4장로, 카르테가 대신 대답했다. 르카이츠의 눈이 가늘어진다.

“호문쿨루스를 담당하고 있는 자가 자리를 비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대로 행동한다라…….”

르카이츠는 입술을 픽 비틀었다.

“언제부터 마왕성의 체계가 사라진 것이지?”

“…….”

빈센트는 할 말이 없었다. 체계 자체를 꼬집어 이야기한다면 자신의 잘못이 명백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잘못이 없다, 나는 할 일을 해낸 것뿐이다, 그것이 단순히 여흥을 위한 내기의 일환이라 할지라도.

“대체 왜 그 호문쿨루스를 싸고도시는 겁니까?”

그래서 빈센트는 억울함이 섞인 목소리를 높였다.

“아시지 않습니까? 호문쿨루스는 우리를 위한 단순한 도구일 뿐입니다. 인간계에서 잘 움직일 수 없는 우리를 대신하여 나갈 수 있게끔 만들어진 존재!”

르카이츠는 더 말을 해 보라는 듯 눈썹을 까딱였고, 빈센트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므로 쓸모가 다 해 질 때가 올 테지요. 그때에 지체 없이 버리고 가야지 않겠습니까? 끝까지 그것들을 품고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것은 마족의 수치입니다!”

빈센트는 살짝 마기를 실어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만약 그렇다면 저희가 직접 막겠습니다.”

르카이츠의 입술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는 지금 흩날리고 있는 눈보라보다 더 차가운 시선으로, 휘몰아치고 있는 날카로운 바람보다 더 날이 선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구를 막겠다는 이야기인가?”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오므려졌다.

“나를, 막겠다고?”

쿵!

천장이 흔들렸고, 그들이 딛고 있는 바닥이 흔들렸다.

“감히?”

휘이익!

태초의 어둠을 품은 마기가 흘러나온다. 르카이츠에게서부터 뽑혀 나온 마기는 빠르게 장로들을 향해 날아갔고, 그들의 목을 움켜쥐었다.

“컥, 컥……!”

“다시 답해라, 장로여.”

르카이츠는 바둥거리는 장로들을 무심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대는 나의 명령에 반기를 들 자격이 있는가?”

“…….”

빈센트는 입을 뻐끔거렸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반기를 들 자격이 있노라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의 소리일 뿐이다.

이성은, 그러니까 몸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이성은 그 외침을 틀어막았다.

르카이츠를 바라본다.

젊은 마왕을 직시한다.

그의 눈동자에 담긴, 이제는 빛이 바랜 자기 자신을 관찰한다.

그리고 이내 깨닫는다.

“없…… 없습니다.”

자신은 이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르카이츠를 바라본다.

혼돈의 지배자를 경외한다.

“그래. 당연히 없어야지.”

“쿨럭! 허억, 헉…….”

“으, 으…….”

르카이츠가 손을 뻗자마자 장로들을 얽매고 있던 마기가 사라졌다.

“호문쿨루스는 보좌관의 관할이다.”

르카이츠는 짧은 말 한 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더 이상의 개입은 허락지 않겠다.”

빈센트는 이를 악물며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지금의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어우, 어우.”

5장로, 뮐러는 쓰러져있는 빈센트와 카르테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까딱했으면 나도 저 꼴이 될 뻔했잖아? 어휴, 안 가길 잘했지.”

뮐러는 정말 감이 좋은 마족 중에 하나였다.

어, 이러다 나 뒈지겠는데? 싶어서 안 하면 실제로 다른 이가 뒈졌다. 어, 이거 남들은 안 하지만 나는 괜찮을 거 같은데? 싶어서 하면 실제로 그는 괜찮았다.

그의 감은 마치 야생동물처럼 매우 발달해 있었고,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제2 능력이 육감이라며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곤 했다.

그런고로 이번 선택도 매우 적절했다 할 수 있겠다.

뭔가 예감이 이상해 대충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떠났었는데, 떠나지 않았다면 저렇게 굴러다니는 이들 중 뮐러가 추가됐을 것이다.

아무리 장로들이 잘났고 대단하다 한들, 마왕 앞에서는 기어 다니는 개미 새끼일 뿐이거늘.

“휴우. 죽다 살았네.”

이제 마왕이 물러갔으니 자신은 괜찮다. 이번 일은 모르는 일이었다고 잡아떼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저 꼴이 된 빈센트가 여기서 뭘 더 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아, 뭔가 찝찝하단 말이야.”

그의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고.

“혹시 마왕님이 장로들을 호출하나?”

아니, 그건 아닐 거 같다. 이미 한 번 경고를 하고 간 마당에 또 호출을 하진 않을 테다.

“그럼 뭐지? 뭐 문제가 있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딱히 다른 문제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그의 예리한 직감은 그에게 계속 경고등을 켜 주고 있었다. 뮐러는 찜찜한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 채 엄지손톱을 자근자근 씹었다.

그때였다.

콰과광!

“으아악! 뭐, 뭐야!”

뮐러는 순식간에 복도 바닥이 무너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도 바로 자신의 바로 옆이었다. 오싹해진 뮐러는 재빨리 기둥 쪽으로 등을 붙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슨 일이야! 뭐야, 대체!”

하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마치 일부러 모두를 내보낸 것처럼 말이다.

거기다가 더해 찌릿찌릿한 감각이 피부를 타고 들어왔다. 뮐러는 이 감각이 말해주는 바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설마…….

에이.

아니겠지?

-그 호문쿨루스는 마물을 다룰 수 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마왕성 안에서 마물을 소환할 리가…….

[꿰에에엑!]

“으아아아악!”

있네, 시바.

뮐러는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도망치기 시작했지만, 거대한 마물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야, 아이씨! 놔! 놔아아악!”

발목을 붙잡힌 그는 대롱대롱 거꾸로 매달린 채 마물에게 끌려갔다.

“젠장할. 이렇게 된 이상 마법을……!”

“대겠냐?”

그때, 뮐러의 발악을 멈추게 한 목소리가 있었다.

“너, 너……!”

마물의 어깨에 앉아있는 세키나였다.

“안뇽?”

세키나는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너 나중에 나한테 디진다 해찌?”

세키나는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는, 아주 올바르게 자란 아이였다.

“이제 함 디져바.”

우우웅!

마물의 거대한 손이 휘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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