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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님이 만드는 파멸엔딩 (139)화 (140/149)

139화

백작가에 의탁한 지 어언 1주일.

이 시간 내내 유리엘은 이상한 시선을 느끼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 느낀 건 줄 알았다. 낯선 곳에서 잠을 자고, 또 매 순간 긴장하고 있다 보니 심신이 허약해져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아니다.

휙!

유리엘은 시선이 느껴진 곳으로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휑한 자리만이 남아 있을 뿐.

‘무서워…….’

유리엘은 오한이 드는 걸 느끼며 양팔을 감싸 안았다.

백작가는 정말 을씨년스러웠다. 북부 최전선에 있는 곳답게, 어딜 가든 추웠고 어딜 가든 어두컴컴했다. 그래서 마치 유령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나온 걸 수도 있다. 어딜 가나 자신을 놓치지 않는 이 시선…… 유령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신을 섬기는 신관이 유령을 두려워하는 건 퍽 모순적인 일이었으나, 유리엘은 정말로 유령이 무서웠다. 악한 유령은 퇴마조차 안 된다는데, 무슨 수로 자신이 막을 수 있겠는가.

아무래도 백작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야겠어.

꿀꺽. 유리엘은 마른침을 삼키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였다.

“거기, 신관 아저씨.”

“으아아아악!”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인영에 유리엘은 체통도 잊은 채 그만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아니, 그도 그럴 게, 유리엘의 앞에 있는 아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옷을 입고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아, 뭔 애가 저렇게 파리하게 생겼어!

유리엘은 깜짝 놀란 가슴을 애써 쓸어내리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아, 아, 안녕하세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두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유리엘의 앞에 나타난 아이. 디디에는 제 눈가를 가리는 앞머리 사이사이로 유리엘을 직시했다.

“왜 그렇게 놀라요? 내가 뭘 했다고.”

디디에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유령 같은지 전혀 알지 못했기에 핀잔을 했다. 그러고는 유리엘에게 손을 뻗었다.

“일단 일어나요.”

“가, 감사합니다…….”

“저는 디디에라고 해요. 셋째.”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유리엘은 디디에가 백작가의 셋째 영애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디디에가 입고 있는 옷이나 뭐나 그런 겉치레 때문에 알게 된 건 아니다. 그저 이런 흉흉한 성을 혼자 돌아다닐 정도의 담력을 지닌 아이는 백작가의 아이이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한 것일 뿐.

유리엘은 디디에의 손을 잡고 엉거주춤 일어났다.

“예, 영애. 그, 그런데 왜 저, 저를…….”

“며칠 전부터 지켜봤거든요.”

아.

유령이 아니라 이 아이였구나.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유리엘은 디디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상하더라고요. 왜 이렇게 얼빠진 인간을 성에 들인 거지? 싶어서.”

“……네?”

“신관님도 알고 있잖아요, 자기가 얼마나 얼빠진 놈인지. 그런데 왜 성에 온 거예요? 무슨 이유가 있어요?”

“그, 그…….”

유리엘은 말문이 턱 막혔다. 아무리 자신이 얼빠진 놈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대놓고 얼빠졌다고 말을 듣는 건 거의 처음이었으니까…… 더군다나 10살도 안 돼 보이는 어린아이에게!

간신히 정신줄을 잡은 유리엘이 힘겹게 대답했다.

“저, 저희는 사정이 있어서 자, 잠시 몸을 마, 맡기고 있는 겁니다.”

“무슨 사정이요?”

“……어른드, 들의 사, 사정?”

“얼빠진 어른들의 사정?”

“…….”

얼빠진 건 나만 그렇고 나머지는 안 그렇다고 대답해야 하나? 아니면 아서 님은 빼고 얘기해야 하나? 유리엘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디디에!”

그때,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리엘은 그 소리의 주인공이 마치 구원자라도 되는 양 기뻐하며 고개를 돌렸고, 어느새 디디에가 그 소년의 옆에 찰싹 붙어 있는 걸 보게 되었다.

“율리안 님! 뭐야, 제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오셨어요! 왜? 제가 보고 싶어서 왔어요? 응?”

짙은 다크써클을 드러내며 눈을 번뜩이던 디디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생글생글 웃으며 팔짱을 끼는 디디에는 영락없는 소녀였다.

그…… 저렇게 어린아이가…… 이중인격이어도 되는 건지……? 유리엘은 혼란스러웠다.

“안녕하세요. 율리안 다이몬입니다. 다이몬 백작의 장남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그런 유리엘에게 다가온 율리안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인사를 했다.

