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파문 (3)
“한 줄기 긴 하늘이 골짜기에서 뿜어나오니
백 길 용추(龍湫)에 물은 모이고 모이네.”
흐드러진 단풍은 서리 맞고서 기세가 죽어, 슬슬 낙엽이 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박연폭포 절경은 어디 가지 않으니, 알록달록 잎새가 나무에 달려 있든, 폭포수 따라 계곡으로 동동 떠내려가든 어찌 멋이 덜하다 하랴.
“우박 휘날리고 우레 치달려 온 골짜기 메우는데
튀어나간 구슬은 옥처럼 부서져 맑은 하늘을 꿰뚫누나.
노니는 이들이여, 여산(廬山) 풍광을 말하지 마시라.
모름지기 천마산(天磨山)이 해동의 으뜸임을 알아야 하리니.”
황진이가 그 자리에서 곡조에 실어 읊으니, 고개 끄덕이며 듣던 화담 선생이 찬탄한다.
“좋구나.”
반면 함께 따라온 꺽정이는 그새를 못 참고 삐죽 불평을 덧붙인다.
“멋지구려. 그러니까 어려운 문자 쓰지 말고 이렇게 읽어주면 오죽 좋소?”
필시 『훈몽자회』를 다 떼고 그 짧은 글로 황진이가 써서 스승에게 바친 시를 읽으려다 고배 마신 그 사소한 원한이 남은 것일 테다.
“얘, 한시는 한시대로 맛이 있고 시조는 시조대로 맵시가 있는 것이란다. 스승님, 간만에 생긴 사제(師弟)가 이리도 멋을 모르니 어찌해야 할까요.”
“잘난 네가 참아야지, 어쩌겠느냐.”
이제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 부쩍 가을 넘기며 기침이 늘어난 서경덕은 이곳 박연폭포에 자주 오지 못할 테다. 올해 나들이는 이것으로 끝이려니 생각하며, 몇 번을 와도 새로운 경치를 눈에 담았다.
그사이 황진이는 (꺽정이가 역시 투덜대며 매고 온) 거문고를 들고서 용추 옆 큰 바위 위로 훨훨 올라가서는, 편하게 앉아 현을 뜯기 시작하였다. 우레같은 폭포 소리를 뚫고서 맑은 도드리 곡조가 들려왔다.
나이로 치면 마흔줄이요 미모는 쇠하기 시작한 지 오래라. 마치 아름다운 정원이 사람 손을 타지 못해 조금씩 퇴락하는 것과 같아, 이제 절정을 지나 끝으로 향해가는 가을 숲 풍광과도, 저 위에서 떨어져 또 정처없이 흘러가는 폭포수와도 어우러졌다.
한때 자색(姿色) 출중하였던 여인이라면 분칠부터 시작해 갖은 수로 눈가의 주름을 감추고 옷맵시로 몸을 가릴 법도 하건만, 황진이는 도리어 그것을 감추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내니, 그 또한 기묘한 멋이요 미(美)라.
전생에 한양에 올라갈 때면 곧장 기방(妓房)도 드나들었던 꺽정이었지만 이러한 모습은 처음이라, 저도 모르게 눈이 붙박이가 되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리 수양이 부족해서야 어느 세월에 선비가 다 되겠느냐.”
‘그러면 선생은 안 보고 배기겠소?’라고 반문하려 몸을 돌리니, 정말로 서경덕은 폭포만 보고 앉아있었다.
“내가 언제 선비가 되겠다 하였소?”
“네가 네 입으로 큰 도적이 되겠노라 하지 않았더냐. 그리고 그 큰 도적이 선비라 하였으니, 그러면 마땅히 선비가 되어야지.”
“...”
그제야 며칠 전 자신이 득의양양하게 고해바쳤던 ‘답’이 제기하는 자가당착의 지경을 깨달은 꺽정이는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 그래도 선비는 싫소. 선비는 도통 쓸모가 없단 말이오.”
