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5화 (5/259)

3. 파문 (2)

올해 을사년 국상을 기하여 (사내 가운데서는) 가장 나라에서 목소리 큰 사람이 된 윤원형에게는 기벽이 하나 있었다.

그 사람됨이 본디 이익에 밝아, 똑같이 인정(人情, 뇌물) 챙기더라도 남들이 고작해야 쌀과 무명, 가죽 따위, 그리고 대국에서 나오는 귀물 등등을 쟁여놓는 동안, 윤원형은 시세에 따라 넘치는 베나 곡식 따위를 팔아 방짜유기처럼 보잘것없는 듯하면서도 실지로는 꽤 귀한 다른 재화를 사들이곤 하였다.

그런데 유독 그중에서 저택만은 딱히 이득 되지 않을 때에도 사서 모으곤 하였다. 윤원형이 누이인 국모(國母, 문정왕후)와 형 원로와 함께 김안로(金安老)을 내쫓을 때만 하여도 고작 세 채에 불과하던 고래등 기와집은 지난해에 다섯 채가 되었고, 선대왕(인종) 즉위하였을 때는 그것이 네 채로 줄었다가, 다시 올 가을에 일곱 채로 늘었다.

개중 (그나마) 보잘것없고 낡은 집에는 정실부인 김씨를 가두어두듯 하고, 나머지 다른 집을 오가며 사는 것이 윤원형의 낙이었다. 때로는 죽고 못 사는 사이인 애첩 난정이(鄭蘭貞)가 먼저 가서 배필 맞이하는 양갓집 규수 시늉을 하고, 때로는 원형이 먼저 가고 나중에 난정이가 몰래 찾아오는 시늉을 하니, 눈꼴시다고 여기는 사람이야 있겠지만 그것을 말로 꺼낼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희희낙락 노니는 와중에도, 저 ‘거의’ 없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윤원형이었다. 이왕이면 깡그리 한양에서 쫓아내고, 더 나아가서는 이승에서 쫓아내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화담 선생을 국정에 끌어들여 사류(士類)의 공론을 호도할 심산으로 개성에 보냈던 이희손이 빈손으로 돌아와서는, 얼굴 붉히며 씩씩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윤원형은 그리 생각하였다.

“자, 자. 병계(昞溪, 이희손), 날도 슬슬 쌀쌀하니 화기가 과하면 몸이 상하오. 우선 진정함이 어떻겠소.”

사람 좋은 체 인자하게 웃으며 윤원형이 이희손을 달랬다.

속으로야, 역시 이 작자의 재주가 이뿐이라, 그의 파벌에서는 쓰고 버리는 패 내지는 외직 돌면서 두둑하니 재보나 올려보내게끔 할 사람으로만 쓰면 족하겠거려니 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겉으로는 인심 좋은 양 꾸미고 있었다.

“허나 금번 옥사에서 인덕 베푼 것이 이렇게 소인들로 하여금 날뛰게 하였으니, 마땅히 처분하여 지금부터라도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소이까?”

“그야 맞는 말씀이시오. 그러나 무릇 국법의 지엄함도 공론(公論)을 아니 따를 수 없는 법. 아직 옥사로 인하여 놀란 민심이 가라앉지 않았으니, 비록 재앙의 근원이 남았다 한들 지금 당장 뽑아 없앨 수는 없는 것이외다.”

때맞추어 주안상이 나왔다.

여전히 씩씩대며, 자신이 화담 기거하는 초당에 가서 봉변한 사연을 중언부언 떠드는 이희손을 앞에 두고, 예의 그 미소 거두지 않고 간혹 끄덕이는 척 하면서 윤원형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그는 항상 그렇게 살아왔다. 겉으로 항상 겸손하게, 부드럽게, 남을 위해주는 양, 스스로 낮추는 양. 그보다 반의 반만도 못한 소소한 욕심을 지닌 자들이, 뽐내며 먼저 나아가서는 구정물을 모두 뒤집어쓰기를 기다려 왔다.

그토록 위세 당당하던 김안로도 그러므로 끝내 자신을 죽여 없애지는 못하였다. 선대왕 즉위하였을 때도 사람들은 소윤의 우두머리가 저의 못난 형 원로(尹元老)라고 여겼으며, 금번 옥사에서도 손을 가장 더럽힌 것은 한때 조광조의 일파였던 정순붕(鄭順朋)이었다.

“허나 비단옷 입었다면 밤일지라도 등불을 밝혀야겠지.”

그간 열심히 힘써 권력을 잡아놓고서, 정작 휘두르지는 않아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제멋대로 말뜻을 (아마도 그릇되게) 짐작한 이희손이, 떠들다 말고 참 옳다고 맞장구를 쳤다.

