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23화 (23/259)

8. 교학상장 (3)

거하게 망신당한 이래 몇 달을 두문불출하던 군수 이원수는, 이왕 할 일 없는 바에야 선정(善政) 소리라도 듣게 군민들 오가는 곳을 손수 둘러보는 시늉이라도 함이 어떻겠느냐 하는 부인 신씨의 조언을 듣고 마치 저의 할 일 깨달은 사람처럼 부지런히 봉산군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오늘도 그렇게 장시 ‘시찰’을 나갔으므로, 동헌은 텅텅 비어있어야 할 것이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내아에서 거문고 소리 은은하게 퍼지고, 그 앞에서는 현숙한 부인 홀로 칼춤을 추고 있으니, 참으로 기이한 풍경이었다.

처음 그 ‘검무’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기생들의 춤 따위, 사내의 눈요기에 불과하거늘 무슨 반가 규수의 입에 올릴 바가 되겠느냐 여겼는데, 황진이가 당당하게 답하기를 검무가 반드시 주안상 앞에서만 펼쳐져야 한다는 이치가 세상에 어디 있냐 하였다.

하면서 그 자리에서 현란한 칼사위 선보이며 말하기를, 저의 사제들에 비하면 한참 못하지만 일신의 정절 지킬 만큼의 솜씨는 된다 하였다.

‘여인네 혈혈단신으로 금강산 유람을 어찌 다녀왔겠어요? 여인이 수절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면, 간악한 마음 품은 자들이 그 마음을 드러낼 엄두도 못 내게 제압하는 것이지요.’

하면서, 하늘하늘 쌍검 놀리던 것에서 갑자기 검세 바꾸어, 검 하나는 버리고 남은 하나를 벼락같이 휘두르는데, 그 형상이 마치 산들바람이 돌개바람으로 화하는 것과 같아 무예에 밝을 리 없는 신씨도 순간 소름이 돋았다.

‘검무라는 것은 본디 검법을 춤으로 간추린 것이니, 반대로 검무를 되짚어 검법으로 되돌릴 수도 있는 것이랍니다. 실제로 싸움에 쓰이는 칼솜씨로는 한없이 부족하겠지만, 한 몸은 족히 지킬 수 있지요. 아무나 쉬이 익힐 수 없으니 그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조선국 여인 중 이런 재주를 족히 부릴 이가 얼마나 될까요.’

팔도 여인 가운데 저만한 이 없다고 여기고 있던 신씨의 마음을 – 셋째아들 성품이 어디서 왔겠는가 – 그렇게 은근슬쩍 황진이가 긁으니, 기생들 춤 말고 몸 지키는 검법이라면 몸에 활기도 돌게 할 겸 배움직하지 않겠느냐 그 자리에서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그 이후로 굳은 몸을 오기로 놀려 억지로 따라오기를 몇 달.

황씨에게 굳이 밝힐 생각은 없었지만, 몸이 가벼워지고 부드러워지며 항상 가득하던 울화가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자, 이렇게 한 단락이 끝났습니다, 부인. 이대로라면 해가 바뀌기 전에 앞서 보여드렸던 검무를 모두 따라하실 수 있겠는데요?”

‘스승이 훌륭한 덕이다’ 같은 소리가 나올 법도 하지만 나오지 않았다. 허나 그런 말이 올라오다가 마는 것이 황진이 눈에 훤히 보였으므로 그저 씩 웃을 뿐.

“잠깐 쉬었다가 숨 돌리고 마저 함이 좋겠소. 마침 내 그대에게 묻고자 하는 사정도 하나 있고. 부군께서 고을을 둘러보시던 중 기이한 일이 있어, 그 까닭을 묻고자 하오.”

봉산 고을에 장시가 널리 열리게 된 지 벌써 세 해가 되어가고 있었다.

장시가 흥성하니 사람 많이 오가고, 사람 많이 오가면 자연히 끼니 해결하려는 이들도 늘기 마련이며, 끼니 때우다 보면 나는 것은 술 생각이라. 그로 인해 봉산 일대 술도가와 주막들은 나날이 벌이가 좋아졌다.

