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22화 (22/259)

8. 교학상장 (2)

꼬맹이 이 도령 데리고 임진강 건넌 꺽정이 패거리는, 곧장 장단 지나 금교역에서 하룻밤 묵고 청석골로 향했다.

한종을 잡아 죽인 일로 금교찰방의 인심을 후하게 산 덕에 금교역에서는 발 뻗고 등 따습게 잤을 뿐 아니라, 먼 길 걷느라 발 부르트고 다리는 온통 부은 꼬맹이를 위해 나귀 한 필도 빌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걱정했던 것보다는 빨리 청석골에 돌아올 수 있었다.

금지옥엽 도련님 다리에 말썽 생겼다고 신씨 마나님께 한 소리 들을까 두려워 – 정말 그런 게 두려웠다면 애초에 그 아들을 이렇게 붙잡아오면 안 되었겠지만 - 산속까지 올라가지는 않고 아랫말 서림이네에 눌러앉아, 올 여름 아랫말로 흘러들어온 의원에게 한 번 와보라 말을 전하였다.

의원은 고약 조금 바르고 곧장 나가고, 그사이 기별 받은 이지함도 내려왔는데, 그도 어쩔 수 없는 공부하는 사람인지라 신동(神童) 구경하겠다며 방 안에 뻗어 있는 꼬맹이를 찾아가서는 기어이 문답 몇 번을 하고서 나왔다.

“꺽정이 네놈은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놈이기에 이렇게 주변에 기이한 사람만 모이나 모르겠다. 서림이는 축재하는 재주가 귀신같고, 저 신씨는... 그냥 신씨고. 이제는 신동까지 하나 데려오다니.”

“사형도 따지면 기인 축에 들지 않소? 솥뚜껑을 갓으로 쓰고 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몸의 힘을 단련한다고 저의 비법이라면서 그렇게 하고 다닌 적도 있던 이지함이었다. 허나 지금처럼 엄연히 역적 신세일 때 그렇게 눈에 띄는 짓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더구나 꺽정이 앞에서 힘자랑하는 것도 참 우스운 일이라, 때려치운 지 오래였다.

“너만 하겠느냐.”

대답 궁색한 이지함이 화제를 돌렸다. 허나 새로 꺼낸 이야기도 답답하긴 매한가지라, 말 꺼내기도 전 한숨부터 나왔다.

“그나저나 저 아이와 말 몇 마디 나누어보았는데, 이리 말하니 마음은 좋지 않지만 내 조카녀석보다도 더 총명한 듯하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저 아이 스승이 되어줄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구나.”

며칠 전 이지함은 제자 들인다는 핑계로 이 도령을 납치하여 산채에 둔 뒤 신씨를 겁박하려는 꺽정이의 우악스런 생각에 질겁하여, 그럴 게 아니라 정말로 저의 제자로 거두어보겠노라 하였다.

어차피 한양에서 벼슬하던 허엽도 역적의 동문이라 하여 벼슬길 끊겼다지 않은가. 그렇다면 반대로 어떻게 어린아이를 잘 구슬리고 달래어 저의 문하에 들이기만 하면 그 아이 역시 역적의 제자가 되는 셈이니, 아들 앞길 걱정하는 신씨도 부득불 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싶었다.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를 속여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는 것 아니냐는, 마음 한 구석 찔리는 양심 한 토막은, 반대로 이 근방에 지금 저만큼 뛰어난 스승이 얼마나 있겠냐는 생각으로 억눌렀다.

그리하여 『화담자의』와 함께 한껏 어린 사람에게 보내는 것치고 매우 정중한 글까지 함께 써서 부쳤던 이지함이었다.

그러나 막상 만나보니 떠오르는 감상은 그저 후생가외(後生可畏) 네 글자.

