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6화 (16/259)

6. 도적은 때를 만나네 (4)

‘師兄 보시오. 내 平壤 當到하야 徐林이를 만났는데... (사형 보시오. 내 평양 당도하여 서림이를 만났는데...)’

꺽정이와 함께 평양 갔던 노복 밤이가 후다닥 돌아오면서 전한 서간을 펼친 이지함은, 첫 한 줄만 읽더라도 누가 썼는지가 훤히 보여 홀로 웃었다.

조선국 팔도에 저런 문장을 쓸 사람이 꺽정이 외에 누가 있겠는가. 양반이라면 문리에 밝지 않은 시골 선비일지라도 겉으로는 온전한 진서로 글을 쓰는 시늉을 하기 마련이요, 향리들 역시 언문이 부끄러워 얼핏 진서인 척하는 이두로 글을 쓰기 마련이다.

저는 천한 백정이요 도적이라 말하지만, 동시에 여태껏 세상에 없던 도적 되겠노라 외치는 꺽정이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귀천(貴賤)과 상하가 뒤섞인 문장을 문장이라고 세상에 내놓으려 하겠는가.

처음의 그 충격이 가시니, 여느 향찰이나 구결 붙은 글 보는 것처럼 술술 읽힌다. 보기에 이상한 것을 제하면 언문을 이두처럼 쓰는 것도 의외로 괜찮음을 새삼스레 깨닫는 이지함이었다.

‘서림이 이르기를 내 힘을 빌어 관찰사 이준경이를 속이겠다 하는데, 내 보기에 이는 하책이오.’

언문으로 쓴 ‘이준경’ 앞에 진서로 李까지 썼다가 지운 흔적이 확연하였다. 필시 기세 좋게 쓰려다가 그제야 저는 모르는 이름자임을 깨닫고서 관둔 것이리라.

무식한 듯하면서도 은근히 견문 넓은 꺽정이답게, 이준경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얼추 들어 알고 있는 듯했다. 확실히 그 이준경이라면 어지간한 계책으로는 속여넘기기가 어려울 터.

‘하여 내 나름대로 상책이 무엇인가 고심하였는데, 사형이 살펴보고 고칠 것 있으면 고쳐서 우리 애들 보낼 때 함께 알려주시기 바라오.’

‘우리 애들’이라 하면 이 패거리에 갓 들어온 봉산군 장정들이다. 처음 초당에 끌려왔던 진퉁 도적들 중 하나를 패두(牌頭, 패거리의 우두머리) 삼아 한 열 명쯤 보내면 될 것이었다.

그 다음 대목을 보니, 꺽정이 저의 생각하는 바를 얼추 적었는데, 제법 괜찮은 계책이라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글에 전한 서림의 본디 꾀대로 하지 않더라도, 아전들이 얽힌 일이라면 어리석은 지방관 – 즉 대부분의 수령방백들 – 은 족히 속여넘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평안도 관찰사의 권한을 생각한다면, 반대로 제정신 갖춘 자가 그 직을 맡고 있다면 어떤 수를 쓰더라도 평양에서 들키지 않고 장난질을 치기는 어려울 터였다.

그렇다고 서림의 제의를 아예 따르지 않는다면, 본디 꺽정이가 평양행까지 한 이유가 무색하게 될 것이요, 서림이를 억지로 붙잡아온다면 가뜩이나 미덥지 못하다는 자가 원한까지 품게 되니 역시 곤란할 것이었다.

그런데 꺽정이가 저의 생각을 적어 보낸 것을 보니, 여기서 어떻게 하면 될지 저의 생각을 굳이 더 첨언할 필요는 없을 듯하였다.

“녀석, 나쁜 짓하는 머리만은 나보다 좋구나.”

답장을 보내려 하는데, 문득 꺽정이와 동일한 문체로 글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장난기가 들었다. 무릇 문장이란 도(道)를 싣는 그릇이므로 가볍게 여기면 아니 된다는 것이 선비들 사이의 당연한 통념이나, 그리 따지면 천하에 도둑떼 모주 노릇하는 선비는 얼마나 되겠는가.

자조 담아 붓 놀린다.