흉년이 이어지고 있는데 귀한 곡식으로 술 빚어 파는 것을 보면 관에서는 눈을 찌푸려야겠지만, 이곳 봉산은 군수가 군수 노릇 아니하는 고장으로 암암리에 알려져 있었으므로 모두가 여기서는 안심하고 부어라 마셔라 하였다.

한 해 농사가 끝난 지금은 그저 술 한 잔 걸치러 서흥이나 재령에서 봉산으로 놀러 온다는 작자들도 있을 정도였다.

노름 역시 나라에서 좋게 보지 않지만, 이곳 봉산에서는 술과 마찬가지 이유로 판이 꽤 흥하고 있었다. 그런 자리에 늘상 있기 마련인 왈패가 봉산 장터에서는 씨가 마른지 오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술과 노름에 늘 따라다니기 마련인 색(色)은 유독 기를 펴지 못하였다. 봉산군 기적(妓籍)에 오른 기생들이야 말이 기생이지 실제로는 관비였으니 그렇다 쳐도, 평산이나 해주 같은 곳에서 흘러들어오는 여인들조차 술자리에서 웃음 파는 데는 나아가지 않고 있었다.

“... 부군께서 이를 이상히 여기시어 탐문하시었는데, 그 연유가 바로 그대에게 있다고들 한다더구려.”

“어머, 그런가요? 여기 동헌에 머물며 부인께 소소한 재주를 뽐내느라 미처 알지 못했네요.”

“어찌 여인 가운데라 한들 주머니 속 송곳의 이치가 다르겠소?”

뻔히 알면서 겸양하는 시늉 하지 말라고 살짝 찔렀더니, 언변과 뻔뻔함 겸비한 퇴기 황씨가 씩 웃었다.

“정 궁금하시다면 이번 단락을 틀리지 않고 추어보시지요.”

황진이가 다시 거문고를 탔다. 익숙한 곡조가 울려나오기 시작했다.

신씨도 옛일 생각에서 벗어나, 오직 지금 여기서 칼 휘두르는 데만 전념하였다.

장시 ‘시찰’을 나갔다가 백성들 노름판에 혹 간사한 술수는 없는지 확인한다는 핑계로 그 판에 끼어, ‘순전히 저의 재주로’ 마구 따고 온 이원수가 멋모르고 내아 문을 열었다가 기겁하여 달아나는 일이 있었지만 신씨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황씨도 사임당 부인의 무덕(武德)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헌헌한 장부의 기색으로 추는 춤이니, 연회가 아니라 남을 제압할 때 쓰는 춤사위로 족하고도 남으리라, 그렇게 칭찬하면서도 속에 뼈를 담아 놀리는 황씨였지만, 약속은 약속인 고로 그간 사연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 나온 말이 생각할 바를 많이 던지는 것이라, 청석골로 가는 동안 사임당은 생각에 깊게 빠졌다.

이르기를,

‘대개 양갓집의 남녀가 입을 모아 천하다 하는 기생이지만, 상정(常情)은 똑같기 마련이지요. 그리고 사람의 상정이란 곧 지금보다 더 위로,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것 아닐지요?

어떻게든 제 눈에 띄어 조그만 재주라도 배워, 궁벽한 신세를 벗어나거나 더 번화한 도회로 나가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어찌 푼돈 벌고자 제 코앞에서 저들 재주를 뽐낼 생각을 하겠어요?’

하는 것이었다.

그런 천한 사람들이 저들 신세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리라는 생각은 딱히 해본 적 없던 사임당에게는 그것만 해도 놀라운 이야기였는데, 그렇다면 앞으로 그런 기생들을 데리고 무얼 할 것이냐 물었더니 나온 답이 더욱 놀라웠다.

‘지금에야 그런 젊은 여인들 데리고 무언가를 가르치는 곳이 기방(妓房)뿐이니, 어쩔 수 없이 그저 알음알음 몇 명씩 데려다 눈에 안 띄게 가르치고 있답니다. 가뜩이나 오해받을 일 많이 하는 이곳 봉산인데, 기방까지 열었다 하면 부인의 부군께도 어려움이 갈 것이요, 저의 사제들이 벌이는 일도 자칫 발목을 잡힐 테니까요.’