꼬맹이가 『화담자의』를 일컬어 형편없다 했다는 얘기를 듣고 더욱 주눅이 드는 이지함이었다. 꺽정이야 그저, 저의 스승이 쓴 책이니 훌륭하리라 여기고 있겠지만, 사실 그 책에는 모든 것을 의심하여 마침내 진리 궁구할 기반을 다진다는 대의(大義)만 있고 그 이하 각론은 없다시피 했다.

물론 그렇게 의고(擬古, 옛 것에 의지함) 대신 의고(疑古, 옛 것을 의심함)를 역설한 것만 해도 여태껏 드문 논의였지만, 말하자면 종이를 빨아 새롭게 쓸 수 있도록 한 것에 불과하였을 뿐. 그렇게 깔끔하게 정리한 종이 위에 쓰인 내용은 없었다.

그렇다면 제자로서 그 뜻을 이어받아 얼른 나머지 이론을 완성하여야 할 터인데, 지금껏 그가 그럴 겨를이 있었던가.

“그러면 어쩌시려오?”

“나도 부족함 많지만, 그래도 함께 공부해보자, 그렇게 허심탄회하게 부족함을 얘기해주고 어떻게 잘 설득해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때, 꺽정이가 꼬맹이 들어간 방 쪽을 돌아보며 목청을 높였다.

“어이, 꼬마야. 몰래 엿들으려면 창호지에서 몸은 떼고 들어라. 햇빛에 그림자가 다 비치지 않느냐.”

그랬더니 정말로 방문이 끽 하며 열리고, 쭈뼛거리는 꼬마 도령이 얼굴을 내밀었다.

“이왕 이리 된 것 네 말도 들어보자. 여기 내 사형 되시는 분이, 말은 이리 겸손하게 하시지만 그래도 참 훌륭한 분이다. 어차피 너도 파주 네 집 근방에 스승으로 모실 만한 이가 없다 하지 않았느냐?”

“그렇기는 합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꺽정이가 또 한 번 노려보니, 도령도 깜짝 놀라 말이 끊어졌다.

그사이 이지함은 크게 한 번 숨 들이키곤 말했다.

“네 말하려던 것을 내 대신 말해주마. 나는 아직 학문 이루었다 하기도 어려운 초야의 서생일 뿐이고, 대역죄인 허물까지 쓴 몸이니 어찌 부족함이 없겠느냐. 네 말이 틀리지 않다.”

“대신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야.”

“꺽정아, 괜찮다.”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고맙다는 듯 말하는 도령을 또 한 번 꺽정이가 노려보았다.

“너도 짐작했겠지만, 우리는 나라를 뒤엎을 궁리를 하고 있다. 허나 그저 뒤엎기만 하고 그친다면 조조(曹操)와 다름이 없을 것이요, 뒤엎은 뒤 바로잡지 않는다면 왕망(王莽)보다도 못하게 될 것이다. 사직과 백성에 두루 죄를 짓는 셈이니, 어찌 두려워하며 더욱 정진하지 않겠느냐.

허나 반대로, 네가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서 이런 공부를 해보겠느냐? 그 어떤 막힘도, 그 어떤 거리낌도 없이 묻고 따지고 또 깨우칠 수 있는 곳이 조선 팔도 중 여기 외에 또 어디에 있겠느냐?”

꺽정이가 얼핏 보니 그 말에 꼬맹이도 회가 동한 듯했다. 아니, 회가 동한 것을 넘어 꽤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했다.

“나는 너의 스승이 되기에는 부족할 지도 모른다. 허나 감히 자부하건대 너의 말동무가 되고, 선진(先進, 선배)으로서 네게 생각할 점 짚어주는 정도는 족히 하고도 남을 것이다.

『화담자의』가 부족함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들었다. 나와 함께 그 부족함을 마저 채워나가 보지 않겠느냐? 지금껏 없던 치세의 도리를 새롭게 세워보지 않겠느냐?”

