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선비는 화를 당하고 (3)
아무리 삼남에는 준마(駿馬)가 드물다지만, 그래도 명색이 감영이었기에 쓸만한 파발마가 한두 마리는 있었다. 거기서 훔쳐 나온 절따말(赤馬)은 제법 달리는 맛이 있었다.
곧 보름이라 달빛은 밝았다. 충주는 이번 생에서나 지난 생에서나 초행길이었으니, 달빛마저 어두웠더라면 길만 따라 달려가는 것조차 어려웠으리라.
아침 햇살이 비추기 시작하자, 꺽정이는 곧장 대로를 이탈하여 옆의 산기슭으로 들어갔다.
족적을 일부러 반대쪽으로 남겨 추적하는 관군 따돌리는 것은 꺽정이 그가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자주 우려먹던 술기 중 하나였다. 그의 수법을 잘 알던 황해도 군관들조차 속절없이 당하곤 하였으니, 이곳 충주목에 기병들 추적하는 데는 이골이 났다는 저 북변 함경도 군사들이 있지 않고서는 알아차리지 못할 테다.
하물며 사형 이지함 말에 따르면 지금 있는 관찰사는 한없이 용렬한 인물이라 하였다. 기생을 항상 옆에 끼고 살고, 또 맹하고 줏대없기가 우물에 탄 숭늉 같다던가. 그러니 지금쯤 아무 생각 없이, 아래에 거느린 아병(牙兵)들까지 흩어서 말도둑 잡는 데 진력하고 있을 것이었다.
충분히 눈에 안 띌 만큼 울창한 숲속에 들어오자, 곧장 다시 북쪽, 사형 이지함이 알려준 모산수 이정랑의 집 있는 쪽으로 향했다. 자신이 지난 생에 걸쳐 산속 누비고 다니며 깨우친 길찾기 감(感)과 이지함이 일러준 바에 따르면, 이 산 너머 심항산 자락에 있는, 큼직한 낭떠러지 등지고 있는 대택(大宅)이 바로 모산수의 집이었다.
밤을 졸지에 꼬박 새었지만, 아직 졸리지는 않았다. 전생에도 이만큼 무모한 일은 몇 번 하지 않았으니, 그 긴장으로 인해 눈꺼풀은 오히려 가벼웠다..
그러나, 앞으로 꺽정이 그가 다시 염라대왕 앞에 설 날을 생각하면, 고작 이런 일을 큰일이라 여겨서는 아니 될 터.
오래 지나지 않아 하얀 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제대로 찾아왔다고 알려주는 것처럼, 절벽 아래의 널따란 기와집 쪽에서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지체할 것 없이 이지함의 이름 팔면서 곧장 밀고 들어가서는, 모산수의 안사람인 듯한 여인에게 지아비와 사위를 구할 방도 있으니 도와달라 하였다.
자신에게 익숙한, 노비들(또는 백정들)이 입을 법한 허름한 옷을 내어달라 하고서, 자신이 환복하는 동안 집 안팎의 사내종과 비부(婢夫)살이하는 양민들을 최대한 모아달라 하였다.
과연 종친의 집이라 가도(家道) 엄정한지, 아니면 그만큼 가족 사랑이 대단한지 모산수의 아내는 곧장 사람을 모았다. 한 식경만에 수십이 족히 모였다.
널찍한 마당에 사람들 모아두고서, 대청 위에 서서 말했다.
“자, 들으시오들! 평생 다시 없을 일확천금 기회가 여기 있소!”
뭐, 굳이 따지자면 천금(千金)까지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눈앞의 남루한 작자들 일생에 보기 드문 기회이기는 할 것이다.
과연 모두들 눈이 휘둥그래지고, 저기 멀리서 빼꼼히 지켜보는 모산수의 아내와 그 딸 – 아마 이지함의 아내일 테니 형수라 불러야 할 것이다 – 도 뚱딴지같은 소리에 역시 깜짝 놀랐다.
