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정의 죗값
가정(嘉靖) 무자년(1562)이 밝았다. 정초에 늘 그러하듯 이틀을 연이어 쉬고, 사흘째 되는 날 임금이 정사를 다시 돌보는데, 승정원에서 글 입계(入啓)하기에 살핀즉 황해도 토포사(討捕使)로 나가 있는 남치근(南致勤)의 서장(書狀)이었다.
그 글에 아뢰기를 임거질정(林巨叱正)을 서흥 땅에서 추포하였다 하였으니, 임거질정이란 다름 아닌 해서대적(海西大賊) 임꺽정이었다.
임꺽정이 날뛰기 시작한 지도 벌써 여러 해였다. 그간 관군이 토벌하려 하였다가 도리어 토벌당하기만 몇 번이었던가. 그럴수록 적당(賊黨)의 위세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으니, 황해·평안·함경 삼도(三道)에서 올라오는 길이 꽉 막히다시피 하고, 특히 그 해악이 심한 황해도는 거의 적국과 진배없게 될 지경이었다.
나라의 영이 제대로 서지 않으니 임금은 골머리를 앓고, (그보다 중요하게는) 윤원형(尹元衡)과 그 일당 역시 재물 들어오는 것이 신통치 않게 되어 속을 썩였는데, 그러던 차 마침내 그 도적 수괴가 붙잡힌 것이다.
이에 임금은 크게 기뻐하며 곧장 선전관 아래에 의금부의 낭청들과 포도청 군관 여럿을 붙여 속히 압송하라 하였으니, 친히 국문하며 위엄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허나 닷새 뒤에 돌아온 선전관이 고하기를, 임꺽정이는 쫒기던 도중 화살 여섯 대를 맞은바 파상풍이 심하게 들어 인사불성이라 하므로 임금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어차피 죽여야 할 흉적의 수괴를 굳이 국문하기 위해 귀한 약까지 내릴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권신 윤원형의 마음은 잠시 외직 나가 있던 정적 이량(李樑)이 조만간 돌아온다는 데 온통 쏠려 있었고, 저의 공을 자랑하고자 하는 토포사 남치근조차 때마침 그 사람됨이 포악하고 군공은 적다며 언관의 탄핵을 당한 터라 이 일을 챙길 겨를이 없었다.
그러므로 임금도, 윤원형도, 조정의 대소 신료들도 이미 잡힌 도적의 수괴를 두고 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임금이 탄핵당한 남치근은 제쳐두고 다른 군관들에게 먼저 상급 내릴 것을 명하면서 하유하기를,
“도적이란 빈궁함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니, 근년 사이 연달아 흉년이 들고 수령들 또한 백성을 아끼지 않아 이런 반적(叛賊)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이 사소한 도적들로 인해 백성들이 해를 입어 해서(海西) 일원이 장차 버려진 땅이 될까 심히 걱정하였느니라.”
하였으니, 그뿐이었다.
어찌하여 그 빈궁함이 생기는가, 어찌하여 수령이라는 자들은 차마 그 백성을 아끼지 못하는가, 과연 백성들이 도적들로 인하여 입은 해와 도적이 없어짐으로써 입을 해 중 무엇이 더 클까 등등의 물음은 성심(聖心, 임금의 마음)에 담아둘 이유가 없었다.
임금의 마음이 그러하니 경대부(卿大夫)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아래는 또 더욱 말할 것이 없었다.
대적(大賊)이니 반적(叛賊)이니 하였지만, 그래 보아야 일신의 힘 조금 세고 따르는 무리가 꽤 있었을 뿐, 결국 백정놈의 자식이요 사소한 도둑놈에 지나지 않았다. 잡히지 않았다면 모르겠으되, 이미 붙잡혀 끝난 일이 되었거늘 어찌 나라의 지존과 번듯한 고관들이 오래 마음을 두겠는가.
상의 총애를 받는 이량에게 과연 어떤 직이 제수될지에 고관대작 모두의 이목이 쏠려 있는 동안, 그렇게 임꺽정은 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고통은 뼛속까지 스며들어 모든 힘줄을 찰나마다 새로이 난도질하는 듯하였고, 상처는 곪아가니 힘겹게 숨 들고 날 때마다 인두로 지지는 듯하였다.