‘巨正이 보아라. 네 意대로 함이 可하리라. 但 旣往 如此히 되었으니 成事에 도움 될 글월을 同封함이라. (꺽정이 보아라. 네 뜻대로 함이 가할 것이다. 다만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일을 이루는 데 도움 될 글월을 함께 보낸다.)’

며칠 뒤, 평양.

서림이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병방 아래서 장사치들 관리하며 여기저기서 소소하게 떼어먹고 있을 뿐이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아비 하나 – 서림이 말로는 저가 여기 평양으로 흘러들어오기 전 상처(喪妻)하였다 하는데, 말한 사람이 사람인지라 곧이곧대로 들리지는 않았다 – 사는 집치고는 꽤 성대하여, 양주 읍내의 어지간한 양반들과 비등하게 기와집 마련하여 살고 있었다.

과연 평양이요, 또 과연 그 평양의 아전이라.

헌데 집 퍽 좋다며 마루에 큰대자로 누워 있는 꺽정이와 달리, 집주인은 좌불안석이라 마당을 빙빙 돌고 있었다.

“암만 생각해도 이건 미친 짓이오!”

‘임 처사’는 할 일 없으니 밥값이나 하겠다며, 서림의 곁을 지켜주고 있었다.

이 기회에 그간 거들먹거리던 놈 손 봐주겠다며 달려드는 다른 구실아치들을 임 처사가 단매에 때려눕히는 것을 보니 오히려 속이 잠깐이나마 뻥 뚫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그뿐,

지난 며칠간, 평양 아전 서림이가 곧 충주 파옥한 흉악죄인 서림이와 같은 사람이라고 육방 아전들이 입을 맞추어 이준경에게 고하고 있었으므로 서림이는 바짝 피가 마르는 느낌이었다.

“내 몇 번을 말했소이까. 아직 감사또 나리께서 따로 죄 주려고 아니하고 있는 걸 보면, 처음 임자를 가볍게 의심하기만 했을 뿐 지금은 무고하다고 단정하였음이 틀림없소. 그 사람이 그만한 분별은 있는 이라니까 그러네.”

“그게 중한 게 아니잖소. 이제 나는 이 평양부에서는 끝이오, 끝! 얼른 움직여서 새로 터전 마련할 수 있게 무명이며 쌀이며 얼른 은으로 바꾸어야 할 판에, 이렇게 대놓고 움직이고 있으니...”

임 처사가 다 저에게 수가 있다며, 병방의 집을 터는 시늉만 할 게 아니라 한탕 제대로 털면 어떻겠느냐 꼬드겼을 때, 술김에 좋은 생각이라고 덜컥 동의해버린 것이 잘못이었다.

그런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 ‘한탕’이라는 것이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었고, 더구나 관찰사 눈앞에서 한 차례 거하게 일을 터뜨릴 것이므로 마땅히 관의 이목도 대비해야 할 텐데, 여기에 대해서도 임 처사는 무사태평으로 드러누워 저의 사람들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뭐, 저들이 암만 기세 등등하다 한들 고작해야 아전 아니오. 병영의 군졸이라면 모를까, 서리 몇몇 모여서 어울리지도 않는 몽치 따위 들고 있으면 흩어 없애버리는 건 일도 아니라 이 말이오.

더구나 말로는 싫다면서 어쨌든 지난 며칠간 열심히 상인들 모아두고서 한탕 건질 채비 다 해놓지 않았소? 사람이 이렇게 겉과 속이 달라서야...”

그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 어디 한 곳에 가만히 머물러 있겠는가. 냉정하게 따진다면 유사시 평양부 경내를 무사히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임 처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것이 맞겠지만, 시시각각 ‘죄인 서림은 오라 받으라’ 하는 소리 들려오는 상상을 하며 두려워하는 서림이로서는 도저히 평온함을 지킬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 속 잘 못 헤아리는 꺽정이 보기에는, 좀생이 기질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해서대적의 모주다운 기세는 있던 그때 그 서림이가 이렇게 전전긍긍하고 있으니 오히려 답답할 뿐.

‘그래, 며칠 벌벌 떨었으니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은 얼추 갚은 셈 치자.’

벌떡 일어나, 서림이 어깨에 털썩 손 올려두고 말했다.

“이보시오, 서림이. 평생 평양부 아전으로 썩을 생각이었소? 스스로 생각하기에 재주가 그뿐이냐, 이 말이오.”

