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2화 (12/259)

5. 선비는 화를 당하고 (4)

어젯밤, 이지함은 꺽정이에게 이렇게 마음 정하여 들려주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 혼자 살겠노라며 너와 함께 도망하는 것은 차마 못 할 일이다. 그러니 이렇게 하자꾸나. 이왕 파옥을 하는 것, 통채로 감영을 뒤엎고 여기 끌려들어온 이들을 모두 풀어주는 것이다.”

“그, 사형께 이렇게 말하면 보나마나 예의는 아니겠지만... 에라, 모르겠다. 사형, 미쳤소?”

꺽정이가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았다.

“암만 나라꼴 우습고 이곳 감영은 기강이 해이하다지만, 그래도 엄연히 한 도의 감영이오. 더구나 지금 하루이틀이 급한 실정인데 어느 세월에 패거리를 모으고 있겠소? 이 일대에 무슨 도적떼가 있어서 끌어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 사람 말을 좀 들어보거라. 나 홀로 파옥하고서 너와 함께 달아나면, 반드시 관에서 일벌백계(一罰百戒)를 하겠다며 필히 내 장인과 주변 사람들을 더욱 괴롭게 할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만약 일벌백계가 아니라 백벌만계(百罰萬戒)를 해야 하게끔 만든다면 어찌 될까? 충주 유생들을 거의 모두 가두어놓다시피 했는데, 이들이 모두 빠져나가게 된다면? 그리고 그들에게 딸린 민인(民人)까지 모두 풀어서 온 고을이 엮이게 만든다면?”

충주 고을 유생들이 모두 붙잡혀 왔으니, 그들을 동시에 모두 풀어주면 고을 전체가, 더 나아가 그들과 엮인 호서 다른 군현의 문중들까지 공범이 되는 셈이었다. 설령 윤원형이 끝까지 색출하여 죄를 주려 한들, 호서 인심 모두를 적으로 돌릴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어려울 것이다.

이 나라가 세워진 이래 역적질하는 자들도 없지 않았지만, 억지 역모 고변에 당하여 죽은 자는 훨씬 많았다.

그러면 그들은 왜 가만 앉아 죽음을 기다렸는가? 임금에 대한 의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도망친들 죽느니만 못한 꼴을 당할 것이요, 그나마 결국에는 잡혀 죽으리라는 그 두려움. 그것이 사람들의 발을 잡았을 터.

스승의 가르침대로 의심하고 의심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러한 두려움을 깨뜨리고, 이지함 그가 원하는 대로 최대한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에게도 의심을 불어넣으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역시 욕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선비 노릇이 궁하여, 새롭게 변할 각오 하고서 고심하고 고심하니, 저의 머릿속에서 나오리라 생각도 못한 계책이 튀어나온다.

“... 하여, 노복들을 끌어들이면 충분히 머릿수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모산수 어르신뿐 아니라 잡혀들어온 다른 문중까지 뒤엎는 일 아니오? 그것을 홀로 해도 되겠소?”

“어차피 모두 멸문지화를 당하게 된 판이지 않으냐. 조정이 올바르게 될 때까지 숨어 살 만한 재물 정도야 다들 있을 것이다. 일단 내 장인어른께는 사후에 내가 잘 말씀드려 보겠다.”

그런 재물이 없다 한들, 여기 갇혀 있다 추포되어 장살당하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구명할 길 찾아 떠돌아다니는 것이 나으리라. 그렇지 않다면야 파옥할 때 나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모질게 단정하는 이지함이었다.

“후... 알겠소. 내 그러면 그렇게 해보리다.”

어느새 털썩 감방 앞에 앉아 있던 꺽정이가 몸을 일으켰다. 나서려던 차, 몸 돌려 한 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아까 말한 것처럼, 여기는 어쨌든 감영이고, 아무리 군기가 해이해도 군사 수십은 금방 모을 수 있을 거요. 그들이 곧장 쫓아오지 못하게 하려면, 시일은 촉박하고 사람 손은 모자랄 테니 기책(奇策)을 써야 하는데, 그것이 사형을 비롯해 여러 사람 눈에는 거슬릴 수 있겠소.”

“너만 믿는다. 걱정 말거라.”

“그저... 나를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주시오.”

그러고서 꺽정이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바깥에서 함성과 더불어 비명이 들려온다. 계책대로 이루어진 듯하여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는 딱히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갑작스럽게 수백의 횃불을 보고 놀란 관찰사 이하 관헌들이 당황하여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있는 것일 테다.

