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31화 (31/259)

11. 군신유의 (2)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으로, 김대의 고발에는 의외로 진실이 많이 담겨 있었다.

그가 의민당 죄상을 폭로하며 서두 떼기를,

“무릇 수령방백과 군현 백성의 사이는 곧 군신(君臣)과 같으니, 수령이 지존의 뜻을 받들고 나아가 풍속을 교화하고 백성을 기르는 도를 펼침은 모두 이를 기틀로 삼습니다.

(...) 아아, 그러나 저 의민당은 수령을 우롱하고 군현의 일을 모두 제멋대로 하고 있으니, 그 죄는 이미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를 어그러뜨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미 적당(賊黨)의 고질이 깊어졌으니 이를 어찌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면서 주르륵 나열한 바, 의민당은 참으로 완악하여 관의 창고를 저들의 것처럼 쓰고, 향리들과 결탁하고서는 방납과 대립의 일을 마음대로 하여 국법(國法)을 우습게 만들고 있으며, 나라에서 허여해준 서책 외에도 온갖 물품을 들여와 파는데 간혹 요양(遼陽)이나 산동에서 들어온 물산도 있다는 풍문이 있고, 거기에 더불어 장시를 오가는 상인들에게 저들 마음대로 세까지 받는다 하였다.

저 죄목들 중 하나도 사실 아닌 것이 없었으므로, 어지간히 낯이 두꺼운 자가 아니고서야 저게 무슨 죄가 되냐고 항변할지언정 어찌 거짓을 말하느냐고 따지고들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봉산군수 이원수를 필두로 평산·재령·서흥·안악 고을의 수령들, 그리고 금교찰방까지 연명으로 그에 반박하는 상소가 올라왔으니, 한 도의 수령끼리 상소로써 조정에서 다투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이 또한 이원수가 군수로 부임하여 세운 업적이라 할 만했다.)

그 소에 이르기를,

“무릇 군신(君臣)의 일이란 사람을 얻는 데 달려 있으며, 미미하고 진폐(陳弊)된 일개 군현이라 할지라도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전조의 폐단을 일소할 때,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부민(部民)이 수령을 고소하는 것을 막으면서도 끝내 유향소(留鄕所)는 남겨 수령을 보좌하게끔 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흉년이 널리 들어 백성은 유랑하고 관의 창고는 비었을 때, 저들 의민당이 일어나 한마음 한몸으로 수령을 도와 민생을 보살폈으니, 이는 이미 나라에서도 그 뜻을 기특히 여기어 포장한 바 있습니다.

아아, 참으로 비통합니다! 산야의 어진 선비와 선량한 백성이 모여 이렇게 스스로 풍속을 교화하고 바른 일을 권면하는데, 이웃 고을 수령은 이를 본받지 않고 오히려 무함하는 말을 꾸며내 헐뜯고 있습니다. 이에 신 등은 엎드려 바른 처결을 기다릴 따름이오나, 바라건대 다음과 같은 정황을 감안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면서 구구절절 변명하는 말이 이어졌다.

예컨대 관의 창고를 사사로이 쓴다는 것은, 그저 곡식과 포목 옮기는 일을 도왔을 뿐이었다고 항변하였다. 그 곡식과 포목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았으므로 거짓말은 아니었다.

방납과 대립은 모두 백성들끼리 힘을 합쳐 더욱 좋은 토산품을 진상하고 저들 사이에서 군역을 균등하게 하려 한 일을 모함한 것이라 둘러대었다. 마치 한양에서 직접 사들인 것처럼 품질 좋은 진상품, 그리고 내일 외침(外侵)이 있더라도 믿고 의지할 수 있을 만큼 정비된 산성 등은 모두 이를 입증하는 근거였다.