현룡이(이이의 아명) 시절부터 지금까지 주변에서 신동 소리 듣고 자란 이이였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의 스승될 만한 사람은 어머니 한 사람 외에는 보지 못했고, 정학을 배우기 시작한 뒤로는 어머니와도 함께 이야기하기가 곤란하였다.

그 이후로 만나는 이들은 대개 그런 식이었다. 잘해보아야 저보다 잘난 점이 하나둘씩 있을 뿐, 대개는 못나고 둔했으며, 또한 이를 부끄럽게 여기며 이이 그를 미워하곤 했다.

책 속에서 만나는 옛 사람들도 비슷하였다. 감탄할 만한 말도 있지만 답답한 말도 있고, 아무리 보아도 그런 뜻이 아닌데 아래에 주해(註解)라고 달린 것은 영 이상할 때도 있었다. 누군가 저에게 그 뜻을 밝혀주어, 그 사람들 딴에는 저 정도가 최선이었고, 거기서 취할 뜻은 바로 이것이라 알려준다면 모를까, 이이 스스로는 그의 선인들이 성(聖)임은 받아들여도 과연 현(賢)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었다.

허나 이 팔도 어딘가 그를 받아줄 스승이 있기는 할 것이요, 설령 이이 저보다 어리석고 굼뜨다 한들 존경할 만한 성품의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이라면 마땅히 스승으로 모시면서 아직 저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나갈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게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이 이지함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오히려 너 잘난 대로, 마음껏 생각 펼쳐보라.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며 달려가고 싶은 만큼 먼저 달려 나가 보라. 너를 질시하지도, 붙잡지도 않을 것이요, 그저 옆에서 따라서 달리겠다.

마음 속의 저울이 기울기 시작한다.

“아니, 사형. 아무리 그래도 열세 살 어린아이인데...”

“시끄럽다, 꺽정아. 배움에 나이가 어디 있느냐.”

그 말이 그 뜻이었던가 싶어 꺽정이가 머리 긁적이는 사이, 이지함은 그 이이 마음속 저울을 들여다본 양 마지막 무게추 하나를 더 달았다.

“이곳 산채에 머물면 네가 원하는 대국의 서책을 마음껏 들여와 볼 수 있다고 내가 얘기했던가? 우리 당에서 벌이는 여러 일들 중 하나가 그렇게 서책 들여오는 장사라서 말이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이이는 바로 큰절을 올렸다.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그사이 그의 머릿속에서 오간 수많은 생각을 알 리 없고, 다 여물지 않은 그 조그만 머리통에 그토록 많은 생각이 들어있음을 알 수도 없는 꺽정이로서는, 이토록 꼬맹이 마음이 쉽게 넘어올 것이었는데 사형 홀로 지나치게 어렵게 여긴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 고맙다. 잘해보자꾸나. 비록 네가 이곳 봉산에 오게 됨이 너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라지만, 혹여 불편하거나 어려운 것이 있다면 언제든 나나 여기 임 당수에게 말해다오.”

“예, 스승님.”

“자, 잘 풀린 듯하니 이제 슬슬 동헌에 가서 도령 어머니께 인사를...”

꺽정이가 손뼉 한 번 치며 말하려던 차였다. 이지함을 스승으로 모시건 말건 없던 눈치가 갑작스레 생기는 것은 아님을 잊고 있었다.

“다만 여기 머물기는 조금 어려울 듯합니다. 이왕 이렇게 부모님과 함께 봉산 고을에 머물게 되었으니, 동헌에서 지내면서 오가도 괜찮을지요?”

이지함이 꺽정이를 슥 보았다. 꺽정이 생각에도 어차피 이지함 제자로 이 아이가 들어오기로 한 이상 일가가 야반도주하거나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지금 이지함과 꺽정이를 속이고자 거짓으로 스승으로 모신다 답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꺽정이가 살펴본바 이 꼬마 도령 깜냥에 그만한 거짓말을 낯빛 멀쩡하게 늘어놓지는 못할 듯하였다.

