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도적은 때를 만나네 (5)
평양 감영이 발칵 뒤집히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병방 이 더러운 놈! 그렇게나 백성들 환심을 사고 싶었더냐!”
“명화적떼에게 당한 사람에게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나는 모르는 일이오!”
“네가 모르면 누가 안다는 말이냐! 네가 그 서림이를 시켜 벌인 일 아니더냐!”
“명화적떼라니, 병방. 우리 말은 똑바로 합시다. 세상에 어느 도적이 저의 훔친 물건을 제 것으로 하지 않고 그렇게 쌀로 바꾸어 백성들에게 뿌린단 말이오? 그렇게 눈 가리고 아웅해보았자 소용 없소.”
“예방 어르신, 사위가, 다복이가 그놈들에게 얻어맞아 온몸이 멍투성이란 말입니다. 뭐라 말씀 좀 해 주십시오!”
멀리서 들려오는 언쟁 소리에, 관찰사 이준경은 미소를 지었다. 평양이 마치 자신들 것인 양, 관찰사인 저의 등 뒤에서 날뛰며 거들먹대던 아전들이, 산산히 갈리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서림이라는 구실아치가 아전 중 있는지 물어보았던 것이 이렇게 돌아올 줄 알았겠는가?
관찰사인 자신이 아직까지 진정으로 서림을 죄인이라 생각하고 있었더라면, 저의 아병을 풀어 진작에 몰래 조사하고 추포하였을 것이다. 고작 아전들 따위의 말을 듣고서 대역죄인이 얽힌 그런 일을 다룰 것이라 생각하다니, 그 견문 좁음에 한탄하고, 그런 견문 좁은 작자들에게 놀아날 만큼 대부분의 수령들이 사리 어두움에 한탄하는 이준경이었다.
“되었다! 착한 일 할 때조차 눈치가 보여 도둑질 맞은 시늉을 해야 할 만큼 우리들은 못된 놈들이라고, 백성들에게 그렇게 거짓부렁 늘어놓으려 억지를 부리는 것이겠지! 착한 척은 네놈 혼자 할 수 있는 줄 아느냐! 나도 오늘 당장 곳간을 열 것이다!”
“이보시오. 호방! 그런 일은 모름지기...”
“시끄럽소! 지금 병방 저놈의 수작이 뻔하지 않소! 저 혼자 곳간 안을 깨끗이 한 다음, 혼자서 청렴한 척 하고 싶다는 것이겠지! 그때 홍수 뒷수습이 불거졌을 적 우리끼리 다 말을 맞추어두었는데 그것을 이리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 역시 장사치들과 놀아나는 놈은 품성이 뻔하군그래!”
“무어라? 호방, 지금 말 다 했소?”
슬쩍 한 걸음 내딛어 문지방을 넘었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군그래.”
“뭐? 누가 지금 어르신들 말씀하시는데... 아이고! 가, 감사또 나리!”
“병방에 이어 호방이 나서서 곳간을 연다니 참으로 좋은 일 아닌가. 추운 겨울이 닥쳐왔건만 백성들이 여전히 헐벗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사재를 털겠다니.
가득 차 있어야 할 부내의 창고가 지난 여름에 살핀 것처럼 텅 비어 있어, 구휼하기 어려움을 내 한탄하고 있던 차 그대들이 나서니, 이는 반드시 상주(上奏)하여야 할 아름다운 일일세.
헌데 이를 두고 언성이 높아지고 있다니, 기이하지 않은가?”
육방이 다투고 있는 판에 관찰사가 나타나는 것도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일인데, 텅 빈 창고 운운하며 슬쩍 꼬집는 말에 뼈가 아주 날카롭게 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상주’ 두 글자에 모두의 표정이 겨울철 대동강처럼 삭 얼어붙었다.
향리의 일이란 모름지기 수령의 눈 아래에서, ‘관례’라는 이름으로 글 대신 말을 빌어 이루어져야 이로운 법이었다. 그러므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글에 저의 이름 두세 글자가 들어가는 것은 설령 그 내용이 좋다 하더라도 실지로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님을 향리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병방이 출연한 재물이 내 듣기로 적지 않다 하였네. 물론 다른 이들도 주변의 어려운 이들을 긍휼히 여겨 물력을 다해 돕고 있겠지만, 아무래도 위로 계주(啓奏)할 때는 공이 가장 높은 이를 먼저 쓸 수밖에 없다네.
