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0화 (10/259)

5. 선비는 화를 당하고 (2)

이지함이 난데없이 대역죄인 소리를 들으며 충주 감영의 춥고 눅눅한 향옥(鄕獄, 지방 관아의 감옥)에 갇히게 된 내력은 이러하였다.

그의 직감대로 이약빙의 초대에 응하여 한 번 그가 기거하는 북촌에 찾아간 것이 화근이었다.

이약빙은 북촌에 대대로 뿌리내리고 살아온 광주 이씨 문중의 사람이었는데, 옛 기묘년 사화 당시에 벼슬을 잃었다. 형 약수(李若水)가 성균관 유생으로서 다른 유생들을 이끌고 조광조의 무고함을 한껏 아뢰다가 상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었다.

십여 년 뒤, 이약빙은 겨우 다시 벼슬길에 나섰으나, 형 약수는 끝내 유배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죄인으로서 죽었다. 그로부터 이약빙이 힘쓴 것은 오로지 하나뿐으로, 그의 형을 신원(伸冤)하기에 족한 권세를 얻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그의 총애하는 둘째 아들 홍윤(李洪胤)을 권신 윤임(尹任)의 딸과 혼인시켰다. 그러던 와중 마침내 선대왕이 즉위하였으니, 이루었던 바를 다 이룬 것처럼 기쁘고 즐거웠다.

허나 선대왕 또한 명운이 짧아 여덟 달 만에 훙(薨)하였고, 윤임은 곧장 사사당하였으며, 이약빙 역시 바로 소윤 무리에게 탄핵당하여 다시 이곳 충주로 낙향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낙담한 채, 앞날을 두려워하고 또 형의 한을 풀어주지 못함을 원통히 여기며 살아가고 있을 때, 충주 고을에 이름난 화담 선생의 제자 이지함이 찾아왔음을 알게 되었다.

물론 딱히 그와 연은 없으니 평소대로라면 굳이 불러 만나보려 할 것까지야 없겠지만, 오래지 않아 사람 관심을 절로 끄는 소문이 들려왔기에 마음이 바뀌었다.

그 소문인즉, 처가인 종친 모산수(毛山守, 이정랑 李呈琅)를 찾아온 이지함이 그 스승 화담 선생의 유고(遺稿)를 모아 문집을 내려 하는데, 개중 절세의 기문(奇文, 기묘한 글)이 있다는 것이었다.

심기일전을 할 겸, 이약빙은 모산수 댁에 연통을 넣어 이지함을 한 번 만나보기를 청하였다.

처음 이지함을 초대했을 때만 하여도 이약빙은 그저 화담 선생의 상사(喪事)에 위로의 뜻을 전하고, 화담 선생이 주장한 바는 무엇이었으며 그 문장은 무엇이 있는지 전해듣고자 하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찾아온 이지함과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깨달은바, 천문과 지리, 인사(人事)에 걸쳐 막힘 없이 말이 나오니 참으로 기재(奇才)였다. 너무나 여기저기 해박하였기에, 이지함이 『화담자의』에서 화제를 돌리고자 이리저리 말을 돌리고 있음을 이약빙은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심지어 나중에는 농장의 소출을 서너 배 늘리는 비법까지 막힘없이 나오니, 이미 반은 홀린 이약빙은 어찌 그것이 선비의 마음 쓸 바가 되겠느냐 타박 놓는 대신 저의 농장을 물려줄 사람으로 점찍어둔 둘째 아들 홍윤을 불러 그 자리에서 안면을 트게끔 하고 바로 가르침을 청하였다.

여기서 일이 멈추었다면 그뿐이겠으나, 이약빙의 집안 사정과 이 환담이 얽히면서 일이 커졌다.

이약빙의 첫째아들 이홍남(李洪男)은 가뜩이나 동생 홍윤이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것을 질투하고 있었다. 이홍윤 역시 성정이 모나서 둘 사이에 우애롭지 못한 일이 종종 일어났기에, 결국 이약빙은 일찌감치 홍남에게 가산 일부를 나누어 주고서 충주의 반대편에 분가하여 살게끔 하였다.

