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21화 (21/259)

8. 교학상장 (1)

이제 원 주인이 누구인지 다들 별반 신경을 쓰지 않게 된 봉산군 동헌.

멀쩡한 문 내버려두고 내아 담을 훌쩍 뛰어넘는 인영 있으니 바로 꺽정이였다.

이윽고 한두 각이나 지났을까. 곧 문이 열리고 검수역에 나와 있다가 졸지에 꺽정이와 함께 읍내 동헌까지 오게 된 이지함이 터덜터덜 걸어나왔다.

“천하에 시초가 있으니 곧 천하의 어머니라 (天下有始 以爲天下母)...”

두 눈이 풀린 채 『도덕경』 구절이 절로 새어나오는 모양새를 보니, 꺽정이 저만큼이나 고초 치른 모양이었다.

“사형, 정신 차리쇼.”

두 눈에 초점 돌아오자마자 곧장 욕이 나왔다.

“야, 이 매정한 사제 놈아. 내가 너를 한고조(유방)에 빗댔다고 하는 짓도 한고조를 닮아가면 어떻게 하느냐? 아니지, 하다못해 한고조도 저의 자식들을 수레 밖으로 던질지언정 장자방(장량)을 던지고 가진 않았다.”

평소의 꺽정이라면, ‘사형이 어딜 봐서 장자방이오? 잘 쳐줘도 숙손통(叔孫通)쯤이나 되겠구만.’ 하며 놀렸을 테지만, 이미 사임당 신씨에게 근 한 시진을 시달리고 나온 터라 정직한 대꾸가 나왔다.

“미안하오. 그래도 사형이라면 나보다는 양갓집 규수님네들을 많이 대해보았을 줄 알았지.”

“후... 강릉에 그런 부인 있다고 소문만 들었는데, 사람이 저렇게...”

“드세다? 완악하다?”

“... 대단할 줄은 몰랐다.”

“그건 그렇지. 나도 앞으로는 군수 나리께 조금은 더 잘 대해줄 생각이오. 그런 고충 있었는 지 꿈에나 알았을까.”

하필이면 때가 좋지 않아, 서림이는 방납 장사가 바빠 정신이 없었고 이지함은 꺽정이 따라 멸악산 산줄기를 누비고 있던 중 신씨 부인이 텅 빈 관아를 급습하게 되었다.

부군 내놓으라며 애먼 아전들을 조용하게 들볶으면서, 마침내 군정(郡政)이 의민당 손에 넘어간 사정을 짐작한 뒤 검수역에 나아와 기다리고 있었다던가.

여느 고관대작 앞에서도 쉽게 움츠러들지 않을 꺽정이지만, 저 신씨 앞에서는 어째 영 기세 억눌림을 금할 수 없었다.

“거 참 이상한 일이오. 분명 내가 힘으로 찍어누르면 찍어누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안 되니.”

“그런 게 바로 말재주 아니겠느냐. 부처(夫妻)간 사람됨이 바뀌어 저 신씨가 군수로 왔더라면 우리도 큰일날 뻔했다.”

신씨 부인이 꺽정이와 이지함 앉혀두고 조곤조곤 이야기하기를,

‘일개 아녀자가 어찌 바깥일에 밝겠습니까. 허나 이곳 군에 들어와 사정을 어설프게나마 살피건대, 임 처사님의 행적에 다소 의문 가는 바 있어 감히 여쭙고자 합니다.

분명 군민 모두에게 큰 이로움을 주고 계시지만, 결국 이는 말(末)로써 본(本)을 갈음하는 것이니 결국 권도(權道, 임기응변)라 하겠습니다. 언제까지 권도로서 정도(正道)를 갈음할 수는 없겠지요. 하면 임 처사께서 생각하시는 정도란 무엇인지요?’