“뭐, 그 정도야...”

“그리고 어머님을 이미 찾아뵈셨을 테니 알고 계시겠지만, 어머님께서 기체(氣體)가 미령하십니다. 제 다리를 보아준 의원은 품성은 온량하나 의서(醫書)는 많이 보지 못하여 저보다도 어두운 것 같으니 미덥지 못하더군요. 혹 임 장사님께서 화적질을 하실 때 용한 의원을 마주치게 되신다면 제 마음도 많이 편해질 듯합니다.”

“이놈아, 화적질이라니. 사업이라고 불러라.”

“‘사업’이라고요? 임 장사님, 이름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마음대로 붙일 수 없는 것인데...”

“흠흠, 제자야. 나중에 내가 더 설명해주마. 또 더 원하는 것은 없느냐?”

꺽정이가 손 휘휘 저으며 만류하였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이어서 어머니의 평소 습관부터, 이런 시골 군의 동헌이 변변할 리 없으니 혹 재정 여력 있으면 개축이나 해 달라, 즐기시는 반찬은 이러이러하니 읍내 상인들에게 이야기하여 갖출 수 있으면 갖추어달라 해 달라 등등.

이게 효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아이가 부모님을 지극히 생각함은 알고도 남았다. 그러니 이제 족함을 알고 멈추면 좋겠는데 도저히 멈추지를 않았다.

“... 그리고 어머니께서 종종 심화(心火)도 도지시는데, 주변에 더불어 이야기할 규수가 없으니 특히 그러시곤 하십니다. 그럴 때 산천을 벗삼아 유람을 하시면 조금 나아지시거든요. 그럴 때를 위하여 임 장사께서 조금 더 마음을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지함도 이제 슬슬 말려야 하지 않을까 싶어 입 열려던 차,

“흐흐... 그렇지. 그러면 되겠어!”

꺽정이가 예의 그 험상궂은 미소를 지으며 홀로 웃었다.

“사형, 내 서림이를 좀 보고 오겠소. 동헌 가서 신씨 마님께 자제분 데려왔노라 얘기만 덜렁 하기가 무엇하였는데, 이거 잘 되었군그래, 흐흐흐.”

“저기, 장사님?”

“내버려 두어라. 저럴 때면 엮이지 않는 게 마음 평온케 하는 길이다.”

스승의 말에 어린 제자가 뭔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꺽정이는 곧 서림을 보고서 돌아와서는, 이지함과 이이 두 사람과 함께 읍내 동헌으로 향했다.

저의 아들, 그것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셋째아들을 이 일에 끌어들였다는 데 자칫 지체를 잃고 대노할 뻔하였던 신씨도, 아들에 제 마음에 따라 스승으로 이지함을 모시기로 했다는 데 한 번 멈칫 하고, 이어서 꺽정이가 저의 음험한 계책을 내놓으니 또 한 번 멈칫하여, 결국 노여움은 흐지부지 흩어지고 모자간 상봉만 남았다.

그렇게 인사 올리고, 해 떨어지기 전 청석골로 돌아가야 한다는 핑계로 후다닥 빠져나온 뒤 아랫말에서 사형과 함께 술 한 잔 기울이는 꺽정이었다.

“그래서 그 계책이란 게 무엇이냐?”

“내가 얘기할 때 안 계셨던가? 아, 맞다. 도령 데리고 군수 나리 뵈러 갔었지. 생각해보니 동문의 의리가 있으니 사형께 미리 말씀드리는 게 옳았겠소.”

멸악산 산바람 쌀쌀한 것을 제외하면 그럭저럭 상쾌한 가을날 저녁이라, 호젓하니 사람들 이목 없는 곳에 평상 가져다 놓고 주거니받거니 하고 있었다.

꺽정이 등 뒤 멀찌감치 있는 저쪽 덤불 위로 복건 꼭지가 불쑥 나와있는 것이 이지함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갓 들인 제자와의 의리를 생각하여, 아직 꺽정이에게 말해주지는 않았다.