그러다 갑자기, 모든 것이 멎었다.
도로 눈 떠본즉 주변은 더럽고 눅눅한 옥 안이 아니라, 웬 골짜기였다. 하늘은 음침하되 아예 어둡지는 않고, 초목은 늘 보던 초목이되 어딘가 섬뜩하게 달랐다. 그리고 저 멀리 관청 비슷해 보이는 전각이 있어, 꺽정의 눈에 들어왔다.
손발을 살피니 차꼬도 칼도 말끔히 사라져 있어, 이 무슨 조화인가 궁금해할 무렵,
“궁금한 것은 뒤로 미루어두고, 우선 함께 갑시다.”
휙 고개 돌리니, 허여멀건한 얼굴에 음침한 인상의 젊은이가 웬 책 한 권을 옆구리에 끼고서 말을 걸고 있었다.
대체 뭐 하는 놈인지 묻는 것과, 지금 이것이 어찌 된 영문인가 묻는 것 가운데 무엇이 먼저냐 잠시 고민하는 사이, 저쪽에서 답이 먼저 나왔다.
“내 바로 명부차사(冥府差使), 저승사자이외다. 짐작이야 했겠지만 임자는 명이 다하여 이곳 저승으로 오게 되었소.”
“허.”
“뭐, 그럼 설마 거기서 더 살기를 바랐소? 이미 넋이 떠났으니 돌이킬 수는 없소이다. 그러니 얼른 발걸음 재촉하십시다. 이러고 있을 겨를이 없소.”
그러나 임꺽정이로 말하자면 생전에도 일신의 완력만큼이나 성정 배배 꼬인 것으로 이름 났으니, 화적질 하기 전부터 관이든 어른이든 제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곧이 못 넘기는 성정이었다. 깊게 생각하기도 전에 시큰둥한 되물음이 튀어나왔다.
“이미 죽은 놈인데, 재촉은 뭔 재촉이오?”
차사는 어쩌다 이런 놈이 저의 번 설 때 걸렸는가 속으로 한탄하며 대꾸했다.
“저승 사정이 임자 생각만큼 널널하지 않소. 억만창생 가운데 사람만 헤아려도 하늘의 별마냥 많고, 또 그 사람 하나하나가 살면서 쌓는 업은 또 백사장 모래알마냥 허다하니, 우리네 명부만 고생이외다.
더구나 임자는 속세에서 쌓은 업이 작지 않아 우리 명부에서도 꽤 중한 안건으로 다루게 되었소. 우리 대왕님께옵서 직접 처결하시게 되었으니, 발걸음을 서둘러야 하지 않겠소?”
이승에서는 끝내 그 임금이란 작자 면상은 못 보고 하직하였으니, 여기서라도 한 번 대면함이 가하리라. 이미 숨 거두었다는데 여기서 더 뻗대본들 재미 적을 듯하여 임꺽정은 순순히 따라나섰다.
저 멀리, 허허벌판 한가운데 홀로 휘황하니 서 있는 관청이 있으니 필히 염라대왕 관부(官府)일 터였다.
허나 의외로 길은 멀었고, 한 시름 놓았다 여기는지 차사는 걸어가는 내내 옆에서 퍽 재잘재잘 떠들어 대었다. 누가 묻지도 않았건만, 어찌 저승 사정을 이리도 궁시렁궁시렁 털어놓는다는 말인가. 권세 알량한 아전들일수록 더욱 저들이 얼마나 사또 도와서 고을을 잘 운영하는지를 떠벌거리곤 하는데, 딱 보아도 그 격이었다.
“... 우리 십전염왕(十殿閻王)께옵서 천하 중생 가운데 중원과 그 일대를 모두 관할하시니, 그 일이 참으로 크고도 무거운 것이외다.
