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3화 (3/259)

2. 반년 치 새경 (2)

3. 반년 치 새경 (2)

칠장사와 그에 딸린 여러 암자가 있는 이 산은 이름을 칠현산(七賢山)이라 하니, 옛이야기에 이르기를 옛 신라 때 혜소국사라는 고승이 산적 우두머리 일곱을 감복시켜 거두었기에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 하였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리 산세 험하지도 않은 곳에 산적 우두머리가 일곱이나 있었다는 것이 조금 기묘하기는 하였다.)

또한 사연은 그뿐이 아니니, 궁예가 선문을 나선 뒤, 죽산의 기훤(箕萱)에게 의탁할 때 이곳에 머물며 무예를 닦았다고도 하였다.

병해가 말한 ‘활터’란, 바로 그때 궁예가 활 쏘는 연습을 하였다는 공터로 – 궁예니 무어니 하는 내력은 모두 병해가 꺽정이에게 심심할 때면 해주던 옛 이야기에서 주워들은 것이었다 - 하필이면 명부전(冥府殿) 뒤에 있었다.

하늘에는 이제 막 초승달 티를 벗은 달이 은은히 빛났다. 꺽정이 딴에는 조심스레 움직이고 있었는데, 아직 다 크지도 않았건만 벌써 그 덩치가 작지 않았기에 영 어설펐다.

달빛 따라 그림자 길게 늘어져, 명부전 바깥에 그린 탱화에 드리웠다. 전각이 명부전이니 그려진 탱화는 어김없이 저승 열 임금(十王) 그림이라. 꺽정이 걸음 따라 그림자도 덩실덩실 춤추듯 일렁이며, 한 발짝 한 발짝 저 탱화에 그려진 염라대왕 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왕의 우두머리 염라대왕과 그 아래 판관들 앞에 꺽정이의 그림자가 닿았다.

‘한낱 화적떼 우두머리가 퍽이나 거창하게 일컬음을 받았구나.’

지나가는 구름이 잠시 달을 가렸는지, 아니면 꺽정이의 마음이 장난질을 치는 것인지, 염라대왕의 얼굴이 번뜩이는 듯하였다.

‘네가 도적질을 암만 한들 어디 번듯한 서책에 이름이나 제대로 남기겠느냐?’

귓가에 선하게 그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여, 저도 모르게 꺽정이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이토록 생생한 기억이 한바탕 꿈일 리 있겠는가. 지난 며칠간 고민한 꺽정이는, 그가 겪었던 전생과 저승에서의 일이 모두 실지로 있던 것이라 여기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앞으로 세월은 많이 남았으니, 혹 그때 기억하던 것과 훗날 일어날 일이 틀어진다면 그때에 이르러 다시 고민하면 족할 것이다.

눈길 돌리니, 병해와 만나기로 한 활터가 어슴푸레하게 보인다.

지난 생에서도 꺽정이는 병해를 저기서 만났다.

그때만 하더라도 백정의 자식에게 도적질 외에 다른 길이 있으리라 여겼다. 병해가 무얼 원하느냐 묻기에, 곧장 답했다.

‘내 듣기로 일자무식에 태생도 보잘것없는 사람이 어디 가서 손가락질 그나마 덜 받으려면 군공 세우는 수밖에 없다고들 하더이다.’

‘천지가 두어 번쯤 뒤집히지 않고서야 대개 그렇지 않겠느냐.’

‘헌데 내가 보다시피 몸뚱이에 힘은 조금 있지만, 무예라 하면 또 얘기가 다르지 않겠소? 어르신께서 속세에 연이 그리 많다 하셨는데, 혹시 나 같은 놈에게 칼질하고 말 타는 법을 알려줄 만한 사람 있으면 거간이나 좀 서 주시오.’

했더니, 병해는 그 자리에서 곧장 사람 하나의 이름을 일러주었다.

병해 말하기를, 저기 멀리 북방 함경도에 가면 권관(權管) 노릇하는 토관(土官) 아무개가 있는데, 그이가 칼도, 활도, 말타기도 곧잘 하는 무재(武才) 있는 사람이나 출세에 욕심 없어 오래도록 미관말직 권관으로 남아 있다 하였다.