“쓸모가 없다니 무슨 말이냐? 뭐, 나야 분수를 헤아려 스스로 은둔하고 있다지만, 선비라 하여도 다 같지 않으니, 누군가는 경세(經世)의 뜻을 품고 백성을 새롭게 하고자 세상에 나와 일하며, 또 누군가는 현명한 군주를 보필하여 천하를 바르게 하는 법이다.
천하에 선비가 없다면 어찌 바름을 알고 덕을 펼 것이며, 또 어찌 지난 일을 꿰뚫고 훗날에 대비하겠느냐?”
자신이 기어오를 때도 빙긋 웃으며 받아주고, 그가 지금껏 보았던 어느 양반님네보다도 더 어진 듯한 이 화담 선생이, 또 고리타분해질 때는 어찌 이렇게 한없이 꽉 막힌다는 말인가. 그간 죽이고 있던 성질이 되살아나며 은근슬쩍 짜증이 솟아나, 저도 모르게 말에 가시가 돋친다.
“그러면 지금 우리 조선국은 선비가 없어서 이 모양이오?”
어린 녀석 치기로만 알고 가볍게 대꾸하던 서경덕의 말문이 갑작스레 막혔다.
“내 스승님을 알고 모신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참으로 훌륭하고 성품 어지신 것은 족히 알겠소. 하지만 내 발품 팔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보니, 이 나라에 스승님같은 분들이 그리 많지는 않은 모양이외다. 그것이 아니라면야, 있어도 보탬이 안 되는 것일 테고.”
꺽정이 스스로 폭언이라 여기지 않고서 던지는 말이 폭언이 되어 스승의 가슴에 박혔다. 지금까지 가볍게 받아넘기던 서경덕도 잠시 머리를 정리하고서는 진지하게 답했다.
“너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 나라에 어찌 선비가 없다 하겠느냐? 비록 천하를 보는 눈이 나와 같지는 않지만 능히 왕업을 보필할 수 있는 사람이 결코 드물지 않으니, 지금은 잠시 숨어 있다지만 언제고 다시 세상에 드러나게 되면 지금의 소소한 어지러움은 다스려질 것이다.”
그래, 꺽정이 그가 알던 갓 쓴 무리들도 대개 저런 소리들을 하곤 하였다.
그러나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확실하게 한 가지는 아는 꺽정이었다. 그러므로 자신보다 총명함도, 아는 것도 족히 여러 곱절은 될 이 화담 선생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어지러움은 다스려지기는커녕 해를 거듭하여 드높아질 것이다. 윤원형이는 윤원형이대로 패악질을 부리고, 임금의 어미는 어미대로 나랏돈을 흩뿌리며, 해를 거듭하여 가뭄과 큰물, 역병이 돌 것이다.
적어도 꺽정이가 구월산에서 화살 맞을 때까지의 세상은 그러하였다.
“그러면 왜 지금 그렇게 하지 않고 때를 기다린다는 말이오? 나 같은 백정이야 천한 몸이니 고생한다 쳐도, 당장 양민들만 하더라도 맨날 대립값(代立價) 마련하랴 토산품 값 대랴 집안 살림이 남아나지 않는다 합디다.”
꺽정이네 패거리가 팔도에 이름을 떨치기 전부터 이미 유랑하는 백성들은 많았고, 그들이 작당하여 여기저기 털고 다니는 일도 허다하게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면면을 보면, 정말로 욕심이 많아서, 천생 악한이라 패악질 부리는 자들도 없지 않았고, 스스로 생각건대 꺽정이 저도 그쪽에 들 터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의 패거리에 낄 수밖에 없던 그의 형 가도치처럼, 분명 제대로 다스려지는 나라라면 도둑질은커녕 길가의 풀 한 포기도 함부로 뽑지 않았을 사람들이 꺽정이네 패거리 안에도 적지 않았다.
“금방 다스릴 수 있을 어려움이라면 왜 그것을 지금 다스리지 않는 것이오?”