하니, 다시 말해 의민당 패거리가 군정 농단하는 까닭이 결코 범상치 않은 듯하니 실토하라는 뜻이었다. 적당히 에둘러서 그간 고을에 쌓여 있던 폐단을 없애고자 할 뿐이라 했더니, 전혀 넘어가지 않았다.

‘비록 세상의 일은 규방에 앉아 가솔을 다스리는 것 이상으로 잘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무릇 모든 일에 정해진 예와 규범이 있음을 압니다. 아무리 지금 연이어 흉년이 닥치고 도적이 일어난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러하지는 않을 터이니 지금부터라도 돌이킬 방도를 마련함이 어떠할까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왠지 뭔가 크나큰 잘못을 했다는 느낌이 마구 들어, 끝내 계면쩍게 고개를 떨어뜨리게 되는 꺽정이였다. 어머니 훈계란 게 이런 것이었을까.

물론 힘으로 따지자면야, 여기 이 자리에서 신씨도, 이원수도 모조리 목을 비틀 수 있겠지만, 신씨의 말을 듣다 보니 그렇게 하면 꺽정이 저조차 해서는 안 될 패륜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마구 들 정도였다.

‘오얏나무 아래에서 어찌 갓을 고쳐 매겠습니까? 본말을 뒤집어 행하는 것이 일시의 처세하는 도리라 하지만, 그것이 오래되면 새로운 병폐가 되고, 그렇게 되면 자칫 무고한 이들에게도 죄가 미칠 수 있는 법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부인으로서 지아비를 도와 화란을 피해야 하겠지요.’

네놈이 정녕 역적질을 하여 애먼 우리 집안까지 곤란하게 만들려 한다면 좌시하지 않으리라는 경고였다. 다른 아낙네라면 그래서 네가 어찌할 테냐 비웃겠지만, 어째 이 신씨라면 이원수에게 독약을 먹여 잠시 반신불수로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군수직 버리고서 봉산을 빠져나갈 수 있을 듯했다.

‘허나 임 처사께서 그러한 오해될 부분을 미리 없애고 오로지 바름을 구하는 뜻을 보이신다면, 부족한 가산이나마 보태어 공덕 이룸을 돕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저의 가산 얘기를 은근슬쩍 꺼내는 것이었다. 채찍과 여물을 함께 내미니, 뻔히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노릇.

그렇게 옳고 그름에 대해 계속 이야기를 듣고, 또 듣고, 가끔 한 번쯤 반박을 하였다가 밑천도 못 건지고 하기를 한 시진.

꺽정이는 마침내 ‘그러한 일은 여기 계신 이 처사가 더 잘 알 것이이다.’ 하고서 측간 가는 척하고는 도망을 나왔다.

“그나저나 사형은 어떻게 빠져나오셨소?”

“신씨 부인이 스스로 밝히기를 기질이 허하여 종종 앓아눕는다 하더라. 여독도 풀어야 할 테니 잠시 자리 비워드리겠노라 말하고서 빠져나왔다.”

“하면 한 반나절쯤 뒤에 다시 우릴 찾을지도 모르겠구려.”

“그때까지 뭔가 말을 짜맞추어야 하지 않겠느냐.”

“내가 군략은 사형보다 밝은 듯하니 내 말대로 함이 어떻겠소? 마침 빠져나갈 방도도 하나 있고.”

“무엇이냐?”

“한나라 고조 얘기 나온 길에 마저 하자면,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기신(紀信)이 아니겠소? 서림이더러 이리 오라 합시다. 서림이가 털리는 사이에 우리만 청석골로 내빼면 그만이지.”

기신은 생김새가 유방과 닮아서, 주군 유방이 항우의 포위를 벗어날 틈을 만들고자 주군 대신 목숨을 버렸다지만, 서림이는 꺽정이가 그 이름 한 번 사칭한 것을 제하면 하등 닮은 구석 없었으니 참 억울한 일이었다.

발 빠른 밤이를 청석골 아랫말로 보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서림이가 헐레벌떡 달려와 동헌에 들었다.