“이대로 조금만 기다리면, 반드시 어리석은 무리가 먼저 고개를 들어 화를 자초하게 될 것이오. 그때가 되면 반드시 정도(正道)를 밝히고 위엄을 드러내리다.”

물론, 정말로 기다릴 생각은 아니었다. 어떤 꼬투리를 만들어내 누구와 함께 쳐낼까. 즐거운 상상을 하며 껄껄 웃으니, 이희손도 멋모르고 따라서 웃었다.

서경덕은 아침에 일어나면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서 점을 치곤 했다. 무릇 점복(占卜)이란 근원을 따지면 성현이 천지 운수를 따라 창안한 법도이므로 마땅히 복식과 자세를 가다듬고 맑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 옳았다.

선대왕께서 지난 칠월 초하루에 훙서하신 이래 서경덕은 자최삼월(齊衰三月)의 예에 따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상복을 입고, 마음을 정갈하게 하기 위해 방문을 열었다.

바깥의 상쾌한 바람이 들어오며, 동이 막 터 어슴푸레 푸르스름한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풍광을 다 감상하기 전, 시커먼 사내 하나가 성큼성큼 지나가며 경치를 흐리더니만, 한 박자 늦게 몸 돌려 고개 꾸벅 숙였다.

“일어났, 아니, 기침하셨습니까?”

“오냐. 거정(巨正)이 너도 어지간히 일찍 일어났구나.”

“간밤에 잠자리가 꽤 추우셨던 모양이라, 장작이나 패러 갑니다.”

여전히 입에 안 익은 존댓말에, 장작보다는 어째 사람 머리통 쪼갤 것 같은 기세로 어깨에 걸친 도끼자루. 불청제자(不請弟子) 임거정이었다.

거정이야 저를 꺽정이로 불러달라 하지만, 서경덕이 생각하기에는 이왕 천한 사람이 스스로 드러내고자 성을 자작(自作)하였다면 이름도 마땅히 있어보이게 바꾸는 것이 옳았으므로, 한사코 거정이라 부르고 있었다.

“네가 구들 데우는 법을 다 아느냐?”

“그야 뭐, 그냥 아궁이에 섶이랑 장작 넣고서 불 지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구들장 놓인 집이 뭐 그리 드문 것도 아니고.”

누가 그 콧대 높은 송도 토박이 아니랄까봐, 구들장 같은 문물이 아직 다른 군현에는 없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허나 청석골에서 두목 노릇 할 때 산속에 번듯하게 산채 꾸려두고서 따뜻하게 지냈으므로 꺽정이가 온돌을 모를 리 없었다. 본래대로라면야, 양주 본가는 물론이요 일대 백정들치고 집에 구들장 깔린 경우가 없었으니 모르는 것이 맞았겠지만,

“그래,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염려 마시우. 아니, 마십시오.”

하고서는 또 휙 몸 돌려 성큼성큼 걸어나간다. 허우대도 큼직한 놈이 또 몸은 퍽 날래니, 양민으로 태어나기만 했더라면 필히 장재(將材)라 일컬음 받았을 것이련만.

도로 방에 들어가 정좌하고서는, 산통의 뚜껑을 열고 산가지를 잡아낸다. 때맞추어 하나가 통에 걸려 나오지 않았으니 절로 마흔아홉 개가 놓인 셈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득, 잡상(雜想)이 들어 맥이 끊겼다. 며칠 전 저 짐덩이 제자를 들였을 때 점쳤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날 아침 분명 나그네 온다는 여(旅) 괘를 얻었기에, 근래 조정에서 옥사가 일어나고 사람됨 현량한 척하면서 실제로는 간악한 윤원형이 권병(權柄) 잡은바 조만간 그쪽에서 무언가 수작 부리려는 듯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한양 오가는 상고(商賈)들 중 가끔 들려 소식 전해주는 이들 말만 들어보아도, 벌써 김인후(金麟厚)와 같이 도학으로 이름 높은 사람들이 칭병하고서 낙향하기 시작하였으니, 그렇다면 차라리 아직 출사하지 않은 사람을 끌어오고자 꾀를 부리기 시작할 것이었다.

그러나 아뿔싸, 결국 변화무쌍한 세상의 이치는 사람 하나가 모두 헤아릴 수 없는 것이어서, 그 이희손이라는 작자를 피했거려니 여겼건만 더욱 머리 아프게 하는 녀석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시라소니 피하려다 범 만나는 꼴 아니겠는가.