지난 생에서 서림이가 한 말이었다. 병방 바로 아래 서원(書員)까지 올라가서, 한양 윤원형이 앞에 올라가는 토산품에까지 손을 댈 만큼 간 컸던 그 작자. 쫓겨나다시피 청석골로 흘러들어온 주제에, 평양부 아전은 너무나 시시하여 이리 왔다고 가슴팍 땅땅 두드려대던 작자.

아무리 뒷골목에서 구른 경력이 꽤 된다지만, 아직 그때만큼의 패기를 갖추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함 많은 서림이었다. 하물며 아직은 감히 못 오를 산봉우리 같은 아전들과 그 위의 하늘같은 관찰사가 저를 언제 붙잡아들일지 모른다고 벌벌 떨고 있는 지금이야 어떻겠는가.

“이번에 일을 제대로 이루면 물론 한동안은 평양부에 발 못 들이겠지만, 오직 그뿐이외다. 장부가 되어서, 저들이 무릎 꿇고서 부디 지난날 일은 없던 것으로 해 달라 빌도록 만들 생각을 해야지.”

“그리 할 수 있겠소?”

“내 그리 만들 테요. 그러니 호기롭게 병방네 곳간 털겠노라 얘기하던 그 모습으로 얼른 돌아오시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두령, 아차, 처사님. 쇤네 오막손이입니다요.”

‘두령’ 했을 때 바로 옆에서 ‘쉿’ 소리가 난 걸 보니 밤이도 함께 온 모양이었다.

“오, 어서들 오게.”

(아직은) 드러내놓고 범법을 저지르진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우르르 꺽정이 패거리가 평양성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아무도 막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들 중 대부분은 아직 한 차례도 함께 일을 치룬 적 없는 봉산 장정들이니, 잡으려 한들 무슨 핑계가 있겠는가.

장정들이 하나둘씩 들어와 마당에 죽 늘어섰는데, 잠깐 돌아오는가 싶던 서림이의 패기가 도로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말로는 천군만마 데려올 것 같더니, 열댓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게 전부요?”

“어차피 얼마나 사람을 모으든 누군가의 귀에는 들어갈 수밖에 없소. ‘죄인으로 몰린 서림이가 무리를 모아 한탕 하려 한다.’ 추포하기에 얼마나 좋은 핑계요? 그런 명분을 대놓고 주면 곤란하지.”

“허나 병방의 집에 머무는 사내만 해도 족히 스물이요, 작정하고 모으면 쉰은 모을 텐데...”

“오십이라! 그 정도면 나 혼자서도 제압할 수 있으니 걱정 마시오. 애초에 그럴 생각이기도 했고.”

꺽정이가 껄껄 웃으니, 바로 그 꺽정이 손에 한 번 삼도천 구경을 하고 왔던 오막손이 이하 도적들은 따라 웃고, 나머지 일당들도 멋모르고 헤헤 따라 웃는데, 서림이 홀로 오만상 짓고 있었다.

그러나 이윽고, 꺽정이가 바람 넣으며 했던 말을 되새김질 몇 번 하더니, 저 홀로 결연한 표정 지으며 말했다.

“젠장. 좋소. 어차피 막다른 길이니, 한 번 해 봅시다. 해 보자고.”

“바로 그거요.”

병방 김귀손 귀에도 당연히 소식이 들어갔다.

“서림이가 무리를 모으고 있다?”

양반 시늉하고자 화려하게 꾸며놓은 사랑방에 앉아, 그의 사위이자 예방의 막내 아들인 고다복(高多福)을 앉혀두고 그간 주변 동향 듣던 김귀손이 곧장 되물었다.

“예, 어르신. 오늘 오시(午時, 11~13시)께 저기 봉산서 왔다는 장정들이 우르르 들어왔는데, 그들이 곧장 서림이의 집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요새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멀쩡한 양민들도 도둑 피하고자 그렇게 무리지어 다니는 일이 많았으므로 서림이네 집으로 향했다는 것만 제하면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헌데 요새 서림이가 그 임 아무개라는 도깨비같은 작자를 거느리고서 상고(상인) 여럿과 만났다는 얘기도 있지 않았던가?”