그대들 공이 작지 않으므로 내 이리 친히 찾아와 알려주고 가네.”
말 마치고 곧장 몸 돌려 나가니, 곧 다시 고성이 오가기 시작했다.
저렇게 말해두고 왔으니, ‘육방 아전을 필두로 모두가 의로운 일에 재물을 내놓아 수위(首位)를 다투니...’ 하는 말이 나오게끔 모두가 지금 병방이 ‘출연한’ 만큼씩은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반드시 각각 얼마씩 내었는지 이름을 열거해가며 상급에 차등 둘 것을 명시할 수밖에 없을 테니.
관가의 생리를 뻔히 아는 자들이므로, 눈 뜨고 당했음을 진작 눈치챘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렇게 악다구니를 쓰고 있다니.
쓴웃음이라도 나와야 할 텐데, 나오지 않는다. 오늘 새벽에 아마 도적의 일당일 누군가 와서 던지고 간 그 글월 때문이었다.
‘우리 당이 바라는 것은 오로지 의(義)요 이(利)가 아닙니다. 비록 밝은 하늘 아래에서 떳떳하게 일을 벌이지는 못하지만, 감히 생각건대 지금 평양 백성들에게는 내일 하루를 날 곡식이 급할 뿐, 그 곡식이 어디서 어떻게 나왔는지는 깃털 하나만큼도 중하지 않을 것입니다.’
구구절절 저들이 작당하여 병방의 집에 들어가 도적질하고, 이어서 다른 아전들도 허겁지겁 제 손으로 곳간을 열도록 만들기 위해 꾀를 부린 이유를 쓰고 있었다.
이준경도 이를 읽고 저의 표하(標下, 직할)에 있는 군관 여럿을 미리 대동강가로 보내 병방의 ‘구휼’이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하였으니, 따지고 보면 그도 공범인 셈이었다.
그리고 돌아온 군관의 보고는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홍수 후에 급히 진휼한다며 내놓았던 우리 감영의 물자보다, 병방이 ‘나누어준’ 곡식이 더 많다니.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물론 이준경도 아전들 곳간만은 가득 차 있음을 모르지 않았고, 꼭 서림의 건이 아니더라도 다른 핑계를 잡아 어떻게든 그들이 비장해 둔 재산을 환수하거나 적어도 더 뜯어먹지는 못하도록 할 심산을 품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수를 쓰더라도, 이렇게 짧은 시일 내에 이만큼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계책은 내놓을 수 없었으리라.
이준경이 작정한다면, 관찰사의 권한으로 당장 아전들을 잡아 가두고 그 곳간을 모두 헐어낼 수도 있을 터. 그러나 그것이 나라의 법도에 맞지 않고 작게는 관찰사 자신의 ‘덕’에 흠결이 되는 일이므로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도적이 오히려 나라에 도움이 되는 세상이라니, 어쩌다 이 나라가 이에 이르렀는가!”
차마 마음속에만 품을 수 없어 작게나마 입 밖으로 한탄을 내었다.
그리고 그제야 마음에 또 한 가지가 걸린다.
‘그러고 보니 그 서한... 겨우 시골 글방에서 글자를 배운 범상한 백성은 따라할 수 없는 문체요 필체였다.
선비 도적이라. 지금이 기묘년도 아니고... 심지어 그때도 그저 일시의 뜬소문 아니었던가.’
이준경은 젊었을 때 잠시 도성을 떠들썩하게 했던 김식(金湜)의 일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껏 선대왕과 그 이전, 길게 잡으면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기 시작한 폐주(연산군) 때부터 각지에 도적이 횡행해 왔으나, 대개 오래 가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오직 하찮은 욕심으로만 뭉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라를 원망하는 선비가 그들 사이에 끼어, 욕심 이상의 대의를 내세우고 그 아래에 사람이 뭉친다면 어찌 되겠는가.