“... 그것은 내가 식자(識者)로서 차마 할 말이 없구나. 그러나 지금 조정이 어지럽고 어질지 못한 신하들이 횡행한다 하지만, 운수가 다 되면 반드시 사필귀정(事必歸正)하여 바른 도가 다시 이루어질 터.”
홀로 하늘 위를 노니는 것 같던 황진이의 거문고 소리도 어느새 끊겼다.
“선비들이야 그렇게 마음대로 들고 나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제자처럼 밑바닥에 있는 놈들은 도저히 그리할 수 없소. 똑같이 집에 곡량 떨어져도 선비님네들은 냉수로 속 차리면 그뿐이지만, 우리네들은 당장 관아에서 아전이 나와 없는 곡식 만들어서라도 바치라 한단 말이오.”
“백성이 수탈당하여 곳간에 콩 한 쪽 남지 않고 바늘 하나 꽂을 땅조차 빼앗기는 것은 분명 사람을 잘못 뽑은 제도의 잘못이요, 또한 그릇되어 폐단만 쌓이는 법도의 잘못이다. 허나 이것을 고치려면 결국 선비의 현량한 계책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지금 네가 말하는 것이 물론 잘못된 일은 맞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선비의 쓰임이 중한 것이다.
선비가 나아가서 밝은 임금을 모시고 물러나서 일월을 벗삼는 것은 당우(唐虞) 이래 지금까지 변함이 없었고, 왕망과 동탁 같은 무리가 잠시 위세를 부릴지언정 기어이 무너져내려 비참하게 되는 것 역시 지금까지 변함이 없었다.
천지의 도리란 대개 저 폭포수와도 같다. 저 폭포에서 떨어진 물이 아래에 잠시 고여 머무는 것처럼, 잠시 그러한 도가 흐트러진 듯할 때가 있을지언정 반드시 오래 가지 못한다.
물이 하늘에서 땅으로 흐르고,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사람 사는 세상도 위에 임금이 계시고 아래에 백성이 있으니, 높은 사람은 높은 사람대로 도를 다하고 낮은 사람은 낮은 사람대로 그 자리를 지키게 되는 것이다.”
“정녕 하늘의 도가 그렇다면, 그 도가 잘못된 것이오.”
매정한 폭포는 쏟아져 내리기만 할 뿐, 화담 선생을 갈음하여 답변해주지는 못하였다.
해는 바뀌어 병오년(1546)이 되고, 절기도 겨울을 지나 춘삼월이 되었다.
그날 박연폭포에서 논쟁한 이후로, 꺽정이는 (그제야) 서경덕이 저를 쫓아내지는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스승이라는 자가 일견 다른 듯하면서도 결국 속은 여느 서생과 다름 없다고 하면 굳이 모실 것도 없지 않은가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오히려 서경덕은 저를 불러다가 계속 이것저것 물어보고, 또 반대로 네가 답해보라며 생각거리를 던져주기도 하였다.
‘네 말대로 지금 백성들은 참으로 곤궁하여 살기가 어렵다. 네 말대로 이것을 당장 해결하자고 하면, 어떤 계책을 베풀어야 하겠느냐?’
‘그것을 왜 내게 묻소? 나는 도적질 하겠다고 공언하였는데.’
‘선비가 큰 도적이라면, 그들보다 잘하는 바가 있어야 더 큰 도적이 될 것 아니냐? 네 말대로 선비들이 도통 세상일에 쓰임이 없다면, 네가 그들보다 잘나서 더 훌륭한 꾀를 낸다면 절로 가장 큰 도적이 될 수 있겠지.’
어딘가 이상한 말인데, 자신의 논리를 그대로 가져다가 내놓으니 꺽정이가 당해낼 수 없었다. 과연 서책을 가까이하면 머리가 좋아지는 것일까.
‘천하의 도가 잘못되었다고 당당히 외치고 싶다면, 이를 대신할 만한 무언가도 네가 내놓아야 하지 않겠느냐?
