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수령칠사 (1)
무릇 수령이란 임금의 교화를 팔도에 퍼뜨리는 자리이니, 관찰사와 유수부터 일개 현감까지 모두가 중한 자리였다.
물론 실제로는 자리가 워낙 중하다 보니, 그 자리에 앉은 자들이 그 무게에 상당하는 보화를 뜯어내려 하곤 하였으므로, 백성들 입장에서 썩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쨌든 수령의 위엄이 (이론상으로는) 이처럼 무거운데, 그것을 하룻밤 사이에 농락하다 못해 숫제 짓밟은 일대 대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도적의 괴수 서림과 그 일당이 유신현(충주)에 있던 감영을 때려부수고 대역죄인 이지함을 비롯한 죄인들을 모두 풀어준 일이었다.
이 참혹한 일은 팔도에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일례로 지난해 가을 평양부 아전으로 이름이 도적 우두머리와 같은 서림이라는 자가 저의 이름을 부끄럽게 여기어 가산을 처분하고 멸악산 산속(청석골)에 숨어드는 일까지 벌어졌다.
(전 재산을 털어 구휼에 나선 평양부 아전들의 아름다운 행실은 이미 잘 알려진 바였으므로, 서림이 염치를 아는 것은 큰 얘깃거리도 되지 않았다.)
그때 이후로 조정은 청홍도(충청도) 한 도를 샅샅이 뒤져 그 도적 일당을 잡으려 하였으나, 그때 파옥하면서 도망한 충주 유생 몇몇을 잡았을 뿐이요, 그 외의 성과는 애먼 좀도둑 몇 명 뿐이었다.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서림과 이지함은 종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혹자는 속리산 깊은 곳에 그들이 은거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고, 또 혹자는 이미 관군의 포위를 벗어나 멀리 남쪽 지리산에 웅거하고서 삼남의 도적들을 한데 모으고 있다고 하였다.
윤원형의 마음 같아서야 뻔히 보령에 있는 이지함의 형 이지번이나, 그의 친우로 얼마 전 벼슬을 잃은 안명세, 그의 동문으로 역시 파직당한 허엽 등을 추포하여 고신(拷訊)을 가하고 싶었지만, 그럴 여력이 없었다.
금상 즉위 후 연이어 흉년에 각종 재해가 잇따르니, 민심은 어지럽고 도적은 흥성하며, 무엇보다 이를 핑계 삼아 소위 사림이란 작자들은 모든 일이 외척이 전횡하기 때문이라며 목청을 높여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놈의 ‘여주(女主)’ 운운하는 패역한 소리가 공공연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하니, 윤원형과 그의 누이인 대비(문정왕후)로서는 답답한 일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또 무언가 일을 꾸며서 한 번 숙청을 일으켜야 하는가 고민하던 무렵, 간만에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봉산군수 곽순수가 기묘한 계책으로써 민생을 돌보니, 굶주리며 유랑하는 백성을 모두 거두어 도적을 제압하고 있다 하였다.
이로써 가만히 앉아 구휼미만 기다리는 게으른 백성은 없어지고, 생업에 전념하는 선량한 이들은 도적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지난해 가을 어지간한 군현은 구휼이다 무엇이다 하면서 곳간 텅 비었다고 아우성인데 봉산군만은 오히려 곳간이 가득 찼다고 하였다.
봉산군수가 저에게 인정(人情) 바치지 않는 것을 아니꼽게 여기던 해주 감영의 판관 기(奇) 아무개가, 포폄을 위하여 찾아와서는 자신이 청백리를 알아보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눈물을 흘렸다고 하던가.
더구나 이때가 기회라는 듯, 그간 차마 아뢰지 못하였던 시무(時務)의 대책을 대신 건의해달라 청하니, 문헌(文獻)을 고루 갖추는 일이 하나요, 자염의 이익으로 주린 백성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이 또 하나였다.
이처럼 품행은 훌륭하고 지모는 깊건만, 정작 곽순수는 저는 한 것이 없고 오로지 처사 임 모 등을 곁에 두었기 때문이라 주장하였으니, 그 겸손함마저도 훌륭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저 홀로 감격하여 난리를 치는 판관을 보면서 곽순수의 복장은 산산히 터져나갔지만, 그런 내막까지는 위에 진달(進達)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임금이 – 즉 윤원형의 부추김 받은 문정왕후가 – 전교하기를,
“아아, 내가 부덕하여 교화를 제대로 펴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슬플 뿐이다. 재변은 공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니, 오직 사람이 이를 부르는 것이다. 명철하지 못한 내가 사위(嗣位)하니, 하늘로부터 재이가 이어지고 땅 위에는 서림·이지함과 같은 흉적이 날뛰고 있다.