“다들 알고서 전전긍긍하고 있겠지만, 이 집 주인 되시는 모산수 어르신께서 지금 역모 고변을 당하셔서 붙잡혀 계시오. 이대로라면 반드시 한양으로 압송되셔서 변을 당하게 되실 테고, 그리되면 가산은 적몰(籍沒)이니, 여기 모인 그대들과 식구들, 그리고 그대들이 일구는 논밭도 모두 남에게 넘어가게 될 것이외다.”
젊은 놈이 아침부터 사람들 모아다가 이상한 소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는지, 모인 군중 가운데 사내 하나가 벌써 볼멘소리를 했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오? 나는 양민으로 그저 고공(雇工) 노릇할 뿐인데, 집주인이 화변(禍變) 당하면 다른 데 가서 품 팔고 땅 부쳐 먹으면 그만이오.”
“참 순진한 소리를 하시는구려. 죄 없는 이 집 주인어르신도 역적으로 몰아가는 놈들인데, 저들 손에 들어올 노비 한 구를 늘리기 위해서라면 손바닥 뒤집듯 양민을 종놈으로 바꿀 게요.”
그제야 역적 두 글자 무게를 깨달았는지, 모여든 양민 일동도 우거지상이 되었다.
“그러면 어쩌자는 게요?”
“내가 일확천금이라 하지 않았소? 우리네 할 일은 간단하오. 오늘밤 감영에 쳐들어가 파옥을 하는 것이지. 그러고서는 이 집에 속한 종복들은 그 노비 문권(文券, 문서)을 모두 불사르고, 토지는 다들 나누어 갖는 것이오.”
꺽정이가 태연자약하게 파옥을 꺼내면서 동시에 생각지도 못한 달콤한 보상을 거론하니, 이제 모두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감영에는 군사들이 있고, 충주진(忠州鎭) 군사들도 이미 싸움박질 잘 하는 패거리 여럿을 모아두었소. 그러니 여러분이 할 일이라 해봐야, 오밤중에 횃불 훤히 켜서 사람 많은 티를 팍팍 내고 기세를 더해주는 것, 그리고 감영 문이 부서지면 우르르 들어가 감옥 문을 여는 것. 이 둘 뿐이오.”
‘패거리 여럿’은 거짓이었지만, 그리 따지면 감영과 충주진의 군사라는 것들도 대개가 거짓이었다. 백성들이 선량하거나 어리석어, 나라의 군병이라는 것들이 대개 허장성세에 지나지 않음을 모르고 있을 뿐. 하물며 오밤중에 우르르 무리지어 급습한다면 저들이 어찌 배길까.
“어차피 그렇게 빠져나오면, 모산수 어르신도 가만 앉아 화를 당하실 수 없으니 당장 챙길 수 있는 가산만 챙겨서 야반도주를 하셔야 할 게요. 그러면 땅이 남겠지. 그 논밭이 여러분 것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소? 종들은 이 기회에 종놈 신세도 벗을 수 있고. 꿩 먹고 알 먹고지.”
남의 집 도우러 왔다고 하고서는 그 집 재산을 빼앗아 나누어주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모산수의 아내와 자식들은 까무러칠 노릇일 테다. 그러나 나중에 이게 다 이지함 머릿속에서 나온 계책이라고 하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허나, 젊은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관이 그렇게 허술하지 않소. 충주 고을에 이 일대에만 갑자기 저의 논밭 가진 양민들이 늘어나면, 사정 뻔히 아는 관이 가만히 있을까.”
아까 저에게 반문한 사내가 또 반문하였다. 꺽정이로서는 오히려 저 혼자 떠드는 것보다 더 사람 설득하기 쉽게 만들어주니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니 여러분이 오밤중 감영 앞에 횃불 들고 모여들기 전에 또 해주어야 하는 일이 있는 것이오. 그 말대로, 난데없이 이곳 농장에만 새 전주(田主)들이 우르르 생기면야 당연히 뒷탈이 생기겠지.
하지만 금번 옥사로 충주의 번듯한 집안들은 죄다 엮여 들어갔는데, 그런 곳마다 죄다 노비며 고공이며 떨쳐 나오면 어찌 될까? 어차피 이 동네 전답이라는 것이 특히 양반님네들 농장이라면 태반이 은결(隱結, 미등록 토지) 아니오? 여러분들끼리 싹 나눠 먹고 입만 씻으면 나랏님도 모를 것이오.”