그렇게 서림이를 대신 밀어넣고서 사형과 사제 두 사람은 청석골로 잽싸게 발걸음을 옮겼다.

“서림이더러 우리네가 이곳 봉산군 차지한 이래로 얼마나 민생이 좋아졌는지 장부 들고 와서 설득해보라 해두었소. 아마 오늘 해 질 때까지는 버티지 않을까 싶소.”

“글쎄다.”

삼십육계 주위상책(走爲上策)이라, 부리나케 발걸음 옮겨 읍내를 벗어나니, 다행히 부르는 이는 없었다. (서림이가 저에게 왜 이러냐며 원망하는 소리가 언뜻 바람 타고 들려오는듯 싶긴 했다.)

“왜 그러시오? 사형도 서림이 재주는 익히 보시지 않았소. 요새 우리 당 살림 불리는 데 재미를 붙였으니 아직은 장부에 장난질도 치지 않고 있을 테고.”

“신씨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테다. 대갓집 여식이라면 가산 불리고 농장 경영하는 것도 여덕(女德)으로 치곤 하니까. 서림이도 여간내기는 아니지만...”

“참, 군수 나리는 대체 전생에 무슨 업을 쌓아서 그런 이에게 장가를 들었는지. 내가 여기 시골 유생들이 시국 흉을 보는 걸 들었는데, 천지에 음기가 흥성해서 구중궁궐에 여주(女主) 들어앉아 있다고들 하더이다. 그러니까 여인네 재상감도 하나쯤 나올 법하지 않소.”

꺽정이가 농을 던졌는데 대꾸가 아니 돌아오기에 곁을 살피니, 이지함이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네 말에 일리가 있다.”

“엥? 거 무슨 소리요?”

“내 생각에, 사임당 저이를 우리가 어떻게 잘 끌어들일 수만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솔직히 말해, 우리 패거리는 지금 사람 하나하나가 아쉽지 않으냐. 당장 우두머리인 너부터가 도적 잡겠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판국이고, 나도 아직 남들 눈길 때문에 저자 오가는 것이라면 모를까, 사류(士類, 선비 부류)를 대면하기는 조금 저어되고. 서림이는 청석골 아랫말에서 떼어놓기가 아깝고.”

“그리 따지면 여인네는 뭐, 어디 마음대로 싸돌아다닐 수 있나.”

“이놈아, 신씨 부인이 여염집 아낙네였으면 우리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겠느냐. 그리고 그 집 가산이 얼마나 가멸찬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우리가 빠르게 일을 벌이려면 밑천을 어디선가 더 뜯어와야 하지 않겠느냐.”

“서림이랑 일하시다 보니 입이 퍽 걸어지셨소. 그런데 신씨가 그렇게 저의 집안 재산 불리는 데 밝다면, 당연히 우리네와 손을 잡으려 하지 않겠소? 그쪽은 우리네에 밑천을 대어 주고, 우리는 그만큼 한몫 떼어 넘겨주고. 서로 이득이 될 터인데. 그러다가 우리네 대계가 실지로 이루어지면 더욱 덕을 볼 것이고.”

“신씨가 우리를 미덥지 못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그 점일 게다.”

꺽정이는 여전히 이해가 잘 되지 않아 갸우뚱하고 있었다.

“뭐, 역적질하다 걸리면 삼족 멸문에 파가저택(집을 헐어 그 자리를 못으로 만듦)이라지만, 안 걸리고 성공하면 될 일 아니오? 그리고 신씨 수완이라면 설령 수틀리더라도 빠져나갈 길 한둘 쯤이야 족히 마련할 수 있을 테고.”

“처음 부군이 이기 그자에게 청탁하여 문음으로 나오려 했을 때도 만류하였다지 않더냐. 신씨 보기에는, 설령 우리가 대계를 성사시킨다 해도 부정한 수로 집권하였다며 세간의 욕을 들을까, 그것이 걱정되는 게지.”