두려워하고 또 슬퍼하던 중, 마침 인사(人事)의 올바름을 우연히 얻어 다스림의 방도를 얻었으니 어찌 택하지 않겠는가?”
그 흉적의 일당이 바로 봉산 고을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인사의 올바름’이 갖추어졌음은 꿈에도 모르는 윤원형과 문정왕후였다.
“... 봉산군수 곽순수는 기국(器局)이 작지 않고 그 재주는 문무를 겸전하였으니 포장(褒獎)함이 마땅할 것이다. 이에 한 자급(資級)을 더한다.”
물론 이렇게 요란벅적하게 치켜세우는 것은, 천재지변과 내수사 및 윤원형 일당의 농간으로 백성의 삶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다 수령들이 어리석고 백성들이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일개 무부조차도 저처럼 쉽게 도적의 문제를 해결하고 고을의 살림살이를 펼 수 있거늘, 어찌 소위 선비라는 자들이 좁은 식견으로 조정의 음양이 어쩌고, 나라의 기강이 저쩌고 왈가왈부한다는 말인가?
“또한 그러면서도 나라를 위하여 진언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어찌 이것이 세세한 말단의 일이라 하여 가볍게 여기겠는가? 마땅히 그에 따라 조처하도록 허여할 것이로다.”
그러나 ‘곽순수가 건의한’ 두 가지 안건 중에서는 문헌의 일만 허락하고 자염은 불허하니, 이는 무엇보다도 내수사와 윤원형 일파가 점유한 토지 가운데 황해도 해안가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이를 빌미로 저들이 자염의 이익을 누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죽 전교하는 말이 이어져 내려가는데, 말미에 한 줄 사족이 더 붙었다.
“또한 처사 임거정 등은 이른바 의민당을 스스로 꾸려 곽순수를 도와 봉산 고을을 평온케 하였으니 그 공이 비록 사소하다 하나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에 상급을 내리니 그 물목은 아래와 같다...”
어차피 치하할 때 나가는 재물은 윤원형 저의 것이 아니요, 곽순수든 의민당이든 잡다한 무리에 불과하니, 나중에 필요하다면 언제든 트집 잡아 끌어내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찌 쓰임새가 있는 지금 그들에게 내릴 포장을 아끼겠는가.
위와 같은 내용의 글이 곧 원님 바뀔 봉산 관아에 내려오니, 떠나는 수령 배웅하는 잔치 자리가 꽤 흥겹게 되었다.
전생에는 임금께 올라가는 토산물을 빼돌린 적은 있어도 임금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은 적은 없던 꺽정이었기에, 희한한 일도 다 있다며 선뜻 무리를 거느리고 산에서 나왔다.
밖에서는 아무도 그 이름 모르는 이지함도 태연하게 함께 나왔고, 고을의 수령과 같은 자리에 앉아 주거니받거니 할 수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서림이도 따라 나왔다.
또한 일전에는 소 닭 보듯 꺽정이 패거리를 대하던 고을의 사족들과 아전들도 함께 우르르 나왔는데, 곽순수가 떠나가게 되면 고을의 중심이 누가 될지가 뻔하기 때문이었다.
아전들 가운데 간혹 이를 분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을 법도 했지만, 대부분은 이 ‘의민당’이 다루는 재화의 양이 저들 생각하던 것을 훨씬 뛰어넘음을 보고 어떻게 하면 그들과 함께하면서 떨어지는 것을 먹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었으므로 볼멘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출세에 욕심 많은 동네 유생 김절(金浙)도 그 서책 사들이는 데 회가 동하여 어떻게 임 처사에게 얼굴 보일 수 있을까 고개를 내밀었다.
그런데 정작 임 처사와 곽순수는 자리에 오지 않아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데, 발 빠른 밤이가 눈길 헤치고 호다닥 달려와 곧 두 분 모두 오신다 알렸다.
백성을 괴롭히지 않겠노라 하는 뜻으로 – 실제로는 저 아래의 도적들이 밥값도 안 하고 겨울 내내 노는 꼴이 보기 싫어서 – 아침부터 거하게 사냥을 하여 술안주감을 마련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시골 군졸들 치고는 위풍당당한 행차가 곧 읍내에 당도하였다.