“괜찮으니 사람 궁금하게 하지 말고 말해보아라.”

“그, 꼬맹이, 아니, 사형네 새 제자가 저의 어머니가 병약하여 걱정이라 하지 않았소.

그런데 내가 지금껏 살면서 본 바로는 조선국 아낙네들 중 가장 신체 건강한 이들이 있으니 바로 기생이오. 그중에서도 특히 조용히 앉아 시나 읊는 그런 기생보다, 화사하니 춤 잘 추는 이들이 나중에 퇴기 된 뒤에도 오래오래 잘 산다 하더이다.”

물론 지금의 이 몸으로는 기방 문턱도 넘어본 적 없었지만, 지난 생에서는 한양 올라갈 때마다 색주가 섭렵하곤 하였고 간혹 한온이가 귀한 기생들도 모셔오곤 하였으므로 잘 알고 있었다.

다행히 그런 쪽으로는 눈길도 준 적 없던 이지함은 딱히 이상하다 여기지 않는 듯했다.

“잠깐, 퇴기라 하면...”

“그렇지! 지금 개성에 아직도 바깥에 발걸음 못 하고 쥐죽은 듯 계시는 가여운 우리 사저께서 계시지 않소? 더구나 대갓집 마나님이라 천생 손에 물 한 방울 아니 묻혀보았을 신씨와 달리 우리 사저님께서는 소싯적에 두 발로 걸어서 평양도 다녀오고 금강산 유람도 다녀오셨다지 않소?

그러니 개성에서 숨어살듯 하느니 차라리 봉산으로 옮겨오셔서 저 신씨의 벗이나 해 달라 하는 것이지. 그렇게 신씨 옆에 우리 누님 붙여두면, 누님도 적적하지 않고, 신씨는 지쳐서 우리 쪽에 신경 못 쓰고. 우리는 그사이 계속 은근하게 신씨에게 청하여 우리 편으로 만들고.”

“사저께 청한다면야 궁금해서라도 오기는 하겠지만...”

“그런데 그렇게 신씨 옆에만 붙여두자니 누님 재주가 아깝긴 하더라 이 말이오. 그래서 서림이를 보러 갔지. 흐흐, 그리고 누가 서림이 아니랄까봐 기막힌 생각을 해냈지 뭐요.”

그 유명한 황진이가 이곳 봉산에 오게 된다면 무슨 이득될 만한 일을 더 벌릴 수 있겠느냐 물었더니, 서림이는 바빠 죽겠는데 농담하지 말라며 면박 주더니 – 아직 일전에 동헌에 저를 홀로 던져두고 간 일의 앙금이 조금 남아 있었다 – 진담임을 깨닫고서는 곧장 그럴듯한 제안을 내어놓았다.

“팔도 기생 중 평양 기생이 제일이고, 평양 기생 재주라 하면 검무(劍舞)가 최고 아니오?”

“검무라면, 설마?”

“그 설마가 맞소. 흐흐흐.”

떠돌이 하나 구해줬다가 정경부인(貞敬夫人) 봉작까지 받은 이장곤(李長坤)의 백정 부인 이야기가 아직도 팔도 백정들 사이에 도는 것처럼, 화담 선생과 함께 송도삼절로 꼽히는 황진이 역시 기생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선망의 대상일 테다.

일감 없어 사실상 사장(私匠) 노릇하는 재령 고을의 야장(冶匠)들을 끌어와, 그 황진이의 이름을 내걸고 검무에 쓸 칼 장사를 하면 나쁘지 않은 장사가 될 것이었다. 평양 상인들과 연줄 만들어놓은 것을 이렇게 쓰게 될 줄 누가 미리 알았으랴.

물론 그렇다 한들 평양 기생들이 모두 검무를 추는 것도 아니요, 한 번 사들인 칼이 썩는 것도 아니므로 한철 바짝 벌고 나면 나머지는 벼려내는 대로 고스란히 창고에 박히게 될 터.