그런데 이약빙만큼이나 이홍남 역시 근래 퍽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었다. 아버지가 둘째 녀석을 사랑하여 건네준 윤임이라는 동아줄이 실제로는 썩어 문드러지다 못해 숫제 불이 붙은 줄이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저를 어찌 생각하건, 어쨌든 장남은 홍남 자신이었으니, 아버지에게 죄가 떨어지면 반드시 형벌이 저에게까지는 미칠 것이었다. 아버지의 사랑은 죄다 둘째 홍윤에게 갔건만, 어찌 죄는 형제 가운데 저만 뒤집어써야 한다는 말인가. 원망하고 두려워하고 있던 터.

그러던 어느 날, 아직 그와 연락 주고받는 어린 서제(庶弟, 서자 아우) 이후정이 찾아와 분통 터지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재앙의 원인을 만든 아버지는 유유자적하면서 그 토정(土亭)인지 수정(水亭)인지 하는 백면서생을 데려다 놓고 담소나 나누지를 않나, 심지어 그 작자와 더불어 농장을 경영하는 일까지 논했다고 하지를 않나, 답답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농장 이야기를 하는데 동생 홍윤을 데려다 앉혀놓았다 하니, 마침내 마음의 울화가 끓어오르다 터져 나오기에 이르렀다.

언제고 아버지가 조정으로부터 죄를 받게 되면 저도 연루되어 벼슬길이 날아가는 것은 물론이요. 명줄이나 붙이고 있을지 모르는 터였다.

그런데 정작 멸문지화를 불러온 동생은 농장의 논의에 끼워주었다 하니, 이 무슨 뜻이겠는가. 정말로 저는 그저 아비와 함께 순장(殉葬)되는 셈 치고 가산은 모두 둘째에게 물려주겠다는 것 아닌가.

빠득빠득 이를 갈면서, 홍문관 교리로 있는 처남 원호섭(元虎燮)에게 어찌하면 좋을까 상의하고자 편지를 보냈다. 원호섭은 처세에 밝은 사람이므로, 반드시 지금의 한양 돌아가는 형편에 비추어 현명한 답을 주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랬더니 저의 매부가 죄를 받을 때 저까지 혹 연좌되지는 않을까 두렵게 여기던 원호섭은 답하기를, 지금 조정이 조용한 듯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니, 이때 먼저 종사를 보전하는 데 공을 세우면 어찌 이전의 과(過)를 덮지 못하겠느냐 하였다.

마침내 큰 결단을 내린 이홍남은 의리를 끊고 구차하게 목숨을 구한다는 생각을, 잘못은 저쪽이 먼저 하였다는 생각으로써 찍어누르며 밤새도록 역모 고변을 꾸민 뒤 믿는 종복에게 맡기어 원호섭에게 보냈다.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신 홍남은 일개 유생으로서 밖으로는 국주(國主, 임금)의 지극한 성은에 답하지 못하고 안으로는 가주(家主)의 집안 다스림을 돕지 못했으니 그 죄가 죽어 마땅합니다. 이제 참으로 참혹한 사정을 고하게 되어 마음은 더욱 찢어지고 하늘을 보기가 부끄럽기에 이르렀습니다. (...)

신의 아우 홍윤은 성품이 본디 강포하고 제멋대로였으므로, 신의 아버지조차 이를 단속하지 못하였습니다. 형제는 천륜(天倫)의 지친(至親)이나, 어찌 공의(公義)에 비하겠습니까?

보령에 사는 이지함은 유생으로 헛된 이름을 조금 얻어 방자하게 다니는데, 특히 자랑하여 말하기를 저의 비결로써 천지 운수를 훤히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그가 마침 충주 고을에 머물고 있어, 홍윤이 저의 아비에게 청하여 이지함을 불러서 조정의 경대부(卿大夫)의 길흉을 모두 점쳤다고 합니다.

이를 보고 홍윤이 마침내 말하기를, ‘연산주(연산군)가 선비 죽이기를 좋아하여 마침내 폐해지게 되었다. 금상인들 오래 가겠는가?’라 하였으니 무도함이 극에 이르렀습니다. (...)

