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저…….”
우물쭈물하며 서 있던 율리안은 뒤를 돌아 다른 아이들을 쳐다보다가, 이내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외쳤다.
“세키나를 그만 괴롭혀 주세요!”
말을 하면서도 그의 몸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눈앞에 있는 건 다름 아닌 마왕. 자신들의 생사를 쥐고 있는 존재였으니까.
이렇게 말을 하다가 제 목이 떨어져 나가도 이상할 게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카이츠를 찾아온 것이다. 세키나를 위해서.
율리안은 니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마왕이 세키나를 협박하고 있나 봐.
-세키나가 그러던데? 자길 죽인다거나 하는 말을 했다고.
-그런데도 옆에 꼭 붙어 있는 걸 보면…… 세키나도 참 어지간하지. 왜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는지 몰라.
죽인다니……. 마왕의 말에는 그만큼의 무게가 있다. 어쭙잖은 마족들이 협박하는 것과는 결이 다르단 뜻이다.
자신이었다면 그런 말을 듣고 너무나도 무서워 벌벌 떨었을 테다. 그리고 울며불며 무릎을 꿇고, 마왕에게 재차 복종을 맹세했겠지.
한데 그런 무자비한 말을 듣고도 세키나는…… 전과 다름이 없었다. 니샤의 말로는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우리를 위해 희생하는 거겠지.’
가장 어린 세키나가 이렇게까지 참고 있는데, 우리가 손 놓고 있을 순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렇게 르카이츠를 찾아온 것이다.
자신들도 세키나를 지키겠다고.
“마, 맞아요. 세키나한테 그러지 마세요!”
율리안의 뒤에 쏙 숨은 디디에가 소리쳤다.
“세키나 불쌍해요!”
“차라리 저희한테 하세요!”
“아니, 그건 아니죠! 그건 무섭다고!”
“디디에! 여기까지 와서 발을 빼면 어떡해!”
르카이츠는 투덕거리는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이들은 서로 성질을 내고 틱틱거리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르카이츠를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들은 쉽게 물러서지 않을 거라는 듯이 말이다.
르카이츠는 이 작은 아이들이 언제 이렇게 컸는지 새삼스러워졌다.
전에는 마주치기만 하면 고양이 본 쥐새끼처럼 얼어붙거나 꼬리를 말고 도망쳤는데.
이제는 적어도 목에 방울을 달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지 않은가.
참으로 재미있다.
“하하하!”
그렇기에 르카이츠는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졸지에 마왕의 웃음을 맞닥뜨리게 된 아이들은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뭐야. 왜 웃어?
왜 저래……?
***
그림자 속에 숨어 르카이츠와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캘빈도 같은 생각을 했다.
왜 저래……?
아니, 아니! 감히 마왕님께 이런 불경한 생각을 갖다니! 나쁜 캘빈! 미운 캘빈!
제 뺨을 두어 번 때린 캘빈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다시 르카이츠와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방금 전 르카이츠의 웃음으로 인해 다소간 분위기가 풀린 방 안은 흐르는 기류가 나쁘지 않았다.
“너희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르카이츠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나는 세키나를 꽤 아낀다.”
“뭐래, 진짜.”
자신도 모르게 말을 뱉어 버린 캘빈이 헙 소리를 내며 입을 틀어막았다.
“죄송합니다! 그만 속마음이!”
그림자 속에서 일어난 캘빈은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듣다 보니 마왕님이 이상한 소리를…….”
“내 허락 없이 숨어 있지 말라 했을 텐데.”
“나갈까요?”
“나가.”
“넵.”
구박받은 캘빈은 꾸벅 고개를 숙인 후 재빨리 방을 빠져나갔다.
물론 그 와중에도 갑자기 튀어나온 자신 때문에 기겁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눈을 찡긋거리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방에서 나온 캘빈은 돌아가지 않고 다시 문에 귀를 기울였다.
세키나를 아낀다는 말 이후로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들려오는 말은,
“나가라고 했다.”
르카이츠의 살벌한 목소리였다.
“넵. 꺼지겠습니다.”
제 목숨은 소중했기에 곧바로 문에서 귀를 떼어 낸 캘빈은 쩝 입맛을 다시고는 복도를 가로질러 걸었다.
그러고는 생각한다.
마왕님이 세키나를 아낀다고?
그럼…….
호문쿨루스들을 죽이지 않을 건가?
***
“으아! 개잘잤따!”
간만에 푹 잠을 잔 세키나는 뻐근한 목을 돌리며 빵긋 웃었다.
미우나 고우나 이곳이 집이라고 인식을 하고 있기는 한가 보다. 수도에서의 숙소도 꽤 고급이었는데, 이곳보다 훨씬 더 잠을 못 잤었으니까.
“아니면 어제 밥을 넘 잘 먹어서 그른가.”
