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유리엘은 또 길을 잃은 참이었다.
이놈의 성은 복잡하기가 황실 저리 가라 할 수준이라서, 방 바깥으로 나왔다 하면 길을 잃곤 한다.
그래도 이제 어느 정도 길을 외웠다 싶었는데……. 역시 아니었구나.
유리엘은 스스로의 멍청함을 탓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백작가 성에 온 지도 어언 보름이 되어간다. 이 시간 동안 유리엘은 착실하게 눈치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드한은 그래도 사정이 나았다. 세키나가 데리고 가 이것저것 훈련을 시키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자신은?
그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었다. 혹시 제가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물으면 모두가 기겁해서 제발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마족인 그들에게 신성력을 쓰는 신관인 유리엘이 상극이기 때문이었지만, 이런 이유를 전혀 모르는 유리엘은 저가 쓸모없는 존재인가 생각하며 시무룩해지기 일쑤였다.
아무도 눈치를 주지 않지만 스스로 눈칫밥을 먹고 있는 지금.
유리엘은 제게 차라리 청소라도 시키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중얼거리며 복도를 헤매고 있었다.
그때였다.
“유리엘 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아서가 멀뚱멀뚱 서 있었다.
드디어 길을 찾아 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 유리엘은 크게 기뻐하며 아서에게 뛰어갔다.
“아, 아서 니……임?”
그런데 아서는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방금까지는 없었던 것 같은데…… 아서의 드리워진 그림자 쪽에서 훅 튀어나온 이가 유리엘과 아서의 사이에 발을 쭉 내밀었다.
“누구냐?”
짙은 흑발을 늘어뜨려 한쪽 눈을 가리고 있고, 코를 압박하는 듯한 반쪽짜리 복면을 쓰고 있는 사내였다. 그는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유리엘을 주시했다.
뭐, 뭐야. 무서워. 유리엘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누구기에 수상하게 혼자 성을 쏘다니고 있는 거냐? 대답 제대로 안 하면 당장 지하 감옥으로…….”
“캘빈. 시끄럽다.”
그런 캘빈의 입을 틀어막은 건 심드렁한 표정의 아서였다. 그는 유리엘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어쩐지 전보다 훨씬 더 무서운 느낌이 들어 유리엘은 더더욱 주춤거렸다.
“야! 하지만……!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성에 있는 건!”
“네가 모르긴 뭘 모르나. 일전에 이미 말을 했었는데. 네놈이 고양이에게 빠져 있어서 아무것도 안 들은 것 아니냐.”
“……아하?”
날뛰던 캘빈은 멋쩍어하며 슬쩍 시선을 돌렸다. 에잉, 그럼 그렇다고 진즉 말을 하지. 중얼거리면서.
“그래서, 누군데?”
캘빈이 턱 끝으로 유리엘을 가리켰다. 유리엘은 꿀꺽 마른침을 삼키고 얌전히 두 손을 모았다.
“저, 저는 유리엘 아가토라고 합니다. 북부성 신전의 시, 신관이었지요.”
“아씨, 신관? 어쩐지 냄새가 빡돌게 만드는, 아! 왜 때려!”
“작작 해라.”
아서의 말에 캘빈은 입을 비죽 내밀며 유리엘의 면면을 살폈다.
“그런데 왜 ‘이었다’고 말해? 지금은 아닌 것처럼?”
“아…….”
유리엘은 입술을 살포시 깨물었다.
백작가 사람들은 정말 감사하게도 자신과 드한이 이곳에 온 이유를 동네방네 소문내지 않았다. 그래서 한결 마음이 편한 것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 이럴 때마다 매번 난처하다는 게 단점이기도 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유리엘의 눈이 도로록 굴러가다 아서에게 닿았다. 아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정이 있었다. 꼬치꼬치 캐물을 거면 나 말고 보좌관님에게나 가. 어련히 다 말해 주실 테니.”
“흐음.”
캘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아서와 유리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정보원으로서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게 불편한 모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유리엘을 매달아 놓고 꼬챙이로 찔러가며 진실을 듣고 싶지만…… 그럴 순 없겠지. 캘빈은 머릿속 상상을 빠르게 정리한 뒤 다시 유리엘을 쳐다보았다.
“여기 식객인 건 알겠는데, 왜 시종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고 있지?”
“네, 네?”
“뭐라도 캐내려고?”
“아, 아닙니다!”
꽥 소리를 지른 유리엘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 그저…… 기, 길을 잃어서…….”
