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드한이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건 말건 간에, 세키나는 태연했다. 애초에 드한이 자신에게 ‘목숨을 바치겠다’느니 뭐니 말을 했을 때부터 계획해 왔던 것이니까.
지금의 드한은 작고 어린아이다.
하지만 미래의 드한은?
‘게임의 주인공.’
그러니까 다시 말해 세계관 최강자가 된다는 뜻이다.
‘내 편이 되어 준다고 했으니, 제대로 이용해 줘야지.’
후후후.
세키나는 사악한 웃음을 흘리며 드한을 쳐다보았다.
드한이 주인공, 즉 세계관 최강자가 되기까지에는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다.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소중한 사람을 잃기도 하고…… 그러면서 강해지는 건 지금으로부터 10년 뒤다.
세키나는 그때까지 기다려 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지금 당장 드한이 강해지는 것을 원한다.
그런고로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굴려야지.’
세키나의 입매가 고집스럽게 올라갔다.
“드한. 머해, 안 싸우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분홍 머리 마족이 이 말을 덧붙였다.
“응, 벌써 나한테 겁먹었죠? 이제 와 도망칠 수 없죠? 큰일 났다 싶죠?”
자신의 계획을 알고 일부러 저렇게 도발하는 것이라고 세키나는 생각했지만, 아니다. 저자는 원래 그냥 말본새가 저런 것이다.
“하…….”
드한은 헛숨을 뱉으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세키나를 쳐다본다.
“진심이십니까?”
“웅. 진심인디? 내가 이런 장난을 칠 꺼 같아?”
그렇다고 대답할 뻔한 드한은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발치에 굴러다니는 목검을 억지로 쥐어 들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응, 부탁이고 나발이고 한큐에 끝날 거죠?”
마족은 고개를 까딱이며 턱을 당겼다. 목검을 쥐고 있는 드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쉽게 끝나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파앗-!
드한은 순식간에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눈 깜빡할 사이에 마족의 지척으로 다가온 그는 목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움직임이다. 역시 용사,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군더더기 없는 동작.
만약 상대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한 대쯤은 맞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드한의 상대는 아쉽게도 마족이었다. 그것도 마족 제일의 1군단에 속해 있는 마족.
“크흡!”
가볍게 목검을 휘둘러 드한의 일격을 막아 낸 마족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발뒤꿈치를 떼었다.
“이거 좀 재밌네.”
그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검을 휘둘렀다. 그와 드한의 거리가 가깝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윽!”
드한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고 그대로 쓰러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셔츠의 단추가 떨어지고 가슴팍이 붉어져 있다.
“에궁. 한 번은 버틸 줄 알았는데, 아니죠?”
원래의 말투로 돌아온 마족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목검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세키나를 쳐다봤다.
“저 잘못했나요?”
한큐에 드한을 쓰러뜨린 것이 잘못된 건가 싶어 지레 눈치를 본 것이다. 하지만 세키나는 이런 상황을 원했고, 또 이런 상황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태연했다.
“아뉘. 잘해써.”
솔직히 5살짜리 어린아이가 몇백 년을 산 마족을 이긴다는 게 말이 되나. 기세를 잃지 않고 덤벼든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할 수 있겠다.
세키나는 쓰러진 드한에게 두었던 시선을 거두고 마족을 쳐다보았다.
“너가 바쓸 땐 쟤 어떤 거 가타?”
마족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그는 아까 전 느꼈던 ‘재미있음’을 떠올리며 콧잔등을 찌푸린다.
어린 인간 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와 주눅 들지 않는 기운까지.
여러모로 재미있는 아이였다.
“응, 나 저 나이 때 검도 제대로 못 쥐었죠? 그런데 쟤는 아니죠? 조금 놀랐죠?”
오호라.
예상보다 높은 평가다.
세키나는 역시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하며 턱을 당겼다.
“구럼 계속 붙어 볼래?”
그러자마자 마족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그래도 눈치가 제법 빠른 편이었으니 말이다.
“가르쳐 보란 말인가요?”
“웅!”
처음부터 드한을 가르치라 했으면 마족은 거절했을 거다.
하지만 이미 저놈을 데리고 노는 게 재미있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된 이상, 마족은 어쩔 수 없이 이 제안을 승낙할 수밖에 없다.
이것까지 계산하고 제안을 한 거겠지.
이 요망한 호문쿨루스 같으니라고.
마족은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입매를 간신히 가라앉히며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히 맨입으로는 안 되죠?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것도 있어야죠?”