아아, 이처럼 천인공노할 무도(無道)를 범하였으니, 어찌 신의 가문이 화(禍)를 면할 궁리를 하겠습니까? 다만 바깥사람이 먼저 고변하는 것보다는 이렇게나마 부끄러움을 깨닫고 성은에 털끝만 한 보답이라도 하는 것이 온당할 터입니다. 이에 어리석은 신은 편지를 앞에 두고 통곡할 뿐입니다.”

벽서(壁書) 따위를 꾸며 슬슬 사람 피를 보려던 윤원형에게 이 고변이 그대로 전해졌으니, 옥사 일으킬 빌미를 구하던 그에게는 참으로 호재였다.

그런데 마침 그 고변하는 글에 서경덕의 제자라는 이지함의 이름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만하면 각 고을에서 알량한 위세 부리는 사족들과 산림의 헛된 선비들에게 모두 엄중히 경고할 수 있으리라 여기면서, 윤원형은 곧장 옥사를 키울 준비를 하였다.

먼저 이약빙과 이홍윤이 추포되어 한양으로 바로 압송되었다. 그사이 충주 감영에서는 이지함과 그 장인 모산수, 북촌에 기거하는 다른 광산 이씨 문중 사람들 등을 굴비 엮듯 줄줄이 잡아 가두었다.

또한 이약빙의 서자 이후정도 죄인으로서 함께 추포하여 올려보냈는데, 형벌을 두려워하는 소년을 윤원형의 끄나풀들이 을러대니, 곧장 충주에 사는 유생이라는 유생은 그 이름이 모두 공초에 오르게 되었다.

곧 ‘진상’이 드러나기 시작한바, 특히 이지함은 그 죄가 컸다. 조정 고관대작들의 길흉뿐 아니라 무엄하기 그지없게도 지존의 수명까지도 점쳤고 그 점괘가 이러이러하다며 참람된 요설을 꾸몄으며, 이로써 모산수 이정랑에게 절로 중심(衆心)이 모여 그를 추대하게끔 하였다는 것이었다.

“... 그것이 언제 일이오?”

“소, 소인이야 산속에서 소소하게 벌이하며 사는 무지렁이이니 잘은 모릅니다. 다만 여기 충주 고을에서 역모 고변이 일어나 온 읍내가 뒤집혔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 사흘 전이었습니다.”

충주 장미산(薔薇山) 고개 넘으면서 어김없이 만난 도적이 정신없이 말을 주워섬겼다.

“고맙소. 가보시오.”

“예, 처사님, 소인이야말로 은덕에 감사드립니다.”

늙은 도적의 눈앞에서 번쩍이던 왜도 칼날이 그의 몸을 후벼파지는 않았으니, 멀쩡히 보내주는 것은 실로 은덕이 맞았다.

하도 경기도에서 산적들에게 ‘대접’받으며 돌아다녔기에, 홀로 다니는 더벅머리 천둥벌거숭이를 조심하라는 소식이야 이곳 충청도에도 제법 퍼졌지만, 홀로 다니는 처사 조심하라는 소리는 아마 안 퍼진 모양이었다.

“사흘, 사흘이라...”

“예? 처사님, 혹시 분부하실 것이라도?”

방금 전 칼이 번뜩일 때부터 넋이 반쯤 나가 있던 도적이 꺽정이 말소리에 퍼뜩 놀라 물었다.

“아니, 되었소. 혼잣말이오.”

“아, 예. 그러면 소인 물러가보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산적들이 산속에 산다 하지만, 사실 바깥소식에는 제법 밝은 편이었다. 바깥소식에 항상 귀를 기울여야만 자칫 잘못해서 지나가는 귀인이나 공물 올라가는 행렬 앞에서 얼쩡거리다 산적 노릇이 바로 끝장나는 일을 면할 수 있었고, 반대로 기화(奇貨) 소문을 먼저 듣고서 좋은 쪽으로 산적 노릇 청산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뜯어낸 면필이나 보화 따위도 곧장 곡식으로 바꾸어야 하니, 산적들은 대개 산 아래 주막 주인이나 역의 역리(驛吏)들과 연이 닿아있기 십상이었다. 더구나 이곳 장미산은 충주 읍내에서 코앞에 있었으므로, 역적질하다 유생들이 일제히 잡혀들어가 온 고을이 초상집 되었다더라 하는 소문을 사흘 전에 들었다면 길어야 대엿새 전에 일이 터졌을 것이었다.