“여기서 길을 잃는다고? 너 바보냐?”
“……네에.”
시무룩해 하다못해 쥐구멍으로 들어갈 것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는 유리엘을 보며 캘빈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여간, 신관 새끼들. 제대로 뭘 하는 꼴을 본 적이 없어.
그는 쯧 혀를 찬 뒤 아서에게 말했다.
“나 얘 못 믿겠는데.”
“어쩌라고.”
“너무해.”
“시끄러워.”
팔꿈치로 캘빈을 쿡 찌른 아서는 얼굴에 미소를 덧그리며 유리엘에게 말했다.
“가는 길에 유리엘 님의 방이 있으니 저희와 함께 가시죠. 따라오시면 됩니다.”
“가,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유리엘은 종종걸음으로 그들의 뒤를 쫓았다. 그러다 아차, 하며 아서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세키나 님이 유리엘 님을 찾았습니다.”
“저, 저를요?”
“네. 다만 어디 계시는지 몰라 말씀은 못 드렸지만…… 지금이라도 얘기 드릴까요?”
“그…….”
유리엘의 시선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세, 세키나 니, 님이 저, 저를 왜…….”
“글쎄요.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무심하게 대답하는 아서와 달리, 유리엘은 죽을 맛이었다.
딱 봐도 백작가의 실세는 세키나였다. 그 어린아이를 끼고도는 이들만 몇이던가! 세키나에게 잘못 보이면 이 엄동설한에 내쫓기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유리엘도 세키나에게 최대한 잘 보여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신을 왜 찾는단 말인가! 무섭게!
세키나가 나를 찾을 이유.
유리엘은 머리를 빠릿빠릿하게 굴려 보았다.
“아, 아……!”
그러다 뭔가가 떠올라 손뼉을 쳤다. 캘빈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왜. 뭐 짐작 가는 거라도 있냐?”
“그…… 일전에 새, 새에 대해서 무, 물어보신 저, 적이 있거든요.”
“새?”
캘빈과 아서는 고개를 갸웃하며 ‘새’에 대해 떠올렸다.
새라 하면…… 북부의 새…… 집채만 한 괴물 새…… 잡혀가서 돌아오지 않은 마족도 있었지…… 그 새 말고 또 뭐가 있나…… 어?
“아. 그 새!”
일전에 북부 신관들이 왔을 때 선물로 돌려보냈던 그 새 동상!
눈에 기록 공유 장치를 넣어서 그들을 감시할 목적으로 두었지!
“그, 그래서 아, 아마 새, 새를 보, 보고 싶어서 절 차, 찾은 게 아닐까…… 하는데요…….”
세상에나.
마족들은 유리엘이 이쪽으로 온 이후 북부에 신경을 꺼버려 아예 잊고 있었다. 리아트조차도!
그런데 세키나는 놓치지 않고 있었던 건가?
세키나는 대체 어디까지 우리를 놀라게 할 것인지, 아서는 감동했고 캘빈은 분해했다. 자신도 잊고 있던 걸 세키나가 알아챈 게 뭔가 지는 느낌이었으니까.
둘 중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아서였다.
“그거, 볼 수 있습니까?”
“아! 네, 네……!”
유리엘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대답했다.
“제, 제가 대신관님들 바, 방으로 옮겨 놨거든요……. 호, 혹시 싶어서…….”
캘빈은 조용히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너 이 자식.
훌륭한 변절자다.
***
드한을 질질 끌고 온 세키나는 유리엘의 방문을 두드렸다.
이제 유리엘만 끌고 가면 된다, 그리 생각해서 유리엘에게 할 말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는 중이었다.
드한은 자신들이 마족인 걸 아니까 대충 설명해도 됐지만, 유리엘은 그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유리엘에게 대뜸 인어를 만나러 가자고 하면 놀라 쓰러지지 않겠나.
그러니 최대한 말을 잘 골라야 했다. 세키나는 말을 웅얼거리며 방문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런데,
“머야. 왜 대답이 업써.”
문을 여러 번 두드렸는데도 안에서는 답이 없었다.
“기척은 있습니다.”
“구건 나도 알아. 머야. 무시하는 거야?”
세키나는 눈을 샐쭉하게 뜨며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쾅!
하며 문을 연 순간.
[그러니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고,
[우리 중에 한 명을 교황 자리에 추대해야 한다는 거죠!]
뭔 미친 개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머여, 저거?”
세키나의 질문에 아서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의 다음 먹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