“네, 어르신. 맞습니다. 다만 잠상들이 아니라 장시에서 대놓고 장사판 벌이는 그런 장사치들을 만나고 다닌다 들었습니다.”

보통 잠상처럼 떳떳하지 못한 자들일수록 떳떳한 시늉 하게 도와주는 값을 후하게 받을 수 있기에, 병방과 그 패거리에게는 꽤 쏠쏠한 상대였다. 그리고 그런 자들을 관리하는 데 두각 드러내 뜨내기치곤 꽤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것이 서림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잠상들이 아니라 평소 저와는 썩 연이 없던 장사치들과 만나고 있다 하니 의아한 일이었다.

대개 그런 치들은 병방쪽 사람들이 뒤를 봐주고는 있지만 이를 감사히 여기기는커녕 백주대낮 장사에 저들이 도와주는 것이 무엇이기에 떼어가냐며 괘씸한 불만을 품곤 했기 때문이었다. 서림이에게 무엇 하나 도움 줄 생각조차 당연히 없을 터.

김귀손은 저의 버릇대로 바닥을 툭툭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내 알 것 같네. 서림이 그놈이 야반도주를 하려는 게야. ”

김귀손이 아는 서림이라면, 이쯤 해서 겁을 먹고 지레 도망칠 공산이 컸다. 그만한 수완이라면 재산 불리기도 꽤 했을 테고, 그것을 밑천삼아 의주나 개성으로 가서 새로 출발할 수도 있을 터.

“그러니 저의 곳간을 열어 처분하기 어려운 물건만 골라 처분하고, 그렇게 해서 구한 쌀과 베 따위는 홀로 못 옮기니 사람을 불러모은 것이지.”

밤에 몰래 성을 드나드는 잠상들 – 보다 정확히는, 그들이 다루는 각종 재보와 베·쌀 - 이 많다 보니, 나장(羅將)들에게 문을 굳게 걸어잠그고 서림이를 내보내주지 말라 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었다. 관찰사가 직접 명을 내린들 지켜지지 않을 것이었으니, 어찌 병방의 명령을 듣겠는가.

“그런데 함께 듣기로 서림이 지나간 뒤 그들 상인들이 뭉쳐서 함께 곡식과 무명 따위를 모으기 시작했다 합니다. 아무리 서림 그자의 수완이 좋다지만, 그간 모으고 불린 재화가 설마 그 정도였을까요?”

“그야 모르는 일이지. 당장 자랑할 것은 아니나 이 집 곳간만 하여도 안에 비장한 것이 여느 대갓집 부럽잖거늘, 서림이도 딴주머니를 꽤 실하게 차렸을 수도 있지 않겠나. 물론 그러면서도 더 올라갈 욕심을 부렸다니 괘씸하긴 하지만.

아마 장사치들이 서림이 일로 또 연좌되어 급히 가산 처분하는 이들 있을까 헛된 기대를 품는 모양인데, 그치들 헛물켜는 것은 어제오늘 일도 아니니 딱히 개의치 않아도 될 듯하네.”

“하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내 사람이었으니 내가 다스려야 하지 않겠나. 오늘밤 서림이 그놈 집을 덮치고 오게. 놈이 몰래 내빼려던 것을 보니 확실히 죄가 있다고 하면, 관찰사 어르신도, 호방 그 작자도 더 트집은 못 잡지 않겠나.”

꽤 손실이 크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서림이가 그대로 도망하여 병방 자신이 그 뒷탈을 고스란히 감당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다. 만약 서림이가 장정 여럿을 불러야 했을 만큼 그 가산이 많았다면, 그 중 일부를 저의 곳간에 쟁여넣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아무리 그 임가 놈이 있다지만, 한 서른이면 족히 때려잡을 수 있을 것이야.”

“예, 어르신.”

“그러면 그렇게 준비해주게. 순라군들에게는 미리 얘기해서 혹 불미스런 일 없도록 하고.”

그러나 그들이 알지 못했던 것은, 이미 서림이가 직접 그날 밤 번 서는 순라군들에게 비슷한 청 – 장정 수십이 우르르 몰려다녀도 눈 감아달라 – 을 두둑한 인정과 함께 넣었다는 사실이었다.

나장과 순라군들 입장에서야, 한 번 눈 감았는데 떡 두 개가 들어오는 격이라 별 상관은 없었다.