그 군졸 태반은 진짜 군졸이 아니라 구휼미의 꼬드김 이기지 못한 채 청석골로 들어왔다가 이제 나갈 생각 아니하게 된 봉산 장정들, 그리고 나가고 싶어도 무서워서 나가지 못하는 봉산 고갯길의 원 주인들이었다.
또한 군율이라 할 것도 없었으니, 아직 따로 기율을 정한 바도 없고 반듯한 것은 오직 저의 말 안 듣고 행패 부릴 때 꺽정이가 휘두르는 ‘의민봉(義民棒)’ - 말이 ‘봉’이지 어디 서까래만큼 두툼한 통나무였다 –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만큼만 하더라도 황해도 여느 고을의 군사보다도 정예하다는 소리 들을 것이었다.
꺽정이가 저의 어깨에 들쳐멘 멧돼지를 턱 던져놓으며 말했다.
“자, 얼른들 안으로 옮겨라! 잔칫상이 기다린다!”
“와아아!”
백 명 남짓한 의민당 패거리들이 환호하며 고기를 날랐다.
말에서 내린 곽순수가 그 광경을 보며 물었다.
“임 처사, 솔직히 나는 그대가 처사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소.”
“처사면 어떻고 백정이면 어떻겠소.”
세상의 어느 처사가, 지금 이 임 처사처럼 거친 털가죽옷을 입고 손수 칼과 도끼 놀리며 눈 속에서 사냥을 하겠는가.
더구나 사냥하면서 ‘군령(軍令)’ 내릴 때는 암만 보아도 도적떼 우두머리였는데,
‘야, 저기 저놈 잡아라! 너희 열 놈만 저기 바위 위쪽으로 올라가서 쫓고 다섯은 지금 여기 남아라. 야! 이 배냇병신들아! 열 놈만 가라고!’
‘저기 저 멧돼지와 네놈들 가운데 누가 더 도야지 대가리에 가까운지 모르겠다! 우르르 몰려 다니지만 말고, 반으로 나뉘어서 한 패는 몰고 한 패는 잡아야지! 저기 저 골짜기 아래로 스무 명 골라서 내려가고 나머지는 나를 따라와라.’
하는 식의 말들이 지금 생각해보면 다들 의미가 깊었다. 만약 저 멧돼지가 북변 야인이고, 자신이 임 처사 자리에서 명령 내리는 군관이라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대체 이 임 처사는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겨울철 사냥에 끌고 갔다고 원망하는 것이라면, 이게 다 수령칠사(守令七事) 가운데 하나이니 오히려 보람차게 생각해야 할 게요. 이렇게나 봉산 군사들을 잘 조련하였으니 군정수(軍政修, 군정이 잘 닦임) 아니면 무엇이겠소?”
“휴우, 그 말이 맞소.”
도저히 내력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니, 차라리 정체를 알아내는 것은 포기함이 마땅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저렇게 상놈 같은 말투로 수령칠사를 읊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자, 우리도 얼른 안으로 드십시다. 다들 기다리겠소.”
곽순수가 들어가 의관 정제하고 나오는데, 그사이 꺽정이도 제대로 된 처사 차림으로 옷 갈아입고 잔칫상 펴진 마당에 나왔다.
아직 겨울바람이 간혹 쌀쌀하게 불지만, 날은 그리 춥지 않았다. 정말로 그의 사형 이지함이 날을 잘 잡은 셈이었다.
“자, 사또 나리, 그간 고생이 많았소이다. 한 잔 받으시오.”
곧 잔치가 시작되고, 상석에 앉은 곽순수 바로 옆에 편하게 앉은 꺽정이가 바로 술을 권했다.
흉년 가운데 술판 벌임은 본디 마땅치 않은 일이나, 그리 따지면 봉산군보다 훨씬 사정 좋지 않은 군현에서도 비슷하게 술판들 벌이고 있었으니 곽순수로서도 할 말은 있었다.
“나도 임 처사 덕을 많이 보았소.”
조정에서 내려온 글을 받든 이후 부쩍 꺽정이에게 친하게 구는 곽순수였다.
일전에 의민당 창당하는 자리에는 ‘내가 왜 이런 도적놈들 잔치까지 와야 하느냐’ 하는 짜증스러움이 얼굴에 한가득 드러나 있었건만, 지금은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꺽정이도 이를 눈치채고서 곧장 물었다.