그러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무리 조선국 나라꼴이 엉망이라지만, 한양으로 압송되기라도 하면 그때는 정말 끝이었다. 물론 이지함이 미리 천기라도 읽어 몸을 피했다면 쓸데없는 고민이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더 늦기 전에 수를 써야 하리라.

슬슬 해 넘어갈 무렵 도착한 충주 읍내는 과연 날아가는 새조차 짹소리 한 번 맘대로 못 낼 것처럼 살벌하였다. 다만 감영 앞에서 ‘아이고’ 하는 곡소리가 연이어 울려퍼져, 새와 달리 사람은 여전히 목청 살아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필시 그 옥사에 연루된 집안의 가솔들이리라.

그들 가운데 아무나 붙잡고서,

‘미안한데, 혹시 그대의 부군께서 저 안에 갇혀 계시오?’

하고 물어볼 만큼 눈치 없거나 매정하지는 않은 꺽정이었다.

대신 한 각에 한두 명쯤 지나가는 행인 가운데 그나마 선비 비슷하게 생긴 – 아마 향리쯤이나 될 것이다 –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았다. 부디 멀쩡한 답이 나오기를 내심 기대하면서.

“여보시오. 말씀 좀 여쭙겠소이다.”

화들짝 놀라며 무어라 둘러댈 말대꾸를 찾는 그에게, 그럴 여유 주지 않고 곧장 물었다.

“토정 선생 이지함이라는 분께서 여기 충주 고을에 계신다는데, 혹시 어디 머무시는지 아시오?”

“히익! 소인은, 아니, 나는 아무것도 모르오. 주변 이목이 있으니 얼른 댁에 돌아가시오.”

잔뜩 두려워하는 마음에 절로 익숙한 존대가 나온 모양이었다.

두어 명쯤 더 붙잡고, 지난번에 이지함이 당분간 충주에 머물 것 같다면서 알려준 그 모산수 이름을 더 대어보았건만 돌아오는 것은 똑같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뭔가를 뻔히 알면서도 시급히 감추려는 기색 역력한 답뿐이었다.

“젠장맞을. 그놈의 『주역』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이럴 때 화를 피했어야지, 참.”

소소하게 이지함을 원망하는 혼잣말과는 별개로, 벌써 다음 수를 열심히 궁리하기 시작하는 꺽정이었다.

물론 어떻게 미리 알고 저 홀로 몰래 몸을 빼돌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시가 급한데 어느 세월에 더 수소문을 하겠는가.

그냥 눈앞의 감영에 걸어 들어가 찾아보면 되는 것을.

적당히 서성이다가 해 떨어지고 삼경(三更, 23시~01시)께 되었을 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감영 담벼락이야 그냥 단번에 훌쩍 뛰어넘으면 되는 것이었으니, 꼭 꺽정이가 아니더라도 조금 몸 날렵한 도적이라면 누구든 드나들 수 있을 것이요 실제로도 종종 그러하였다.

그러나 꽤 그럴듯하게 지어놓은 감옥은 담벼락이 족히 한 길하고도 절반 높이는 되어, 준비 없이 월담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꺽정이가 어디 파옥 한두 번 해본 사람이던가. 나올 때는 나올 때에 맞추어 새로 고민해야 하겠지만, 들어갈 때는 또 나름의 수법이 있었다.

그가 한창 날뛰던 때는 모든 수령방백이 독이 잔뜩 올라 있었기에 먹힐 턱이 없었지만, 지금 이곳 충청도는 경기도와 마찬가지로 군도(群盜)가 마지막으로 날뛴 지가 오래되었으니 분명 유효할 터였다.

혹시 담 뛰어넘을 때 흙이나 먼지 묻었을까 싶어 몇 번 옷을 탈탈 턴 뒤, 앞을 지키는 옥졸들에게 당당히 걸어가 말을 걸었다.

“이보게들. 오밤중에 고생이 많네.”

한밤중에 칼을 찬 처사 복색의 사람이 나타나 수작 걸어오니 하품 참아가며 자리 지키던 옥졸 여럿이 모두 바짝 긴장하였다.