어느새 마음도 몸가짐도 정(靜)을 잃었다. 거정이 생각을 하다 보니, 또 거기서 다시 죽은 줄만 알았던 전우치 이야기로 마음이 흘러가 종잡을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조짐을 깨닫고 그쳐야 하리라. 피식 웃으며 산가지를 도로 산통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다시 불편한 몸을 일으켜 바깥에 나왔더니만, 장작 마련하러 간다던 거정이가 그사이 돌아와서는 마당 한구석으로 장작 여러 꾸러미를 옮기고 있는 것 아닌가.

“허공섭물(虛空攝物)이라도 한 게냐?”

“그러는 스승님이야말로 무슨 조화를 일으키신 것 아니시오? 나가자마자 보니까 사립문 앞에 이렇게 장작이 놓여 있더이다.”

저도 모르게 말이 합쇼에서 도로 하오로 바뀐 거정이가 대꾸했다.

“하하. 또 누가 두고 간 모양이로구나. 이웃들 중에 이렇게 소소하게 도움 주는 이들이 간혹 있단다. 어찌 고맙지 않겠느냐. 저기 저쪽에다 옮겨놓거라.”

물 길어오던 어린 종 밤이도 그제야 장작을 보고서 헐레벌떡 달려왔다.

“스승님께서는 참으로 덕이 도탑기도 하시오.”

“내가 뭘 하는 게 있겠느냐. 다만 여기 가만히 앉아 다른 사람들 고민하는 것을 들어주고, 어찌하면 풀어나갈 수 있을까 소소한 꾀를 조금 내어주고 할 뿐이다.”

지난 며칠간 의외로 이 초당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는지 – 그리고 개중에는 사립문이 난데없이 바뀐 것을 알아보고서 사연을 묻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 거정이도 고개를 순순히 끄덕인다.

“아직 조찬 지을 때까지는 꽤 남았으니, 이왕 이리된 것 그간 스스로 배운 바가 무엇인지나 들어보자꾸나. 『소학』은 읽을 만하더냐.”

하늘 아래 무서운 것 없을 듯하기만 하던 거정이 낯빛이 그제야 딱딱하게 굳는다. 쩔쩔매며 변명하는 말이 나온다.

“그것이... 조금 어려워서...”

처음에 당당하게 밝히기를, 천하의 큰 도적이 되고자 하니 가르침을 내려달라 하였던가. 서경덕은 그때, 이 덩치만 큰 소년이 겉멋이 들어 – 사실 서경덕 저도 대충 저 나이대에는 저러하였다 – 자신이 헛소리하는 것도 모르고서 마음대로 떠드는 것이라 짐작하였다.

아무리 그의 학풍이 이 나라의 다른 이름난 선비들과 다르다 하나, 어쨌든 서경덕도 선비의 한 사람이요, 스스로 배운 학문(自得之學)으로 일문을 이룬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선 글공부를 조금 한 다음에 비로소 더불어 논할 바가 있으리라 여기면서, 우선 서책부터 몇 권 내어주고서 다 읽은 뒤에 논하자 하였다.

그제야 수줍게, 아직 진서를 읽지 못한다 하였으므로, 전우치의 제자 보는 안목을 탓하면서 근년새 새로 나왔다는 『훈몽자회(訓蒙字會)』 한 질을 함께 내어주었다.

모르는 글자가 있으면 찾아서 배우면 될 것이요, 혹 찾아도 나오지 않는 글자라고 해도 그 자리에서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방 뜻을 알 수 있을 테니, 그 의도야 어찌 되었건 배우려는 열의가 있는 한 금방 다 읽으리라 여겼다.

“무엇이 그리 어렵더냐?”

비꼬거나 꾸중하려는 뜻 없이, 그저 궁금하여 물었다.

나중에야 그의 아들딸들 가르치던 것을 떠올리고서, 사실 지금까지 그의 문하에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였던 이들이 그 몸의 귀천과 무관하게 유난히 총명하였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내가, 아니, 제가 글방 문지방은 못 넘어봤지만, 그래도 책 한 질 떼는 데 족히 몇 달 걸리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헌데 몇 달은커녕 보름도 채 주지 않고서 그렇게 술술 떼기를 바란다니, 이제 보니 스승님이 도둑놈 심보 아닌가 싶습니다.”

도적 되길 원한다더니 적반하장(賊反荷杖)도 곧잘 하는 모양이었다. 피식 웃었더니 그사이 제 발 저린 거정이가 마루 위로 뛰쳐 올라와서는 『훈몽자회』를 꺼내와서는 훌훌 펼친 뒤 내밀었다.