세키나는 이제야 자신의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다며 눈물을 흘리던 인간 주방장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어째 음식이 맛있긴 했지만 짭짤했었지. 눈물이 섞였나…….
“머가 대뜬, 이제 할 일이 이쮜.”
세키나는 어제 저녁을 먹으며 재차 결심한 것이 있었다.
이 맛있는 걸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는 마족들을 도와주자고!
‘특히 아서.’
아서가 제일 안쓰러워. 우리 아서.
아서에게 가장 먼저 마계의 마기를 줘야지.
그다음에는?
‘이용해야지.’
장로들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지금.
마계의 마기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들이 무궁무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일단 블랙 스피넬을 찾아야 했다.
‘인어의 궁전을 찾아가면 되지.’
그곳에 갈 방법을 이미 알고 있으니 잘만 이용하면 충분히 득이 되리라.
“구럼 일딴 나가 보까.”
세키나는 씨익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일단 1장로 놈을 만나서 공간 이동 마법진에 대해 이야기를 해 봐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장로들의 꿍꿍이도 한번 캐묻고 말이지.
그래서 서둘러 씻고 준비를 마친 뒤 방을 나서려는 순간.
“세키나 니이이이임!”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키나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바로,
“세바스챤?”
세키나에게 제일 먼저 흑마법의 흔적을 들켰던 마족, 세바스찬이었다.
달려오고 있는 그는 전에 봤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전에는 그래도 나름 깔끔하고 잘 관리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먼 거지새끼가 오냐……?”
피죽도 못 얻어먹고 살았던 것 같은 꼴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단추가 뜯긴 셔츠, 움푹 들어간 볼 어귀와 다크써클이 길게 내려와 있는 눈가까지.
대체 내가 수도에 가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세키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제게 다가온 세바스찬을 쳐다보았다.
“야, 너 꼴이 왜구…….”
“저 좀 살려 주십쇼!”
세바스찬은 무릎을 꿇고 앉아 세키나를 붙잡았다.
“그, 그, 보좌관님이! 자꾸 절 데리고 이상한 짓을 하는데! 아, 진짜 죽을 것 같습니다! 저 이러다 죽어요, 진짜!”
죽을 것 같다는 말이 괜한 건 아닌 듯, 세바스찬은 정말 공포에 질려 덜덜 떨고 있었다. 세키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널 가꼬 먼 이상한 짓을 하는디?”
“흑마법에 대해서요!”
세바스찬은 급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제가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채신 건지……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저 좀 살려 주세요. 제발 그만하라고 좀 말해 주세요. 네?”
흐음.
리아트가 세바스찬에 대해 눈치를 챈 것 같다.
어쨌거나 흑마법이 루치페르와 매우 관련이 있으니, 흑마법을 알아내려 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에 대해 세바스찬을 데리고 이리저리 실험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세키나가 잠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눈앞이 번쩍하더니 리아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딜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군.”
“히이이익!”
세바스찬은 기겁을 하며 세키나에게 더 찰싹 붙었다. 그를 본 리아트의 표정이 더 굳어진다.
“우리 세키나, 이제 일어났구나?”
하지만 세키나에게 하는 말만큼은 다정하다. 세키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웅. 군데 머 하는 거야, 삼쫀?”
잠시 고민하던 리아트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재미있는 놀이를 하고 있는 중이다.”
“놀이?”
“그래. 음…… 술래잡기라 하면 되겠구나. 이놈이 먼저 감히 거짓말을 해 성에 들어오지도 않고 밖에서 멋대로 흑마법을 쓰고 돌아다니다 잡혔으니, 이번에는 내가 술래가 아니겠느냐.”
역시, 예상대로 리아트는 세바스찬의 개짓거리를 다 알아챘다.
“그러니 이번에는 술래 마음대로 해야지. 그렇지?”
리아트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걸 눈치채자마자 세바스찬이 세키나를 더 세게 붙잡았다.
“세키나 님! 저, 저 진짜 이러다 죽어요. 네? 살려 주세요!”
세키나는 저가 마치 마지막 구명줄이라는 듯 매달리고 있는 세바스찬을 쳐다보며 잠시 고민했다.
“우움.”
세바스찬이 불쌍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마왕의 명령을 어기고 몰래 성밖에서 살아간 거나, 흑마법을 익힌 거나, 모두 다 지금 당장 죽어도 모자람이 없는 죄목이 아닌가?
죽는 것보다 무서운 건 없지.
그래서 세키나는 활짝 웃으며 세바스찬의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안 주거짜나.”
“……예?”
“죽꼬 나서 말하면 대! 그땐 도와주깨!”
세키나는 두 손을 꽉 쥔 채 외쳤다.
“파이팅! 아자아자!”
“…….”
세바스찬은 입을 쩍 벌리다가, 이내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 미쳤어…… 미쳤다고…….”
마족들 중에 안 미친 놈이 있을까.
새삼스러운 걸 말하는 세바스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