그나마 명부의 큰 법으로 저의 생전 믿던 바에 따라 넋의 관할을 나누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천주교니 청진교(淸眞敎, 이슬람)니 믿는 이들은 그쪽에서 알아서 처결하게 되어있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도 훨씬 번잡하고 힘들었을 게요. 한 시진에 우리 앞에 떨어지는 넋의 수만 해도 대충 일백은 되는데, 더구나 절기가 겨울이니 굶어죽거나 얼어죽는 중생이 좀 많아야지.
어지간히 큰 업을 쌓아 공과(功過) 면밀히 살펴야 하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전생(轉生)할 때 열 분 임금님은 물론이요 한 분만 뵙기도 흔한 일이 아니오. 하니 임자도 몸가짐을 바로 하는 게 좋을 게요.”
슬슬 관아의 솟을대문이 지척까지 다가올 무렵까지도 수다가 그치지 않기에, 듣다 못한 꺽정이가 대꾸했다.
“거 내 알고 싶지 않은 사정까지 퍽 열심히 털어놓는구려.”
“어차피 지옥에서 죗값 다 치르고 육도윤회(六道輪廻)할 때면, 전생하기 전 망혼탕(亡魂湯) 한 사발씩 들이키곤 하니까 그렇지. 한 방울만 들어가도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못 하고, 한 그릇이 모두 들어가면 이전 생을 송두리째 잊는다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얘기 나누는 것도 그때면 전혀 떠올리지 못할 테니, 이럴 때 내 하고 싶은 얘기 마음껏 털어놓는 것 아니겠소이까.”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차사가 낄낄 웃었다.
그러나 그 직후 코앞까지 다가온 대문 너머로 근엄한 목소리 울렸기에 그 웃음은 금방 눈 녹은듯 사라졌다.
“차사는 어찌 지엄한 명부대전(冥府大殿) 앞에서 훤화(喧譁)하느냐. 속히 들지 못할까!”
차사가 어마 뜨거라 대경(大驚)하고서는, 급히 꺽정이 어깨를 떠밀었다.
임꺽정 생전에 많이 보았던 – 그리고 많이 털기도 했던 – 관아와 생김새는 비슷하되, 어딘가 더 험악하고 진중한 전각 사이를 지나 돌 깔린 마당에 섰다.
저기 딱 보아도 비범하게 생긴 의자 위에 앉은 수염쟁이 거한이 필히 그 염라대왕이란 자일 것이다. 곧장 앞서 들은 그 묵직한 목소리가 꺽정의 신상을 물었다.
“조선국 양주에서 태어난 백정 임꺽정이 맞느냐?”
넋을 파고드는 듯한 물음. 꺽정이라 한들 어찌 일말의 흔들림이 없겠는가. 그러나 처음 화적질할 마음 품었을 때부터 편히 죽으리라는 욕심은 가지지 않았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엇하리오. 마음 굳게 고쳐먹고, 힘 모아 당당하게 대꾸한다.
“그렇소이다.”
옆에서 어느 안전에서 말을 그리 하느냐며 핀잔 들어올 듯하였으나, 의외로 판관도, 옆의 차사나 그 주변 저승 관원들 모두 덤덤하였다. 대왕 앞에서 감히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할 만큼 기강이 엄하기 때문일 터.
“어디 보자. 강도, 살인, 그것도 명화적 패당을 만들어서 꽤 거하게 하였구나.”
“그 또한 맞소. 해서대적 임꺽정이가 바로 나요.”
사람 죽인 것이 자랑이냐 묻는다면, 꼭 그렇지는 않다 할 것이다. 그러나 꺽정이 생각하기에 조선국에서 천하디 천한 고리백정의 자식으로 태어나, 누구에게 멸시당하지 않고서 허리 꼿꼿이 펴고 살았으니 결코 부끄러움도 없었다.
평범하게 백정으로 살다 죽는 것에 비하면, 설령 죽어 지옥의 밑바닥에 떨어질지라도 저의 이름 떨치고 하고자 하는 바 마음껏 하며 살다 가는 것이 훨씬 마음에 맞는 일이었다.