하나둘씩 솔깃하게 여기는 눈치가 늘기 시작했다. 꺽정이가 갑자기 달변이 된 것이 아니요, 꺽정이 입을 빌려 나오는 이지함의 꾀가 사람의 이목을 끌어모으는 것이었다.
“이것이 성사되려면, 여러분 모두가, 이 집 식구들 뿐 아니라 충주 고을의 모두가 한 집 건너 하나 꼴로 한꺼번에 연루되어야 하오. 누구 한 사람이 나중에 고변하였다가는 엮인 사람 모두가 패가망신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 말이오. 그러니 여러분 가운데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의 친우나 가족이 있으면 얼른 달려가 말을 전하시오.”
뒤에 모산수 집안의 상전들이 있는 것도 모르는지, 눈치 없는 사내종 하나가 손을 번쩍 들며 물었다.
“헌데 정말로 우리가 그... 파옥을 이루어낸다 해서 약조한 것이 지켜지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소?”
“거참 답답한 사람이로세. 몸 빠져나온들 여러분 상전은 역적 대접받는 몸이고, 여러분은 아니오. 그리고 여러분들은 몽치 하나씩 챙겨 나올 텐데 반대로 상전들은 맨몸이겠지. 떠다 주는 밥술도 못 챙겨 먹을 팔자라면 어차피 종놈 신세 벗어난들 오래 못 갈 테니 알아서 하시오.”
좌중을 둘러보니 다들 반신반의하면서도 제법 솔깃해하고 있었다. 그 정도야, 저들끼리 말을 퍼뜨리고 주고받고 하면서 금방 확신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자, 잊지들 마시오! 오늘밤 감영 앞에 모여드는 사람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노름의 판돈은 커지고 여러분들이 얻어낼 전답을 후에 억울하게 빼앗길 공산은 줄어드는 것이오! 그러니 얼른 움직이시오! 얼른들!”
손뼉 몇 번 치니, 전답과 면천의 약속에 홀린 듯한 종복 몇몇을 필두로 모여든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갑자기 텅 빈 마당을 가로질러, 조심스레 걸어오는 여인이 있었다. 필히 사형 이지함의 아내일 테다.
“형수님, 걱정 마시오. 사형께서는 몸 멀쩡히 잘 계시고, 오늘 밤 나오실 때도 반드시 멀쩡하실 것이외다.”
‘그딴 것을 계책이라고 내고 있으니 내가 걱정 안 하게 생겼냐’ 하는 말을 억지로 씹어 삼키면서 여인이 물었다.
“... 고마워요. 그런데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어머님께서...”
“기절초풍할 만한 이야기이기는 하겠지. 허나 부군께서 내신 꾀이니 제가 무어라 하겠습니까. 탓하려면 오늘 밤에 직접 만나 뵙고 탓하시오. 이대로라면... 아시잖소?”
꺽정이의 본래 성미대로라면 지금쯤 쓰러지려 할 모산수의 아내에게 가서는 ‘마나님 마나님 소리에 아쉬워하다 그 나이 먹고 관비(官婢) 박히고 싶으냐’ 하며 진작 다그쳤을 것이련만, 어떻게 잘 참아지는 것을 보니 확실히 글을 조금 배워서 성품이 좋아지기는 한 모양이었다.
(물론 원판 꺽정이를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지금도 완악스럽기 그지없다 하겠지만.)
“여하간 시한이 촉박하니 여기 오래 있을 수 없소. 내 잠시 눈을 붙이고 있을 테니 밥 한 상 차려주시오. 그리고 이제 횡액 당한 다른 대갓집들도 돌아야 하니, 덩치 작은 사람으로 길잡이도 하나 구해주시면 고맙겠소.”
오늘 밤은 어제 이상으로 길 것이 틀림없었다. 미리 기력을 모아두어야 했다.
그런 심산 알 길 없는 이지함의 아내는, 제 말 마치고 딴에는 공손히 인사 올리고서 대청 한구석에 드러눕는 꺽정이를 보고서 다시 아찔함을 느꼈다.