“아... 좀 알 것도 같소. 나나 사형이야 더 잃을 게 없으니 여기서 어떻게 굴러도 성공만 하면 이득이지만, 저쪽은 그렇지 않겠구려.”

“그래, 네 말대로다. 이 나라에서 정당하게 권세 얻으려면 정학(正學)과 도덕만이 답이요, 나머지는 외도(外道)니까. 우리야, 너는 영달하기를 바라고 나는 신원(伸冤, 무고한 죄를 벗음)하여 스승님 말씀 널리 퍼뜨릴 수 있게 되길 바라니, 외도건 정도건 상관하지 않지만, 신씨 보기엔 그렇지 않은 게지.”

꺽정이가 하도 큰 도적 되겠다, 나라 뒤엎는 도적 되겠다 하다 보니, 이지함은 나름대로 꺽정이의 그 말이 저에게 씌워진 천민의 굴레를 벗고서 높이 올라가려는 뜻이겠거려니 해석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꺽정이가 진상을 모두 밝힌들 믿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 꺽정이도 더 첨언하여 고쳐주지는 않았다.

“그럼 어찌해야 하겠소? 아까 장자방 자칭하시던데, 꾀 좀 내 주시오.”

“네겐 미안한 말이지만, 아직 뭔가 떠오르는 게 없구나. 솔직히 우리 대계가 아직은 엉성하지 않으냐.”

오 년 기한을 잡고서, 우선은 최대한 기반을 갖추어나가는 것이 현재 ‘대계’의 전부였다. 물론 그것만 해도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흉년은 이어지고 수탈은 거세지니, 의민당 하겠다며 봉산 찾아오는 장정은 꾸준히 있었고, 이대로 세력을 불려나가면 더욱 빠르게 세력도 늘어날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꺽정이가 제꺽제꺽 벌이를 물어오니, 이대로 삼 년만 지나면 황해도 전체를 아우르는 일개 군영(軍營) 갖추는 것도 불가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 이지함과 서림 둘이서 날 잡아 밤새도록 셈하여 얻은 결론이었다.

물론 그쯤 되면 말이 새어나가지 않기가 더 어려울 것이므로, 군수는 물론이고 관찰사까지도 손아귀에 넣어 함부로 의민당을 모해하거나 고변하지 못하도록 수를 써야 할 테다. 청석골 하나로는 산채가 부족할 테니, 버려진 산성 – 꺽정이는 전생의 기억에 따라 자모산성(慈母山城) -을 권했다 – 하나쯤 골라 웅거할 계획도 있었다.

여기까지만 생각해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두근거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머리가 지끈거리기 마련이었다.

“당장 우리가 내일 천군만마를 얻어 도성으로 나아간다 치자. 저 윤원형와 다른 권신, 폐행(嬖幸, 아첨꾼) 무리를 쓸어 없앤 다음 무엇을 할 테냐?”

“모산수 어르신께서 산속에서 고생이 많으시지 않소. 그분도 종친이시니 보위에 못 오르시겠소?”

그런 말에 숨 들이키며 놀라기에는 이지함도 벌써 때가 많이 묻었다.

“차라리 다른 젊은 종친을 찾아 금상께 입적시킨다면 모를까, 그건 어렵다. 그리고 그게 중한 게 아니다. 꺽정아, 만약 네게 이 조선국을 뒤흔들 수 있는 권병(權柄, 권력)이 쥐어진다면 무엇을 하겠느냐? 이 나라를 어찌 꾸려갈 테냐?”

다른 사람이 저런 말을 하면 – 그런 말을 감히 입 밖에 낼 수 있는 사람이 조선 팔도에 얼마나 되겠냐만 –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소리라며 면박 줄 꺽정이지만, 이지함이 물으니 진지하게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사형이라면 어찌하시겠소?”