‘아니, 그럴 리 없다. 그저 시골 유생 중 붓만 잘 놀리는 자가 탐욕에 눈이 멀어 그들과 함께하는 것일 테다.’
그렇지 않을 경우는 차마 생각하기 두려웠기 때문에, 이준경은 억지로 거기서 생각을 끊었다.
선비가 도적을 이끄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도적이 선비를 거느리는 것이었다.
청석골 산채는 아직 말이 산채지, 초가 다섯 채가 전부였다. 이 정도로 만족할 꺽정이가 아니었고, 이지함도 저의 말에 따라 실제로 땅이 파헤쳐지고 기둥이 세워지는 그 맛을 깨우쳤기에 봄이 오면 더욱 거하게 공사를 벌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올해는 첫눈이 빨리 왔고, 이어진 추위에 땅도 금방 얼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한 해 공사는 여기서 마무리하게 되었다.
어차피 이곳 산채를 누구에게 보여줄 일도 없으니, 한 번 하는 것 제대로, 여유 가지고 하자는 것이 두 사람 모두의 뜻이었다.
그러나 꺽정이는 이제야 저의 생각이 짧았다고 한탄하고 있었다. 당장 서림이를 데리고 여기 와야 한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흠흠, 여기도 곧 여력 닿는 대로 다 기와를 얹을 생각이오. 아무래도 산속에 있으니 지붕의 짚 가는 것도 꽤 귀찮은 일이라서. 그리고 우리 무리가 백 명을 넘으니 당연히 여러 채 집이 더 늘어날 것이고.”
과연 이 초라한 산채를 본 서림이 눈이 조금 흔들리는 듯... 했는데 지금 안색을 살피니 의외로 무덤덤하였다.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가 싶어, 곧장 데리고 이지함 머무는 쪽으로 향했다.
초라한 산채에는 별 감흥 없던 서림이는 시골뜨기 유생도 아니고 제대로 된 선비가 정말로 있었다는 데 오히려 놀랐다. 아전 노릇이 이미 몸에 너무 익어, 어쩔 수 없이 양반이란 자들 앞에서는 절로 몸이 위축됨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지함이 곧장 자리 일어나,
“아, 오셨소? 안으로 드시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소이다. 내 이 무리의 모주 노릇하는 이 아무개라 하오.”
하면서 먼저 곰살맞게 인사 건네니 서림이는 한 번 더 깜짝 놀랐다.
“우리 임 두령께서 그대를 꽤 높이 보고 있었소. 듣기로 치부(致富)의 재주가 범용함을 한참 벗어났다 하였는데, 부디 많이 도와주기를 바라오.”
“...”
“이보시오, 서림이. 우리 모주님께서 이리 환대해주시는데 한 마디 답사라도 하셔야지.”
“흠흠. 소생 서림, 일신의 광영이로소이다.”
아마 머릿속에는 벌써 의문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을 것이다. ‘이 아무개’의 본명은 무엇인지, 천생 선비인 자가 어쩌다 이 무리에 끼어있게 되었는지. 암만 보아도 서로 가까워 보이는 이 ‘임 처사’와 저 모주의 사이는 무엇인지.
“아직은 여러 사정이 있어 지금 그대가 궁금하게 여길 것을 모두 답해줄 수는 없소이다. 그러나 우리의 뜻대로 일이 이루어지면 곧 모든 것을 밝힐 수 있을 게요.”
“자, 잡설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우리 사업 얘기를 해 봅시다.”
꺽정이가 솥뚜껑만한 손으로 손뼉을 찰싹 치며 자리에 퍽 앉았다.
“사업(事業)?”
“괜찮지 않소, 모주님? 내가 만든 말이오. 일이니까 사(事)고, 도적질이 업이니까 업 자를 붙여서 ‘사업’.”
“이놈아, 그렇게 말을 제멋대로 만들면 안 된다. 우리는 그런 걸 그냥 도적질이라고 부르지... 하긴, 벌써 어지간한 도적질은 벗어났구나. 그래, 이름 따로 못 붙일 게 무어냐. 사업이라고 하자꾸나.”