허나 칼춤에 쓰라고 만들어놓은 칼을 사람 목 베는 데 쓰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으랴? 그렇게 묵혀둔 칼은 수년 내로 본래의 그 상서롭지 못한 목적에 쓰이게 될 것이었다.

얼떨떨하게 있는 이지함을 앞에 두고 꺽정이가 술병을 확 들이켰다.

“커어, 좋다! 한 병 더 하시겠소?”

“아니, 되었다. 당장 내일부터 제자와 머리 맞대고서 세상 바르게 할 방도를 고심해야 하지 않겠느냐.”

“아, 맞다. 그게 있었지.”

꺽정이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사저가 암만 사형을 안타깝게 여기고, 또 우리네에게 동문의 정을 느낀다 한들, 그래도 솔직히 위험한 일은 맞지 않소. 저 꼬마 도령 한 사람 더 붙었다고 치국(治國) 도리를 금방 깨우칠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사저가 우리 청에 응해서 봉산 올 때까지는 누님께도 꽤 괜찮게 들릴 만한 이야기를 내놓아야 할 게요.”

“뭐, 떠오르는 것이라도 있더냐?”

“사형, 나는 백정이고, 누님은 기녀요. 나도 그렇고, 우리 누님도 그렇고, 재주가 백정과 기녀로 끝날 사람들은 아니지 않소?”

“양천(良賤)의 구분을 폐하기를 원하느냐?”

“뭐, 그것까지 들어가면 좋고. 며칠 전에 서림이를 신씨에게 던져두고 청석골 돌아오던 길에 사형이 내게 물어본 것 있지 않소? 내 실은 그때 이후로 파주 다녀오면서 죽 생각해보았소.”

‘에이, 안 되겠다.’ 하면서 이지함에게 권하려던 술을 죄다 저의 입에 털어넣는 꺽정이였다.

“사형, 나는 어차피 큰 도적 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모로 가도 한양만 가면 그만이오. 허나 이왕 더 나은 나라 만들 궁리를 한다면, 한 가지 부탁하고자 하는 게 있소.

어차피 세상이 갑자기 극락으로 화하지 않는 한, 이름을 암만 바꿔도 천한 놈들과 귀한 분들은 나뉠 수밖에 없다고 보오. 그렇지만 적어도 못난 놈이 잘난 사람 위에서 거들먹거리는 일은 없었으면 하오. 아마 누님도 그것을 한으로 여기고 있지 않겠소?”

백정의 아들이자 명유(名儒)의 제자. 선비의 벗이자 살육 즐기는 도적.

조선 팔도에서 가장 사연 복잡한 사람 꼽으라면 분명 한 손 안에 들 꺽정이가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나도 마찬가지요. 나중에 우리 일이 성사되어 윤원형이 거꾸러뜨리게 되더라도 나는 그 자리에 고대로 앉고 싶지는 않소. 그런데 기껏 한 놈 보냈는데 그 자리에 나 말고 다른 놈이 앉는 꼬락서니는 더 보기 싫거든.

차라리 천하를 모조리 쪼개서 모두가 나누어 갖는다면 모를까, 같잖은 것들이 내 위에서 상전 노릇하는 건 죽어도 싫소.”

날것 가득한 말에, 덤불 뒤에 숨어 엿듣는 이이의 눈도 절로 크게 뜨였다.

“혹여 그 꼬마 도령과 함께 나라 고치는 방도 고심할 때 내 생각도 조금 담아줄 여력 있으면, 조금 챙겨주면 고맙겠소.”

황진이 이야기 듣고서 오늘 들을 놀라운 이야기는 다 들었거려니 여기던 이지함은 여전히 술잔 들고 그대로 멈춰 있고, 할 말 다 털어낼 꺽정이 혼자 남은 술 모두 들이키고 일어났다.