해가 서편으로 저문다. 스산한 감영 앞 대로에 긴장한 사내들 여럿이 남루한 행색을 하고서 모여들기 시작한다.
다행히 아직 감영 앞을 지키고 있는 군졸들은, 그놈의 말도둑 때문에 새벽부터 고생했다며 저들끼리 하품 한가득 곁들이며 툴툴대고 있었기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말이야 가볍게 했지만, 금일 벌일 이 난동이 결코 쉽게 풀리지만은 않을 것을 능히 짐작하고 있는 꺽정이였다.
노비와 고공들이 앞으로 얼마나 더 모여들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저들 집구석에 박혀 벌벌 떨고 있는 자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그나마 자신이 그렇게 다들 끼어야만 한다고 윽박지르다시피 하였으니 이만큼이라도 모이고 있는 것일 테다.
딴에 장작 패는 도끼나 급히 마련한 몽둥이 따위를 병장기라고 가져와 애써 숨기고 있는 자들도 눈에 띄었다. 정말로 저들 상전을 구하고 싶은 충실한 종복들이거나, 아니면 정말로 이 일을 성사시키고자 혈안이 된 욕심쟁이들이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다.
그러나 그런 자들일지라도 제대로 된 군사를 상대하게 되면 금방 의욕이 사라질 것이다.
나름대로 나라의 녹을 먹는 군졸들조차 꺽정이 패거리들이 어흥 하면 어마 뜨거라 하며 도망가기 십상이었다. 하물며 그보다도 못한, 아마 이렇게 모여드는 것이 그들 생에서 가장 두렵고 떨리는 일일 자들은 어떻겠는가. 군기 빠진 군졸들이라도 엄연히 군(軍) 자는 붙이고 있으니, 제때 모이기만 한다면 이 오합지졸 노비 패거리는 금방 패퇴시킬 수 있을 것이다.
충주진은 엄연히 도 하나의 진이니, 군적에 오른 군졸의 수만 족히 오천은 될 것이다. 개중 이름만 있고 몸은 없는 군사들을 제하고, 또 몸은 있지만 아녀자나 노인인 경우, 신체는 멀쩡하나 들고 나갈 병장기가 썩어서 없어진 경우 등등을 모두 합해 열에 아홉은 된다 할지라도, 남은 수는 오백.
거기에 관찰사가 직접 표하(標下)에 거느린 비장(裨將)과 아병만 해도 족히 이백.
정면으로 싸움이 붙으면 어떻게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감영 파옥은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나 꺽정이 패거리의 악명이 높아진 이후로는 관도 경계를 쉽게 풀지 않았으므로 더욱 그러했다. 그의 아내와 처제들이 한양에서 붙잡혔을 때도, 형 가도치가 체포되었을 때도 차마 파옥을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다만 오늘은 고을 노비들을 데려오는 것이니 파옥 후 달아날 때는 이지함과 그 식솔들만 챙기면 될 것이요, 더구나 충주 감영과 충주진 군사들 모두 급습에 정신이 없을 테니 그나마 조금은 나았다.
하지만 자칫 정면으로 싸움이 붙으면 일패도지할 것은 여전히 명백하였다. 그러니 오늘 밤 힘닿는 데까지 군관처럼 생긴 자들은 눈에 띄는 족족 족치고, 거기에 더불어 다음날 해 뜰 때까지 아무도 정신 못 차리도록 술수를 더 부려야 할 것이다.
“그래, 내가 이 짓 하려고 돌아온 것 아니더냐.”
칼자루 만지며 혼잣말로 스스로 다짐한다.
그러나 이 일이 끝났을 때 과연 사형이 저를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따뜻하게 보아줄지는, 스스로 확언할 수 없었다.
“거기, 저쪽이 어둡지 않으냐! 불을 밝혀라, 불을!”
한산해 보이는 겉보기와 달리, 감영 안쪽은 나름대로 부산하였다. 반나절 전 이번에 붙잡혀 온 진사 최 모의 집에 딸린 사내종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와, 노비 몇몇이 작당하여 오늘 밤 저들 상전을 구하러 쳐들어오려 한다고 고변하였던 것이다.