장시 거쳐가는 상인들에게 세를 받는다는 것 또한 무고로, 그저 의민당 대의에 감동한 상인들이 스스로 조금씩 내어놓는다는 것이었다. 만일 의민당이 진실로 도적이라면 그것보다 더 많이 받아내어, 마침내 금교도 오가는 상행이 끊어지고야 말았을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면서 은근히, 대체 어떻게 말업(末業)인 장삿일에 우봉현감 김대가 그리 밝은지 그것이야말로 수상하다고도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산동과 요양에서 대국 물산을 몰래 들여온다는 것 역시 새빨간 거짓으로, 간혹 ‘우연히’ 서책과 함께 섞여 들어오는 물품이 있을지언정 그들 고을에 사사롭게 쟁여둔 것은 전혀 없다 하였다.

의민당으로 함께 뭉친 고을 수령들끼리 작당하여, 서책 사러 요양 가는 김절을 통해 조정 권신들에게 뇌물로 바칠 물건들을 공동으로 사들이곤 했으므로 – 의주와 평양을 거치지 않으므로 그 값이 몇 곱절은 헐하였다 – 가끔 ‘실수로’ 서책 대신 다른 귀한 물건이 들어오는 일은 있었지만 그 현 소재지를 보면 모두 한양 어딘가의 창고에 있을 터였다.

이처럼 말이 교묘하니, 모든 진상을 훤히 들여다보는 식자가 있다면 기군망상(欺君罔上)이 극에 달하여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지경이 되었다 한탄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일이 참으로 이상하게 되었소.”

기군망상과 지록위마를 모두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윤원형이 혀를 찼다.

“분명 지난날 그 의민당에게 소소한 포장 내린 일을 두고 대간(臺諫, 사헌부·사간원)에서 트집을 잡을 줄 알았건만, 이렇게 풀려나갈 줄이야.”

“자전(慈殿)의 뜻조차 분명치 않으니 의외는 의외더군요.”

옆에 앉아 함께 가을 하늘을 보던 정난정이 평했다.

어느새 계절도 가을 초입. 아침부터 거세게 내리던 비는 반나절 소나기로 그치고 청명한 가을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초여름에 시작된 논쟁이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질 줄 어찌 알았겠는가.

처음에는 그때 단양에서 이언적을 만나려 한 것이 의민당이었음을 두리손이 밝힌 것을 토대로, 언관들이 곧장 의민당을 옹호하고 나서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지금은 양비론을 내세우며, 우봉현감 김대만큼이나 의민당 당수 임거정도 잘못이 있고, 설령 의민당이 공적이 있다 한들 그 정도를 넘어서지 않도록 규제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고 떠들고 있었다.

만약 의민당이 의탁할 곳을 찾아 저들 사림에게 찾아갔다면, 대놓고 의민당 편을 들지는 않더라도 지금보다는 훨씬 임거정에게 유리한 논변을 내어놓고 있어야 할 터였다.

반대로 의민당과 사림 사이에 사실 별다른 연이 없다면, 이전에 의민당에게 포상 내린 것이 소윤의 사람들이었고, 더구나 의민당 옹호하는 상소를 올린 이원수는 윤원형 다음가는 자리에 있는 이기의 종질이므로 마땅히 지금보다 훨씬 강경하게 탄핵을 주도하고 있어야 할 터였다.

더욱 이상한 것은 분명 윤원형 저의 편이어야 할 이기와 대비전의 동향이었다.

“풍성부원군(이기) 댁에 있는 여인들이 떠들기로는, 의민당 터전이 바로 봉산이니, 의민당을 고변한 것은 곧 자신의 문중을 공박한 것이라고 풍성부원군께서 이를 갈고 계신다 하더군요.”

“자전께서도 이렇게 논쟁 벌어지는 것 자체가 아름답지 못하다고 내게 이르셨으니 기이한 일이오.”