저를 업신여기고 깔보는 자는 목숨 다루는 데 손속을 아끼지 않았고, 또한 주변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저를 받들어 모시는 것이 좋았기에 그 재미로 잔혹한 짓을 많이 하였다. 저보다도 천한 작자라도 저와 맞먹으려 하면 산 채로 배를 갈랐고, 귀하디 귀한 종친이라도 저를 사람처럼, 산의 주인처럼 대해주면 꺽정 역시 털 한오라기 건드리지 않고 손님으로 대접하였다.
재물 빼앗은 일이야, 무어. 조선국 대명천지에 백정놈의 자식이 재산 모으려면 그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정직하게 가산 모으면 곧장 더 잘난 사람이 찾아와, 어디 천한 놈이 이리 가멸차게도 재산 모았느냐며 갖은 수 부려 빼앗아가기 마련이므로, 꺽정 생각하기에 어차피 떳떳하지 못하게 모은 가산 소리 들을 바에야 억울하지라도 않은 쪽이 그나마 나았다.
이 마당에 들어서도 뉘우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아니, 오히려 일견 스스로 대견하게 여기는 마음도 있었다. 백정의 자식이 마침내 조선 팔도를 진동케 하였으니, 어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허나 지옥이 무섭지 않으냐 하면 그 또한 아니어서, 꺽정이도 염라대왕이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저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는데, 나오는 말이 참으로 의외였다.
“해서대적이라. 한낱 화적떼 우두머리가 퍽이나 거창하게 일컬음을 받았구나.”
“지금 무어라 하였소?”
한 점 생각 없이 곧장 분기어린 반문이 튀어나온다. 주변에 도열한 판관과 차사 무리들 가운데 숨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마당에 갑작스레 냉랭한 바람 부는 듯하였다. 그러나 염라대왕은 꺽정이가 씩씩대건 말건, 옆에 늘어선 저승 판관들 사이를 향해 물었다.
“이 자를 내 스스로 처결해야 할 자로 이름 올린 자가 너희 가운데 누구더냐? 명부의 기강이 아무리 풀어졌다 한들, 사안의 경중조차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여 일개 도적 무리의 우두머리의 사정까지 내가 돌보아야 하겠느냐? 내 필히 일벌백계하여 훗날의 잘못을 미리 막겠노라.”
그러자 판관 가운데 하나가 새파랗게 질린 채 나아와 부복하고서 죄를 청하는데, 그들 가운데서 나름 위세 있는 자인지, 죄주어야 한다는 자들, 옹호하는 자들 등등이 얽혀 한동안 저들끼리 설왕설래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오가는 소리를 듣고서 할 말 많던 꺽정이가 끝내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보시오! 내 한때는 저 상감조차도 내 이름을 듣고 근심하게 만들었소. 그리 넓지 않은 견식으로 헤아려도 이 사람만한 도적은 조선국 열린 뒤에 하나쯤 있을까 말까 하였다고 들었소이다.”
아무리 꺽정이가 세상에 무서운 것 없이 들이받고 보는 성정이라지만, 멍텅구리는 아니었다.
차라리 여기서 승복하고서, 적당히 지옥에서 지내다가 전생길에 오른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꺽정이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물론 지옥이 이름만 지옥일 리는 없으니 괴로운 지경은 면하지 못할 것이요, 중들 말하는 윤회전생 법도대로라면 다음 생도 썩 좋은 팔자로 태어나지는 못할 테지만, 그래도 눈앞의 이 염라대왕을 더욱 노엽게 하는 것보다는 나을 터.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그가 청석골 대왕 노릇하며 살았던 그 세월 모든 것이 다 떳떳하진 않을지언정, 스스로 고작 범상한 도적이라 불리는 것을 차마 감내할 수는 없었다. 백정의 자식으로 태어난 죗값을 스스로 힘써 갚고자 그리 길지 않았던 일생을 발버둥치는 데 쏟아부었다. 나아갈 길은 오직 소소한 도적질뿐이요, 그마저도 무언가 다른 것을 도모하기도 전 서림이 그놈의 배신으로 끝나고야 말았으니, 어찌 분하고 한스럽지 않겠는가.