점차 함성 소리가 다가오고, 바람 통하라고 내어둔 구멍으로 일렁이는 횃불 불빛이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옥의 문이 열렸다.

“나오십쇼! 어르신들 모두 나오십쇼!”

꺽정이가 저렇게 공손하게 말할 리 없으니, 필히 어느 집의 서얼 자제거나 노복일 테다. 곧 우르르 사내 몇몇이 밀려들어와, 도끼로 문살을 찍어 부수기 시작했다.

이어서 목에 찬 칼이 부서지고, 마침내 손발이 풀려났다.

옥을 나서니, 생각보다 훨씬 적은 무리들이 불안하게 서성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먼저 나온 장인어른은 여전히 당황한 듯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사위, 이게 다 무슨 일인가!”

“나중에 모두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우선은 댁으로 향하셔서, 값나가는 패물만 추리시고 나머지는 모조리 나누어주실 준비를 하시지요. 노비들 문기는 불사르시고요.”

“무어라? 지금 대체 무슨...”

그때, 마침 아직 추포되지 않고 집에 있던 모산수의 서자 이령(李領) - 무과를 준비하고 있었다 - 이 환도를 차고서 무리 가운데 끼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령 역시 저의 아버지와 이지함을 보았는지 급히 달려왔다.

“나오셨습니까! 한시가 급합니다. 그 거한이 눈길을 끌겠다 하였으니 얼른 발걸음을 하시지요.”

‘발걸음’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거한’만 맴돈다. 필시 꺽정이리라.

“거한이라? 그이가 어디로 갔느냐?”

“관찰사를 만나보겠다며 감영 안쪽으로 깊이 들어갔답니다.”

“홀로 보냈단 말이냐?”

“그럼 저희가 따라가야 하겠습니까? 말투로 보니 일개 상한(常漢)인데...”

“시끄럽다. 그 사람이 바로 내 사제요 우리 모두의 은인이란 말이다! 지금 찬 그 칼을 내놓아라. 나 혼자라도 따라갈 테니, 너는 장인어르신을 모시고 얼른 돌아가거라.”

더 왈가왈부하지 않고 곧장 띠돈 풀어 칼집 채로 건네주는 이령이었다.

이지함 그가 감영을 드나들 일이 얼마나 있었겠냐만, 꺽정이 지나간 길은 훤히 볼 수 있었다.

곳곳에서 화롯불 받아, 또 보름달 달빛 받아 번뜩이는 저 검붉은 것이 먹물일 리는 없으니, 반드시 사람의 피일 테다.

그리고 마치 표(標) 세워둔 것처럼 곳곳에서 꿈틀대고 있는, 아직 죽지 못한 자들. 붉게 물든 군복으로 그들이 군관임을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으아아, 내 다리, 다리가!”

“게 누구 없느냐, 누가, 누가 와서 도와다오!”

누구는 무릎 아래가 서로 어긋나 비척비척 기어다니고 있고, 누구는 양눈을 가로질러 붉은 일(一)자 그어진 채 주저앉아 뉘 없느냐며 소리만 지르고 있었다.

소란 듣고 뛰쳐나온 감영 군졸들도 이 끔찍한 광경을 보고 그대로 얼어붙어 있다가, 이지함이 지나가니 화들짝 놀라 달아났다.

이 와중에도 날카로운 눈매와 명석한 머리는 주변 둘러보고 판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살핀즉, 진짜 죽은 시체는 두엇뿐이요 나머지는 모두 피칠갑을 했다지만 멀쩡히 살아있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더 소름이 돋고 구역질이 올라왔다.

결국 달리다 말고 한 차례 게워낼 수밖에 없었다.

저 쓰러져 버둥대는 군관들의 몸에 새겨진 칼자국 하나하나가 다 노리고 그어진 것이었다. 지금도 달려오다 말고 자빠지고 달아나는 저 군졸들 같은 이들이, 추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도록. 사람을 베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목석에 흠집 내는 것처럼 평온하고 냉정하게.

그리고 그것을 저지른 사람이 바로 그의 사제, 어젯밤 마치 장난질 모의하듯 파옥을 함께 이야기했던 꺽정이었다.

‘아니, 꺽정이가 아니다. 내가 시킨 일이다.’

이렇게 될 것을 자신이 어찌 미리 알았겠는가.

그러나 다시 의심이 떠오른다. 정말 몰랐는가? 꺽정이 손에만 피 묻힐 궁리 하고서 저는 신선놀음 할 수 있을 줄 알았던가?

만약 꺽정이 말대로 저 혼자 전날 밤 도망을 쳤더라면, 적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터.