의주와 평양을 거치지 않고 대국에서 바로 들여온 보화들이 이기 눈앞에 진상되니, 그 물건들의 본디 값어치는 모르고 오직 한양에서 거래될 때의 값으로만 헤아리는 이기는 저의 종질 이원수가 사람의 도리를 알아 당숙을 잘 모신다며 흡족해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원수 뒤에 이기 있다고 지레짐작하고서 의민당 뒷돈 흔쾌히 받은 해주 감영에서도 고하기를, 봉산 군민들은 그 수령을 참으로 아끼고 친하게 여겨, 마치 같은 집안의 어르신처럼 모신다 하였다. (종종 길거리에서 만나 격의 없이 인사도 올리고, 또 술판이나 노름판 함께하기도 하므로 이 또한 거짓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디 현감 따위가 의민당을 빌미삼아 그런 기특한 종질을 모욕하니, 반드시 그 뒤에 누군가 있어 저의 문중을 싸잡아 공격하는 것이라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본디 이런 일에는 큰 관심이 없고 오직 내수사 살림 늘리고 불사 벌이는 데만 생각 많던 윤원형의 누이 대비조차, 이번 가을에 능묘 옮기는 일에 황해도 장정들이 오기로 하였는데 이처럼 민심 어지러워서 되겠느냐며 언짢은 기색을 내보였다.

대비가 근래 가까이 지내는 그 병해라는 중을 봉은사에서 만나고 온 뒤 그런 말을 꺼내는 것이 더욱 의심스러웠다.

“그 의민당이라는 자들이 풍성부원군이나 자전께도 무언가 말씀을 올렸을 리는 없겠지요?”

“그렇소. 어찌 되었든 그들은 황해도의 몇몇 고을에서 겨우 이름 날리는 정도요. 적어도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그렇지.”

그러나 ‘지금까지 밝혀진 바’라는 것이 문제였다.

당장 우봉현감 김대의 뒤에 누가 있어 일을 크게 벌였는지조차 확실치 않았다.

윤원형과 같은 공신들(소윤) 사이에서 벌어진 다툼이라기에는, 그런 일을 벌일 만한 사람이 딱히 없었다. 끽해야 이기와 사이 틀어진 허자(許磁) 정도일 텐데, 그 온건한 성품을 생각하면 결코 이런 수를 부리지는 않을 터.

또한 윤원형이 봉산에 보내둔 이들 중 그 누구도 돌아와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분명 의민당도 나름의 꿍꿍이가 있을 것이련만 이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저들은 대체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인가?

윤원형 그를 상대할 만한 이라면 누구든 모셔와 좌장으로 세우려 할 저 사림의 잔당들조차 완전히 비호하지 못하고, 반대로 윤원형 그도 모르는 사이에 누이 대비와 이기에게 연통을 넣을 정도라면, 다른 것은 몰라도 한 가지만은 명백하였다.

“처음부터 이리 될 것을 뜻하여 마침내 이루었다면 반드시 비상한 무리이겠지요. 마땅히 준비하여야 하지 않겠어요?”

“그대 생각이 나와 같소. 그러나 드러난 바가 아직 없으니 준비한다 한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까?”

“무릇 일이란 한 번 발단이 있으면 또 반드시 한 번은 매듭지어야 할 때가 오기 마련이지요.”

“그래, 그때 저들이 움직여 스스로 모습 드러내기를 기다릴 수밖에. 허나 마음에는 맞지 않는구려.”

얼마 지나지 않아 의민당 당수 임거정이 상경하여 저의 무고함을 직접 아뢰겠다 하였다는 소식이 봉산군수를 통해 한양으로 올라왔다.

저의 편으로 회유를 하든, 떠보면서 그 사람됨을 살피든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윤원형은 속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또한, 여차하면 한양에 머물던 중 임 처사가 급병으로 쓰러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봉산군수 이원수와 우봉현감 김대가 같은 날 치계(馳啓, 급히 보고함)한  바가 한양에 당도하였으니, 윤원형은 급히 새로운 계획을 짜야만 하는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우봉현감 김대는 아뢰기를, 의민당 임거정의 무리가 한양으로 올라가겠다며 우봉 경내를 지나고 있는데, 그 수는 오백에 달하며 기세는 지극히 흉험하다 하였다.

