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4화 (14/259)

6. 도적은 때를 만나네 (2)

봉산군수 곽순수(郭舜壽)는 아침에 등청하자마자 한숨을 푹 쉬었다.

“이보게, 호방.”

“예, 사또.”

“다들 올해 농사가 대흉이라고들 하는데, 그래도 아직 진휼(賑恤, 구휼)을 위해 관창(官倉) 빗장을 열기는 이르지 않겠는가?”

“이르다니요. 진휼(賑恤, 구휼)을 하시려면 지금만 한 때가 없겠습니다.”

“혹시, 그... 갑자기 곳간에 묵혀둔 미곡이 벌레를 먹었다던가 하지는 않았다는가?”

“아이고,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리 되면 정말 큰일이지요.”

차마 구휼을 하기 싫다고 말은 못하는 곽순수였다.

누구는 수령의 자리에 나아와 집안을 일으킬 만큼 치부한다는데, 곽순수는 천생 무관이라 도저히 그럴 깜냥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선정(善政)으로 포폄(인사고과)에서 연달아 상(上)이라도 받으면 모르겠는데, 일머리가 좋지 않아 그 또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얼른 임기나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뿔싸, 나라의 법으로 정하기를, 흉년이 든 해에는 그해 가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체직을 금하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귀찮고 자신에게 이익은 돌아오지 않는 일을 피할까 고심하던 차 미루기 어려운 지경까지 오고야 말았다.

연이은 흉년으로 인해 생기는 손실, 항상 있는 인쥐들로 인해 생기는 손실 등등으로 인해 곳간은 사실상 한 해 거두어 한 해 버티면 기특하다 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여러 해 전 조정에서 정하기를, 팔도가 나란히 흉년이라 어디서 곡식 나올 구석도 없으니 각 군현에서 알아서 뜯어내고 알아서 나누어주라 하였겠는가.

호방 같은 사람이야, 저는 원성을 아니 받으니 곡식이 드나들 때마다 스리슬쩍 포흠(逋欠, 횡령)도 하고 할 것이다. 그리고 호방 대신 수령인 곽순수만 잔뜩 원한을 사게 될 터.

할 말이 궁색하던 차, 다행히 군졸 하나가 쪼르르 와서는 아뢰기를 임 처사라는 사람이 긴히 수령께 건의할 것이 있다며 찾아왔다 하였다.

저의 입에서 진휼을 하라는 말 떨어지기만 기다리며 모여 있는 호방과 이방, 형방을 얼른 물리고서 손님을 맞이할 채비를 하는 곽순수였다.

“임 처사라 하셨소이까.”

“예, 맞습니다. 소생이 품성 비루하여 벼슬은 아니하고 그저 초야에 머물고 있는데, 마침 이 일대에서 가히 시행할 만한 방책이 하나 떠올라 건백(建白. 건의)코자 이리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개성 사는 처사 임거정(林巨正)이라고 스스로 밝힌 이 서생은 서책만 가까이한 것은 아닌지, 기골 장대하고 용모는 헌걸찼다. 어쩐지 기에서 눌리는 듯한 느낌을 떨쳐내려는 곽순수에게 처사가 본론을 꺼냈다.

“천운이 따르지 않아 흉년이 이어지니 참으로 근심이 크실 것으로 압니다. 구휼미를 내어 나누어준들 마치 마른 밭에 물 한 바가지 붓는 것과 같고, 더구나 각지에 도적이 들끓어 순량한 백성을 해치게 되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소생 생각건대, 무릇 도적이란 떳떳하지 못한 자로 산림과 소택(沼澤), 절도(絶島) 따위를 소굴로 삼고 사람들 오가는 길을 점거하기 마련입니다. 흉년을 당한 백성들이 가산을 장시에 내다 팔아 겨우 미곡을 구하는데, 도적들이 그렇게 길을 막는다면 이 또한 어려워져 그 고통이 곱절이 될 것입니다.

허나 사람을 부려 그러한 곳을 때때로 순찰하고, 음험한 무리가 머물고 있으면 곧장 쫓아낸다면 어떻겠습니까?”