“글쎄, 나도 아직 확언은 못 하겠지만, 적어도 윤원형이나 선대의 다른 권신들처럼 무슨 공신이니 훈작(勳爵)이니 하면서 부정한 위세를 얻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것은 스승님의 이름을 영세토록 더럽히는 일이니.

허나 지금 우리가 여기 봉산군에서 일궈놓은 것을 전국에 널리 퍼뜨린다 하면, 그때는 이 나라가 더 이상 옛날의 조선국이 아니게 될 테다. 그러면 그에 맞게 국법도, 제도도 바뀌어야 할 텐데, 그 도(道)를 얻기가 어렵구나.”

사실 누가 해도 지금 이것보단 잘 할 수 있겠다 싶었으므로 꺽정이도, 이지함도 지금까지 봉산군 한 군의 일을 멋대로 뜯어고치는 데는 별반 거리낌이 없었다. 허나 나라의 제도를 말하니, 꺽정이조차 해본 적 없던 고민에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 확실하게 무언가 말을 만들어 내놓지 못한다면 신씨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와 함께하면 집안의 이름에 보탬이 되면 되었지, 먹칠할 일은 없음을 보여야 할 텐데... 잘 모르겠다. 하루아침에 될 일은 아니구나.”

사형에 대한 정 때문에 다소 왜곡이야 있겠지만, 꺽정이 눈에 이지함만큼 총명하고 박식한 사람은 작고한 화담 선생 외엔 없었다. 이전 생에 만난 선비라 해보아야 청석골 지나가다 종종 붙잡히곤 하는 시골 유생들이 전부였으니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겉핥기로나마 학문의 맛을 보았기에, 지금 이지함이 말하는 것이 결코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님은 족히 알 수 있었다. 하물며 이지함이 온전한 야인도 아니요, 서림이와 함께 의민당 살림을 나누어 맡고 있지 않은가.

엄연히 대역죄인의 허물을 쓰고 있는 사람이니 다른 학문 깊은 선비를 구하여 옆에 붙여줄 수도 없고, 이미 의민당과 깊게 엮여 있는 봉산과 재령 일대 유생들은 하나같이 견식이 얕아 개중에는 꺽정이보다도 문리가 어두운 작자들이 있을 정도였다.

“사형이 고생이 참 많소... 그렇다면야 어찌 하겠소. 한동안 몸 사리면서 신씨 부인 눈치를 보아야지. 그이도 성정이 깐깐해서 그렇지 아예 모질지는 않은 듯하니, 내가 가서 딴짓 못하게 열심히 눈길을 끌도록 하겠소.”

“그래, 고맙다. 나도 힘 닿는 데까지 고민해보도록 하마.”

그렇게 터덜터덜 걸어가던 중, 길가의 돌멩이 하나가 꺽정이 발에 치여 옆의 개울에 퐁당 빠졌다.

그 소리 듣고 퍼뜩 명안이 떠오른 꺽정이였다.

“사형, 내게 좋은 생각이 났소.”

“통상 네가 그런 말 할 때면 골칫거리만 늘어났던 것 같은데...”

귓가로 흘리며 꺽정이가 물었다.

“군수 셋째아들이 아비와 달리 총명하여 금번에 초시도 장원으로 급제하였다지 않았소? 나는 그냥 이원수 그이가 팔불출이라 자식자랑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 신씨를 보니 정말로 머리통이 외탁이라 총명한 아이일 수도 있겠다 싶소.”

“무슨 소리인지 마저 듣고 나서 답하겠다.”

“솔직히 우리가 무슨 말로 꾸미든, 하루이틀 고민해서 역적질을 온당한 것으로 만들기는 어렵지 않겠소. 논리로 설복을 못 시킬 것 같으면 억지로 팔을 비틀어야지.”

무슨 뜻인가 곰곰이 생각하던 이지함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인석아, 설마 네놈 생각하는 방도라는 것이...”

“제자 하나 들이실 생각 없소?”

꺽정이가 씩 웃었다.