‘그래, 내가 일으킨 일이다.’

마음을 다잡고 일어난다. 정말로 고변 공초장에 올라온 것처럼 흉악한 죄인이 될지언정, 사람으로서 차마 꺽정이에게 이 모든 짐을 지울 수는 없었다.

이 광경이 잊히려면 한참은 걸릴 것이다.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더 생각하기에 앞서, 지금은 우선 나아갈 때였다.

“여봐라! 침노해온 적은 제압하였느냐? 적도들의 함성이 잦아든 듯하구나.”

술기운 남아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관찰사 김익수가 물었다. 처음 적습 얘기를 듣자마자 화들짝 놀라 이곳 내아(內衙)로 뛰쳐들어온 뒤 빗장을 닫아걸고 있었는데, 다행히 함성은 가까워오지 않고 오히려 물러나는 듯했다.

그러다 마침내 잦아들기에 이르렀으니, 다만 다친 이들의 신음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그마저도 굳게 닫힌 내아의 문 너머로는 잘 들어오지 않았기에, 김익수는 은근히 안심하였다.

물론 그가 조금 더 총명한 사람이었다면, 함성이 커졌다가 반대편으로 물러간 것을 두고 내아 반대편에 있는 향옥을 향한 것임을 짐작했을 것이요, 소란이 잦아든 것은 곧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였기 때문 – 즉 대역죄인들을 모두 풀어주었기 때문 –임을 깨닫고서 좌불안석으로 있겠지만, 김익수는 그만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소관이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영감.”

곁을 지키던 비장 최가가 선뜻 나섰다.

조심스레 빗장을 열고 살짝 문을 열었는데,

“어?”

비명 같지도 않은 이상한 소리와 함께 등짝으로 번뜩이는 칼날이 빠져나왔다.

“급소는 피했으니, 얼른 가서 지혈이나 하쇼. 가는 길에 비명이란 비명은 다 지르면서 가는 것 잊지 말고.”

최가는 곧 풀썩 쓰러지고, 문간에 서 있는 괴한의 모습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괴한은 최가의 몸을 번쩍 들어 바깥으로 던진 뒤, 김익수를 향해 다가왔다.

“나리가 관찰사요?”

“네 이놈,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맞나보군. 이보쇼, 나리, 내가 무사하길 바랐으면 이런 짓을 했겠소?”

“이.... 이! 이미 네놈의 패악질을 모두가 보았으니, 반드시 국법(國法)에 따라 주륙(誅戮)을 당할 것이다!”

“아, 그렇지. 나리 말씀이 옳소. 본 눈이 많지. 암.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죽기는 싫군그래. 그러면 이제라도 증좌를 하나씩 하나씩 없애야 하지 않겠소?”

괴한이 칼날을 휙 옆으로 휘두른다. 거기에 묻은 피가 칼날 따라 확 튀어, 김익수의 얼굴에 닿았다.

“어디 보자. 나리의 그 두 눈이 나를 보았으니, 지금이라도 칼질 한 번으로 말끔히 도려내야 할까?”

이미 서너 걸음 안쪽까지 괴한이 들어왔다. 도망치려면 도망칠 수 있을까? 그제야 영감이고 나리고 따질 계제가 아님을 김익수는 깨달았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아니지, 그래도 두 발로 도망을 가서 또 시끄럽게 떠들어댈 수도 있지 않은가? 아예 무릎 아래를 깔끔하게 잘라버려야지.

아니지, 그래도 또 누가 업어갈 수도 있지 않은가? 그 혀를 미리 뽑아버려야지.

아니지, 그래도 또 붓으로 뭔가 장난질을 칠 수 있으니, 양손을 모두 으스러뜨려야지.”

섬뜩한 자문자답이 한 단락을 건너뛸 때마다 온몸의 맥이 빠진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깔끔하게 머리통이나 잘라버리련다.”

“사... 살려...”

“왁!”

칼 뽑는 시늉을 하다가 갑자기 얼굴을 확 들이밀며 괴한이 소리치니, 김익수는 넋이 고대로 빠져나간 듯 ‘히익’ 하는 비명과 함께 바로 혼절했다.

그로 인하여 뒤이어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는 그대로 반대편 귀로 빠져나가게 되었다.

“꺽정아.”

“죽일 생각은 애초에 없었소. 현감이나 군수 정도라면 모를까, 관찰사를 죽이면 골치가 아파지거든.”

“...”

“어디까지 보셨소?”

“다 보았다.”

김익수의 사람됨에 대한 이지함의 평이 맞다면, 이만큼 겁을 주었으니 설령 깨어나더라도 한동안은 인사불성일 테다.