그러면서 조심스레 얘기 꺼내기를,

‘나중에,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제들이 가야 할 곳으로 가게 된다면, 그때는 여기 봉산이든 송도든 가서 그런 아이들에게 재주 가르치는 학당... 아니, 학당이라 하기까지는 부끄러우니 습재당(習才堂)이라 해야 할까요, 그런 곳을 하나 차리고 싶기도 해요.

사실 기생이라고 해서 모두가 웃음을 파는 것도 아니고, 배워야 할 일도, 배우면 좋은 일도 각양각색이거든요.’

하였다. 그간 저처럼 세상 이모저모를 다 겪으면서 견식이 트였다 여겼던 황씨가 이런 황당한 얘기 하는 것을 의외라 여겼는데, 그것을 또 눈치챘는지 말을 덧붙였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다들 만류하겠지요. 그런데 제 사제 꺽정, 아니, 임 처사라면 그럴 때, 안 될 것 무엇 있냐며 해보라 할 것 같더라고요.’

정말 그런 일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사임당이 지금껏 배워 알던 성현의 도리, 집안의 법도, 그런 것들을 모두 벗어나, 천하고 상스러운 이들이 욕심껏 발버둥치는 것까지 모두 끌어안아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 가한 일일까?

아들보다 딱히 못하지 않은 사임당의 머리는, ‘이곳 봉산군을 보라’ 라고 근거를 들이대고 있었다.

가마도 타지 않고, 말구종과 몸종 하나씩만 대동하고 가는 길.

겨울치고 포근한 날인데 유독 안개만 자욱하였다. 서쪽으로 뻗은 밭둑 군데군데에는 눈이 남아 있어, 멀리 갈수록 안개와 분간이 되지 않아 하늘과 절로 합하게 되었다.

“들을 바라보니 하늘 끝에 닿은 듯 / 마을의 밭은 땅 깊이 파헤쳤네.

땅은 낮으니 윤기로 빛나고 / 산은 가까우니 한기가 드누나

(野望際天斷。村耕入壤深。地卑微潤泫。山近薄寒侵).”

절로 떠오르는 구절을 읊으니 이상국(李相國, 이규보)의 시다.

어떤 거창한 가르침에 따른 것도 아니다.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가 참으로 훌륭한 제도라 칭찬을 아끼지 않던 『여씨향약(呂氏鄕約)』과는 가히 막북(漠北, 고비 사막 이북)과 강남(장강 이남)만큼 동떨어져 있었다.

봉산 고을의 사정을 지난 몇 달간 직접 보고, 남편 이원수의 귀를 빌려 또 전해들었다.

그저 장사치 욕심대로, 내년에 더 많이 뜯어내고자 올해 뜯어가는 것을 줄이고, 저들 외에 다른 곳에서 더 뜯어가지 않도록 힘으로 막았을 뿐인데도, 백성들은 그런 욕심 많은 도적과 장사치, 향리들 아래에서 좋은 세상이라며 마음 편하게 밭을 갈았다.

겨울보리가 잠자고 있을 저 밭만 해도, 몇 년을 묵혔다가 얼마 전에 다시 사람 손이 닿은 기색이 역력했다. 아마도 불운하게 나라의 양안(量案)에 올라, 경작을 할작시면 나오는 소출보다 바쳐야 하는 조세가 더 많을 지경이므로 나서는 주인 없이 묵혀둘 수밖에 없었던 밭이리라.

앞서 읊은 이규보의 시는 이렇게 끝났다.

‘내 일찍이 시로써 예견하였네 / 벼슬은 잃었으나 반드시 나라에서 다시 찾아오게 되리니 (我詩先有讖 / 落職果重尋).’

과연 임 처사와 그의 도당도 나라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터무니없다 여겼던 것들을 실제로 이루면서, 지금껏 성현의 말씀을 받든다 말했던 사내들이 일구지 못했던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사임당 신씨는 조금 더 믿어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청석골 아랫말에 도달하자 곧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 현철(賢哲)한 자를 종친 가운데서 뽑아 대대로 이어나가겠다 했느냐?”