또한 봉산군수 이원수는 아뢰기를, 의민당 임거정이 스스로 결백함을 밝히고자 상경하는데, 마침 능침 옮기는 일로 상경하는 인정(人丁, 장정)들과 함께 가고 있으니 주변 고을에 널리 알려 오인하는 일이 없도록 하게 하여달라 청하였다.

저벅저벅 걸어가는 행렬 맨 앞에는 쌍가마 한 채와 노비 수십, 그리고 마치 그 옆을 지키듯 성큼성큼 발걸음하는 처사 하나가 있었다.

또한 그 옆에는 영락없는 아전 하나가 영 불편하게 조랑말 타고서 따라가고 있었으니, 바로 의민당 우두머리 꺽정이와 그 아래 서림, 그리고 사임당 신씨였다.

서림은 어디까지나 능묘 옮기는 일에 장정들 이끌고 가는 중이었으며, 신씨는 마침 가는 길에 시댁 들려서 인사나 하고 올 생각 – 그리고 조만간 대계를 추진하는 데 혹여 발목 잡힐 일 없도록 정리하고 올 생각 – 으로 따라왔다.

“처음부터 이럴 뜻이었소?”

가마 안쪽에서 슬쩍 발(簾) 걷고서 신씨가 꺽정이에게 물었다.

“그럴 리 있겠소? 우리 모주님이 암만 대단하시다지만 여기 봉산 앉아서 한양 도성 사정 훤히 보는 천리안 재주는 없소. 그냥 그때그때 변통하다 보니 이렇게까지 된 것이오.”

처음 뜻하였던 바는, 의민당을 때려잡는 데 거창한 명분이 필요할 수밖에 없도록 판을 키우는 것이었다. 윤원형의 문객 몇몇이 사라진 정도로는 일을 꾸밀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트집 잡힐 만한 사안들을 미리 골라 그럴듯한 호구 하나로 하여금 고발하게 하고, 이원수를 부려 그에 반박하게끔 하면, 이미 이언적을 통해 의민당 소식을 곁가지로나마 들었을 도성의 언관들은 제 입으로 이원수 편을 들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리 여기고서 이지함은 일을 꾸몄는데, 삼사의 사림들이 저들의 그 곧은 뜻대로 꼬장을 부리면서 문제가 생겼다.

우봉현감 김대도 잘못이 있으나 의민당 또한 저들 분수를 모르고 날뛰었다고 하는데, 그 어조가 한 달 넘게 그대로 이어졌으므로, 사림의 의중이 결코 의민당 뜻대로 놀아나지 않겠다는 데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 대신 병해를 통하여 자전을 움직이고자 했는데, 마침 그때 기대하지도 않았던 이기도 제 발로 움직여 이원수를 두둔하고 나섰다.

“그저 이렇게 일이 막혀 시일만 헛되이 보내고 있으니, 이 틈을 타서 확연히 우리 당이 세력 있음을 보이는 것이지. 출발할 때 모주가 밝힌 대로, 윤원형이가 우리를 치려 할 때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게끔 허장성세를 거하게 부리는 것이외다.”

그리고 그 준비를 하는 시일 하루하루는, 윤원형보다 나날이 덩치 불려나가는 의민당에게 훨씬 값질 것이었다.

당장 이렇게 무리를 거느리고 내려가는 것부터가 의민당 졸개들에게는 귀중한 훈련이 될 터. 부름이 있을 때 빠르게 보이고, 식량을 준비하여 나르고, 대열 갖추어 한 번에 움직이는 것. 멋모르고 따라오는 장정들이라면 모를까, 꺽정이 그가 직접 부릴 장래의 군졸들에게는 꼭 필요한 배움이었다.

“이 사람 걱정하는 바는 거기에 있지 않소.”