전생에도 감영은 한 번도 턴 적이 없었고, 관찰사쯤 되는 사람을 까무러치게 만든 적도 없었으므로, 이번 생이 지난번보다 낫다 할 만한 거리가 또 늘어났다.

옛날 같았으면 이쯤에서 통쾌한 마음에 박장대소라도 했으련만.

이지함 앞에서는 차마 그럴 수도 없었고, 그럴 마음도 들지 않았다.

올봄 가뭄은 정말로 심하였기에, 칼을 씻을 만한 개울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개울가에 내려갔다가 허탕치고 돌아와서는, 어쩔 수 없이 옷자락에 쓱쓱 닦았다. 달빛에 드러난 핏자국이 선명하여 영 찝찝하였다.

“험한 꼴을 보였소. 앞으로는 사형 보시는 앞에서는 이렇게 피 튀길 일 없도록 주의하겠소. 장담은 못하겠지만.”

한동안 침묵 속에서 함께 길을 걸었다. 잰걸음으로 저자를 벗어난 지 오래여서, 두 사람만으로 흙길이 꽉 찼다. 쩍 갈라진 논밭에는 개구리 하나 울지 않고, 물 없는 도랑에는 풀 한 줄기 바람에 울지 않았다.

“나는 몹쓸 사람이오. 그래서 기책이랍시고 떠올린 게 그런 몹쓸 짓뿐이었소. 딴에는 사람 목숨 덜 상하게 한답시고 힘은 썼지만.”

“... 그리 따지면 거하게 파옥 일으키자고 꼬드긴 나도 나쁜 놈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대역죄인데, 이것을 뒤엎으려 하니 어찌 피가 안 흐를 수 있겠느냐. 내 각오가 부족했지.”

이지함이 한숨을 푹 쉬었다.

“모르겠다. 네가 시산혈해를 만들어놓은 것을 보니 참으로 끔찍하고 무서웠다. 그리고 지금도 무섭다. 옥에 갇혀 있을 때만 해도 저 넓은 하늘이 그토록 그리웠는데, 이제는 무섭기만 하구나. 앞으로 적어도 한동안은 대명천지에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을 테니, 앞으로도 계속 무섭겠지.

그런데 말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 한 편이 두근거린다.나는 원래 배 타고 섬이나 떠돌면서, 백성들 이롭게 할 방책을 찾아다닐 생각이었다. 그러나 방책을 백 번 구하면 무엇하느냐. 그것을 실제로 이룰 힘이 없으면 아무 소용 없거늘.

반대로 너를 따라다니게 되면 아무리 비천하고 부끄러운 도적의 몸이라지만, 세상에 무언가 족적을 남기고 가지 않겠느냐. 일의 성패야 어찌 되든. 그래서 짜릿하다. 어떠냐. 이 사형도 참으로 몹쓸 작자 아니더냐.”

이러고도 선비인가. 그 모순이 문득 우스워, 마침내 이지함 입에 가벼운 미소나마 감돌았다.

“고맙소. 함께 해주겠다 말해주어서.”

“그래. 잘 해보자꾸나.”

솔직히 지금도 자신이 잘하고 있는 것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면 자신이 무언가 잘 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던 적이, 아니,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던 적이 얼마나 되었던가.

“그래, 네가 말했던 그 대계가 무엇이냐?”

“별 건 없소. 도적질로 세를 모아서 나라를 뒤엎는 것이지.”

꺽정이가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니, 다시금 힘없는 웃음이나마 이지함 입에서 빠져나왔다.

“나라 뒤엎기라. 그럼 그건 또 어떻게 이루어낼 심산이냐?”

“그걸 지금부터 사형께서 생각해주셔야 하지 않겠소?”

“허. 녀석.”

멀리 달빛 받아 빛나는 절벽 아래, 모산수의 집이 보였다. 종이 태우는 연기가 멀리서도 보였다.

봄 가뭄이 근래에 드물게 심하여, 대흉(大凶)은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이로 인해 가뜩이나 민심도 뒤숭숭한 판에 역모 고변까지 터져 평온치 못한 조정이었는데, 그러고도 아직 부족하다는 양 충주에서 대죄(待罪)하는 장계가 올라오니 이제 조정이 발칵 뒤집히다시피 하게 되었다.