딱히 누구에게 존함 듣고서 찾아왔다 할 것도 없이 가서 배움 청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르쳐줄 것인즉, 거기서 잘  배워서 어디 감영의 비장(裨將) 취재라도 붙으면 그것이 곧 무관 되는 편한 길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북변은 언제고 야인들이 난리를 일으킬 지 모르는 땅이니, 그 일대에 정 붙이고 오래 머물다 보면 반드시 군공을 득할 때도 올 것이요, 그때가 되면 반드시 꺽정이 그의 이름이 장계에도 오를 것인즉 어찌 출세가 먼 일이겠느냐, 하는 것이 그 자리에서 병해가 일러준 장구지책의 골자였다.

그래. 퍽이나 훌륭한 계획이었다. 그때야 청산유수로 흘러나오는 병해의 말을 입 벌어진 채 들으며, 이대로라면 금방 무슨무슨 만호가 되고 또 이런저런 대부가 되어 떵떵거리고 살 수 있을 줄만 알았다.

허나 모두 허황된 꿈이었다. 병해는 이 나라 조선이 그사이 얼마나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나중에, 할 수 있는 일은 도적질만 남게 되어 두령 소리 들으면서 이곳 칠장사로 돌아왔을 적. 그때 이미 생불 소리 듣던 병해대사는 미안하다며, 너무나 미안하다며 꺽정이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차라리 그때 헛된 꿈을 불어넣지 말았어야 했다면서.

그러나 그것이 어찌 병해의 잘못이겠는가? 나라가 잘못된 것이요 천하가 잘못된 것일 테다.

하면 꺽정이 그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도적질을 새로 시작한다면 이전보다 더 거하게 할 수 있을까? 도적질과 싸움박질도 재주는 재주니, 처음 하였을 때보다야 훨씬 능숙하게 저지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생에 아니 되었더라도, 이번에는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다.’

- ‘과연 그러할까? 염라대왕 말이 맞다. 백정놈의 자식이 도적질 한다면 얼마나 거하게 하겠느냐?’

마음속 한 구석에서, 마치 저 탱화 속 염라대왕 앞에 선 저의 그림자가 말 거는 양 스스로 반문하는 소리가 튀어나온다.

이놈의 조선이라는 나라는, 너무나 허술하여 툭 치면 무너질 것 같았건만 정작 꺽정이가 그렇게 뭔가 더 일을 벌여볼까 마음 먹을 때가 되니 그제서야 결코 만만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항상 제가 무언가 스스로 일으키려 할 때마다 발목을 붙잡으니, 참으로 몹쓸 나라 아닌가.

구월산까지 쫓겨들어가, 산기슭을 가득 에워싼 그 사람의 장벽을 보았을 때의 절망감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화살 맞고 붙잡혔을 적, 나도 어쩔 수 없었노라 항변하던 서림이의 그 밉고도 반가운 면상이 떠오른다.

‘아니다. 그때 잘못하였던 일을 이제 고쳐서 어긋나지 않게 한다면 저 관군이 어찌 나를 잡겠느냐.’

- ‘그래. 끝내 못 잡아죽인 이흠례(李欽禮)도 족치고, 서림이 그놈도 미리 결딴을 내 두고. 한양에 벌여두었던 일도 일찌감치 처분하고. 그랬더라면 한 몇 달쯤, 아니, 두어 해는 더 버틸 수 있었겠구나. 허나 암만 발버둥친들 그때 그 구월산 아래 모였던 남치근이의 군세를 깨부술 수 있었겠느냐? 어차피 끝은 똑같았을 터.’

‘평산 싸움에서 했던 것처럼만 하면 된다. 칼질 솜씨를 잊지 않았으니, 지난 번보다 더 잘할 수 있다.’

- ‘그러면 그 다음은 어찌할 테냐? 무리 일곱으로 오백 관군을 파했다고 하지만, 그 다음에 오천이 오면 어찌할 테냐? 또 그 다음에 오만이 오면?’