그러나 여전히 신씨는 무언가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대들은 서원군 한 사람을 보고 움직이지만, 모든 일에는 뜻하지 않게 얽히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오. 강릉이나 봉산 한 고을만 해도 그리할진대, 이번에는 도성까지 상경하게 되었으니 반드시 당수도, 모주도 생각지 못한 일이 덩달아 벌어지리라 보오.

그에 대비가 되어 있는가, 그것이 궁금할 뿐이오.”

저의 얼굴 알아보는 자 있을까 두려워 이지함은 따라오지 못하였는데, 바로 그 점을 사임당은 꼬집는 것이었다.

옛날 같았다면야 저를 낮추어보냐며 발끈하였겠지만, 이미 그럴만한 때는 한참 지난 꺽정이었으므로 씩 웃으며 신씨를 안심시켰다.

“생각지 못한 일에 어찌 모두 대비하겠소? 그저 그때그때 대응하다가 빠져나오는 것이지. 물론 여차하면 몸 빼돌려 우리 당이나 도련님께 화 미치지 않게 할 만큼은 미리 얘기 들어두었으니 너무 못 미덥게 생각지는 마시오.”

“지금 올라가는 이들의 태반은 본디 능묘 옮기는 일 때문에 상경하려던 이들이었습니다. 다만 며칠 일찍 움직이고 사람이 조금 더 붙었을 뿐이지요. 명분이 이러하니 누가 우리를 함부로 해치거나 겁박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서림이가 깍듯한 말투로 첨언하였다.

“알겠소. 그대들이 더 잘 알 터이니 이 사람은 그러면 말을 삼가도록 하겠소.”

여전히 말 한 마디 할 때마다 가시를 담아 말하는 사임당 신씨였다.

과연 그 가시에 찔린 서림이가 말 위에서 움찔하는 것이 보여, 꺽정이 홀로 웃었다.

“당장 저 우봉현감만 하더라도 우리 길을 막기는커녕 무서워서 동헌에 꽁꽁 숨었다지 않았소? 그 이후로 여기까지 오면서 구경하는 사람은 있어도 길 막는 이 없었소.

그러니 걱정 마시오. 너무 걱정해도 몸에는 아니 좋소이다. 우리 부인께서도 이제 연세가 연세인데.”

꺽정이가 사족 붙여 신씨 나이를 말하니, 한 마디 지지 않는 신씨의 대꾸가 따라붙었다.

“당수 사저라는 황씨도 나이 마흔 넘었건만 아직 여염집 스무 살 규수보다 몸놀림에 맵시가 있지 않소? 이 사람도 그이 따라서 이것저것 재주 배우다 보니 몇 살은 젊어진 느낌이오.”

“군수 나리만 불쌍... 헙!”

옆에서 저도 모르게 깐죽대던 서림이가 뻔히 신씨 옆에 계심을 뒤늦게 떠올리고서 말을 급히 끊었다.

“당수님! 동파역(東坡驛)이 보입니다!”

때마침 앞장서서 가던 밤이가 달려와 고하였기에 서림이는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네 눈에 보이는 것이 내 눈엔들 아니 보이겠냐? 얼른 달려가서 배나 마련해두어라. 우리 모두 건너려면 족히 한나절은 걸릴 테니.”

퉁명스러운 꺽정이의 대답대로, 고갯길 바로 코앞에 동파역, 그리고 임진강 건너는 나루가 모두 보였다.

밤이가 또 쪼르르 달려가는 것을 보면서, 신씨가 가볍게 한 마디 덧붙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있구려.”

“무엇이 또 아쉬우시오?”

“이왕 이렇게 뭉쳐서 상경하는 것이라면 옷의 빛깔도 맞춤이 가당할 터인데. 예컨대 저 장정들이 모두 검은색 적삼을 입고 있다고 생각해 보시오. 지금 돌이켜보면 황토색도 나쁘진 않을 듯하고.”

덩달아 머릿속으로 그려보던 꺽정이와 서림 모두 고개를 저었다.

“딱히 어째서라고 짚지는 못하겠는데, 내 생각에는 별로요.”