“죄인들을 좀 보아야 하니 문을 열어주게나.”

하니, 개중 한 사람이 순순히 문을 열어주려 움직였다.

대역죄인 가둔 곳에 저처럼 말끔한 처사가 칼 차고 나타났으니, 반드시 남들 말 못할 일 하는 사람이요, 아무 소란 없이 들어왔으니 감사또께서도 이미 알고 계신 것이리라 지레짐작한 것이었다.

“그, 송구하오나 어디서 오신 뉘신지요?”

그러나 개중 뚝심 있는 자가 없지 않아, 눈짓으로 문 열려는 옥졸을 제지하고서는 조심스레 물었다. 허나 이 정도에 당황한다면 대적(大賊) 이름이 아깝지 않겠는가.

“내 서림(徐林)이라는 사람일세. 벼슬은 따로 없지만 한양 윤 서원군 댁을 드나들며 소소하게 일을 돕고 있다네. 이 대역죄인들 때문에 서원군 대감께서 참으로 근심이 크신데, 죄인들이 간사하여 당당하게 문초할 때와 홀로 가두어두고 얼러댈 때 나오는 말이 다르니 어찌하겠는가?”

윤원형이 이름 대는 길에 소소하게 복수나 할 겸 (아마 아직 평양 감영에서 잡일이나 하고 있을) 서림의 이름을 꺼내었다. 그러나 저쪽은 이 나라 조선에 드물게 있는 저의 밥값 하는 옥졸인지, 꽤나 끈질겼다.

“하면 소인이 함께 들어가도 될지요? 국법이 국법이고 사안이 사안인지라...”

꺽정이가 짐짓 안타깝다는 표정 지으며 답하였다.

“직(職)에 열과 성을 다하니 장하군그래. 그러나 어지간한 일이라면 그리함이 마땅하겠지만, 이 사안은 임자 말한 것처럼 중대하기 그지없는데, 널리 알려지면 아니 되는 사정도 종종 나오기 마련.

그대에게도 엄연히 처자식이 있을진대, 어찌 이를 위태롭게 하겠나?”

옆에 따라붙었다가 여차하면 살인멸구(殺人滅口)해야 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옆에 찬 칼자루를 슬쩍 만져주니, 그제야 옥졸도 겁을 먹고서 군말 없이 들여보내주었다.

봄이 진작 왔건만, 해 떨어진 뒤의 감옥은 말 그대로 냉방이라 지내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충주 한 고을의 유생을 모조리 잡아들이고 있으니 옥에 남는 자리가 별로 없을 것이 분명하였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지함 저는 이 원옥(圓屋)의 문에서 가장 먼 쪽의 옥에 홀로 가두었고, 심지어 옆 칸은 통째로 비우기까지 하였으니, 저에게 씌워진 죄목이 참으로 무거움을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었다.

이지함은 아직도 지난 며칠의 일이 꿈만 같았다. 대역죄인이라니. 역적 무고라는 것이 유사 이래 심심찮게 일어났음은 알았지만, 자신이 거기에 휘말릴 줄을 어찌 알았을까?

사실일 리가 없었다. 아무리 조정이 혼미하다지만 아무런 죄가 없는 자신과 장인까지 이렇게 엮어 잡아가둘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럴 리(理)가 없든 기(氣)가 없든, 그의 몸을 구속하고 있는 차꼬와 칼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필시 윤원형의 수작일 테다. 어찌하여 사직과 열성조께서는 그런 난신적자가 이 땅에 발 붙이고 사는 것을 허여하신다는 말인가.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그러면서도, 그의 명석한 머리는 어떻게든 살아나갈 길을 찾고자 필사적으로 돌아갔다. 만일 그가 장인 모산수를 팔아넘긴다면? 아니면 저는 죄가 없다며 다른 누군가를 끌어들인다면? 그러나 곧장 단념하였다. 그렇게 스스로 비굴해지면서, 스승의 이름을 욕되게까지 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억울함을 삼키고 억지 자복(自服, 자백)을 하여 빠른 죽음을 구하는 편이 그의 형과 조카 산해에게는 그나마 나으리라.