“너무 군사들을 괴롭게 하지 마시오. 감사또께서 하루 일을 모두 돌보시고 이제 쉬시려 하시거늘, 우리가 아랫사람 되어서 어찌 소란을 일으키겠소?”
비장 김삼동(金參同)이 포정루(布政樓, 감영 정문) 뒷편 마당에 진을 치고서 여기저기 바삐 지시를 내리고 있는데, 병방 박가가 슬쩍 다가와 딴지를 걸었다.
“아니, 다른 것도 아니고 이 감영에 직접 쳐들어와 파옥을 하려 한다지 않았소. 만에 하나 잡아둔 대역죄인이 풀려나는 일이라도 생기면 어찌할 테요?”
“그러니까 너무 호들갑을 떨지 마시라 이 말이오. 이 사람 참. 어차피 그깟 노비들이야, 이렇게 훤히 불 켜놓은 것을 보면 일이 어그러졌구나 하고 겁먹어서 절로 내뺄 텐데, 우리가 이렇게 부산을 떨면 사람들이 무어라 하겠소? 다 평소에 기강을 잘 갖추지 않아 이렇게 급히 허둥댄다 할 것 아니오?”
고변한 종 막쇠를 심문하면서 캐묻기를, 정녕 노복들끼리 이런 엄청난 일을 꾸미고 있느냐, 누군가가 뒤에서 작당하여 그들을 이끌고 있는 것은 아니냐 하였는데, 답하기를 순전히 저들 사이에서 도는 이야기라 하였다.
이를 전달받은 관찰사 김익수는, 끽해야 아직 잡혀들어오지 않은 죄인의 서자나 얼자 가운데 나름대로 효심 있는 자가 나서서 저의 집안 종복들이나 모으고 있을 것이라 단정하였다. 사태가 크게 벌어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긁어 부스럼 될까를 더 염려하였던 것이다.
어떻게든 윗전에 잘 보여, 역적놈들 가산 적몰할 때 중간중간 누락되는 노비와 토지 따위를 야무지게 챙겨먹을 생각이었던 육방 아전들도 참으로 탁월한 혜안이라 찬탄하면서, 그 말대로 ‘과한 대비’ 이루어지지 않도록 애썼다.
“오늘 새벽의 말도둑도 아직 찾지 못한 판국 아니오? 정황을 따지고 보면 그쪽이 더 수상하거늘... 쯧쯧. 비장으로서 사안의 경중(輕重)을 가리셔야지 않겠소?”
“이미 그쪽에 적지 않은 아병들을 풀어 찾고 있소이다. 그만큼 이곳 감영의 경계가 약해졌으니 마땅히 보완해야 하는 것이오.”
“노복들이 설령 간이 부어서 직접 여기 감영까지 쳐들어온다 한들, 그 수가 수십이나 되겠소? 군사 한 열 명만 무장 갖추고 지키고 있다가 나가서 쫓아내면 될 것 아니오? 지금 여기끌고 온 군졸만 해도 족히 오십은 되겠구만.”
그러나 암만 옆에서 딴지를 걸어도 이 고지식한 비장 김삼동은 요지부동. 결국 병방이 먼저 지쳐 나가떨어졌다.
그렇게 해는 저물고, 시각은 벌써 이경.
여전히 활활 타는 화롯불로 인해 보름달 달빛도 그리 환하게 보이지 않았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군사들에게, 김삼동이 호통을 쳤다.
“이놈들, 일어나라! 놈들이 바로 이럴 때 쳐들어올 것이란 말이다!”
“비장 나리, 우리도 엄연히 여기 감영에 속한 군졸입니다. 이렇게 사람을 새벽부터 오밤중까지 끌고 다니면서 쉬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 어디 군법에 있습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왜 하필 많고 많은 군졸 중 우리입니까?”
참다 못한 군사들이 대들기 시작했다.
“이놈들이... 후, 좋다. 만약 오늘이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간다면, 다 너희가 물샐틈없이 방비하여 적당(賊黨)이 허튼짓할 엄두도 못한 것이라, 내 그렇게 감사또께 말씀을 올리마.”