어느새 저는 주변으로 밀려난 것을 어색하게 여긴 서림이 몇 번 헛기침을 했다.
“흠흠, 우선 이... 무리의 ‘사업’에 대해 조금 더 말씀을 해주시지요. 오면서 보기로는 벌써 그 규모가 작지 아니한 듯하던데 말입니다.”
이지함이 기다렸다는 듯 예의 『봉산적도』를 펼치며 이야기를 꺼냈다.
“... 해서, 내년에는 반드시 사람이 더 늘어날 것이므로 바닷가에서 자염(煮鹽) 만드는 일을 시작해볼 생각이오.”
“또 자염 얘기입니까, 형, 아니, 모주?”
“음식이 싱겁단 말이다. 농담이고, 오로지 사람 힘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 중 가장 값어치 있는 것이 소금 아니겠느냐.”
사실 서림이 데리러 평양 가기 전부터 장차 어떻게 재보를 끌어모아 세력 넓히는 기반으로 삼을지를 두고 의견이 갈린 두 사람이었다.
서림이 올 때까지 우선 두고 보자는 쪽으로 결론 아닌 결론을 내렸으므로 이제 와서 다시 그 건을 꺼낸 것이었는데, 차마 꺽정이에게 가운데서 말 좀 끊지 말라고 할 수 없던 서림이는 기다렸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자염이야 그렇다 치고, 다른 계획은 없습니까?”
“아, 맞다. 실은 내가 서림이 그대를 여기 끌고 올 생각을 한 것도 이 때문이었소.
우리 무리는 보다시피 여느 도적떼와는 많이 다르오. 이렇게 훌륭하신 모주님도 두고 있고 말이지. 하여, 이왕 글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 남들 다 하는 도적질이나 비단·말 잠상질 대신 서책을 몰래 들여와 파는 일을 해 보려 하오.”
“아니면 여기서 사람을 구해서 찍어내 팔 수도 있고.”
이번엔 이지함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자염을 굽는다면 거기에 몰래 배를 댈 수도 있을 테니 여러모로 편리할...”
“아니, 또 그 놈의 소금... 내가 저기 읍내 어물전에 얘기해서 젓갈 많이 사오라 하겠소, 모주님.”
“흠흠, 송구한 이야기인데, 큰 이익은 안 남을 것입니다. 서책은.”
이제야 말 많은 두 사람 눈이 서림에게 확 쏠렸다.
“서책이 이익이 많이 남을 듯함에도 아직 거하게 일 벌이는 장사치가 나오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 말이지요.
듣기로, 요새는 저 요양까지만 가면 강남까지 오가는 대국 상인들을 많이 찾을 수 있다 합디다. 그러니 그쪽까지만 가면 서책을 대량으로 들여오는 건 일도 아니지요.
그런 상인들을 만나, 다음번 요양에 올 때는 이러이러한 서책을 준비해달라며 물목(物目, 목록)을 전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면 잘 되었군그래. 당장 날 풀리면 준비 시작하면 될 텐데 왜...”
“살 사람이 없는 것이 오히려 문제입니다.”
꺽정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이지함은 찬탄과 한탄 겸하여 ‘아’ 소리를 내었다.
“그렇지. 역시 임 두령이 데려온 보람이 있는 분이시구려. 허나 정말 그렇다면... 후우, 이것 참.”
“서책과 아니 친한 나는 모르는 소리요. 누가 좀 풀어서 말해주시오.”
“우리가 대놓고 도적질은 안 한다지만 어쨌든 남이 보기에는 산속의 수상쩍은 무리일 뿐이다. 설령 평범한 장사치가 경전을 들고 있다 한들, 체통 상한다며 함부로 사지 않는 것이 반가의 상정(常情)일진대, 하물며 우리에게서 경전을 살 사람이 얼마나 있겠느냐?”
모주의 말에 끄덕이며 서림이 말을 덧붙였다.