세키나의 눈이 샐쭉하니 가늘어졌다.
“너 그 말투 지짜 짜증 난다. 어디서 배운 거야, 대체?”
“이게 요즘 애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말투죠?”
“아닐껄. 어려 보이려고 애쓰는 삼쫀 같아.”
“……충격이죠…….”
고개를 툭 떨어뜨리는 마족을 보며 세키나는 쯧 혀를 찼다.
“머. 멀 원하는디?”
마족은 언제 시무룩해 했냐는 듯 환히 웃으며 소리쳤다.
“우리가 갈 때 다른 놈들보다 제일 먼저 절 반겨 주는 거! 그거면 충분하죠?”
“…….”
“후후후. 다른 놈들이 얼마나 부러워할지!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죠? 최고죠?”
쓸데없는 것에 기뻐하고 낄낄거리는 게, 정말 누가 봐도 마족이었다. 세키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한숨을 뱉었다.
“너도 미친넘이라는 걸 내가 잊꼬 이써따…….”
그래. 미친놈 상대가 어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제 와 힘들다고 말하기에는 멀리 왔다.
***
“……그래서.”
리아트는 부들부들 떨며 이를 갈았다.
“그 인간 아이가 우리의 정체를 안단 말이냐?”
그는 맞은편에 서 있는 아서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한눈에 봐도 노기가 짙게 서려 있는 눈빛이었지만, 그를 맞는 아서는 무덤덤했다. 아서는 평온한 어투로 대답했다.
“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습니다.”
그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리아트는 결국 목청을 높였다.
“어쩔 수 없었다고? 어쩔 수 없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마왕님과 세키나 님의 대화 때문에 그렇게 된 건데요.”
“그럼 어쩔 수 없지.”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한 리아트는 대화 주제를 바꿨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들켰다 치고. 왜 기억을 안 지웠느냐?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었을 터.”
“음…….”
아서는 대답을 고민했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내버려 뒀다, 알다시피 저는 재미에 환장하는 마족이 아니냐, 하는 답은 해 봤자 리아트를 빡치게만 할 거다.
말을 고르던 아서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내버려 둬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하? 그놈이 다른 곳에 가서 입을 턴다 해도?”
“그럴 수 없지요. 인질이 있으니까.”
리아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허여멀건 신관 놈을 말하는 거냐?”
“예. 그 인간도 인간이고…….”
아서는 씨익 웃었다.
“제가 봤을 땐 그 아이, 세키나 님에게 꽂혔습니다.”
“뭐?”
“세키나 님을 졸졸 쫓아다니는 게, 지금은 어려서 모른다 쳐도…… 크면 어떻게 될까요?”
“인간 따위가 감히!”
쾅!
리아트는 책상을 세게 내려쳤다.
“안 된다. 절대 안 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돼!”
그 단호한 부정에 아서는 차가운 비소를 내뱉었다.
“왜 그러십니까? 마계로 돌아갈 때가 되면 세키나 님을 놓고 갈 생각 아니었습니까?”
“……뭐?”
“아니, 그렇잖습니까. 애초에 호문쿨루스를 만들 때부터 그렇게 말씀하셔놓고서는. 왜, 이제 와서 마음이 바뀌신 겁니까?”
“…….”
리아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아서는 그가 아직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지금도 심사숙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 고민을 다시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그리 생각한 아서는 다시금 어깨를 으쓱였다.
“뭐, 먼 미래의 이야기니까 그때 가서 얘기할까요? 지금은 어차피 탁상공론밖에 되지 않으니.”
그런 아서의 말에 어떤 뜻이 포함돼 있는지 리아트도 알고 있었기에, 그는 후우 한숨을 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어쨌거나 그 꼬맹이 놈을 세키나와 함께 둘 수 없다. 이건 동의하겠지?”
“예. 저도 그놈이 딱히 마음에 드는 건 아니라서요.”
아서의 시선이 리아트에게서 위로 올라갔다. 그는 창밖 너머, 정확히 말하면 이곳으로 날아오고 있는 전서구의 발에 묶인 편지를 보았다.
“다만…….”
창문을 활짝 열고 전서구를 맞이한 그는 편지의 줄을 풀고 그것을 리아트의 앞에서 흔들었다.
“둘 중 꼭 한 인간을 택해야 한다면, 차선 정도는 되겠지요.”
편지에 찍혀 있는 인장은 황실의 것.
내용은 안 봐도 뻔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