“헌데 내게 무언가 원하는 바가 있는 듯하구려. 지금 이렇게 시끌벅적할 때 터놓고 말함이 후에 따로 자리 마련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소.”
“... 그저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그 청을 하고 싶었소.”
“그 무슨 뜻이오? 사또 나리께서 이제 영전에 영전을 이어나가 저기 해주 판관이나 관찰사 정도로 오지 않는 한 이 봉산 고을과 당분간 연이 없을 터인데...”
“이제 조정에서 우리 두 사람의 공이 한데 엮여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그것이 걱정이오.”
의민당의 공은 별것 아니고, 오직 곽순수 한 사람이 주동하여 봉산 고을을 다스린 것으로 위에는 알려져 있었다. 곽순수 본인의 뜻이 아니라, 지금 미리 튀어서 좋을 것 없음을 알던 이지함의 꾀였다.
그러나 어쨌든 곽순수와 의민당은 묶이게 되었으니, 훗날 만에 하나 의민당의 실체가 교활한 도적 무리임이 밝혀진다면 그때는 곽순수 역시 죄를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더구나 주변에서 시기하는 이들도 적지 않소. 그런 이들이 만약 그... 임 처사의 당이 꼭 떳떳하지만은 않음을 알게 된다면...”
“하하, 그 일이라면 걱정 마시오. 우리네 당이 사업을 크게 일으키고 있으니, 곧 주변에서 헛소리 할 만한 이들은 모두 얽혀들 것이외다.”
당장 이번 겨울이 지나면 꺽정이가 출두하여 도적 때려잡기로 약조된 곳만 두 군데였다. 청석골 아랫말에 ‘의민당청(義民黨廳)’ 차려두고, 서림이를 거기에 앉혀두었는데, 곽순수가 크게 포상받은 이야기에 혹한 이웃 고을 재령의 군수와 일대 도로를 관할하는 금교찰방 등이 모두 한 번 나와주십사 청을 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라의 지존이 윤허하였으니 서책을 널리 구비하는 것도 이제 과감하게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글에 ‘월경하여 몰래 요양까지 가서는 서책을 잠상(潛商) 통해 구해오라’ 하는 구절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반드시 서책을 정정당당하게 구해오라는 말 또한 없었다.
이만하면 북방 군관들이 직접 나서서 군마 따위를 몰래 팔아넘기는 것에 비해 명분이 차고 넘치는 셈이니, 글 아는 사람 중 입 적당히 무겁고 살림은 쪼들리는 사람 – 예컨대 욕심쟁이 김절 같은 사람 – 을 포섭하여 의주로 보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봉산 한 고을만으로는 상행(商行) 이윤을 다할 수 없으니, 아예 의민당 이름을 내걸고 여기저기에 사람을 돌려 소문을 내고 있었다.
성현 말씀이 담긴 책을 몰래 사오려 한다 하였다면 아무도 응하지 않겠지만, 이미 경사(京師, 서울)에서 글 내려 스스로 학풍 일으키고자 하는 뜻이 갸륵하다 하였으니, 이제 여기에 동참하지 않는 자야말로 사족의 가운데서 뒤쳐지게 되는 셈이었다.
그리하여 저의 집안 종들을 부려 원하는 서책의 물목을 적어 역시 청석골 아랫말 서림이에게 다들 전해오고 있었으니, 만일 의민당이 도적 무리로 드러나게 된다면 이들 역시 도적들에게 밑천을 마련해준 적당(賊黨)이 될 것이었다.
그러니 말하자면 일전 충주에서 노비들을 양민으로 만들면서 서로 얽히게 만든 것을 훨씬 규모 크게 행하는 것이었는데, 저의 창창한 앞길이 난데없이 막혀버릴까 두려워하는 곽순수의 불안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비록 범용한 무부(武夫)지만, 내 재주가 어디까지인지를 얼추 안다고 생각하오. 더 과분한 자리가 내려온다면 사양은 않을 것이로되, 너무 무리하여 자칫 화가 닥치는 일은 피하고 싶소.
만약 들 곳과 날 곳을 분별할 수 있는 이가 내 후임으로 온다면, 그이 역시 임 처사와 의민당의 도움 받기를 원할 것이니 그뿐이겠지만, 과하게 용렬하거나 과하게 뛰어난 사람이 이 고을에 부임하게 된다면 그때는 반드시 문제가 불거질 것이니 두렵게 여길 뿐이오.”