김삼동이 꼬장꼬장하기는 하지만 약조한 것은 곧잘 지킴을 아는 군졸들이 그제야 떨군 고개를 들고 다시 경계를 제대로 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까 내가 병방과 언쟁하는 것을 듣지 않았느냐. 만일을 대비하여 이렇게 너희를 힘들게 하는 것뿐, 설령 놈들이 쳐들어온다 한들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 중 우두머리 한둘이 있어 주동자 노릇을 하는 것일 테니, 그자들만 족치면 공은 모두 너희 것이 된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헤헤, 다른 군관도 아니고 우리 김 비장 나으리시라면, 소인네들 공을 가감없이 고해주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 참, 놈들더러 쳐들어와 달라고 달님 보면서 빌기라도 해야 하겠습니다그려.”
그제야 곧 몰수될 그 엄청난 토지와 노비가 떠올랐는지, 언제 대들었냐는듯 급히 말을 바꾸는 군졸들이었다.
사실 김삼동 본인도 그 욕심에 이렇게 바짝 군기를 세우는 것이기도 했기에, 그 역시 달을 보며 마음속으로 빌고 있었다.
관찰사 김익수는 오늘 저녁에도 기생을 불러 술판을 거하게 벌였다. 이제는 그 자리도 파하고, 김익수 역시 본인의 방에서든, 주안상 앞에서든 드러누워 있을 터. 그런 판에 적습이 벌어지고, 그때 관찰사는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었다고 소문이 나게 되면 김익수 역시 곤란해질 테다.
그러니 자신이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들어가 적습이 있었다고 보고하고, 그제야 흐트러진 주안상을 보고서 놀란 척을 하고, 게슴츠레 눈 뜬 김익수에게,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준다면, 김삼동 그의 입을 막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재화가 내려질 것인가?
그런 행복한 상상에 빠져있던 중.
벽력과 같은 소리가 나며 문이 부서졌다.
“네 이놈들! 목숨을 내놓아라!”
문을 걷어차며 들어온 거한의 손에, 방금 전까지 그 문을 지키고 있던 군졸이 피투성이가 되어 붙잡혀 있었다. 마치 장작을 마당 한편에 던지듯, 거한이 휙 그 몸뚱이를 군사들 가운데 던지니, 급히 도열한 군졸들은 절로 얼어붙었다.
“화적이다! 화적떼가 나타났... 다...”
뒤늦게 적습 알리며 달려오던 군졸도, 저놈부터 잡으라 외쳐야 할 김삼동도 말이 떨어지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깨진 문 바깥으로 족히 수백은 될 횃불이 일렁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쳐라!”
거한의 일성(一聲)에 화답하듯, 바깥에서 와아아 하는 함성이 울렸다.
그러고서는 성큼성큼 걸어온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군사들은 기세에 눌려 한 걸음 한 걸음씩 밀려났다.
“거기, 네가 이 군졸들 이끄는 군교(軍校)냐.”
“그, 그렇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칼날이 번뜩이며, 김삼동 옆에 있던 군사의 목이 달아난다. 보상 이야기 들을 때까지 툴툴대던 그자였다.
그리고 김삼동 본인은 어어 하는 사이 멱살이 붙들렸다.
“너, 가서 다들 깨워라. 내 파옥을 한 뒤 너희 관찰사에게 찾아갈 테니, 비장이니 군관이니 하는 자들 모두 모아서 막아보라고.”
가까이 보니 새파랗게 젊은 거한이었다. 그러나 김삼동은 저도 모르게 답하고야 말았다.
“예, 예!”
“그러고 보니, 가서 알리는 데 굳이 팔까지야 필요 없겠지.”
휙 소리와 함께 툭 하고 무언가 떨어진다. 그제야 오른팔에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온다.
“어, 어? 으아아!”
“더 시끄럽게 굴면 다른 쪽 팔도 잘라주마. 자, 가라.”
사람의 것이 아닌 듯한 비명을 지르며 김삼동이 달아나듯 감영 안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나머지 네놈들. 저 꼴 나기 싫으면 알아서 구명들 해라.”