생각이 거기에 미치니, 이제는 한없는 침울함이 이지함을 덮쳤다. 딴에 조금 총명하다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집적거렸지만, 끝내 이룬 것은 없으니 어찌할 터인가. 그가 죽임을 당하면 세상에 누가 있어 그런 사람 있었노라 전해줄까.

아니, 누군가 있긴 했다. 문득 (하필이면) 꺽정이가 떠오르며 안심이 되었다. 물론 평소에 ‘꺽정이’와 ‘안심’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선비들과는 거리가 한없이 먼 꺽정이므로 이번 옥사에서도 더없이 안전할 테다.

설령 그의 동문들에게까지 화가 미친다 한들, 누가 백정의 아들이 화담 선생 문하에 있었다고 의심하겠는가. 그가 남명에게든, 아니, 다른 누구에게든 스승님의 유업(遺業)을 전하면서 이지함 석 자를 함께 전해준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해야 하리라.

‘그래, 꺽정아. 여차하면 이제 너뿐이다. 너라도 살아서, 부디 스승님의 학문을 후대에 전해다오.’

달빛 보며 그의 막내 사제를 떠올리는데, 불쑥 들어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사형, 계시오? 나요. 꺽정이요.”

“이놈아, 네가 거기서 나오면 어떻게 하느냐.”

익숙한 목소리가 너무나 어이없게 튀어나왔기에, 저도 모르게 타박을 주어버리고야 말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아니, 잠깐. 정말 꺽정이냐? 네가 어떻게 여기를...”

“이 사형 보소. 어렵게 되셨다는 소리 듣고서 안부나 여쭙고자 먼 길 찾아왔는데, 초면에 한다는 소리가 참.”

그러면서도 슥슥 달빛에 비친 이지함의 몰골을 살펴보는 꺽정이었다. 말은 퉁명스럽지만, 몸이 딱히 상하지 않음을 눈여겨보았는지 어깨에 힘이 살짝 풀리는 것이 보였다.

“사형, 들으시오. 이미 죄인 여럿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니, 아마 사형도 오래지 않아 한양으로 올라가게 될 거요. 그리 되면 이미 늦소.”

그러고는 너무나도 태연자약하게 다음 말을 꺼낸다.

“해서, 사형을 구하고자 내 이리 왔소. 안부 어쩌고는 당연히 농이고.”

“그 무슨 말이냐. 구한다니. 네가 정녕 파옥이라도 할 생각이더냐.”

“뭐, 해야 할 것 같으면 해야지 어쩌겠소. 자, 사형, 들으시오. 내 원래는 내 맘대로 하려다가, 그래도 사형의 뜻이 중하다 생각하여, 사형께서 정말 여기 갇혀 계신지 살피기도 할 겸 말씀 여쭙고자 찾아왔소.

사형께서 나오려 하신다면, 내 지금 여기서 힘 좀 쓰면 그만이오. 바깥에 옥졸들이라 해 보아야 때려눕히면 그만이고, 들어오면서 보니 큰일 일어난 관아 치곤 영 허술하더이다.”

어차피 윤원형이가 꾸미거나 부풀린 역모 고변에 걸려든 이상 모두 죽음을 당하거나 죽지 못해 사는 정도로 전락할 것은 명백했다. 그렇다면 저 홀로 구명하는 것이 그나마 낫지 않겠느냐. 그런 현명한, 또는 간사한 생각이 절로 이지함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저 홀로 몸을 피하여, 초야로 숨어든들 무엇을 할 것인가? 이곳에 함께 붙잡힌 그의 장인과 처가 식구들, 무고한 유생들을 모두 버리고 달아난다면, 남은 그들에게는 더욱 무거운 죄가 씌워질 것이 분명하였다.

저와 꺽정이 또한 역모를 거들었다 하여 평생 쫓겨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총명한 조카 산해의 벼슬길은 아예 막혀버릴 지도 모른다. 그의 형에게도 분명 해코지가 닿을 터.

“내가 차라리 지조 있게 이대로 죽겠노라 하면 어찌하겠느냐.”

“정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않겠소. 헌데 정말로 죽기를 원하오?”