생각없이 사는 줄 알았던 곽순수도 저의 출세 걸리니 이런 생각을 다 내곤 하였다. 듣고 보니 의외로 그럴듯한 걱정이라, 꺽정이도 함께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기쁜 날에 군수 나리께서 걱정이 과하신 듯하오. 사람이 용렬하거나 비범하거나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는데, 한 군에 군수가 둘이 올 리는 없지 않소?
어리석은 사람이 오면 눈을 가리고, 현명한 사람이 오면 비위를 맞추면 되겠지. 그렇게 그때그때 맞추어 처신하면서 사업은 계속 늘려나갈 것이니, 갑자기 일이 단번에 어그러지는 그런 날이 언제 오기야 하겠소이까.”
물론 이대로라면 언젠가 윤원형의 눈 밖에 나는 날이 오기는 하겠지만, 적어도 오늘내일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또한 그런 날이 올 때 곽순수가 어찌 될지를 걱정해줄 만큼 사이가 돈독하지도 않았다.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를 지낸 뒤 봉산군수로 내려간 무관 곽순수가 출세한 이야기는 미관말직 전전하는 한양의 무관들과 그마저도 못 누리는 선달들 사이에 먼저 퍼졌고, 이어서 나이 먹도록 대과(大科)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는 진사·생원들 사이에도 퍼졌다.
특히나 후자에 속하는 이들은, 대개 저들 글공부는 뒷전이요 처세가 어쩌고 나랏일이 저쩌고 말은 참 많은 이들이라, 저에게 저 곽순수 같은 기회가 주어졌다면 훨씬 더 그럴듯하게 일을 이루어 큰 공훈을 세웠으리라 호언장담하곤 하였다.
그중 한 사람이 권신 이기(李芑)의 5촌 조카로 여태껏 과거만 보면 낙방을 면치 못하던 이원수(李元秀)라는 이였다.
“제길. 어리석은 무부(武夫)조차 시류를 잘 타니 저렇게 출세하는구나!”
심지어 스스로 도적을 토벌한 것도 아니요, 그저 처사 한 사람을 얻어 그로 하여금 한 고을 안의 도적을 진압케 하였을 뿐이라지 않은가.
홀로 주안상 펼쳐두고서 거나하게 취해, 처가에 있는 아내가 보낸 글을 원망스럽게 노려보는 이원수였다.
말하기를, 당숙에게 잘 보여 음서로 출사한들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느냐며, 남의 권세에 의지하여 후일 이름을 더럽힐 여지를 남기느니 되는 데까지 노력함이 마땅한 길이라 하였다.
지방 거족(巨族)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장인어른과 그의 아내에게 붙잡혀 살아왔던 이원수로서는 지금까지 감히 거역할 엄두도 못 내고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와서 분기에 한껏 차 서한을 다시 읽어보니, 좋은 말로 저를 제지하고 있다지만 실제로는 계속 지아비인 자신을 손아귀에 두고 살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저는 아비를 잘 둔 덕에 이렇게 지아비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내가 당숙의 덕을 보는 것은 어째서 안 된다는 말인가?”
안사람 앞에서는 하지 못할 거친 언사를 방에서 저의 그림자 보며 홀로 궁시렁대었다.
“더구나 우리 당숙께서 이미 연로하시어 이미 연세가 고희를 넘으셨다. 이제라도 늦기 전에 덕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내가 냉정하게 말하는 듯하였다.
‘처음 음서로 출사하겠다 말씀하셨을 때 부군 뜻대로 하셨더라면, 지금쯤 벼슬은 높이 올라갔겠지만 세상 사람들은 을사년 옥사를 틈타 출세하였다고 등 뒤에서 흉을 보고 있겠지요. 지금 조정도 마찬가지이거늘, 어찌 그간 참으신 것을 무위로 돌리려 하시는지요?’
한없이 총명하고 현량한, 적어도 그런 시늉은 하는 아내였다. 이원수도 그렇게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아니요, 그저 줏대가 없고 저의 마음을 스스로 다스리는 힘이 턱없이 부족할 뿐이었기에 지금까지 아내의 말을 잘 따라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지 않은가? 내가 저기 저 봉산군수 자리에 가서 앉게 된다면, 그 곽가 놈이 다져둔 기반이 있으니 가만히만 있어도 절로 선정 소리를 들을 것이야. 거기서 몇 가지만 더 고쳐도 훨씬 낫다는 얘기를 들을 테고.”