당장 쓰임새 있는 계책을 내놓을 수 없다면, 스스로 궁구하여 깨달으면 될 일이다. 격물치지(格物致知) 네 글자가 괜히 있겠느냐?’
나중에 황진이가 웃으며 일러주기를, 저것이 공자님이 제자 가르치던 방법이라던가. 그러나 자신이 시작한 일이라서 저 물음을 피할 방도도 없던 꺽정이에게는 공자고 공자 할애비고 그저 부담스러울 따름이었다.
‘그것을 일조일석(一朝一夕)에 깨달을 수 있으면 내가 스승님을 가르치고 있지 않겠소?’
‘녀석, 이제 문자도 제법 쓰는구나. 그래, 네 말대로 깨달은 다음에 나를 가르치면 될 일 아니더냐? 나야 요새 영 몸이 불편하다지만, 너는 젊어서 팔팔하니 저기 저자도 돌아다니곤 하니, 작정만 한다면 눈과 귀에 들어오는 것이 적지 않을 터.
배우고자 마음만 먹으면 천하 만물이 모두 배움 취할 만한 것이니라.’
그러나 그 배우려는 마음은 여간 마음이 아닌지, 꺽정이가 암만 먹으려 하여도 어디에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허나 이대로 떠나자니, 이 조선 땅에 화담 선생 아니고서야 저 같은 놈과 이런 이야기 나누어줄 사람이 또 있을까 싶어 발목이 잡힌 채 겨울을 났다.
올해부터 시작하여 줄곧 가뭄이 들면서 인심은 흉흉해지고 끼니 걱정은 늘어날 것을 아는 꺽정이였기에, 요새는 스승님 제자 노릇과 더불어 황진이네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다.
화담 선생과 명기(名妓) 황진이나, 속세 재보에 큰 관심 없는 것은 사제(師弟)가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서경덕은 정말로 살림이 빈한한 반면 황진이는 여기저기서 어리석은 남정네들이 바치는 것이 꽤 있었으므로 그 집안사정은 같지 않았다.
다만 황진이는 남녀 종복 몇 구(口)를 제하면 식솔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요, 스스로 치장하고 꾸미는 비용과 화담 선생 살림살이 돕는 것을 제하면 딱히 나가는 곳도 없는지라, 절로 곳간만 가득 차고 귀물(貴物)들은 그 귀함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꺽정이 생각하기에, 동문의 정을 내세워 고매하신 사저(師姐)께 품삯 좀 넉넉하게 쳐달라 하면 이문이 크게 남을 것이었다.
송도는 저자도 크고 넓으니, 비단이든 무엇이든 챙겨서 무명이나 곡식으로 바꾸어 양주 집에 떡하니 가져다주면 저의 집안사람들 배곯을 일도 없을 것이요, 하다못해 그의 형 가도치도 우리 배도치가 마침내 사람 노릇 한다며 흡족히 여기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오늘 하기로 한 일을 모두 마치고, 잰걸음으로 초당에 돌아온 꺽정이가 딴에는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니, 요 며칠 앓아누워 있던 서경덕이 조금은 기운 차린 목소리로 답하였다.
“스승님, 내 다녀왔소.”
“어, 우리 도둑놈 왔느냐.”
오늘은 또 어떤 물음으로 그를 괴롭게 할 것인가. 은근슬쩍 각오하며 오늘은 이 머리통이 조금 밥값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초당 방문이 열리면서 문지방 바깥으로 처음 보는 사내가 걸어 나왔다.
“인사 올리거라. 네 사형(師兄) 되는 형백(馨伯, 이지함의 字)이다.”
분명 의복으로 보나 얼굴 생김새로 보나 천생 서생인데, 근골은 장대하고 기세는 어딘가 무골(武骨)이었다. 그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옆에 찬 것은 환도일 테다.
“오, 이 아이가 거정이입니까.”
“꺽정이오.”
“버르장머리가 참 제 더벅머리처럼 제멋대로인 녀석입니다, 스승님.”