수령의 위엄이란 것이 있으니 그 속내를 알아듣는 양 고개는 끄덕이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겨우 겉핥기로 논지를 따라갈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곽순수라도 지금 임 처사가 말하는 바가 이루어지기 어려움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사람을 부리는 것도 결국 미곡이나 포목으로 품삯을 주어야 하는 일이지 않소? 지금 가뜩이나 진휼에 쓸 미곡도 부족하여 그나마 여력 있는 민호(民戶)를 돌며 걷고 있는 형국이외다.”

“바로 그것입니다. 애초에 구휼의 큰 뜻은 굶주린 백성이 떠돌다가 비참하게 되거나 도적이 되는 것을 막는 데 있지요. 그러나 구휼미를 함부로 나누어주기만 한다면 백성들은 스스로 일하거나 보국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관에 더욱 기대기만 할 것입니다.

이왕 풀어야 할 구휼미라면, 그저 흩뿌리는 대신 이를 바탕으로 흉년이 일으키는 다른 어려움을 막는 것이 현책(賢策)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이어서 몇 번 더 문답이 오고 갔는데, 그럴수록 떨어지는 것은 곽순수의 논리 밑천이요, 움직이는 것은 그의 마음이었다.

“... 하여, 우선 허하여 주시면 이곳 봉산 고을의 구휼미를 받아, 그렇게 사람을 모으고 장차 도적의 굴혈 될 곳을 미리 지켜 마침내 온 고을에 도적으로 고통받는 자가 없도록 하고자 합니다.”

“호오...”

그때, 호방이 벌떡 섬돌 위로 올라와 곽순수를 찾았다.

“사또! 사또 나리!”

“흠흠, 호방. 지금 내가 귀한 손을 맞아 고을 다스리는 방책을 논하고 있는데 어찌 소란케 하는가. 잠시 물러나게나.”

도로 내려보내니, 임 처사가 말을 이었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군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근래 정국이 결코 평온치만은 않지 않습니까? 더구나 윤 서원군 같은 분들의 전지(田地)도 적지 않으니, 자칫 간사한 자가 말을 꾸며 소생이 무리를 모아 흉악한 모의를 한다고 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소생이 삼가 청을 올리건대, 수령의 수결(手決)로써 저희가 오로지 도적들이 민려(民黎, 서민) 괴롭히는 것을 막고자 함을 보증하여 주신다면 그러한 근심이 없어질 것입니다.”

홀린 듯 듣던 중 수결이라는 말이 나오니, 아무래도 께름칙함을 느끼는 곽순수였다.

“허나 관장(官長, 수령)의 수결이란 군현 전체를 통틀어 그 무게가 가볍지 않은 것이오. 어찌 함부로...”

“실로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소생이 이름난 집안의 사람도 아니요, 그저 야인(野人)으로서 시책을 낸 것이니 어찌 함부로 믿겠습니까? 다만 이것을 증좌로 삼고자 할 뿐입니다.”

하면서 임 처사가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개성의 처사 임거정에게 구휼미를 내어주어, 무리를 모아 도적을 쫓아내고 농사를 망친 백성에게 마땅한 할 바를 주는 일을 맡기노라. 가정(嘉定) 26년 정미(1547) 6월 2일, 곡산군수 신수(申洙).’

그 이름 두 글자에 눈이 닿으니, 가뜩이나 아침부터 더운 여름 날씨에 열이 확 뻗쳤다.

‘아니, 신수 이 늙은이는 천운이 따라서 팔자에 없는 복록을 누리게 되었으면 족하지, 이제 무슨 치적을 더 쌓겠다고 술수를 부린다는 말인가!’

분명 지금 임 처사에게 혹하여 저도 똑같은 시책을 행하려 하고 있건만, 신수가 하니 욕심 많은 자가 더 높이 올라가겠다고 술수를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흉년으로 인해 여전히 임지에 남아있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신수는 한양으로 올라가는 즉시 벼슬이 크게 오를 것이 분명하였다. 이미 품계가 통정대부에 이르러, 같은 군수지만 신수는 ‘행(行)’ 군수였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스스로 인물됨이 잘나서가 아니라, 오직 을사년 윤임의 옥사에 연루된 종친 류(瑠, 계림군)가 곡산으로 도망쳤다가 붙잡혔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일대 수령들은 모두 신수를 질투하고 있었다.

“사또 나리, 사또 나리!”

“호방은 관장의 위엄을 무엇으로 아는가! 내 물러가라 하였지 않으냐!”