그날 밤, 김귀손은 곧 고다복이 서림이를 잡아올 것을 기다리며, 어떻게 하면 이번 일로 인해 입을 해는 줄이고 덕은 늘릴 수 있을까 계속 고민하였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나으니, 이렇게 자신이 서림을 붙잡아 바치면 호방 이현동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물론 아랫사람 단속을 잘못하였다는 둥 계속 싫은소리야 하겠지만, 이미 끝난 일이니 무어라 더 말을 하겠는가. 아랫사람 부려서 이것저것 딴살림 차리는 것이야 육방이 매한가지요, 다른 것은 그 수완과 벌이뿐일진대.

그렇게 계속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장정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소리 들리기에 나서본즉 고다복과 서림이가 마당에 와 있었다.

다만 묶여 있는 사람과 멀쩡히 서 있는 사람이 기대했던 것과는 반대였기에 그것이 당혹스러울 뿐.

“임자가 병방이오? 사위 단속을 좀 잘 하시오. 남의 집에 와서 행패나 부리고... 쯧쯧.”

저의 어깨에 들쳐 멘 고다복을 땅에 푹 박으며 서림이와 함께 온 장사 – 저자가 임가임이 틀림없었다 – 가 혀를 찼다.

“자, 암만 겨울이 코앞이라지만 밤이 그리 길지 않소. 이놈들 하늘 무섭지 않느냐 어쩌고저쩌고는 생략하고, 얼른 할 일 하게 가서 광이나 열라고 해주시오. 싫으면 뭐, 내가 가서 열고.”

김귀손은 당황함을 애써 감추며 눈알을 여기저기 굴렸다. 그러나 고다복이 그의 무리를 데리고 돌아온 줄 알고서 문을 곧장 열어준 뒤로 보이는 사람은 족족 때려눕히며 들어왔기에, ‘게 누구 없느냐’ 외치려 해도 당장 올 사람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임자 사위 덕에 이렇게 편히 왔으니, 나름 호의 베푼다고 이렇게 수작이나 걸어주고 있는 거요. 나랑 같이 광이나 열러 갑시다. 정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임자 사위 머리통이 꽤 단단한 것 같으니 그것으로 문을 깨부숴야겠지.”

듣는 서림이가 그쯤에서 깔깔 웃었더라면 분기가 치솟아올라 무어라 항변이라도 했겠지만, 지금 보니 진지하게 사람 머리통으로 문짝 부수는 소리를 하는 저의 짝패를 자못 두렵게 여기는 기색 역력하였다.

“... 알겠소. 내 들어가서 열쇠 가져오리다.”

“같이 갑시다.”

신발도 벗지 않고서, 예의 그 거한이 섬돌 밟고 쿵쿵 마루 위로 올라왔다.

장인과 사위가 사이좋게 도적들에게 겁박당해가며 곳간 문을 친히 열었으므로, 그 가솔들이 ‘도둑이야’ 소리라도 낸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성 안이 비로소 발칵 뒤집히기 시작할 무렵, 유기그릇, 오승포, 비단 등등, 값에 비해 가지고 오가기 편한 것들만 골라 모조리 들고 나온 꺽정이와 그 일당은, 서림이를 길잡이로 내세워  여름 홍수로 무너진 이래 아직 복구하지 못한 성벽 사이로 도망쳐 나왔다.

그쪽에는 여름이 집 잃은 백성들이 초막 따위를 치고 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러다 보니 품성 바르지 못한 이들도 많이 오가는지라 야밤중 소란에도 고개 내미는 이들이 없었다.

그렇게 잰걸음으로 한 각쯤 더 가니, 마침내 약조된 곳에 이르렀다. 가을임에도 아직 장마때 퍼부은 빗물이 꽤 남은 듯, 대동강 물이 달빛 받아 넘실거렸다.

“꽤 이르게 오셨구려.”

“병방 어르신께서 의외로 순순히 따라주셨다오. 심지어 사위분을 보내 우리를 마중하시지 뭐요.”

벌써 도둑질 맛을 들였는지, 따라온 봉산 장정 중 그 말 듣고 키득대는 자가 여럿 있었다.

“어쨌든 약속한 만큼 들고 왔으니 한 번 보시오.”