당연히 나라에 죄를 짓든 말든 사는 것이 우선이리라 생각하던 꺽정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한두 번 고민하고서는 저의 어설픈 심계(心計)를 밝혔다.

“내 실은 엉성하기 이를 데 없지만 나름대로 대계(大計) 품고 있소. 그걸 채워나가려면 머리 총명한 사람이 필요하오. 지금 나와 함께 야반도주하면 이미 있는 역모죄에 더하여 국적(國賊) 신세가 되겠지만, 그리 따지면 뭐, 지금 한양에 또아리 틀고 있는 윤원형이도 도적 아니더이까.”

이는 염라대왕도 인정한 사실이었다. 그가 윤원형이를 예로 들며, 한미한 가운데 조금 드러난 도적이라 하였으니, 어찌 일개 중생이 왈가왈부하며 틀리다 할까.

“말이 그렇지, 어쨌든 정말로 도적질 함께 하자는 것 아니냐.”

“... 뭐, 일단 천 리 길도 한 걸음이니, 시작은 그렇소.”

“...”

“실은 그래서 여차하면 여기서 파옥하고 사형을 보쌈이라도 해 갈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동문의 의리가 있고, 또 보자기도 없는 판에 사내가 사내를 보쌈하는 건 영 남사스러워서 말이오.”

“이 마당에도 능청을 다 부리느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 이지함은 지금 이 꺽정이가 나타난 판국에 그가 무엇을 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길일지를 한참 고민하였다.

지금까지 옥에 갇혀서 홀로 번민하였던 것보다도 더한 오뇌(懊惱)가 이지함을 덮친다. 느닷없이 찾아와 던진 자신의 물음이 가볍지 않음을 스스로 아는지, 꺽정이도 더 채근하지는 않았다.

억겁 같은 촌음이 흐른 뒤, 마침내 이지함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 혼자 살겠노라며 너와 함께 도망하는 것은 차마 못 할 일이다. 그러니 이렇게 하자꾸나...”

즉석에서 맞받아 내놓는 계책 치고는 꽤 그럴싸한 것이 나오는가 싶었는데, 한 타래 한 타래씩 풀려 나올 때마다 듣는 꺽정이가 오히려 놀라기 시작하였다.

“... 내가 알던 사형 맞소?”

다 들은 꺽정이의 첫 감상이었다.

“어쩔 수 없지. 선비가 화를 당하는 세상이니, 궁즉변(窮則變, 궁하면 변한다)해야 하지 않겠느냐.”

무언가 체념한 듯한, 또 그러면서도 무언가 마음 먹은 듯한 이지함이 웃으며 말했다.

다음날 아침. 간밤의 그 서림이라는 작자가 끝내 의심스러웠던 옥졸이 병방(兵房)을 통하여 그간의 일을 고해바치니 감영은 발칵 뒤집혔다.

그놈을 들여보낸 것이야 그렇다 쳐도, 일 다 보았다며 제 발로 걸어나갈 때 순순히 문 열어준 놈들은 무엇이냐며 병방은 길길이 날뛰었고, 차마 그 오밤중에 병방이나 숙직하는 감영 비장(裨將)을 깨울 엄두 내지 못하였던 옥졸은 그저 고개 푹 숙일 뿐.

그나마 다행인 것은 딱히 그 서림이가 옥에 들어가서 이상한 일을 벌이지는 않은 듯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훨씬 큰 불행인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림이 몰래 옥에 들어왔다 나간 일은 훨씬 큰일이 터졌기에 절로 덮였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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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의 을사사화가 그 규모가 작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4대 사화의 하나로 꼽히는 이유는, 을사사화 이후 윤원형 일파의 주도 하 다른 공작들이 벌어져 수년 간 연달아 옥사가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먼저 1547년 이른바 양재역 벽서 사건 또는 정미사화(丁未士禍)가 벌어졌는데, 이는 당시 과천에 속했던 양재역에서 조정을 비방하는 익명의 벽서(벽에 쓴 글)가 발견된 것이 단초가 되었습니다. 이때 윤원형 등이, 을사사화에서 ‘관대한 처분’을 내렸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주장했고, 대윤에 속한 사람들 대부분이 이때 숙청됩니다. 글에 등장한 이약빙 역시 이때 사약을 받고 죽었고, 장남 이홍남은 영월로 유배를 당하게 되지요.