운 없게도 그때 또 재촉하러 섬돌 위로 올라온 호방을 단호하게 내치고서, 신수의 수결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을 정했다.

“지필묵을 가져오너라!”

그 자리에서 일필휘지로 같은 내용의 글을 쓴 뒤, 수결까지 하여 마르자마자 임 처사에게 주었다.

“허허, 이 자리에서 이렇게 바로 처결하여 주실 줄은 소생도 몰랐습니다. 참으로 이 고을이 현명한 관장을 두었다 하겠습니다.”

“고맙소이다.”

“이러실 줄 알았더라면 권도(權道, 임기응변)는 아니 택하는 것이었는데... 무어, 소생 또한 마땅히 약조한 바를 손색 없이 지킬 것이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만 하직 고하고, 또 뵙기를 기약하겠습니다.”

“그 무슨...”

그제야 임 처사 언행이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은 곽순수가 붙잡으려 했는데, 임 처사가 일어나는 사이 또 호방이 끼어들었다.

“사또, 큰일입니다! 큰일!”

“대체 무언가!”

“관창이, 곳간 문이 부서졌습니다! 불한당 여럿이 장사 하나와 함께 나타나 고직(庫直, 창고지기)을 때려눕히고는 사또나리 명 받든다면서 안의 미곡을 송두리째 털어갔다고...”

“이... 이 무슨! 여봐라! 저, 저놈 잡아라! 저기 저 처사 잡아라!”

그 소리를 뒤로하며, 임 처사, 아니, 이지함은 관아의 야트막한 담벼락을 훌쩍 뛰어넘었다. 과연 꺽정이 손에 던져지기 싫어 지난 한 달간 열심히 수련한 보람이 있었다.

반나절쯤 뒤, 산수원(山水院)께에서 그 임 처사라는 작자와 그 무리를 보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곽순수는 급한 대로 군졸들을 모아 곧장 그쪽으로 향했다.

그랬는데 기도 차지 않는 광경이 그를 맞이하였다.

“자, 자! 줄들 서시오! 줄을! 곡식은 충분히 있소!”

굶주린 사내들이 길을 따라 죽 줄을 서 있고,

“거기, 새치기하는 놈! 그래, 너 말이다. 마음가짐이 딱 도둑놈 심보로구나. 합격이다. 이쪽으로 와라.”

험상궂게 생긴 젊은이 하나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행패 아닌 행패를 부리고 있으며,

예의 그 ‘임 처사’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차일까지 치고서 서안 앞에 앉아 사람들을 하나씩 앉혀놓고서 문정(問情)을 하고 있었다.

“이름이 어찌 되는가?”

“그, 성은 없고, 저어기 가룻개(粉浦) 사는 작은놈(者斤老味)이라고 합니다요.”

“가솔은 있는가?”

“안사람은 작년에 갔고, 소인네 혼자 노모 모시고 삽니다. 사내아이 하나, 계집아이 둘이 있고요.”

“부쳐 먹는 땅뙈기는 있는가?”

“얼마 안 되는 밭은 안사람 병구완하느라 팔았고, 지금은 가룻개 김 선다님 아래서 소작살이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요새 워낙 자매(自賣)하는 사람이 많아서, 노복이나 비부쟁이들한테 대신 내어준다고는 하는데...”

“다시 말해 먹고 살길 막막하다 이 말이로군. 좋네. 자, 저기 가서 구휼미 받아가고, 내일 해 지기 전까지 여기로 다시 오게. 새 일터를 마련해주도록 하겠네.”

이게 대관절 무슨 짓거리냐고 소리 지르려는 차, 무리 가운데서 예의 그 젊은 장사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곽순수 옆으로 당당히 걸어왔다.

“아, 오셨소? 내 이 무리의 우두머리 노릇하는 임가요. 앞서 저기 저이가 내 이름을 팔았다는데, 임꺽정이는 바로 여기 있으니 오해하지 마시오.”

아무래도 도적질을 제대로 하려면 그 두령부터가 이름값을 날려야 하는 고로, 이지함과 논의한 끝에 다소 이른 감은 있지만 지금부터 임꺽정 세 글자 걸고서 일 벌이자 합의한 바 있었다.

“이... 이놈들이 수령을 능멸하느냐! 당장 붙잡아다가...!”