“디디에. 그런 말을 하면 못써. 이분은 백작가의 손님이잖니.”

세상에. 드디어 백작가에서 정상인을 만나는 건가! 유리엘은 감격스러움을 느끼…….

“하지만 제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아요!”

“인간들은 옳은 말을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때때로 틀린 말을 하는 게 좋지.”

……지 못했다.

내가 뭘 바라겠나. 여긴 다이몬 백작가인데.

유리엘은 실낱같이 남아 있던 희망을 내던지고 허심탄회하게 웃었다.

“많이 놀라셨죠? 죄송합니다. 별관은 저희가 쓰는 곳인데, 논의 없이 갑자기 식구가 늘어난 바람에 궁금해서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 어…… 죄, 죄송합니다…….”

“아니요. 신관님이 죄송해할 필요는 없지요. 이게 다 아서 그 XX한 XXX하고 X할 놈 때문이니까요. 절대 마음 쓰지 마세요.”

“…….”

신이시여.

어찌하여 이런 어여쁜 어린아이에게 걸걸한 입을 준 것입니까.

유리엘은 실로 오랜만에 신을 찾으며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다.

“어쨌든, 저희가 신관님을 찾아온 이유는 정말 궁금해서예요.”

율리안은 유리엘과 눈을 똑바로 마주친 채 말했다.

“왜 오신 건가요? 그리고 언제까지 있으실 건가요? 세키나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네?”

그가 쏟아낸 질문 중 가장 뒤에 한 질문이 메인인 것 같지만…… 어쨌든 유리엘은 차분히 대답했다.

“마, 말씀드린 것처럼 모, 모두가 인정한 사, 사정이 있기 때문에 이곳에 오, 온 것이고요. 기, 기한은…… 아, 아직 모르겠습니다. 세, 세키나 님이 허락하는 도, 동안까지 이, 있을 예정이라서요.”

“아하. 그래요. 사정.”

눈을 가늘게 뜬 율리안은 뭐, 미덥지 않지만 그래도 믿어 주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턱을 까딱거린다. 더 이어 이야기하라는 뜻 같았다.

“세, 세키나 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죽을 뻔한 걸 여러 번 구해 준 은인?

제정신 아닌 백작가 사람들 중 그나마 제정신인 사람인데 또 그렇다고 나를 엄청나게 좋아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고 그저 필요에 의해 데리고 다니는 것 같은 느낌을 숨기지 않는 사람?

……그렇게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저, 저보다 드한이, 더 설명하기 펴, 편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리엘은 이 자리에 없는 드한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어린아이들과 대화하는 건 나보다 드한이 더 잘하겠지. 드한도 똑같이 어린아이니까!

“드, 드한은 세키나 님을 조, 좋아하니까요! 세, 세키나 님도 드한을 자, 잘 챙기시고!”

그렇게 생각한 유리엘이 우다다 말을 쏟아냈는데, 율리안의 표정이 어째 이상했다.

“……뭘 한다고요?”

그는 완전히 썩은 얼굴로 반문했다.

“오. 큰일 났다.”

디디에의 중얼거림 때문에, 유리엘은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는 걸 강하게 직감했다.

***

“으……”

드한은 온몸의 근육통을 느끼며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중이었다.

이름 모를 어른과 목검을 맞댄 지 어언 일주일째.

그는 정말 ‘이러다 죽지 않을까? 응, 아직 안 죽어!’에서 ‘아직’ 상태에 놓여 있었다. 문제는 이 ‘아직’ 상태가 일주일이나 지속된다는 거였다.

숨이 까딱까딱하는 지금.

드한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너가 쟤 이기면은 그때 내 옆에 두께.

-그 전까지눈 안 대.

-간절한 만큼 움직여 바.

세키나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건 오기이자, 치기였다.

어떻게 해서든 눈앞의 마족을 이겨 세키나의 옆을 차지하겠다는 소망.

“후우.”

드한은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늘의 대련은 끝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훈련이 끝난 건 아니다.

이제 다시 연무장에 나가 검을 휘둘러야겠지.

그렇게 생각한 드한이 방을 떠나려 할 때,

쾅!

방문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열린 문 너머에는 자신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흰색 기운이 많이 도는 백금발의 소년이 서 있었다.

누구지? 드한은 쥐었던 목검을 더 세게 움켜쥐며 그를 주시했다.

백금발의 소년, 다시 말해 율리안은 그런 드한을 보며 생긋 웃었다.

“너구나, 별관 여우 새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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