이어서 1548년에는 이른바 시정기(時政記) 필화 사건이 발생합니다. 사관 안명세(安名世) 등이 실록 편찬의 참고자료인 시정기를 기록하면서, 을사사화 당시 소윤이 무고한 선비들을 죽인 사실과 당시 여기에 동조 또는 반대한 사람들의 명단을 가감없이 적었다는 사실이 동료 사관의 고변으로 발각된 사건이었지요. 안명세는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다가 참형을 당해 죽었는데, 이는 그와 친교가 있던 이지함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됩니다.

안명세가 죽은 이후 이지함은 처가 충주를 떠나 본가 보령으로 갔고, 나중에는 아예 근처의 섬에 들어가 살며 한동안 섬과 바다를 오가는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이지함의 행장이나 다른 야담에 따르면 충주 고을에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것을 보고 미리 떠났다고 하지만, 아마 안명세의 죽음이 더 큰 요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1549년에는 이홍남 역모 고변이 터지게 됩니다.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인해 영월로 유배를 간 이홍남이, 아버지 이약빙의 유산이 모두 동생 홍윤에게 갔다는 사실에 분개하여 유배에서 풀려나고자 거짓 역모를 고변한 사건이었는데, 원 역사에서 이지함은 변을 피했지만 그의 장인 모산수 이정랑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혹독한 심문 중 사망한 이정랑은 사후에 능지처참을 당했고, 충주 한 고을이 텅 비게 되었다는 평이 나올 만큼 가혹한 연좌가 적용되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 고장을 짓밟아 본보기를 만들 심산으로 조정은 이때 충주를 유신현(維新縣)으로 강등시켜버렸고, 이에 따라 도의 이름도 충청도에서 청홍도(淸洪道)로 바뀌게 됩니다. 남한강 수운을 바탕으로 번성하던 충주는 이때 큰 타격을 입었고, 하필 막 회복하려던 무렵 임진왜란에 휩쓸리게 됩니다. 그 결과 공주가 충주를 대신해 충청도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지요.

작중에서는 꺽정이가 서경덕네 초당의 문을 막고 강짜를 부린 것의 나비효과로 윤원형이 피의 숙청을 벌일 마음을 조금 일찍 먹게 되었고, 이지함 역시 양재역 벽서 사건이나 시정기 필화 사건이 벌어지지 않아 경계하는 마음을 덜 먹고 있던 상황입니다. 거기에 『화담자의』 때문에 훨씬 활발한 사회적 활동을 벌인 것도 화근이 되었습니다.

이홍남의 역모 고변 내용은 원 역사에서는 이지함의 자리에 술사(術士) 배광의라는 인물이 들어간 것을 제외하면 작중에 묘사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충주감영의 향옥은 감영과 함께 임란 당시에 파괴되었기 때문에 고증할 수 없으나, 이후 축조된 공주 감영의 향옥은 개화기까지 남아있었습니다. 을미의병 당시 체포된 의병 지도자들을 촬영한 사진이 남아 있어 그 구조를 알 수 있지요. 이른바 ‘원옥’이라고 불리는, 둥근 형태로 감방을 배치하고 높은 담을 두른 향옥 형태는 당시의 풍속화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대체로 대동소이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충청도에 군도(群盜)가 드물었다는 것은 실제로도 있던 현상입니다. 나중에 더 설명하겠지만, 이미 중종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군도는 초기에는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중종 중기에 치세가 안정되면서 잦아들었다가 후기로 접어들면서 다시 활발하졌습니다. 그러던 것이 명종대에 이르러서는 황해도와 경기도까지 확산되고, 임꺽정이 체포되어 죽을 무렵에는 도적들이 한양과 인천에서 날뛰어 관군을 저자에서 살해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지요.

그런데 유독 충청도는 중종대 이후로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강도는 많아도 군도는 드물었는데,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비교적 한양으로부터 거리가 가까웠기에 조정에서 중앙군 무관을 파견해 그들이 일종의 체포 담당 TF를 구성케 하였던 대응 방식이 효과를 거두었다는 사실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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