그러나 번쩍 하더니 말 위에서 보던 세상이 한 번 뒤집히고, 곧 그 장사를 아래에서 올려다보게 되었으므로 차마 그 말을 마치지 못했다.

따라온 병방과 그 이하 군사들도 어안 벙벙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많이 놀랐을 것으로 아오. 허나 크게 보면 나리께도 그렇게 손해 가는 일은 아닐 게요.”

앞서 번쩍 들어올려졌다 내려질 때 기혈이 막혔는지, 얼굴을 새빨갛게 되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곽순수였다.

“이... 이 도적놈이, 감히!”

“그 도적놈에게 구휼미를 잘 쓰라고 내주겠노라 수결까지 해서 허락을 해주신 분이 누구신데,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다 도적 아니겠소? 응?”

“...”

“자, 이렇게 된 것, 우리 잘 해봅시다! 이렇게 나누어주다가 구휼미가 모자라면, 우리 나리 존함 대고서 여기저기서 빌려다 쓰기도 할 게요.

이왕 빌려가는 길에, 자잘한 도둑들이 없어진 것은 모두 관장 덕분이니, 그분에 대해 혹 흉이라도 본다면 어쩌다가 집에 거하게 화란이 닥칠지도 모른다, 그렇게 언질을 주고 다니겠소.”

그사이 곽순수가 오늘 아침까지 ‘임 처사’로 알던 그 서생도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너무 낙담하지만은 마시지요. 소생이 도적 없애겠노라 공언한 것은 허언이 아니었습니다. 만에 하나 그렇게 날뛰는 악한이 있다면 마땅히 붙잡아 징치할 것이요, 혹 숨이 붙은 채로 붙잡는다면 모두 동헌으로 인계하여 공으로 삼으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나라에 연이어 흉년이 들고, 금년은 더욱 참혹할 것이니, 전국에 도적이 들끓고 유리걸식하는 백성 역시 한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이곳 봉산군에만 도적이 없고, 유랑하거나 굶어죽는 가여운 이들도 없다 하면, 이 모든 것이 누구의 치적이 되겠습니까?”

이지함은 조금 쉬워 보였는지, 이제야 곽순수도 대꾸를 하였다.

“허나, 그대들도 결국 패악질 부릴 것 아닌가! 내가 어명 받들어 내려온 수령으로서 어찌...”

“그것을 범법으로만 보지 마시고, 권도(權道)로 생각하시지요. 다만 시책(施策)하면서 다소 번잡한 절차를 생략할 뿐입니다. 우리는 굶주린 백성을 모아 이익이 되는 일을 경영할 것이요, 결코 소소한 도적처럼 길손을 괴롭게 하고 인명을 함부로 상하게 하는 그러한 행악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앞서 동헌에 차분히 앉아서도 말로 이기기는커녕 홀라당 넘어가기만 하였으니, 그때 없던 말주변이 지금 생길 리는 만무하였다. 반박할 말을 짜내느라 곽순수가 낑낑대는 동안, 꺽정이는 그가 데려온 군사들 사이에서 엉겁결에 따라온 병방과 호방을 찾았다.

“아, 이 고을 아전분들 되시는구려. 거기 있지 말고 다들 나오시오. 은덕을 베풀었으니 감사도 받아야 하지 않겠소? 군수 나리께서도 이쪽으로 오시고.”

그러고는 서슴없이 어깨에 솥뚜껑만한 손을 짚어 가며 길 한가운데로 끌고 나와서는, 지금도 저기서 곡식 받아가랴, 쌀섬 들어보랴 정신 없는 무리들을 향하여 외치는 것이었다.

“자, 여기들 보아라! 여기 계신 군수와 그분을 보좌하는 향리분들께서 크나큰 결심을 하시어 이렇게 구휼미를 나누어주시고 계신 것이다. 더구나 너희 가운데 호구 어려운 이들에게는 이렇게 일거리까지 주시니 이런 선정(善政)이 어디 있느냐!”

그제야 저들 관장을 알아본 봉산 백성들도 감사하는 말을 외쳤다.

“아이고, 나리! 복 받으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사또 나리!”

“수령님 은혜에 목메어...”

가운데 뭔가 이상한 말도 있었는데, 이미 분기와 당황스러움이 절반씩 섞여 혼절하기 직전까지 가고 있던 곽순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관아와 곳간 위치도 파악할 겸, 미리 이곳 봉산에서 물정 살필 때 꺽정이는 이곳 청석골까지 들어와 미리 터를 닦아두었다.