“뭐, 금세의 도척(盜跖) 되길 바라는 녀석이니 어쩔 수 있겠느냐. 저 녀석이 꿈을 이루어야 너도 유하혜(柳下惠)가 될 테니. 둘이 잘 지내거라.”
남 괴롭히거나 산등성이 넘나들며 싸움박질하는 데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꺽정이지만 문리(文理)는 영 트이지 않는 고로, 『훈몽자회』를 뗀 뒤로는 진도가 지지부진하여 『소학』도 아직껏 다 떼지 못하였다.
꺽정이를 불러다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뭔가 끝없이 고민하고, 홀로 생각하고 하기를 반복하던 서경덕은, 결국 꺽정이가 사서삼경 배우기를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본인이 직접 말로 경전을 풀어서 가르치기에 이르렀다.
특히 병해에 이어 서경덕도 툭하면 저 도척 이야기를 하므로, 꺽정이도 항상 그 두 글자가 언급되면 귀담아 듣곤 하였다. 공자를 가르치는 도적이라니, 선비 되기는 싫고 선비보다 더 큰 도적은 되고 싶은 꺽정이에게 얼마나 솔깃한 이야기겠는가.
그러므로 저 유하혜라는 이름도, 도척 이야기에 나오는 도척의 형을 뜻함을 익히 알고 있었다. 공자 살던 노나라에서 높은 벼슬하던 사람이었다던가.
“스승님, 제가 저 거정이와 잘 지내려면 먼저 한 가지 확실히 해두어야 할 일이 있을 듯합니다.”
근골 장대한 서생이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네가 싸움질을 좀 하느냐?”
“네가 무(武)를 조금 익혔다고 거들먹거리고 다니더니, 반드시 봉변할 줄을 알고 있었다.”
“아니, 남들 앞에서는 이러지 않습니다, 스승님!”
자못 억울한 듯 이지함이 불어터진 입으로 변명을 주워섬겼다.
이지함도 어디 가서 힘이 달린다는 얘기는 아니 듣는 편이었다. 특히 겉보기에는 일개 서생처럼 생겼으니, 그 옷 아래에 붙은 힘줄을 보지 못한다면 마치 도술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보일 테다.
더구나 스스로 고안하였다고 자부하는 괴팍한 술법으로 몸을 단련하니, 세상에 몸을 날렵하게 하겠다며 솥뚜껑을 갓으로 쓰고 다니는 작자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세간에서 기인이사(奇人異士)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서경덕이었지만, 이지함이 하는 짓을 보면 가끔 억울하다는 실없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그저 저 꺽정이 녀석이 천생 무골(武骨) 장군감인 겁니다. 저도 어디 가서 일신 위중한 지경은 아니 당할만큼 솜씨를 갈고 닦았는데...”
“되었다.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무얼.”
씨름으로 붙자 하니 단숨에 휙 몸이 날아가고, 나뭇가지 가져와 환도로 싸우는 시늉을 하며 겨루자 하였더니 한 합에 목이 날아갈 뻔했다. 지금도 목이 뻑적지근할 정도이니, 꼭 진검이 아니었더라도 녀석이 작정하였다면 훨씬 크게 다쳤을 것이었다.
(꺽정이 딴에는 그 근골을 보고 조금 힘을 써도 되겠거려니 여겼던 것이다.)
“스승님께서 저 꺽정이 말씀을 하시기에, 저라도 조금 기를 죽여놓을 수 있을까 생각하고서 그리했습니다.”
“그래, 덕분에 녀석은 더욱 오만방자하게 되었구나. 이미 군자삼락(君子三樂) 누리는 녀석이 그리도 몸이 근질거리더냐.”