“그렇습니다. 그리하였다면 어찌 당고의 화(黨錮之禍, 당고의 금)가 있었겠습니까? 환관도, 외척도 전횡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동한(東漢, 후한)이 오래 이어졌을 것입니다.”

“하면 이것은 어떻겠느냐! 슬픔이 불시에 닥치느니, 후계로 정한 이가 모두 죽고 남은 황족은 단 하나뿐. 그리하여 영제(靈帝)가 그대로 사위(嗣位)하게 되었다.”

“크윽, 이런 법이 어딨습니까?”

“모든 것을 의심하기로 하지 않았더냐. 정해진 법이란, 정해진 법이 없다는 것밖에 없다.”

마당에서 불렀는데 돌아오는 소리가 없기에 방문을 열었더니, 어른 하나와 아이 하나가, 지도 하나를 펼쳐두고 – 중원의 지도인 듯했다 – 그 위에서 나무 말 여럿을 여기저기 옮기며 장난치는 꼴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 어지럽게 널린 서책이 아니라면 정말 장난이라 하여도 믿었을 테다. 아들이 저렇게 진지하게 지도에 빠져서 고민하는 모양새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무어라 목소리를 높였을 터.

어려서부터 서책을 읽을 때도 항상 시시하다며 다른 일을 하던 아들이었기에, 저렇게 골똘히 한 군데를 노려보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때, 엉뚱한 사람이 고개를 내밀었다. 임 처사였다.

“아니, 기껏 구들 데워놓았는데 언놈이 문을 열어놓... 엥, 신씨 부인 아니오? 여기는 무슨 일로?”

“좋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청류당(淸流黨)을 어떻게든 끌어모아... 헛! 어머님?”

“흠흠, 부인. 무슨 일이신지요?”

기가 차서 내외 법도는 잠시 잊고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사형, 그냥 계속 하시오. 부인께서 영특한 셋째아들이 공부를 어찌 하고 있나 궁금하셔서 오셨구만. 나도 이게 어디로 갈지 궁금하단 말이오.”

“그보다는 대체 이게 무슨 꼴... 아니, 흠흠, 어떤 공부인지가 궁금하군요.”

“우리 스승님께서는 이보다도 더 대단한 방식으로 스스로 학문도 이루셨다 하오. 글자 하나를 벽에 붙여두고 열흘 넘게 골똘히 그 생각만 하셨다는데, 이건 그것을 조금 바꾼 것뿐이외다.

나라 다스리는 방도로 무엇이 좋을까, 상고(上古) 때부터 역사를 되짚어가며 고민하는 것이지. 한 사람은 옛 폐단을 벗어나고자 방법을 고안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을 파훼할 길을 마구 만들어서 막는 것이오.”

“이놈아, 왜 네가 내 대신 설명을 하고 있느냐.”

그제야 의관을 바로잡은 이지함이 일어나 임 처사의 말을 끊었다.

그러나 그 설명하는 바를 들어보니 임 처사가 대충 떠든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실 맨 처음은 이러하였다.

그들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 예가 있는가, 옛 일을 두루 상고하여 취할만한 것을 찾자는 데서 시작했다. 『예기』에서 말하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은 과연 이루어진 적이 있는가? 비슷한 예 하나 없겠는가?

그러다가 하나씩 더 바라는 것이 추가되었다.

이지함은 선비가 화를 당하지 않는 나라가 되기를 바랐고, 이이는 아직 어린 자신이 다 장성한 뒤를 생각하며 선대에 정해진 법을 후대에 뒤탈없이 바꿀 수 있는 나라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다 보니 저들끼리도 부딪히고, 한 사람이 좋다고 여기는 가공의 제도가 다른 사람 눈에는 결점투성이일 때가 있었다.