터를 닦는다 함은, 지난 생에 그들 패거리가 처음 조촐한 살림을 시작하였던 산중의 오래된 집을 찾았다는 뜻이었다.

아마 일가가 살다가 어느날 떠났는지, 아니면 변을 당했는지, 골짜기 깊은 곳에 무너져 가는 초가 세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지난번에 여기까지 흘러들어 왔을 때도, 청석골 원 주인이라 해보아야 고작 세 사람과 그들 가솔 뿐이라, 저 세 채 가운데 두 채를 어설프게 고쳐서  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벌써 세 채가 모두 사람 살 만한 곳으로 변해 있었다. 물론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무리 대부분은 해 떨어지면 저들 집으로 가거나 뼈대만 세워진 집터에서 대충 하늘을 지붕삼아 자고 있었지만.

이만해도 지난 생에 비할 바 없이 빠르게, 그리고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한편으로는 옛 청석골의 기세가 돌아옴을 기꺼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딘가 모르는 불안함 느끼는 꺽정이었다.

스승님께서 가르쳐준 말씀대로라면 기호지세가 이런 것일까. 물론 꺽정이가 범의 등에 탄다면 꺽정이보다는 그 덩치를 짊어지고 달리는 범의 안녕을 먼저 걱정해야 하기는 하겠지만.

“오늘만 해도 벌써 소문 듣고 저기 재령에서 네 명이나 왔소. 이대로라면 이번 여름 가기 전에 백 명을 넘기게 생겼다 이 말이오.”

처음 화담 초당에 모였을 때는 두령과 모주를 포함해 열 명이 채 되지 않던 패거리가 어느새 지금은 여든을 훌쩍 넘겼다.

“걱정 말아라. 네가 왜 하필 이곳 청석골을 골랐는지 처음에는 의아하게 여겼지만, 살피면 살필수록 나쁘지 않다. 참으로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요해(要害)가 아니더냐.”

멸악산(滅惡山) 따라 뻗은 산줄기 가운데 숨은 청석골이었다. 여기서 산등성이 타고 반대편으로 넘어가면 바로 의주대로가 나오고, 그 반대쪽으로 내려가면 바로 바닷가가 나온다. 대군(大軍)을 기른다면야 어디 산성에 들어가는 쪽이 훨씬 낫겠지만, 무리 기백 명을 이끌고 몰래 무언가 일을 벌이기에는 오히려 이런 곳이 더 좋을 듯하였다.

“더구나 사람이 많으니 그중 재주 있는 이도 많아서, 벌써 산채가 그럭저럭 모양새를 갖추어가고 있지 않더냐. 물론 우리 형편에 어디 대목장이나 도편수를 모셔오지는 못하겠지만, 이만하면 나는 괜찮다고 본다.”

“... 하지만 오래는 못 갈거요. 사형도 알고 계시리라 믿소.”

“아, 그 얘기더냐.”

지난 며칠간 그리고 있던 봉산과 청석골 일대의 지도에서 눈을 떼며 이지함이 마침내 꺽정이를 마주 보았다.

“그래. 나도 당연히 알고 있다. 그렇게 백주(白晝)에, 도적질의 상도(常道)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짓을 하였으니 어찌 오래 가기를 바라겠느냐.”

본디 계획은 이지함이 관아에서 군수를 붙잡아두고 정신없게 하는 동안 관아에서 몇 리쯤 떨어진 개울가의 곳간을 털어가는 것이었다. 그 뒤에 (위조한) 곡산군수의 수결을 보여주며 겁박하고 얼러가며 수결을 받아내려 하였으니, 단번에 이렇게 일이 풀리게 된 것은 기대 이상이었다.

허나 고작해야 큰 계책의 첫발을 내디딘 것에 불과함을, 꺽정이는 경험으로써, 이지함은 이리저리 머리 굴림으로써 이미 알고 있었다.

“구휼미는 벌써 거의 바닥이 났소. 일대 양반들을 수령 팔아가며 겁박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몇 번 하다 보면 그들도 어떻게든 수를 쓰려 할 것이오. 내가 양반은 아니지만 그 정도는 얼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소.”