‘그러면 내가 어찌하여야 했다는 말이냐. 차라리 도적 노릇은 하지 말고 어떻게든 인정이고 아첨이고 바쳐서 군관 되기를 꾀해야 했겠느냐? 이 내가?’

- ‘...’

꺽정이 그가 누구에게 아첨할 성미도 아니거니와, 이 조선국 군관 태반은 백정의 아들에게 군공을 양보하느니 차라리 저가 빼앗고서 입 씻으려 할 것이었다.

저 마음대로 새어나가는 생각이 말도 안 되는 데까지 이르렀음을 새삼스레 깨달은 꺽정이 홀로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어디 다른 태(胎)도 아니요 이 몸 그대로 돌아온 이상 이름 날릴 방편은 하나뿐이다.’

꺽정이가 이제 와서 회심하고서는 선량하고 어리석은 백성, 아니, 그 백성들보다 아래에 있는 일개 백정으로 살고자 한들, 어디 그 성질 죽이고 살 수가 있겠는가.

목숨 걸고 싸울 때의 그 서늘한 짜릿함. 싸움 끝에 살아남았을 때의 그 허탈한 안도감. 그리고 무엇보다, 산채의 모두가 그를 두령으로, 그들을 지켜주고 이끌어줄 사람으로 받들어 모실 때의 그 뜨거운 즐거움.

임꺽정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오직 그 한 사람으로서 서 있다는 그 한없이 뿌듯한 마음.

그 모든 것을 잊고 다시 무지렁이 백정으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양주 고을 백정으로 아버지와 같이, 또 형님과 같이 살아간다면 죽은 뒤 염라대왕 앞에 다시 섰을 때 할 말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부터가 그 전에 답답하여 필히 미쳐버리고야 말 것이다. 무슨 군공 세워 미관말직 군관이 된들, 거기서 벗어나면 얼마나 벗어날까.’

- ‘그래서 어쩌자는 게냐?  염라대왕도 말하기를 소소한 도적질로는 이름 남기기가 족하지 않다 하였지. 그 도적질 암만 해보았자 끝이 어떻게 날지를 훤히 알고 있으면서, 그 길로 그대로 걸어 들어가겠다고? 병해 어르신 말씀마따나 사람인지 쇠새끼인지 모르겠구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오직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내 말하지 않았느냐. 더 잘 하면 된다. 지난 생에는 되는 대로, 욕심대로 살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놓쳤다. 남들 가려는 길, 여상한 도적이나 악한들이 하려는 일은 모두 피하면서,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 더 비상한 계책, 더 비범한 꾀를 내면 된다.’

그런 꾀가 무엇인지 백날 고심한들 하나라도 떠오르겠냐만, 적어도 꺽정이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장기가 하나 있으니, 바로 남들이 하는 말 아니 듣고 저 하고픈 대로 고집스레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해낼 것이다. 저 북변 산속을 걸어 오르고 남쪽 바다를 자맥질해 건너갈지언정, 저의 숨 다할 때까지 이 길로 끝까지 나아갈 것이다.

결의 스스로 다지며, 그림 속 염라대왕을 똑바로 바라보며 꺽정이 말했다.

“흥, 어디 두고 봅시다. 이왕 돌아온 것, 내 그 어떤 도적보다도 더 이름을 남기고 갈 테니.”

탱화는 당연히 말이 없었다. 그림자도 말없이, 염라대왕을 지나쳐 갔다.

막상 활터에 당도했건만 달이 슬슬 서쪽으로 기울 때까지도 병해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기야, 그 머리 총명하고 말재간은 물에 빠져도 입은 동동 뜰 만한 병해지만, 근면함 세 글자와는 연이 없는 사람이기는 했다. 약조하기를 달이 질 때쯤 만나자 하였으니, 기다리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

무슨 변고라도 있는가 슬슬 걱정되기 시작할 무렵, 마침내 달빛을 (머리로) 받으며 병해가 저 멀리서부터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지금까지 속으로 번민하였던 티를 애써 감추며, 늘 그렇듯 퉁명스러운 말투로 꺽정이가 툭 비꼬았다.