“결국 머릿수의 문제이외다. 족히 많은 선비들이 우리네로부터 서책을 산다면야, 그때부터는 우리가 아니라 이미 서책을 산 선비들을 보고서 따라 살 터이니 알아서 장사가 굴러갈 것이오. 아마 그렇게 되긴 어렵겠지만, 정말로 많은 이들이 여기에 끼게 된다면 대국에서 책 들여오는 대신 직접 우리가 찍어내어도 이문이 남겠지.
허나 그렇게까지 되는 것은 언감생심이고, 현실에 맞게 생각하면 고작해야 『삼국지연의』 같은 잡서를 들여와 파는 게 전부일 테요. 그런 책은 어지간하면 사서 보는 대신 남들이 산 것을 빌려서 보려고 하니, 이익이 안 된다 함은 이 뜻이외다.”
꺽정이가 풀 죽은 – 매우 드문 광경이었다 – 사이, 서림이 이번에는 저의 주체 못하는 입을 이지함의 자염 계책을 향해 돌렸다.
“그리고 그 자염이라는 것도, 아무렇게나 벌일 수 있는 게 아닌 것으로 압니다. 물론 소소하게 수십 명 정도 뭉쳐서 판을 벌인다면 별 탈 안 되게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이익이 남지 않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장사란 살 때도, 팔 때도 거하게 해야 이득을 남길 수 있는 법입니다. 허나 자염으로 이익 건질 만큼 일을 크게 벌인다면, 그때는 반드시 이미 비슷하게 소금 굽는 일에 발 걸치고 있던 고관대작이며 종친들이 문제를 삼아 아예 폐하게 만들 터인데, 아무래도 어렵지 않겠습니까?”
꺽정이와 이지함 모두 머리 긁적이고 있을 때, 서림이가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 씩 웃었다.
“허나 이 무리는 여느 도적과 다르지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관을 뒤에 업고 있지요. 임 처사께서 이곳 청석골 찾아오실 때 봉산군 관아 들렸다 오시는 것을 보면서 크게 깨달았습니다.”
“아, 그거야 뭐...”
이곳 청석골로 오기 전, 꺽정이는 서림과 함께 봉산 읍내 들어가서는, 저의 마음과 달리 아직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군수 곽순수를 만나 당당하게 말했다.
‘조만간 평양에서 쌀과 베 따위가 많이 들어올 것이오. 그곳에서 향리 노릇하던 여기 이 서림이 이곳 봉산 선정(善政) 소식을 듣고서 저의 가산을 처분하고 이리로 오게 되었으니, 그 때문인 줄 아시면 되오.
헌데 청석골 산속에 그만큼 쟁여놓을 곳간이 아직 없는지라, 어차피 옛날에 우리가 비운 관창(官倉)을 우리 손으로 채운다는 생각으로 그쪽에 잠시 두려 하는데 괜찮으시겠소?’
‘아니, 관아 창고를... 대체 왜 제멋대로... 휴우, 아니, 되었소. 그리 하시오.’
‘고맙소이다.’
이 문답을 꺽정이는 별 생각 없이 했지만, 서림이는 아주 감명 깊게 들었던 것이었다. 지금껏 관을 뒷배로 삼아 가산 불리는 데만 열중했던 자신이 비루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수령의 비위를 맞추어가며 그 위세를 빌릴 것이 아니라, 숫제 그 수령 머리 위에 올라타서 마음대로 부린다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얼마나 될 것인가?
거기에 눈이 번뜩 뜨였으므로, 청석골 산채가 초가집이든 동굴이든 알 바 아니었다.
“... 그러니 수령의 이름을 대면 되는 일이지요. 예컨대 시골 유생들에게 가서 수령이 나서서 책을 구해오려 하니 원하는 책의 이름을 적어 내라 한다면, 그들은 전혀 의심하지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또한 자염의 경우에도, 수령으로 하여금 상소를 올려 아예 나라의 허가를 득하면 될 일입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조정의 생리를 조금은 아는 이지함이 딴지를 걸었다.
“참으로 좋은 생각이나, 실제로는 위태로운 계책이오. 우리가 지금보다도 더 수령의 위세를 빌리게 되면, 그때는 꼭 수령 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다른 고을이나 감영에서 이를 알게 될 수 있소.