“네 말이 맞다. 그러니 못해도 이번 겨울이 되기 전까지는, 일대의 사족들이 우리가 이곳에 터를 닦게 된 이후로 그들 삶에 나아짐이 있다고 여기게 만들어야 할 테다.”

별일 아닌 양 말하면서, 다시 붓에 먹물 묻히는 이지함이었다. 꺽정이가 마침내 답답함 못 이기고 다시 물었다.

“뭐 뾰족한 수 없소?”

“네가 있다고 하지 않았더냐?”

“내가 그랬소?”

“인재가 있다고 하지 않았더냐. 빠르게 이익 취할 수 있는 길이라면 장삿일만한 게 없는 법.”

“아니, 우선 그러려면 무언가 그럴듯한 기반을 다져야 한다고 했지. 지금은 턱도 없소.”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몇 번 더 휘휘 붓 놀린 뒤, 살짝 몸 일으켜 저의 솜씨를 감상하는 이지함이었다.

“자, 이리 와서 보아라. 이름하여 ‘봉산적도(鳳山賊圖)’다.”

대역죄인 된 이후로 어딘가 살짝 비틀린 이지함 심성 탓에, ‘적’자가 제목에 들어가버리긴 했고, 그 이름에 맞게 털 만한 대가(大家)들의 위치가 점으로 찍혀 있기는 했지만, 그것을 제하고 보면 꽤 그럴듯한 지도였다.

“스승님으로부터 들었을 것이다. 옛날에는 지도를 바치는 것이 나라의 땅을 바치는 것과 같다고 하였지. 그런데 우리는 지도를 스스로 구하여 이렇게 얻었지 않으냐! 이만하면 남에게 자랑하여 보여줄 만은 한 기반 아니더냐.

지금대로라면 반 년도 못 간다는 얘기만 입 밖으로 안 내면 될 일이다. 도적이라면 인재도 곧이곧대로 데려올 게 아니라, 훔쳐올 생각을 해야지.”

“가끔은 내가 아니라 사형이 더 도둑놈 같을 때가 있소.”

“네가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선비가 큰 도적이라면서.”

“참으로 옳은 말씀이시오. ‘대두령’.”

바야흐로 무언가 시작한다는 느낌이 들어, 근심이 덜해진 꺽정이 혼자 껄껄 웃었다. 그놈의 대두령 소리에 떨떠름해진 이지함은 함께하지 못했지만.

--- *** ---

봉산군수 곽순수는 나중에 임꺽정을 잡는 데 참여한 그 곽순수가 맞습니다. 『명종실록』의 사관들이 그에 대해 매우 박한 평가를 내렸다는 점 (‘간사하고 무식하여 장수감이 아니었다.’ / ‘인망이 없는 사람 (...)’ 등), 윤원형의 몰락 후에도 계속 승승장구하며, 함경남·북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한 뒤 선조 즉위 후에야 물러난 점 등을 감안했을 때 명종의 총애를 어느 정도 받았던 듯합니다.

그러나 작중 시점(1547)에서는 출사한 지 채 십 년도 되지 않은 젊은 무관입니다.

질투의 대상이 되는 곡산군수 신수는 중종 연간 초부터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작중 시점에서는 꽤 노령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첫 기록이 바로 사헌부에서 의금부 도사 직을 맡기에는 아는 것이 너무나 없다는 ‘디스’인 것에서 볼 수 있듯 썩 능력이 있지는 않았던 듯합니다.

1545년 윤임의 옥사에 연루되어 함께 죄인 신세가 된 계림군 이류를 추포하였던 것 역시, 이미 그 직후에 아무런 공이 없이 숟가락만 얹었다는 이유로 언관들의 탄핵을 당한 바 있습니다.

중종 연간 말엽부터 흉년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빈민에 대한 구휼, 즉 식량 배급 위주의 구제정책은 한계에 봉착하기 시작합니다. 이미 1525년 흉년에 대비하고 한양 일대에 대한 진휼을 행하고자 기관으로 진휼청이 출범하였지만, 그로부터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진휼청은 각도의 각자 구제 방침을 하달하게 됩니다. 1541년 5월 정해진 이 방침은, 각 고을별로 알아서 구휼미를 마련하고, 필요시 여력이 되는 민가에 징발하고 구휼 대상 백성에 차등을 두어 배급하는 양을 조절할 것 등 절박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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