주변을 살피니 ‘죄인이 어찌 말대꾸를 할 수 있느냐’ 하며 수근대는 판관들도 있고, 반대로 염라대왕 노여움이 저에게 돌아올까 전전긍긍하던 판관 가운데서는 꺽정의 말에 고개 끄덕이는 자도 있었다. 그러건 말건 꺽정이는 저의 할 말을 이어갔다.
“나는 백정으로 태어나 팔도를 떠들썩하게 하는 데까지 올랐소. 백정이 글 읽어 벼슬살이 할 수도 없고 장사판 벌여 치부(致富)할 수도 없는 나라에서 이만하면 족히 비범하다 해야 하지 않겠소? 내 비록 불행하여 무언가 일을 일으키기도 전에 붙잡혀 이곳에 끌려오기에 이르렀으나, 지금 다시 한 번 해보라 하면 그 뒤가 어찌 될지는 나리조차 알 수 없을 것이외다.”
잠시 정적 흐른 뒤, 염라대왕 웃음소리가 다시 마당에 울렸다. 호탕하되 차디찬 조소였다.
“하하하! 가소롭구나!
네가 딴에 대적(大賊)을 칭하겠느냐? 무릇 큰 도둑이라 하면, 저 석숭(石崇)처럼 산호로 곳간을 가득 채우고 비단으로 오십리 길을 모두 감싸야 비로소 큰 도둑이라 할 수 있거늘, 네놈은 고작해야 진상하는 특산품이나 훔쳐서 산채 서넛을 일궜을 뿐 아니더냐?
또 네가 스스로 화적을 칭하겠느냐? 서초패왕 항우처럼 아방궁을 석 달 동안 불사른 것도 아니요, 고작 횃불이나 들고서 산길 쏘다닌 주제에 무슨 화(火)와 친하였다 하느냐?
그리고 또 네가 포악하기로 일세에 이름을 남기기를 하였느냐? 고작해야 항거하는 사람의 사지를 찢고 배를 가른 것이 전부 아니냐. 네가 저 몽고의 성길사한(成吉思汗, 칭기즈 칸)처럼 성중(城中) 중생 가운데 두 발로 걷는 것을 모두 죽여 없애기를 했느냐, 아니면 저 주원장이처럼 공 세운 신하를 모조리 역적으로 몰아 십족(十族)을 멸하기를 했느냐?
너의 뒤에 곧 따라올 저 윤원형이 정도나 되어야 그나마 작은 가운데서 조금 드러났다 할 것이다. 그에 비해 너는...”
“나리가 사람을 잘못 보았소.”
“다른 것은 몰라도 네놈에게 확실히 내 자비심을 시험하는 재주는 있는 모양이로구나.”
염라대왕이 험상궂게 웃으며 말했다. 말 한 마디 지지 않고 대드는 중생을 재밌게 여기는 것인가? 아니면 스멀스멀 올라오는 노여움이 이미 입가에 당도한 것인가? 이대로 물러날 것인가? 아니면 한 번 더 꺽정이 그의 명운을 시험해볼 것인가?
그때, 꺽정이 저도 어쩌다 그런 말 튀어나왔는지 모르는 그런 소리가 입 밖으로 삐져나왔다.
“나리, 내기를 하나 합시다.”
“네가 지금 감히 이 염라대왕을 희롱하려 하느냐?”
“나는 무식하여 그런가, 암만 생각하여도 지금 나리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일개 도적놈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수긍이 되지 않소. 어린아이들 손장난도 이럴 때면 삼세판을 하기 마련인데, 내 처결을 두고도 그리함은 어떻겠소이까?
바라건대 내 한 번 더 이승에 가서 날뛰게끔 해주시오. 그리하고서도 범상한 도적으로 끝난다면, 죗값을 곱절로, 아니, 거기에 나리를 농락한 죄며 입 함부로 놀린 죄며 곱절로 셈하여 받으리다.”
다시금 무겁게 정적이 내려앉았다.
한나절과도 같은 찰나가 지난 뒤. 아까와는 견주기를 불허하는 폭소가 울려퍼졌다.