고개 까딱하니 장정들이 우르르 나와, 그들이 챙겨온 물건들을 삭 풀어놓았다.

상인 우두머리가 고개 끄덕하더니, 저의 뒤에서 기다리던 이들에게 손짓하였다.

순식간에 나와 있던 물건이 모두 사라졌다.

“물건의 질이야, 어차피 이것 중 태반이 우리 짐에서 병방 어르신께 들어갔다가 이제 겨우 주인 찾아서 돌아온 것이니 따로 살필 필요도 없소. 자! 어서 움직여라!”

미리 대동강변에 대어 둔 배로 병방의 집에서 나온 비단과 유기그릇 등은 들어가고, 거기서 나와 차곡차곡 쌓이는 것은 곡식 담은 가마니였다.

“솔직히 말해, 정말로 임자들이 이렇게 짐 챙겨서 나올 줄은 몰랐소.”

“다 이 서림이가 훌륭한 덕 아니겠소.”

꺽정이가 난데없이 서림을 추켜세워주었다. 그러나 서림도 마음이 확실히 굳었는지, 놀라지 않고 한 발 걸어나와 제 입으로 말했다.

“임 장사 말이 옳소. 내 비록 이번 일로 아전은 관두게 되었지만, 수완은 여전하니 앞으로 이 서림이와 계속 장사하다 보면 서로 이문 많이 남길 일이 죽 이어질 것이외다.”

그러나 저쪽은 영 시큰둥했다.

“무어, 그건 두고 보아야지. 아무래도 우리네 장사치들로서는 가장 무서운 것도, 가장 기댈 만한 것도 관이라오. 헌데 이제 그쪽이 관을 등에 업고 있지도 않으니, 어찌 될지는 모르는 일 아니겠소.

당장 금번의 이 거래만 하여도, 아전 나리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고들 해서 이렇게 우리 장사치들이 뭉치긴 했지만, 어지간히 이문 남는 일이었으니 모였지, 그렇지 않았다면 택도 없었을 것이오.”

며칠 전 상인들을 만났을 때, 서림이는 저의 가산을 모두 털어 민값(선금)으로 주면서 곧 병방 집을 통째로 털 것이니 미곡을 준비해두라 언질해두었다.

또한 도둑질에 연루되는 것이라며 걱정하는 말 나오자 따라갔던 꺽정이가 한 마디 덧붙이기를, 그 미곡은 도둑질하는 저들 패거리가 아니라 아직 여름 홍수의 피해가 복구되지 않아 고통 받고 있는 백성들에게 나누어줄 구휼미로 쓸 것이요, 그 가운데서 ‘적당히’ 상인들이 떼어먹기만 하면 될 것이라 하였다.

“우리도 계속 장사하려면 의주대로는 오가지 않을 수 없으니, 정말 임자들 말한 대로 일이 이루어지면 약조한 만큼의 곡식과 베는 어김없이 봉산 쪽으로 보내주리다. 허나 아직 모르는 일 아니겠소?”

물론 암만 그렇다 한들 꺽정이네도 먹고 사는 일이 여유롭지는 않아서, 어떻게 이것으로 이득 볼 여지는 없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서림이가 꽤 괜찮은 꾀를 내었다.

“걱정 마시오. 여기 서림이 꾀대로 어김없이 그리 될 터이니.”

처음에는 그저, 이준경 눈을 피할 수 없다면 그가 탓하지 못하도록 도덕군자 노릇을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꺽정이야 서림만 챙겨가면 되니, 나머지 사람들 가산이 어찌 되든 알 바 아니었던 것이다.

훔쳐낸 것을 이렇게 현지에서 모두 풀어버리고 간다면, 암만 총명하여도 한 사람의 선비 자부하는 이준경으로서는 이 ‘의적(義賊)’을 단번에 잡지 못하고 대책을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요, 그사이 여유롭게 서림이 데리고 청석골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랬는데 아전들 속사정과 장사 생리 모두에 밝은 서림이가 거기서 덧붙인 것이 이 부분이었다.

“이 깃발 내걸고서 여기 굶주린 이들에게 구휼하는 미곡 나누어주면, 곧장 다른 다섯 아전과 그 끄나풀들도 저들 지닌 귀물을 처분하지 못하여 혈안이 될 게요. 그때 가서 한창 값을 후려치면, 그대들의 이익도 되고 또 속도 시원해지지 않겠소?”