그러던 중, 그냥 책만 펼쳐두고 질정(質正)하는 제자와 가르치는 스승 모양새를 따라하던 것이, 겨울이 되어 일 없던 꺽정이가 종종 쳐들어오면서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옆에서 계속 딴지를 걸면서, 제나라 환공(桓公)이 그냥 관중(管仲)을 죽여버렸다면 온 중원이 오랑캐 땅이 되었을 테니 선비고 뭣이고 없는 세상 되지 않았겠냐고 하지를 않나, 이 선비 대신 저 탁발(拓拔) 씨의 선비족이 계속 중원에 있었더라면 유학 대신 불법(佛法)이 더욱 흥성하지 않았겠느냐 등등.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지도를 펼치고, 그 위에 이것저것 나무 말을 가져다 표시를 하다 보니 어느새 이지함도 재미가 붙고 이이는 숫제 떨어질 생각을 안 하게 되었던 것이다.

“... 그렇게 해서, 지금은 다시 동한 말로 돌아와 있습니다.”

“어찌 규중의 여인으로서 바깥의 일을 함부로 말하겠습니까. 하물며 스승이 제자를 가르침은 더욱 거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들이 이처럼 스승을 구하여 배움을 즐기니, 그 모양이 조금 특이하다 한들 무슨 흠이 더 될까요.”

예의 그 화법은 그대로라, ‘아들 녀석이 재미를 붙이지만 않았어도 진작에 난리를 냈을 것이다.’라는 뜻이 전해져 푸근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지함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마침 임 처사도 여기에 있으니 호기(好機)에 찾아왔다 하겠습니다. 귀중한 배움이 오가는 것을 가로막아서는 안 될 터이니, 이만 물러가고자 하는데 임 처사도 그러시리라 믿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성정 독특한 아들을 가르치느라 고생 많다고 공치사하면서, 혹 아들의 스승 되기에 인품이나 재주가 부족하다면 은근히 핑계를 만들어 빼낼 생각이었다. 역모라는 한없이 위험한 일에 어린 아들이 곁으로나마 엮이게 되었으니, 속된 말로 그만한 값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그저 어련히 잘 될 것이라 믿고서 멀리 떨어지는 쪽이 겨우 가라앉은 저의 심화(心火)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리라 여기게 되었으므로 물러날 뿐이었다.

임 처사도 저의 말을 듣고서 순순히 따라나왔다.

문을 닫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안쪽에서는 통상의 글 읽는 소리 대신 ‘그렇다면 동탁이 나타나면 어떻겠느냐?’ 같은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 무슨 일이시오?”

임 처사 입에서 올바른 공대 듣기가 어려움을 진작 깨달은 사임당이었다. 심지어 저에게 그렇게 눌려있을 때에도 공손함은 멀리 버려두었으니, 지금은 어떻겠는가. 그러니 자신이 그에 맞추어 반공대만 할 뿐이었다.

“내 지난 몇 달간 봉산에 머물면서, 군정(郡政)의 향방을 살피며 그대들의 앞날이 어찌 될지를 생각해보았소. 자칫 일가에 큰 위해가 될 수 있으니, 어찌 살얼음 밟듯 조심히 살피지 않을까.”

“사저한테서도 얘기는 들었소. 검 휘두르는 법을 배우고 계신다고...”

일일이 대꾸하는 대신 곧장 본론에 들어갔다.

“그대들의 이 당은 아직 부족함이 많소. 이대로라면 몇 년 내로 큰 위태함에 처할 텐데, 그대들이야 그 전에 미리 대계를 이루겠노라 여기며 억지로 괜찮다고 할 지 모르나, 이 사람으로서는 좌시할 수 없는 것이외다.

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자잘한 미진함이 적지 않소. 보기에 마음이 아플 정도인 그 ‘의’자 완장의 생김새부터 시작하여...”

“허나 정말로 우리 의민당이 마뜩잖다 여겼다면 이런 말씀도 아니 하실 것 아니오?”

이럴 때만 정곡을 찌르는 임 처사였다.

“후, 그 말대로요. 우선 그때 말한 대로 가산을 조금 덜어 봉산으로 옮기겠소. 그대들의 이 ‘당’이 여느 역당이나 적당(賊黨)과는 다르고, 오히려 백성을 널리 이롭게 할 수도 있다 여기기에 이리 마음 정한 것이오.”

그러자 임 처사 반색하며,

“하하, 그냥 그렇게 말씀하시면 될 것을 무얼 그리 길게 늘어놓으시오? 우리와 함께하시겠다 하시니 참으로 기쁘고 즐거울 뿐이외다. 이리 되었으니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드셔서 마저 말씀하십시다.”