‘봉산의 속사정이 어찌 되는지, 그저 전하는 말만 듣고 판단 내리시는 것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곽 공(公)이 이루어놓은 기반을 무너뜨렸다는 평을 듣게 되면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아내가 할 말이 척척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러나 지금은 저 출세한 무관에 대한 질투로 눈은 벌게져 있었고, 곧 놓칠지도 모르는 출세의 사다리는 계속 어른거리고 있었다.
“왜 그대는 부군 되는 나의 재주는 믿지 않고 내 이름만 걱정하는가? 내 당숙의 세평(世評)이 어찌 되든 나의 이름만은 빛낼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있단 말이야!”
끝내 한이 사무쳐, 울먹이면서 혼잣말을 이어가는 이원수였다.
“내 내일 당장 당숙께 찾아갈 테야. 내가 가서 자리를 청탁한다면, 요새 음서로 출사하려는 이들 중 나보다 문벌 좋은 이가 없으니 마땅히 이루어질 것이라 이 말이오. 가서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되는 일인데, 대체 왜 이 지아비를 믿어주지를 못해...”
그러나 이원수의 억울한 마음과는 별개로, 계속 입 밖으로 나오는 한탄과 원망은 종일토록 글을 읽다가 이제 막 옆방에서 잠을 청하고 있던 그의 셋째아들에게는 퍽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어려서 처가에서 자랐고, 조금 머리 굵은 지금도 딱히 아버지에게 큰 정은 없는 이 셋째아들은, 올해 진사시 볼 생각으로 아버지와 함께 파주에서 상경해 한양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오늘은 또 약주 과하신 아버지께서 무슨 말씀을 그리 열띠게 하시느라 아들 밤잠을 설치게 하나 가만 듣고 있었다.
헌데 듣다 보니 어째 내용이 심상치 않아, 다음날 꼭두새벽에 눈 뜨자마자 급히 강릉 외가에 글을 부쳤다.
안타깝게도 강릉에 그 글이 도착하자마자, 자신이 당숙에게 청탁하여 벼슬을 얻었으며 곧 봉산 군수로 나아갈 것이라 호언장담하는 글도 강릉에 도착했다.
그리하여 당호를 사임당(師任堂)이라 하는 이원수의 아내 신씨는 지아비의 이름을 속되게 한 번 외친 다음, 당장 봉산까지 가서 뒷바라지를 할 채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기왕 엎질러진 물. 지아비의 실책으로 인해 총명한 셋째아들의 앞길까지 막히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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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의 이원수는 평생 미관말직을 전전했기 때문에 그 행적이 자세히 전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음서로, 늦깎이 출사를 하였는데, 생전에는 그리 높은 벼슬을 지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잘 둔 덕에 나중에 좌찬성 벼슬을 추증받게 되지요.
그의 아내 신사임당은 강원도의 거족 평산 신씨 사람입니다. 반면 이원수는 덕수 이씨로 명문가는 맞았지만 정작 본인의 가계는 영 변변치 못했지요. 신사임당이 후대의 허난설헌 등에 비해 유독 남편을 가르치고 깨우치는 일화를 많이 남겼던 것은 이러한 집안 간의 역학 관계도 분명히 작용했을 것입니다.
한편, 신사임당의 지혜가 발휘된 일화로 후대에 많이 언급되는, 을사사화에 연루될까 두려워 소윤의 중진인 이기에게 청탁하려는 이원수를 막았다는 이야기는, 그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후일 그의 삼남 이이(李珥)가 서인의 영수로 추대되면서 함께 확대재생산된 측면이 있습니다. 비록 을사사화에 엮이는 것은 피했지만, 이원수는 이기가 사망할 무렵 결국 음서로 출사하게 됩니다.
이원수는 본디 이기의 5촌 조카이기 때문에, 음서의 대상에 원론적으로는 속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러 음서제를 둘러싼 부정과 비리가 만연하게 되면서, 원칙적으로는 음서 대상자도 치루어야 하는 시험(취재)이 무력화되고 본디 음서 출신자들이 나아갈 수 없는 관직에 이들이 나아가게 되는 등 기강이 해이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원 역사에서 만년에 미관말직이나마 오를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