그리고 그렇게 생긴 이익의 절반은 청석골로 오게 될 것이다.

“그래, 그 이치야 그때 서림 저 사람이 구구절절 설명해주었지. 허나 우리로서는, 아까 말한 것처럼 당한 게 워낙 많아서.”

“아직 쉽게 못 믿겠다... 뭐, 이해는 하오.”

그사이 가마니 모두 옮긴 일꾼들이, 꺽정이가 저의 힘 넘치는 – 솔직히 말하면 힘만 넘치는 – 필체로 쓴 깃발을 내걸었다.

‘평양 의리(義吏, 의로운 아전) 김귀손 진활기민(賑活饑民, 굶주린 백성을 구휼함)’

김귀손에게서 훔쳐, 그 재산으로 널리 구휼하는 생색은 잔뜩 내었으니, 가뜩이나 사이 갈라진 지금, 다른 아전들이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지난 홍수 뒷수습하는 과정에서 저들의 구린 재산을 숨기기 위해 서림이 하나를 버리자고 합의하였던 아전들은, 이 일을 계기로 다시 으르렁대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눈치가 보여서라도 하나씩 저들 집에 본디 있으면 안 되는 귀한 물건들을 팔아 쌀과 베를 흩뿌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의 피눈물도 함께 흩뿌리게 되겠지만 꺽정이가 알 바는 아니었다.

“당장 얼마 지나지 않아 병방이 그들 무리를 이끌고 올 것이오. 그들이 난리치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냥 내뺄 거고. 계속 장사해야 하는 쪽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소?”

이미 대금을 모두 치른 셈이었으니, 상인들 입장에서야 그럴 만도 했다.

“걱정 마시오. 이미 이리 오기 전에 재빨리 조처를 하고 왔소이다.”

“조처라? 이 평양에서 주인 노릇하는 아전들을 그대들이 무슨 조처를 해서 막겠다는 거요?”

“아전들 상전이 있지 않소? 감사또라고.”

“아니, 무슨...”

“이미 그쪽에 글월을 보내두었으니, 너무 걱정 마시오. 감사또 이준경 나리께서 그 정도 일처리는 해 주실 테요.”

의외로 발이 빠른 밤이 덕에, 병방의 집을 터는 동안 감영 안쪽에 이지함이 보내준 그 글을 던져넣고 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감사또 이름이 곧장 나오니, 그 태연자약하던 상인 얼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 그러니 잘 해보시라, 이 말이외다. 우리 도적들은 이만 물러가 보겠소.”

서림이가 상인 통하여 미리 마련해둔 배를 향해 곧장 걸어가며 꺽정이가 말했다.

굶주린 백성 몇몇이 아직 동도 트지 않았는데, 묵은 쌀의 냄새를 맡았는지 갈대 엮어 만든 집에서 하나씩 기어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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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창제 직후 일반 민중에게도 널리 퍼진 것과 별개로, 국한문혼용체는 개화기에 이르러서야 겨우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오히려 순한글이 훨씬 많이 쓰였지요. 이는 한글의 목적 자체가 쉬운 소통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국한문혼용을 쓸 이유가 충분히 있던 중인층의 경우에도 이두와 향찰, 구결을 계속 사용하고, 나중에는 사대부를 따라 ‘진서’로 문예활동을 하는 경우도 나타나게 됩니다. 작중에서는 유길준의 『서유견문』보다 훨씬 앞서서 꺽정이가 국한문혼용을 선도하게 되었네요.

조선시대의 야간 통행금지는 한양의 경우가 가장 잘 알려져 있고 기록도 풍부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주요 도시에서도 비슷한 제도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평양의 경우는 조선 초기부터 시각을 널리 알리는 누각원(漏刻院)을 두어, 체계적으로 인정과 파루를 알렸고, 그 외 경주, 개성 등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통금이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강화도나 전주처럼 국경 방위에서의 중요성이나 국가적 상징성이 높은 도시에 대해서는 중앙 차원에서 통금을 유지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습니다. 실제로 세종 연간에는 시계 장치의 제조 및 관리법을 이들 도시에 전파하고 간략화된 이동식 물시계인 행루(行漏)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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