“더구나 진서(眞書, 한문), 진서 하는데 뜻 하나에 글자 여럿이 있어서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게 무슨 참된 글자란 말입니까. 이 보십쇼, 여기.”

겁도구적(劫盜寇賊).

자기가 막혀 있는 부분이라고 펼친 부분도 참 저 같은 대목을 골라서 펼친다.

“아무리 스승님이시라지만 너무하십니다그려.”

“아, 내가 생각만 한다는 걸 말로 옮긴 모양이로구나. 미안타.”

멋쩍음에 헛기침이 절로 나온다. 거정이에게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오라 하고서는, 곧장 섬돌에 쭈그려 앉아 큼직하니 글자 넉 자를 써본다.

“자, 이것이 후릴 겁(劫), 그리고 도적 도(盜), 도적 구(寇), 도적 적(賊). 겁 자야 훈이 후릴 겁이라 붙어 있으니, 강도질 뜻한다는 것은 너도 짐작했을 테다.”

거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네 생각에 저 도적 뜻하는 세 글자는 차이가 과연 무엇인 것 같으냐?”

“그걸 배우러 찾아온 것 아니겠습니까.”

“네가 스스로 깨우쳐야지, 내가 어떻게 하나하나 다 짚어주며 가르치겠느냐.”

“스승님께서도 지금에야 그리 말씀하시지만, 소싯적에는 스승님의 스승님 모시고서 배우셨을 것 아닙니까?”

“나는 홀로 공부하여 깨우쳤단다.”

“...”

말 한 마디 지지 않고 대꾸하던 녀석이 마침내 말을 잃었다.

“물론 사람의 성정과 기질이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칠공구규 오장육부 고루 갖춘 것은 같을진대 어찌 해보지도 않고서 아니 된다 하겠느냐. 자, 어디 한 번 함께 고민해 보자꾸나. 먼저, 대관절 도적이란 무엇이라 할 수 있겠느냐?”

그의 옆에 걸터앉아 있던 거정이가 잠깐 고민하다가 답했다.

“남의 것을 탐내어 빼앗는 게 도적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큰 도적은 또 무엇이냐?”

“남의 것을 더 많이 빼앗으면 그게 큰 도적이겠지요.”

“하면 더 많이 빼앗는다는 것은 또 무엇이겠느냐? 재물을 많이 빼앗는다는 뜻이냐? 아니면 많은 사람에게서 빼앗는다는 뜻이겠느냐? 도적도 그러므로 다 같은 도적이 아닌 셈이다.”

“... ”

고민에 너무나 깊게 빠져 미간에 내 천(川) 자 새겨진 거정이를 보며, 조금 도와주고자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아 본다.

“내가 살피기에, 큰 도적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무릇 그쳐야 할 때 그치고(止) 가야 할 때 가면(行) 그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올바르게 된다. 한낱 미물부터 크게는 하늘과 땅까지, 각각 그 성(性)에 따라 마땅히 그쳐야 할 곳을 찾는 것이다.”

도적 세 글자 옆에 지(止) 자를 그린다.

“그리고 처한 바에 따라 마땅히 그쳐야 할 곳을 얻는다면, 비로소 이렇게 된다.”

지 자 위에 한 획을 가로로 그어 정(正) 자를 만든다.

“그런데 도적이란 본디 가져서는 아니 될 것을 탐하는 자다. 스스로 그쳐야 할 곳을 알지 못하고, 물(物)을 탐하여 마침내 물을 물로 여기지 못하게 되니, 어찌 크다(大) 하겠느냐? 아무리 그러모은들 위태롭고, 또 아무리 빼앗은들 만족하지 못할 것이니, 결국 스스로 거꾸러질 뿐이다.”

“... 아오, 머리야.”

“하하. 금방 알아듣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나자마자 아는 것이니 성인의 경지 아니겠느냐. 이것은 그저 내 생각이니 불변하는 도라고 감히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네가 큰 도적 되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그 큰 도적이 무엇인지를 모르고서야 백 년을 홀로 공부한들 그 뜻을 이루겠느냐. 다른 서책도 널리 읽으면서 더 공부해보도록 하거라.”

그때쯤 비로소 시장기가 동하여 반상을 내오라 하였다.

그렇게 또 며칠이나 흘렀을까. 산에는 단풍이 들다 못해 흐드러지고, 바람은 조금씩 절기 따라 쌀쌀해지고, 국상으로부터 석 달이 지나 서경덕이 상복을 벗을 즈음.