하고서는, 정말로 저의 팔을 잡아끌 기세로 다가왔다. 빗대어 하는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같은 방안에 앉아 얘기 나눌 심산인 듯하여 절로 몸을 한 발 뺐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규방 법도가 있는데...”

“그리 따지면 규방 규수께서 이렇게 홑몸으로 멀리 나와계시는 것도 법도에는 아니 맞지 않소? 그리고 우리는 이제 같은 도당(盜黨)의 사람들 아니오? 본디 도적들 사이에는 내외가 없는 법이외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결국 사임당 신씨도 섬돌을 밟고 올라섰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서 꺽정이가 사람을 모으니, 이미 있던 이지함은 그대로 따라오고, 방납 대행으로 꽤 쏠쏠한 벌이를 하여 내년에는 그 늘어난 밑천으로 또 어떤 장사 – 보는 눈이 협소한 작자들에게는 비리 – 를 벌일까 고민 중이던 서림이도 멋모르고 끌려왔다.

“임 당수, 무슨 일이기에, 어이쿠.”

“흠흠, 서 별감, 그간 별고 없었는가.”

“이것 참. 방을 잘못 들어왔습니다요, 헤헤.”

서림이는 문을 열자마자 대경실색하여 도로 나가려 했다.

임 처사가 당수(黨首)라면 저는 그 아래 별감(別監)이라며 홀로 만든 호칭을 멋대로 쓰고 있던 서림이었는데, 그 호칭대로 불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림이가 도망하려 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 (딴에는 곰살맞게 건넨) 인삿말 한 사람이 사임당 신씨였기 때문이었다.

“사임당 마님께서 강릉에서 처분하여 우리 밑천으로 대어 주시기로 한 가산도 적지 않거니와, 우리 당의 든든한 뒷배인 동헌을 대신하여 이렇게 나오신 것이니 서림이 그대도 걱정 말고 와서 앉으시오. 이런 자리에서까지 설마 ‘덕담’을 해주시지는 않겠지. 아마도.”

그 ‘아마도’가 퍽 미덥지 못했지만, 같은 방에 다른 집 여인이 있음을 가장 불편하게 여겨야 할 이지함조차, 눈짓으로 ‘사정이 있으니 그냥 참으라’ 하고 있었으므로 결국 군말 않고 방 안으로 다시 들어오는 서림이었다.

결국 조심스레 앉기는 앉았으나, 어쩌다 상석에 앉으신 마나님과의 사이에 꺽정이 떡대를 두고 절묘한 곳을 찾아서 앉았다.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이라. 한숨 한 번 푹 쉬고 사임당 신씨가 말을 꺼냈다.

“내 한 사람의 부인이 아니라 이 무리에 가산을 보탠 이로써, 또 여기에 깊게 얽혀 흥망을 함께하게 된 집안의 사람으로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소. 지금 이 무리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조정과 연이 없다는 것이오.”

“그, 말씀 꺼내자마자 무안한 이야기지만, 우리 당은 조정과 연이 없어야 더 좋은 것 아니겠소?”

“흠흠, 임 당수, 지금 부인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마 조정에서 우리를 미리 쳐내려 할 때의 대비를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 일로 말하자면, 이번에 토산물 진상하면서 한양의 여러 서리와 녹사(錄事) 등등과 말을 터놓았으니 걱정할 것이 못 됩니다.”

입 근질거린 서림이가 기껏 숨은 보람도 없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내 뜻은 그것이 아니오. 물론 그런 이들과 소식 주고받음도 마땅한 소용이 있을 것이오. 허나 나는 이 당이 소소한 도적의 모임이 아니라 장차 세상을 이롭게 하고, 보다 작게는 내 아들이 마음껏 재주 펼칠 수 있도록 기반 꾸리는 그런 당이 되기를 바라고 있소.

그러나 이를 바라지 않는 무리가 한양에 적지 않아, 당을 모함하여 없는 허물은 만들고 있는 허물은 들쳐낼 것인데, 그때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한양과 산림에 고루 이 당의 대의를  알리고 지지를 얻어내야 하는 것이오.”