“멋이야 있을지 몰라도, 거기에 들어가는 물력이 너무 클 것입니다.”

“뭐, 서 별감까지 그리 말씀하신다면 이 사람이 무어라 더 말하겠소이까.”

남들 앞에서는 얘기 안 하지만, 서림이가 움찔대는 것을 은근히 즐기는 신씨였다.

그러나 그런 서림조차 저의 본업이라 할 수 있는 재물 출납에 있어서는 저의 소신껏 언행을 하는지라, 여기에 대해서는 신씨도 서림을 나름대로 존중해주고 있었다.

그사이 꺽정이는 신씨 행렬 바로 뒤에 따라오던 졸개들을 불러모았다. 소패두 내지는 곧 소패두로 올리려 점찍어둔 이들이었다.

“자, 이제 임진강 건너서부터는 길을 잘 봐두어라. 조만간 우리가 병장기 들고 가야 할 길이 될 수도 있으니.”

“예, 당수님.”

“아니, 그런데 잠깐.”

그제야 꺽정이 눈에, 사람 수가 꽤 불어난 것이 들어왔다.

그뿐 아니라, 신씨가 진서와 언문으로 쓴 ‘봉산군 의민(義民)’, ‘평산부 의민’, ‘재령군 의민’ 등등 깃발 사이에 딱 보아도 조잡한 솜씨로 그린 ‘강음’, ‘장단’ 등 깃발들이 함께 펄럭이고 있는 것 아닌가.

심지어 개중 ‘백천’ 깃발은, 저의 고을 배천(白川)군 이름도 잘못 적은 것으로 보아 어디 무식쟁이가 만든 듯해 보였다.

“왜 머릿수가 늘어난 것이냐?”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그사이 새색시가 태기가 있어, 집안살림을 위해 또 따라오게 된 최만복이가 재깍 달려나갔다.

곧 돌아온 최만복이가 곧장 고해바쳤다.

“저... 그것이, 당수님께서 서울 올라가서 우봉 원님 모함한 것이 사실 아니라고 소명하신다는 소식을 어디서 듣고는, 저들 억울한 사정도 함께 하소연하겠다고 무작정 따라나섰답니다.”

“아니, 가을걷이가 얼마나 남았다고, 그렇게들 생각없이 따라나온다더냐?”

“그것은 저도 잘...”

이지함도, 꺽정이도 미처 생각 닿지 않은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별반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무지렁이 백성들 마음이었다.

봉산에 꺽정이가 들어온 지 벌써 세 해가 지나, 그 명성 자자하여 나날이 드높아지고 있었으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도적떼를 손수 때려잡지를 않나, 서울의 어리신 나랏님조차 그 공적을 들어 알고 크나큰 상급 – 사실 그리 크지는 않았으나, 백성들이 알 수는 없었다 – 내리시지를 않나.

딱히 농사 짓지도 않는 듯한데 의민당 완장 차고 다니는 이들은 어디선가 먹을 것이 나오고, 심지어 관에서 말로만 챙겨주는 것과는 달리 어쨌든 당장 그들 삶에 도움이 되고 있었으므로, 백성들 눈에 임 처사가 어찌 보였겠는가.

그런 ‘임 처사’께서 한양에 직접 가신다 하였다. 나라의 법으로 백성이 그 수령을 고발하는 것을 막았으니, 이럴 때가 아니고서야 언제 그들의 억울한 사정을 가감없이 나랏님께 고할 수 있겠는가?

“... 그러면 당장 저들 가면서 먹을 것도 우리가 오죽 알아서 잘 해결해주리라 믿고서 따라왔겠구나.”

“그런 듯합니다요.”

이야기 듣고 후다닥 달려온 서림이 얼굴이, 꺽정이의 그 말을 듣고 신씨 앞에 있을 때보다도 더 창백해졌다.

“에휴, 까짓것, 될 대로 되라지.”

마음 같아서야 나 몰라라 하고 그냥 갈 길 가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는 꺽정이였다.