“그 애지중지하는 셋째 도령을 여기 모셔다놓고, 이제 이 아이도 역모에 가담한 것과 진배없다 우기면 신씨가 뭐 얼마나 더 강짜를 부리겠소. 그 남편이야 워낙 못났으니 제 마음대로 하겠지만, 아들이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

그 아이가 아직 마땅한 스승을 못 구해서 파주 고향집에 있다고 하는데, 파주라 하면 장단 바로 옆 아니오? 이번에 모가지 달아난 한종 그놈 산채 빈집털이나 할 겸 졸개들 데리고 한 번 다녀오리다.”

예로부터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장기판은 뒤집어버린 뒤 비겼다고 우기는 것이 상책이었다.

장기판에서 임자를 만났다 하여, 정정당당히 상대하면서 정직하게 지기만을 기다린다면 어찌 이를 도적이라 하리오.

암만 사임당 신씨가 빈틈없는 여인이라지만, 털고자 작정하면 털리지 않는 대갓집 없듯 그에게도 어쩔 수 없는 약점이 있었다.

대개 상전들은 저들이 인덕과 기율로 노비를 거느린다 여기지만, 대개는 그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대갓집에 붙어 사는 것이었다.

신씨 따라온 노비들은 대개 강릉에서 직접 데려온 이들이라, 이곳 봉산에서 저의 논밭 갈며 사는 것보다 계속 신씨네 행랑살이하는 것이 낫다 여기는 자들이 많았다.

허나 파주 시댁에서 길잡이로 붙여준 노복들은 꼭 그렇지는 않았다. 그렇게 마음 흔들리는 자를 알아채고서 끄나풀로 쓰는 것이 도적질 비법 중 하나였다.

“오... 그렇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뭐, 이 정도를 가지고 그러느냐.”

그런데 그렇게 도적질 당한 입장인 신씨네 셋째아들이, 붙임성이 좋은 것인지 아예 눈치가 없는 것인지, 대놓고 어떻게 그런 범행을 저질렀는지를 물어오니, 꺽정이도 얼떨결에 답해주고야 말았다.

“여하간 그렇게 하나를 꼬드겨 너희 밤골 거기까지 찾아갔던 것이다. 혹시 본가에서 노복 몸값이 아깝다고 말 나오면, 한 오년 뒤에 갚아줄 테니 외상이라 치고 달아놓으라 전해다오.”

“네, 장사님.”

사실 도적질이랄 것도 없었다. 아무리 신씨 팔목을 비틀기 위함이라지만 좋은 게 좋은 것이니 우선 글로 달래보자면서, 이지함이 『화담자의』 한 질과 함께 제자로 들어오기를 권하는 글을 써서 주었는데, 전해주자마자 이 꼬맹이가 그 자리에서 벼락처럼 읽어나가더니 곧장 행장 싸서 따라온 것이다.

여차하면 오밤중 보쌈까지 할 각오였건만 이렇게 일이 쉽게 풀리니, 꼬맹이 – 나이가 열서넛은 될 텐데, 늦게 크는 체질인지 아직 수염도 다 나지 않았다 – 대하는 꺽정이 마음도 조금은 덜 우악스럽게 되었다.

그 이후로 곧장 발걸음 옮겨, 지금은 임진강을 건너고 있었다. 건너는 사람은 많고 사공은 적어, 먼저 넘어온 꺽정이와 꼬맹이 둘이서 이렇게 편히 언덕에 앉아 나머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순순히 따라와도 후환이 없겠느냐?”

“후환이랄 것까지 있으려고요? 더구나 부모님 모시는 일인데, 마땅히 장사님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역죄인 이 공(公)께서 얽히신 일인데, 그에 엮인 분들이 어찌 성질이 순량하기만 할까요.”

“야, 야! 쉿!”

듣는 귀가 없지 않은데 여기서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그냥 눈치가 없는 꼬맹이였다. 아니, 눈치가 좋기는 한데 그 눈치가 애꾸여서, 한쪽은 천리안이고 한 쪽은 한 치도 못 보는 것이라 해야 할까.