그동안 윤원형이 대의멸친하는 명신 시늉을 하며, 저의 형을 비롯하여 나라 안의 간적(奸賊)을 쓸어 없애겠노라며 정국 주도하는 것을 아니꼽게 여기던 같은 소윤 정순붕(鄭順朋)과 이기(李芑)에게는 또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이들은 그동안 윤원형이 저 대신 욕받이 할 사람을 구하고자 사림(士林) 자칭하는 헛똑똑이들을 겉으로나마 가까이 하고 종종 먹이도 던져주던 것을 분하게 여겼다. 저들보다 한참 어린 윤원형이가 득세하기 전부터 그들은 저 거짓 선비들과 다투어 왔건만, 그런 것 따위 신경쓰지 않겠다는 양 마음대로 일을 벌이니, 어찌 당하고만 있겠는가?

은연중 저들을 퇴물로 보는 윤원형을 견제하고자, 이 이홍남 역모 고변에 대해 더 강경한 대응을 외침으로써 금상 즉위 후 윤원형에게 쏠리는 기세를 저들에게 조금은 돌려놓으려 했던 것이다.

허나 윤원형을 질투하는 것에 비해 이들의 계책 꾸미는 솜씨는 한참 뒤쳐졌으니, 누가 말리기도 전에 이미 상소가 올라가버리고 말았다.

“신 등이 삼가 생각하옵건대, 하늘의 재변이 이어지는 것은 가운데(中)를 잃음에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근년 사이 나라의 위엄을 가볍게 여기고 사특한 말을 꾸며 옳고 그름을 뒤섞는 자들이 준동하니, 이들을 안타깝게 여겨 무겁게 다스리지 않음은 인덕(仁德)의 중용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노하고 백성은 놀라, 금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아, 간악한 역적의 무리가 수령방백의 위엄을 가볍게 여기어 마침내 참혹한 일을 벌이고 말았으니, 어찌 신들이 죄를 청하며 교정할 방도를 백방으로 구하지 않겠습니까?

... 서경덕의 제자로 지금 조정에 출사한 자로는 허엽(許曄)이 있을 뿐인데, 이들이 무리를 모아 사사롭게 정사의 옳고 그름을 평하고 때로는 없는 말을 지어내기도 합니다. 어찌 이지함의 흉참함이 그 스스로 일어난 것이겠습니까? 즉시 파직함이 마땅합니다.

또한 역당(逆黨)의 굴혈(窟穴)인 유신현(충주) 모산수의 집에서 이지함 등을 추포할 때 함께 압수한 물품 중 이른바 『화담자의』라는 서책이 있다 합니다. 신 등이 이제 그 내용을 살핀바 천지 사이에 그 어떤 의리도 없다고 억지된 주장을 펼치니 실로 요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늘 아래 정해진 도의가 없다 함은 곧 군신(君臣)과 부자(父子) 사이의 마땅한 이치도 없다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대역의 근원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이약빙과 이홍윤의 공초에, 이지함이 그 사특한 글을 널리 퍼뜨릴 궁리를 하고자 충주에 내려왔다 하니, 재액의 뿌리가 얼마나 깊게 뻗어나가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그 책의 유통을 엄금하고, 그 논의를 함부로 입에 담는 자는 패역(悖逆)한 죄인으로 다루소서.”

윤원형이 뒤늦게나마 손을 쓴 끝에, 실제로 상이 – 즉 윤원형의 누이 문정왕후가 – 저 말을 따르는 일은 없었지만, 이미 소문은 퍼질 대로 퍼지고야 말았다.

보령에서 쥐죽은 듯 지내고 있던 이지번에게, 대체 그 『화담자의』가 무슨 서책이기에 저 윤원형이와 그 패거리가 그토록 경계하고 두려워하느냐며 어떻게 한 번 저들도 구해서 볼 수 없겠느냐 하는 전국 선비들의 문의가 밀물처럼 밀려 들어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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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의 이홍남 고변 당시에도 충주 한 고을 전체의 유력가들이 역모죄로 치죄당하면서, 그 막대한 가산을 적몰하는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당시 이 일을 맡은 이해(이름자가 벽자인 관계로 원문 병기가 어렵습니다)는 전체 몰수 대상 재산의 약 10분의 9 정도는 몰수하지 않고 충주에 거주하는 ‘본주인’들에게 남겨주었는데, 이 과정에서 양민이 보유한 재산이 함께 몰수되었다가 엉뚱한 사람에게 재분배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는 실제로 당시 충주 양반가의 노비나 토지 소유가 그렇게 명확한 근거 없이 이루어졌음을 방증하기도 합니다.

이해는 나중에 이것이 문제가 되어, 역적들에게 관대한 조치를 내렸다는 이유로 탄핵당해 죽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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