“와하하하! 이 도적놈이 참으로 겁이 없구나! 좋다, 좋아. 내 너처럼 건방지고도 어리석은 놈은 실로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래, 네 하고자 하는 대로 해 주마. 여기서 더 왈가왈부할 겨를도 아까우니 바로 처결하겠다.”
그리고 언제 웃었냐는 듯, 한껏 일그러진 낯으로 우렁차게 외쳤다.
“판관들은 들어라!”
“하명하시옵소서!”
“양주 백정 임꺽정이는 본디 여느 도적떼 두목과 같이 변성대왕(變成大王)이 관할하는 독사지옥(毒蛇地獄) 삼 년이면 죄업이 족하였느니라.
허나 여기서 약조하노라. 임꺽정이를 이제 되살려 업을 쌓기 시작할 때로 돌려보낼 것이로되, 이승으로 나아갔다 돌아올 때 이 몸이 친히 다루어야 할 만큼의 업을 쌓고 돌아온다면 그에 맞추어 다시 처결할 것이나, 만일 그러지 못한다면 본디 죄업에 삼백 년을 더하고, 거기에 나를 농락한 죄로 발설지옥(拔舌地獄) 삼백 년을 다시 더할 것이다.”
하고서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임꺽정 앞으로 걸어왔다.
“자, 어찌할 테냐?”
“내기를 처음 발설한 것이 이 사람인데 어찌 여기서 도로 무르겠소? 나도 약조하겠소. 양주 백정 임꺽정이는 지금 염라대왕께옵서 기약하신 대로 따를 것이니, 천지신명께 맹세코 군소리 없이 따르겠소이다.”
“좋다. 그러면 속히 사라지도록 하여라. 네놈 덕에 잠시 재미있기는 하였으나, 벌써 한 각(刻) 넘게 허비하였으니.”
이곳 명부가 이승의 관아와 다른 점이 한둘이 아니련만, 같은 점도 분명 여럿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때가 되면 칼 같이 퇴청한다는 것이었다. 이승의 중생들이야 낮밤 가리지 않고 죽어나갈 테니, 명부 앞에서 밤새도록 기다려야 할 테지만, 어차피 죽은 넋이거늘 하룻밤을 더 못 기다리겠는가?
그렇게 저승의 하루가 끝나고, 일직(日直) 서는 판관 하나를 남기고서 모두들 퇴청할 무렵. 앞서 임꺽정이가 소란 일으켰을 때부터 아무 말 없이 그의 옆을 지키고 있던 의동 최 판관(儀同崔判官)이 염라대왕에게 말을 붙였다.
“신이 감히 생각건대, 앞서 조선국 양주 사람 임꺽정이를 두고 처결하신 일이 혹 후과(後果) 낳을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어찌 그러한가?”
퇴청할 때가 다 되어 한결 너그러워진 염라대왕이 되물었다.
“한없이 밝으신 대왕께서 물론 그자의 품성을 꿰뚫어 보시고 내리신 결정임을 신이 아오나, 망혼탕을 마시지 않고 그대로 저의 소싯적으로 돌아갔으니 이는 곧 천기(天機)를 읽어 아는 것과 같습니다. 이승에서 그자가 난행(亂行)한다면 자칫 돌이킬 수 없게 되지 않을는지요.”
“최 판관 그대가 모두 나를 위해 걱정하는 것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임꺽정 그자는 그저 조선국 어지러운 틈에 일어난 도적이지, 스스로 치(治)와 난(亂)을 가를 수 있는 재주는 일신에 없다. 아무리 그치가 전생의 기억을 오롯이 가지고 돌아갔다 한들, 그 흉포하고 완고한 품성은 그대로요, 또 비천한 출생도 그대로다. 반드시 본래의 명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터인즉, 지켜보는 것이 어찌 즐겁지 않겠느냐.”
너털웃음 지으며, 염라대왕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릇 내기에 뒤탈이 생기는 까닭은 밑천(孤注)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니 금일의 내기는 혹 그르친다 한들 그 후과가 크면 얼마나 크겠느냐? 그 걸린 바가 고작해야 백정 하나의 죗값이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