지금이야, 의민(義民) 몇몇이 모여 봉산 경내 도적을 물리치고 있다는 정도로만 위에 알려져 있지만, 여기서 더 규모를 키우게 되면 반드시 한양 조정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오.
저들에게 이로우면 명신을 만들고 해로우면 역적을 만드는 것이 작금의 조정이오. 어느 쪽이든 우리가 벌이는 일이 지금 정사를 농단하는 윤원형, 이기 등의 눈에 들게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화란의 근원이 될 것이외다.”
거기까지는 생각 못한 서림도 말을 멈추었다. 윤원형과 이기의 이름을 태연하게 담을 수 있다니, 대체 이 도적 선비는 얼마나 거물이란 말인가?
“위태로운 길을 타면 빨리 나아갈 수 있고, 안온한 길을 타면 느리게 갈 수밖에 없다 이 말이로군.”
꺽정이가 제멋대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무언가 심술부릴 때 짓는 그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우리가 소소하게 먹고살기만 하려고 산속에 들어온 건 아니지 않소? 이왕 하는 것 거하게 해봅시다들. 남들 귀에 들어갈 것을 두려워할 게 뭐 있소? 우리가 아직까지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한 적이 얼마나 있다고.
‘사업’을 벌이려면 당 이름도 거창하게 지어서 널리 알려야지. 윤원형이가 우리를 죄인으로 몰 것 같다? 그러면 그 전에 모든 수를 써서 윤원형이가 함부로 그리 못할 만큼 세를 얻으면 그만이지 않소? 어차피 호랑이 등짝에 올라탄 것, 신중하게 움직일 이유는 하등 없소.”
충주에서 파옥하고, 봉산 군수를 겁박하고, 이제 평양 아전들의 피눈물로 대동강을 적신 이 꺽정이가 제 입으로 저런 말을 하니, 만일 그에게 당한 사람들이 듣는다면 기가 막혀서 고꾸라질 노릇이었다.
그러나 꺽정이와 같은 호랑이를 탄 이지함도, 관을 부리는 장사치라는 데 눈이 먼 서림도 결국 결연하게 고개 끄덕이며 꺽정이 말에 찬동하였다.
“의민당(義民黨)이라?”
“그렇습니다, 사또 나리. 저희가 이번에 청석골 아랫마을에서 이... 당 만든 것을 두고 잔치를 벌이려 하는데, 자리를 빛내주시면 참으로 저희 당의 광영이 되겠습니다.”
꺽정이 패에서 혓바닥 잘 놀리기로는 이지함과 서림의 뒤를 잇는다 해도 과언 아닐 오막손이가 봉산군수 곽순수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저 당 이름 정하는 데도 많은 고생이 있었음을 곽순수가 어찌 알까.
예컨대 물건 옮기는 일에 힘을 쓰니 – 종종 그 물건 값을 치루어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발상을 벗어나곤 하지만 – 노동당(勞動黨), 여러 장정들을 데리고 산을 점거하여 공변되게 쓰니 공산당(公山黨) 등등.
가뜩이나 조정에서 곱게 보지 않을 판에 이름까지 괴이쩍으면 언제고 닥칠 화란이 더 빨리 닥칠 것이라 생각한 이지함의 만류로 겨우 그나마 멀쩡한 의민당이 된 것이었다.
허나 곽순수로서는 알 수도 없고 알 바도 아니요, 그저 기가 찰 뿐.
몇 달 전 정도만 해도 이 도적놈들이 수령을 능멸하느냐며, 눈 돌아간 채 저의 이름 들어간 수결이며 무엇이며 신경 쓰지 않고 손수 궁시를 차고 군졸 거느리고서 토벌에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청석골에 자리 잡은 그 무리의 머릿수가 제 아래의 군졸 수보다 많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 한 번 기가 죽었다. (물론 장부로만 따지면 봉산군의 군졸 수는 여전히 수백은 되겠지만, 그 중 태반은 무덤에 있거나, 사내가 아니거나, 네 발로 걷는 축생이었다.)