“며칠 전부터 한종이 모가지 베었다가 꼬마 도령 아버지 구하러 갔다가, 일이 많다 보니 좀 피곤하구려. 미안하지만 먼저 들어가 봐야 하겠소.”

“후... 그래. 네가 고생이 많았다.”

그렇게 꺽정이가 멀리멀리 사라진 뒤,

“너는 좀 몸을 단련해야 하겠다, 제자야. 그리 숨어서 어디 숨는다고 하겠느냐.”

“임 장사, 아니, 사숙(師叔) 눈에만 안 띄면 되지 않겠습니까.”

덤불 뒷편에서 어린 제자가 툭툭 무릎 털며 일어났다.

“미안타. 이렇게 얘기가 무거울 줄 알았으면 진작에 너 여기 있다고 임 장사에게 일러두었을 텐데.”

“네? 미안하시다니요?”

달빛에 얼추 비친 제자의 모습은, 새해에 세배 올리러 갔다가 덕담과 함께 갓 깎은 팽이를 받은 어린아이마냥 가득 흥분에 차 있었다.

“이런 묵직한 물음은 들어본 적도 없고, 또 어떤 책에서도 못 보았던 것 같아요. 처음 들었을 때 바로 답이 안 떠오르는 물음이다 보니 더 재밌기도 하고요.”

세상을 바꾼다는 것의 무게는 알지 못하고, 남들 하지 않는 이야기를 먼저 내놓는 재미는 아는 꼬마 도령 이이가 신나서 떠들었다.

“말이 많이 거칠기는 하지만, 결국 임 장사님 말씀하신 것의 요점은 딱 하나 아니겠어요?”

“그리 보느냐?”

“네, 결국 누군가는 세상을 나누어 가지고 누구는 못 가지니까 상하의 구분이 생기는 것이고, 그게 대를 거쳐 누적되니까 지금 임 장사님 같이 울분 품는 사람도 나오는 것이겠지요. 지금 임 장사님 하신 말씀은 아예 그럴 바에야 모두 잘게 쪼개어서 함께 나누어 쓰자, 그런 뜻 아닐까요?”

꺽정이의 거친 말을 이이가 줄여서 말하니, 말의 뜻이 예리한 비수처럼 벼려져, 생각할수록 이지함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러니까 길게 말할 것도 없이, 딱 네 글자. ‘천하공물(天下公物)’이 지금 얘기한 뜻이겠지요.”

천하공물. 하늘 아래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어라.

이지함 머릿속에는 그 네 글자가 고스란히 남았기에 귀하게 얻은 제자의 조잘대는 말이 미처 들어가지 못했다.

--- *** ---

이전 화부터 종종 언급되던 금교찰방은, 특정한 군현이 아니라 역도(驛道)를 관리하는 직책으로 황주부터 금천까지 황해도의 역참을 관리하던 자리입니다. 조선 후기 기준으로 아래에 배속된 역마만 97필에 달했기에, 개중 한 필쯤 잠깐 빌려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듯합니다.

흔히 기생의 춤이라 하면 사극의 영향으로 하늘하늘 추는 부드러운 무용만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실제로 평양의 검무는 유명하여 조선 말기까지도 전해 내려왔습니다. 한술 더 뜨는 사례로는 의주 기생들의 마상검무가 있었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이는 조선 후기에 잦은 변란과 경제난을 겪으면서 실전되었다고 합니다.

이장곤의 백정 부인 이야기는 유명한 야담으로, 벽초의 『임꺽정』에도 내용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성종 연간에 출사한 이장곤은 문무를 겸비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무오사화 시기 연산군의 의심을 받아 유배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때 탈출하여 잠적하였는데, 이 시기의 행적이 야담으로 많이 남아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양수척 무리 가운데 숨어 살던 중 백정 여인과 눈이 맞아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벽초가 이것을 택한 뒤 더욱 각색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