“그냥 그 자리에서 얘기해주면 되었지, 이 오밤중에 이리 불러내니 무슨 고생이오? 누가 보면 무슨 은밀한 모의라도 하는 줄 알겠수다.”

“뭐, 어쩔 수 없지 않으냐. 네가 무슨 소리를 할 줄 알고. 물론 이제 와서 이 절간에서 나를 쫓아내자고 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만, 그래도... 내 속세에 있을 때 무엇 하던 작자였는지, 또 나와 속세에 연 있던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누구든 알게 되면 썩 좋지만은 않을 것이라서 말이다. 마땅히 대비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꺽정이 그의 전생에도 끝내 풀지 못한 물음이기는 했다. 대관절 병해는 무얼 하다 온 이였을까?

“그래서, 마음은 정했느냐?”

병해의 수완에는 의심이 없었다. 어쨌든, 지난 생에서도 꺽정이가 무예 가르쳐줄 사람을 청하니, 말이 권관이지 거의 은거하다시피 한 칼잡이를 곧장 알려주지 않았던가.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게 있으면 모두 들어줄 수 있으시겠소?”

“뭐, 아무리 속세에 연이 좀 남아 있다지만, 그것이 얼마나 대단하겠느냐. 네 바라는 바를 모두 이루어줄 수는 없고, 다만 그것을 이루는 데 도움 될 만한 이를 손 닿는 데까지 알려줄 뿐이다.”

“내가 글공부 하기를 원한다면 어찌하겠소?”

“이 나라가 선비 높인 것이 몇 해인데, 노비의 자식이나 여인네에게도 글자 가르쳐줄 사람이 어디 팔도에 한둘쯤 없겠느냐?”

“장사 배우기를 원한다면?”

“그건 더 쉽지 않으냐. 아무리 장사가 말업(末業)이라지만 저기 한양이든 송도든 길에 치이는 것이 장사꾼인데.”

“농군 노릇에 힘써서 천석꾼 되고자 한다면?”

“결국 농사도 배워야 잘 짓는 것 아니겠느냐. 초야의 선비들 중에 그러한 비법을 모으고 가르치려는 자가 없지 않으니, 그들에게 찾아가 수소문하면 될 것이다.”

몇 번 변죽 울리며 시간을 끌다가 마침내 결심한 꺽정이가 크게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나는 도적이 되고 싶소.”

“인석아, 이 오밤중에까지 농지거리냐.”

“농이 아니오.”

“...”

남의 마음 꿰뚫어보기를 예사로 하는 병해대사도 여기까진 짐작 못 했는지 눈이 조금 커졌다.

할 말 찾느라 애쓴 끝에, 억지로 웃으며 병해가 말했다.

“정녕 도척같이 생긴 놈이 도척이 되고자 하느냐.”

“죽었다 깨어나도 안연은 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않소. 어르신이 일전에 안연이는 요절했지만 도척은 저의 집에서 발 뻗고 자다 죽었다 하지 않았소? 나도 사람인데, 하고 싶은 거 다 하다가 그렇게 죽고 싶지, 어디 가서 쫄쫄 굶다 요절하는 건 사양이오.”

대꾸하는 꺽정의 낯은 진심 그 자체. 마침내 병해도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도, 그래도... 다른 길도 분명 있을진대 어찌 그런 악업 쌓는 길로 나아가려 하느냐.”

“다른 길이 좀체 없으니 그렇지. 실은 내가 백정의 아들이라오.”

혹 병해가 백정놈 자식에게 무슨 공부냐 하면서 내칠까 두려워서, 지난 생에서는 끝내 너무 늦기 전까지 말하지 못하였던 그 말을 이제 와서 다시 하는 꺽정이었다.

“백정놈의 자식이 암만 학문을 이루고 공을 세운들 이름을 드높일 수 있겠소? 끽해야 면천 한 번으로 퉁치면 다행이요, 대개는 그 공조차 남에게 빼앗기고 말겠지.”