이지함은 고향에서 그의 조카 이산해(李山海)를 가르치는 일에 심혈 기울인 지 여러 해였다. 이산해는 나이 다섯에 『태극도(太極圖)』의 이치를 깨우친 신동으로, 벌써부터 향시에서 여러 차례 장원을 거둔바 과연 이 문정공(文靖公, 이색)의 기혈을 이었다고들 하였다.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가르쳐 기르니, 맹자가 말한 군자의 세 낙 중 마지막 세 번째까지 이룬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그것만으로는 이지함을 만족시키기에 부족한 모양이었다.
“스승님 앞에서 말씀드리기는 참으로 민망하지만, 불초 제자의 문중을 가히 일으켜세울 만한 아이입니다. 요새 시국도 수상한바 멀리 남명(南冥) 선생께 보내 학문을 더 배우게끔 할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 참으로 장한 생각을 하였구나. 그런데 그것과 지금 거정이에게 형편없이 두들겨 맞은 것은 무슨 상관이란 말이더냐.”
“... 제자가 수양이 부족하여 스승께 누를 끼쳤습니다.”
“되었다. 저 녀석도 너의 동문이거늘, 무슨 누 될 바가 있느냐. 더구나 거정이가 네 말대로 장재가 있으니 더욱 그러한 것이지.”
알면서도 이렇게 놀렸다는 말인가. 여전하시다 생각하는 이지함이었다.
“그래, 내려가서도 무예를 닦고 있었다 하니, 아직도 출사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로고.”
“그렇습니다. 이제 산해가 문하를 떠나게 되면... 조금 더 천하를 유람할 생각입니다. 보령 바닷가에 가서 선인(船人)들 일도 조금 배우고요.”
“뱃놀이라도 하려고 그러느냐?”
“하하, 어디 놀기만 하겠습니까. 영주(瀛洲, 제주도) 구경도 하고, 천하의 이익이 주즙(舟楫, 선박)에 있으니 그 생리를 스스로 깨우치고,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그렇구나. 뱃놀이 얘기는 농담이었다.”
애초에 이지함이 이렇게 무를 갈고 닦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평생 송도에 머문 서경덕과는 달리 역마살이 거하게 붙었으니, 홑몸으로 천하를 주유하려면 제 한 몸은 스스로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어쩌다 보니 그것이 과하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지만.
절로 이야기가 한 박자 쉬어가게 되었다. 문득 옆의 벽에 붙은 ‘사(士)’ 자에 눈이 닿은 이지함이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님께서는 이미 훌륭하신 선비신데, 또 선비에 대해 무엇을 깨우치시고자 저리 하시는지요?”
“녀석, 아첨하는 솜씨만 늘어서는. 내 감히 배움으로 일문(一門) 이루었노라 자부하였건만, 만년에 천둥벌거숭이 한 놈을 만나 이제 그 문이 깨어지게 생겼다.”
“아니, 대관절 무슨 곡절이 있던 것인지요?”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 했던가.
그날 박연폭포에서 거정이 녀석이 선비는 무용하다 외쳤던 것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선비가 정말 쓸모없다면, 그런 선비를 갈음하여 무엇을 대신 세울 것이냐. 꺽정이에게 부단히 던지는 질문은, 서경덕 스스로 던지는 자문(自問)이기도 했다.
“여태껏 태허(太虛)에서 천하 만물이 발생하여 정동(靜動)을 그치지 않는 것만 생각하느라, 사람 사이 일에 대해서는 족히 궁구하지 못한 듯하더구나.”
당연히 천하의 도는 항상 옳고, 사람 사는 일에 소소한 어긋남 있는 것은 수양과 도덕, 그리고 때때로 권도(權道)로써 고칠 수 있는 것이라 여기었다.
그러나 너무나 당당하게 그렇지 않다고 외치는 녀석이 지금 저기 마당에서 사립문을 고치고 있지 않던가. (아까 이지함을 내동댕이칠 떄, 하필 그쪽으로 몸이 날아가는 바람에 또 다시 박살이 났다.)
그제야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여섯 글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정녕 세상에 변하지 않는 도가 없을 리 있겠는가?