이판사판 심정으로 비명 지르며 달려든 두어 명을 더 베어넘긴 뒤, 꺽정이가 말했다.
군졸들조차 달아나고, 이제 피로 조금씩 물들기 시작하는 마당은 곧 종복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앞서 어설프게나마 병기를 마련해 왔던 이들 스무 명 가량이 전부였지만, 애초에 아무도 따라 들어오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꺽정이에게는 충분하였다.
“나 혼자 아무리 눈길을 끈들 오래는 못 버틴다. 얼른 파옥해서 너희 상전들 끌고 달아나야지. 자, 가자.”
일렁이는 불길 사이에 보이는 꺽정이의 얼굴은 피가 잔뜩 묻은 지 오래였다.
오늘 아침에 그들을 불러모았을 때는 평대하던 꺽정이가 지금은 하대하고 있었건만, 종복들 가운데 그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말 마친 꺽정이가 감영 안쪽으로 달려나가자 정말 무엇에 홀린 듯, 그대로 따라서 달려갔다.
그리고 향옥의 벽에 사람의 피가 한껏 칠해진 뒤.
얼떨떨해 있는 그들 상전을 모시고 다시 감영을 빠져나가는 이들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파옥이 성공해서 나오는 한숨인지, 저 흉신악살 같은 장정의 곁을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나오는 한숨인지, 그들 누구도 확언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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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설치되었던 감영은 부지의 형태 등에 따라 그 구조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정문(포정루)과 중문(중삼문·내삼문), 관찰사가 업무를 보는 중심 건물(선화당), 관찰사과 그 가솔의 사저(내아), 실무자들을 위한 행랑채와 창고 등 기타 건물로 구성되었습니다. 작중에서도 이를 참고하였습니다.
작중 시점에서 충청도 관찰사를 맡고 있던 김익수는 윤원형 일파에 동조하였던 인물로 추정되는데, 이로 인해 『명종실록』에서도 사관의 혹평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됨이 조급하고 망령되었다는 식의 평은 소윤의 거의 모든 인물에게 붙박이로 붙어 있기 마련이지만, 특히 김익수의 경우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서는 관기를 몹시 사랑하여 거칠고 비루한 일이 많이 있었다’는 평이 남아 있습니다. (명종 9년 12월 17일 기사)
조선 전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면서 각종 사회적 모순이 발생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특히 문제가 된 현상 중 하나가, 양인이 점차 줄어들고 천민이 늘어나며, 지방 사족들이 이를 이용하여 거대한 농장을 경영하는 추세였지요. 빚 때문에 노비로 스스로를 팔거나, 노동력이 필요한 주변 사족들에 의해 억지로 노비가 되거나, 토지를 잃고 비부살이(여자 노비를 아내로 삼아 소작농이나 머슴으로 사는 것)를 하는 경우도, 아예 이름만 양인이지 실제로는 양반가와 농장에 예속되어 사는 경우 등이 모두 있었습니다.
이로 인한 또 다른 문제는 지방군의 붕괴였습니다. 임진왜란 한참 이전, 이르게는 15세기 말부터 문제로 인식된 현상이었지요. 왜구와 여진족 등 소규모나마 외침이 계속되고, 중종대 이후 군도의 발생이 늘어나 수령이 군도들에게 겁박을 당하고 대낮에 관아에 들어와 무기고를 털어가는 등 지방군 붕괴가 가속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해 이른바 아병 또는 표하군(標下軍)이 형성되게 됩니다.
아병은 임란 전까지는 공식 편제가 아니었고, 비공식적으로 수령이 거느리는 소수 정병으로 꾸려졌습니다. 이들은 거의 무력화된 지방군 대신 수령의 직속군으로서 치안과 지역 방위를 수행했고, 공식적인 지방군과 달리 천민 등도 무력만 있다면 선발하여 운영하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능력 위주로 꾸려진 아병들은 임란 초기 그나마 조선이 버틸 수 있는 한 가지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김순남, 2015. “16세기 조선 지방군제의 동요: 아병의 형성 배경.” <조선시대사학보> 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