“예? 아, 당연한 귀결이라서 굳이 말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군요.”

이이 딴에는, 봉산에서 왔다는 이 험상궂은 자칭 ‘처사’가 죄인이라는 이지함 글을 가져 왔으니, 필경 자신이 따라가지 않는다면 부모님께 해코지가 갈 것이라 금방 결론 내리고서, 거기서 자신이 무엇을 하든 봉산 끌려가는 것은 변함없음을 깨닫고 순순히 따라온 것이었다.

허나 강릉에서 지낼 때는 어머님 한 분만 모시고 지냈고, 이곳 밤골 이씨 문중 가운데는 저와 더불어 이야기할 만한 벗이 없어, 다른 사람들이 보통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는지를 잘 모르던 터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후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다고 짚어주어야 하나, 꺽정이가 저로서는 매우 드문 고민을 하는데, 그사이 맹랑한 꼬맹이가 화제를 돌렸다.

“아, 맞다. 그, 주신 책을 읽어봤는데요... 정말 형편없더라고요.”

“뭐가 말이냐?”

“『화담자의』요.”

“내 스승이 쓴 책이다.”

“정말요? 하기야...”

꺽정이 위아래를 흝어보며 꼬맹이가 뭐라 말을 더 하려던 차.

“뭐, 임마.”

아무리 이 꼬맹이가 중하다지만 화담 선생 욕은 차마 가만 들을 수 없던 꺽정이가 슬쩍 흉악한 기운을 보였다.

그제야 이 맹랑한 꼬맹이가 정신을 차리고 바로 둘러대었다.

“그... 의론에 다소 가감할 바가 없지 않지만 분명 훌륭한 글이라 하겠습니다, 장사님.”

“암, 그래야지.”

아무래도 첫 번째 가르침은 사형 대신 꺽정이 자신이 내려주게 된 모양이었다.

--- *** ---

반역죄에 대한 극형과 연좌제 적용은 『대명률』에도 나와 있는 조항으로, 이를 바탕으로 세워진 조선의 법체계에도 명문화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반역죄인의 집을 헐고 그 자리를 파헤쳐 연못으로 만드는 것을 말하는 파가저택은 『대명률』에도, 『경국대전』에도 그 근거가 보이지 않습니다. 조선 초부터 고려 때의 파가저택 사례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한반도에 오랫동안 내려오던 고유의 형벌로 추정됩니다. 주로 비속이 존속을 상해하거나, 향리가 수령을 업신여기는 경우 시행되었지요.

조선 초까지는 영구 추방형에 수반되는 상징적 조치로 시행되었던 파가적몰은 조선 중기에 접어들어 대역죄와 강상죄 전반에 걸쳐 적용되게 되었습니다. 이후 『속대전』에서는 반역과 강상죄에 대해 파가저택이 형의 일환으로 명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이는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나 자란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중간에 강릉을 떠나 서울 수진방(壽進坊)에 있던 이원수의 서울 집과 덕수 이씨 집성촌이 있던 파주 파평면 율곡리 등에서 나머지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다만 8세때 파주 화석정에서 시를 남기고, 이후 10세 때(1545) 경포대에 올라 부(賦)를 지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13세 때 첫 장원을 하기 전까지 계속 강릉과 파주를 오갔던 듯합니다.

이후 1551년 어머니 신사임당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잠시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에 심취하기도 하는 등 – 이는 붕당이 생긴 이후에도 계속해서 공격받게 되는 논란거리가 됩니다 – 한동안 방황하게 되지요. 이후 귀양지 안변에서 파주로 돌아온 백인걸을 스승으로 보시고, 동문으로 들어온 성혼과 교유를 맺는 등 우리가 아는 그 이이로 성장해나가게 됩니다. 다만 작중에서는 아직 그런 정신적 성장을 거치지 못했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