그리고 임 처사가 봉산 일대 산을 누비면서 저의 무리에 들어오지 않는 도적들은 모조리 박살을 내어 – 가끔은 정말 박살나서 시체만 오기도 했다 – 관아 앞에 던져두었으므로 또 기가 죽었다.
마지막으로 얼마 전, 제 집인양 관아에 들어와서 관의 창고를 좀 쓰겠다고 한 뒤 정말로 저의 임기 중 꽉 찰 일이 없다고 여겼던 그 창고에 곡식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꼴을 보고서는 반발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후... 그래. 그렇게 임 처사가 중한 일을 한다는데 내가 어찌 가지 않겠는가.”
“아이고, 감사합니다요. 사또 나리.”
그래도 저놈들 덕분에 저의 포폄(인사고과)이 크게 눈에 띄어, 조만간 이 자리를 떠나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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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경이 언급하는 ‘김식이 화를 입은 것’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끝내 죽음을 맞은 김식을 둘러싸고 발생했던 소동입니다.
일개 선비였던 김식은 조광조가 현량과를 설치하자 장원으로 급제하여 순식간에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는 벼락출세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반작용으로 기묘년에 바로 삭탈관직을 당하고 절도(絶島, 외딴 섬) 유배형에 처해졌는데, 당시 (통념과는 반대로) 사림파 처벌에 반대하였던 영의정 정광필 등의 옹호 덕에 그나마 내륙인 선산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이후 다시 자신을 본래대로 절도안치에 처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김식은 12월의 엄동설한을 뚫고 유배지를 탈출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행방이 묘연하던 중 이듬해 4월 김식의 제자로 자신도 연좌될 것을 두려워한 이신(李信)이 상경하여, 김식이 지리산 일대에서 산적들을 모아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는 황당한 고변을 하면서 소동이 시작되게 됩니다. 조정은 이 고변에 극히 민감하게 반응하여, 그 전까지 김식을 찾는 데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고변 직후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군을 동원하고 나중에는 선전관까지 보내어 김식을 수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김식은 잡히지 않고 애먼 그의 주변인들만 붙잡혀 공초를 당하게 되었는데, 형문이 이어지면서 말이 부풀려져, 김식이 들어간 도적 무리가 이미 전라도 영광을 비롯해 예닐곱 고을을 장악하였으며, 한양의 아전과 서리들 중에도 그 끄나풀이 있을 뿐 아니라 직접 그 무리에 의탁한 유생도 적지 않다는 거대한 음모론이 등장하게 됩니다. 심지어 그해 5월에는 심지어 김식이 이끄는 도적군이 곧 한양을 공격할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지요.
그러나 5월 말, 거창에서 한 종이 산속에서 자살한 김식의 시체를 발견하면서 소동은 끝나게 됩니다. 시신 옆의 짐에서 김식이 직접 쓴 상소문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본인 확인이 어려웠울 정도로 부패가 진행되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 도적단 소동은 사실무근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선비가 도적이 된다는 가능성이 얼마나 당대인들에게 민감하게 받아들여졌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의 유통에 대한 서림과 이지함의 문답은 실제 당시 조선에서도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도 쉽게 서책을 구할 수 없는 현실이 문제가 되어, 중종 연간부터 명종 대까지 종종 서점 설치가 논의된 바 있고, 윤원형 역시 자기 일파인 윤춘년을 내세워 관영 서점 설치를 추진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교서관과 각 관아에서 책을 목판으로 인쇄하여 나누어주는 제도가 있었고 – 실제로는 종잇값과 인건비를 모두 인쇄를 의뢰하는 쪽에서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자주 이용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 경전을 돈을 주고 사고판다는 데 대한 반발심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황 역시 서점 설치론에 대해 비판론을 펼친 바 있지요.
이는 조선 후기 인쇄술이 대중화되고 서적 유통이 활성화된 뒤에도 조선 지식인들, 나아가 조선 사회 자체의 발목을 잡게 됩니다. 당대의 새로운 고급 지식이 유통될 수 있는 경로가, 오직 사대부들이 직접 북경에 가서 사 오는 것으로 한정되면서, 자연스럽게 학계의 논의도 위축될 수밖에 없던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