그 동안 거정이는 질 수 없다는 듯, 나름대로 말을 짜맞추고 성현 말씀을 취장절구하여 ‘큰 도적’이 여기 있노라 대들곤 하였다. 한번은 심지어 『장자』에 나오는 도척(盜跖)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직접 끌어오기도 하였는데, 저의 몸 놀리는 재주에 비해 글머리도, 말재주도 턱없이 부족한 고로 논쟁이 붙으면 한 각도 버티지 못하고 침몰하곤 하였다.

그러던 중, 간만에 진이와 함께 박연폭포 나들이나 한 번 더 갈까 생각할 때의 일이었다.

산적처럼 생긴 녀석이 싱글벙글 웃으며 돌아왔다.

“스승님, 내 알 것 같소! 그 큰 도적 말이오,”

그사이 존대하는 말은 거의 다 입에서 떨어져버린 거정이 말했다.

“오, 그러냐. 들어보자꾸나.”

“내 생각해보니, 결국 도적이 암만 날뛴다 하여도, 스승님 말씀마따나 저의 손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다고 하면 오래가지 못할 수밖에 없겠다 싶었소. 그런데 정말로 도(道)가 멀리 있는 게 아니었소. 도둑질의 가장 높은 경지라 하면, 도둑맞는 사람이 스스로 도둑에게 저의 재물을 가져다 바치게끔 하는 것 아니겠소?”

논리의 흐름이 어째 이상했다. 그러건 말건 거정이는 예의 그 험상궂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당당하게 결론을 내었다.

“그리고 도둑질하는지도 모르게끔 도둑질하는 사람이라면, 역시 선비 아니겠소?”

“...”

“아니요?”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오는지, 아니면 마치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하여 말이 안 나오는지, 서경덕도 쉽사리 알 수 없었다.

--- *** ---

이희손은 윤원형의 과거 동기로, 꽤 정의가 두터웠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인물됨이 용렬하였는지, 여러 차례 탄핵당했음에도 자리보전을 하긴 하였으나 그뿐으로 그리 벼슬이 높이 오르지는 못했습니다. 사헌부 장령을 끝으로 경직을 마치고 외직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광주목사로 있던 중 을묘왜변이 터지게 됩니다.

이때 조정으로부터 강진을 지키라는 명을 받았는데, 막상 싸움이 시작되자 바로 도망쳤고, 최상급자가 적전에서 도주하면서 지휘체계가 붕괴됨에 따라 강진은 고스란히 왜적에게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 윤원형의 ‘쉴드’로 제주도로 잠시 유배되었다가 곧 돌아오게 됩니다. 윤원형이 몰락할 당시 올라온 고발에 따르면, 이때 윤원형은 애걸복걸하는 이희손에게 집에 전해내려오는 가보 – 그의 조상이 다름아닌 양녕대군임을 고려하면 의미심장합니다 – 를 내어놓으라 가차없이 요구하였다고 합니다. 어쨌든 그 덕인지 삼사의 연이은 탄핵에도 불구하고 다시 벼슬길에 올라 오위장과 첨지중추부사를 지냈습니다.  이희손의 호는 작가의 창작입니다.

윤원형의 부정축재는 여러모로 유명합니다. 야사에 따르면 몰락할 당시 그는 서울에 집을 열여섯 채나 가지고 있었다고 하지요. 물론 그렇게 집을 많이 사들인 뒤 정난정과 함께 노닐었다는 것은 작가의 창작입니다.

서경덕은 자신의 말처럼 뚜렷한 스승 없이 스스로 학문을 이루어 조선 사상사에 큰 획을 그었습니다. 비록 그의 학문적 성취에 대해서는 당대에나 지금에나 많은 논쟁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독자적 학문을 비판한 성리학자들조차 서경덕이 스스로 하나의 체계적인 학문을 이루어낸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요. 글자 하나, 또는 현상 하나를 두고 계속 궁리하여 무언가를 깨닫는 공부법은 실제로 그가 종종 취했던 공부법이라고 전합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스스로 세상을 벗어난 처사를 자처하였고, 실제로도 그를 신비한 도인으로 형상화하는 민담이 많이 전하는 것과는 달리, 서경덕은 일생 전체에 걸쳐 현실에 깊게 관여하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종실부터 천민까지 다양한 계층의 제자를 두었고, 또한 초야에 묻혀 있으면서도 지극히 실무적인 내용의 상소를 올리곤 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의 각종 이인(異人) 설화에 서경덕과 그의 제자들이 단골로 등장하는 것은, 오히려 그만큼 서경덕이 민간의 삶 속에 깊이 들어가 있었음을 방증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엄진성, 2020. “서경덕 학파와 조선 성리학의 민중화 – 서경덕의 역철학을 중심으로.” <철학논총>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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