격물치지 네 글자를 항상 마음에 새기라 말했던 것은 자신이 아니었던가. 세상이 바뀔 수 있는지를 시험해보지도 않고서, 천하의 도와 인간사의 도가 공히 불변이라 단언하는 것은 고루한 생각 아닌가?
선비가 없으면서도 다스려지는 세상이 과연 있을 수 있는가?
바른 도가 없더라도 세상이 스스로 올바르게 될 수 있는가?
한 번 문이 깨어져 열리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심이 생겼다.
그러나 서경덕은 그 회의가, 그 무한한 자문자답이 두려우면서도 즐거웠다. 천도(天道) 깨달았다 여기면서 이곳 오관산 자락에 자리잡은 이후로, 이토록 깊게 질문을 던지고 멀리 상상해보았던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거정이가 그러더구나. 자신이 여기기에 천하에 선비는 쓸모가 없다고. 그러면서 또 스스로 큰 도적 되기를 원한다 하더구나.”
잠시 벽에 붙여둔 士를 응시하며 지난 겨울 내내 고민하던 것을 반추한 서경덕이, 똑바로 이지함을 보며 말했다.
“녀석이 물꼬를 튼 질문인데, 다만 이번에는 내 스스로 암만 고민하여도 답을 얻지 못할 듯하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반드시 답을 구하여 얻으실 것입니다.”
“하늘이 내게 몇 년만 더 명을 허하셨다면 그리 되었을 것이련만.”
너무나 묵직한 말을 너무나 범상하게 던지는 서경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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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서두에 등장한 한시는 실제로 황진이가 지었다고 알려진 『박연폭포』를 옮긴 것입니다. 황진이의 생몰년은 정확하게 전하지 않으나, 그의 행적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의 생년을 기준으로 유추했을 때 대략 16세기 초반에 활동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지함은 『토정비결』로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이지만, 사실 정말로 그가 『토정비결』을 지었는지부터 시작해서 그의 생애에 대해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점이 많이 있습니다.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도 더 기이한 면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생각보다 현실에 밀접하게 관여한 면도 있었지요. 특히 그가 북인의 핵심 인물 이산해의 숙부로서 소싯적 그를 직접 가르쳤음을 고려했을 때, 이지함이 조선에 남긴 영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을지도 모릅니다.
이지함의 싸움 실력은 작가의 창작이지만, 남명 조식이 항상 칼을 차고 다니는 등, 정통 성리학 바깥에 있던 당시 선비들이 무를 닦는 것이 결코 드물지 않았다는 점, 이지함이 직접 작은 배를 몰고 제주도 등지를 유람하던 시기, 을묘왜변을 비롯해 일대의 치안이 결코 좋지 않았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아예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후대의 정여립과 비슷하게 일종의 준무력조직을 꾸렸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성년까지 살아남은 이지함의 유일한 자식이었던 이산겸은 임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동했는데, 당시에 그가 유난히 ‘중망(衆望)’이 있을 뿐 아니라 산속에 군량과 병기를 쌓아두고 있었다는 기록도 전합니다 (『선조실록』 선조27년 1월 17일 기사). 서자였던 이산겸이 그런 조직을 홀로 꾸렸을 – 그리고 그러면서도 주변으로부터 고발당하지 않았을 - 가능성이 그렇게 높지는 않을 듯합니다.
또한, 이산해는 비록 북인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며 임란 당시 당쟁과 관련하여 여러 실책을 범하는 바람에 후대에 박한 평가를 받지만,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유명하여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의 신도비명에 전하는 일화 중 하나는 이지함의 행적과 관련하여 의미심장한 면이 있습니다.
이산해가 돌이 막 지났을 무렵, 스스로 글자를 배워 익혔는데, 때마침 마당에 지나가는 사람이 당파(钂鈀, 조선 수군 하면 떠올리는 그 삼지창입니다)를 메고 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고 ‘산(山)’ 자를 익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대체 왜 집안에 있는 사람이 호신용이라고 하기 어려운 병기인 당파를 들고 가고 있던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