“그야 그렇겠지만...”

“어차피 빼앗길 바에야, 내가 먼저 빼앗겠소. 내 짧은 식견으로 생각건대 길은 그것뿐이오. 그 공부를 가르쳐줄 사람을 원하오. 천하에서 가장 큰 도적이 되고자 하오.”

“...”

한껏 커진 병해의 눈에 수심과 연민이 어린다. 꺽정이 고집이 쇠고집이라는 말도 무색할 정도임을 알기에, 더 이야기하지 못하고 몇 번 입을 열었다 닫는다.

그러다 숫제 말하다 말고서는 등 돌려 저기 활터 끝까지 걸어갔다 돌아오기를 두어 번.

전생의 그 천둥벌거숭이라면야 새경 준다는 사람 어디 갔냐며 비아냥댔겠지만, 이제 저 병해의 조카뻘 될 만큼은 나이 먹은 꺽정이었기에 참고 기다렸다.

마침내 병해가 돌아와서는 말을 다시 붙였다.

“중이 도적을 교화하여 아라한을 만든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애먼 중생을 가르쳐 도적으로 만든다는 소리는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하였다.

내가 속세에서 다른 이름에 다른 일 하며 유유자적 살 때에도, 남을 속여먹고 놀렸을지언정 그렇게 도적질하며 살지는 않았다. 그러니 어찌 내가 너를 가르칠 수 있겠느냐? 또 너를 가르칠 사람을 네게 알려줄 수 있겠느냐?”

“하면 어쩌시려오?”

“... 송도(松都, 개성)에 가면 화담(花潭, 서경덕) 선생이라는 기이한 선비가 한 분 계신다.”

이번엔 반대로 꺽정이 눈이 휘둥그래질 차례였다. 그 화담 선생을 전생에서 만나보았을 리야 없지만, 봉산 코앞이 개성이니 어찌 그 유명한 송도삼절(松都三絶)을 모르겠는가.

“너도 그분 명성을 들어본 게로구나.”

“내 배운 건 없어도 귀는 있소. 그러면 그이 앞으로 나아가 무슨 공부든 배우면 된다는 말이오?”

“그래. 그분이시라면, 네놈을 어떻게 가르치든 반드시 옳은 방도를 마련하여 깨우쳐주실 것이다.”

만일 그 옳은 방도를 화담 선생도 가르쳐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임꺽정이, 그리고 어쩌면 이 조선국 운이 거기까지인 것일 테다.

“좋소. 그러면 내 송도로 곧 떠나리다.”

“아니, 네가 무작정 그분 문전에 찾아간다면 석 달 열흘을 기다린들 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네놈 성정으로는 참으려다 참지 못하고 끝내 행패 부려, 곧장 관아에 끌려가 곤장이나 맞겠지.

가서 이렇게 전해다오. 늦깎이 제자가 이미 죽은 사람이 되어, 찾아뵙고 문안인사 올리기는커녕 이렇게 문하생인지 짐덩이인지 모를 천둥벌거숭이 하나만 보내게 되어 참으로 송구스럽다고. 하면 얼추 사연을 짐작하시고 네놈을 댁에 들여 만나보실 테지.”

‘거 끝까지 허튼소리요’ 라며 쏘아붙이기에는 병해의 얼굴이 너무나 진지하였다.

“하면, 누가 보내어 찾아왔다 하면 되겠소? 칠장사 병해 스님 말씀 듣고 찾아왔다 고하리까.”

“아니, 그리 말하면 아마 알지 못하실 테다.”

마침내 병해가 연 끊어 감추어버리려던 그의 속명(俗名)을 꺼냈다.

“가서 이리 말씀 올리려무나. 전우치(田禹治)가 보내어 왔노라고.”

--- *** ---

궁예 활터, 그러니까 궁지(弓地)는 지금도 칠장사 경내에 남아있습니다. 다만 오늘날 남아있는 명부전은 숙종대에 재건한 것으로, 작중에 언급된 명부전과는 다른 건물일 것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