잠깐 고민하던 꺽정이가 퍽 쉬운 것인 양 답을 내놓았다.

“그런 이들과 인연이 없다면, 이제라도 만들면 될 일 아니겠소? 이왕이면 여기 계신 사형처럼 억지 죄를 받아서 잠시 몸을 물린 그런 이들을 찾으면 되겠지. 그러면 남의 이목 신경쓸 것도 없이 좋지 않겠소?”

“그렇다 한들 어찌 그들과 교유할 수 있겠느냐? 윤원형과 그 일당이 비록 간사하기는 하지만, 나름의 재주가 있기에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눈 밖에 나서 멀리 유배를 가는 이라면, 반드시 그곳 현지의 수령을 부려 저들의 이목으로 쓰려 할 터.”

어느새 옆에 부인 계신 것도 신경을 아니 쓰게 된 – 필사적으로 옆에 남의 집 여인이 없다고 스스로 암시를 건 덕이었다 – 이지함이 바로 반박했는데, 나오는 답은 한 술 더 떴다.

“하면 가는 길에 잠시 귀를 빌리면 되지 않겠소? 이왕이면 사람을 통채로 빌려오면 되겠지.”

기가 찬 신사임당이 끼어들었다.

“이보시오, 임 당수, 남의 귀한 아들을 붙잡아온 것으로 족하지 않소?”

“염려 마시오. 아무리 내 배움이 깊지 못하지만 나라의 높은 분 몸이 귀함은 알고 있소. 돌려보낼 때는 멀쩡히 돌려보내려 힘써보리다.”

‘누가 도적놈 아니랄까봐...’라는 말을 삼키며 사임당은 혀를 끌끌 찼고, 그 도적놈들과 함께 묶여 혀 차임을 당하게 된 이지함 홀로 억울하게 여겼다.

그리고 권신 이기를 탄핵하려다가 도리어 탄핵당하여 영월 산속으로 유배를 가게 된 이언적(李彦迪)은 저를 두고 이런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청석골 산자락에서 오가고 있음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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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기생에 대한 여러 이미지와 실제 기생들의 삶 사이에 격차가 있었음은 잘 알려져 있는데, 특히 관기들의 경우 그 정도가 심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기생의 육성과 유지에 드는 비용이 대부분의 지방 관아에서 감당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는 데 있었지요. 그 결과 관기들은 많은 경우 박봉에 시달려야 했고, 생활에 필요한 수입은 별도로 기방을 운영하거나 상업에 종사하는 식으로 충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게 되면 이것이 사실상 양성화되어, 일종의 부역 개념으로 행사가 있을 때 동원할 뿐 그 외에는 자유롭게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는 행태가 보편화되었습니다. 반대급부로 지방 관아 관기들의 재능과 자색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지요. 기생의 딸이지만 엄밀히 말해 기생은 아니었던 성춘향과 변학도 사이의 갈등을 담은 『춘향전』의 서사가 조선 후기에 무리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데는, 이처럼 일종의 부역을 짊어진 동시에 능력껏 그런 부역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중적인 관기의 존재양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P 모 社의 역사 게임을 연상케 하는 이지함과 이이의 기묘한 사고실험에서 언급된 당고의 옥사란, 후한 말 발생한 숙청사건인 당고의 금을 말합니다. 외척과 환관의 대립으로 점차 엉망이 되어가던 후한 중앙정치가 기능부전에 빠져들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으로 평가받는 당고의 금은, 유학을 바탕으로 환관의 전횡을 비판하던 사대부 세력을 환관들이 두 차례에 걸쳐 대대적으로 탄압하면서 발생했습니다.

물론 당시의 사대부 세력은 송·명이나 조선의 사대부와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중앙에 진출한 지방 호족세력에 가까웠으나, 조선 사대부들은 이를 환관과 소인들이 작당하여 선비를 탄압한 사건으로 해석하곤 했습니다. 그 이후 후한의 몰락이 가속되며 『삼국지연의』로 유명해진 난세가 열렸으니, 아전인수라고는 해도 설득력이 충분히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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