“이왕 이리 된 것, 이대로 데리고 한양 마저 가야지, 어쩌겠느냐. 다만 우리도 사정이 그리 넉넉지는 않으니, 여기 나루에서 기다리면서 정말 빈털털이로 무작정 따라붙은 자들만 솎아내고 가야지.”

나루 반대편에는 어느새 엉성하게 만든 ‘파주’ 깃발 하나가 흩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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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남쪽에 있는 배천군(연백 평야의 그 ‘백’입니다.)은 한자로 ‘白川’이라고 쓰는데, ‘ㄱ’이 탈락해 ‘배천’으로 부르는 것이 굳어졌습니다. 이 현상은 조선시대 언중들 사이에서도 꽤 널리 알려져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매관매직으로 배천 군수로 발령난 다음 자신이 부임한 곳 임지도 제대로 읽지 못해 욕을 당했다는 식의 민담이 꽤 많이 남아 있습니다.

지방관은 군주의 대리자이므로 각 지방의 주민과 지방관 사이에도 군신관계가 성립한다는 주장은 실제 조선 중기 부민고소금지법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에서 종종 나왔던 논리였습니다. 오늘날 시점에서는 악법으로도 보이는 부민고소금지법은, 백성이 그 수령을 중앙에 고발하는 것을 금지하는 데 그 골자가 있었습니다. 다름아닌 세종 연간에 제정된 법이었지요.

이는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강력했던 향촌의 토호들이 지방관의 권위를 무시하는 문제가 있었기에, 그에 대응하여 중앙집권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즉 이름은 ‘부민’이었지만 실제 대상으로 했던 것은 지방의 실권을 장악한 향리 계층이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러한 향리들이 지방의 유력자에서 행정실무자로 영락한 뒤에도 부민고소금지법은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이에 세조 연간에 잠시 폐지되었다가 곧 성종 시기에 유학자(!)들의 건의에 따라 부활하게 되었지요. 이미 그 직후부터 부민고소금지법의 폐단이 인지되고 있었고, 결국 암행어사 파견을 비롯해 다양한 형태로 수령의 권한을 견제하기 위한 방편이 논의되었습니다.

한편, 16세기 조선인들의 적극적인 정치참여의식에 대해서는 참고할 만한 흥미로운 일화 하나가 있습니다.

1560년 4월, 재령군수 이즙(李楫)이 재임 중일 때, 재령 주민 이걸이라는 사람이 궐문 안에 난입하여 이즙의 선정(善政)에 대해 격쟁을 벌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즙이 한창 명종이 윤원형의 대항마로 띄우고 있던 자신의 외삼촌 이량의 형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다분히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사건입니다. 실제로도 당시 명종은 이를 빌미로 이즙에게 포상을 내렸고, 이걸에 대해서도 아무런 처벌을 내리지 않았지요.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일은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에 일어났습니다. 장단부사 박계현이 임기가 만료되어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자, 이걸의 소식을 들었던 장단 주민 김유현이 명종을 시위하는 군사로 변장한 뒤, 궁궐 안으로 들어와 박계현의 선정을 칭송하며 유임을 청하는 내용의 격쟁을 벌인 것입니다.

심지어 군사로 변장했기 때문에 칼도 그대로 차고 있어, 만일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곧장 거기서 대역을 범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는 여러모로 의심스러운 이걸의 경우와는 달리 정말로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벌어진 사건임을 방증하기도 합니다. 잘못하면 역모로 몰리기 딱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이지요. 결국 김유현은 그 의도가 순수했으며 어떤 조직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일개 백성의 ‘단독범행’이었다는 점이 참작되어 죽음은 겨우 면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김유현의 사례를 고려하면, 임 처사 상경에 끼어서 그간 침탈당한 사정을 나랏님께 고하고자 하는 황해도 남부-경기도 북부 일대 주민들의 모습에도 일리가 있다 하겠습니다.

여담으로 이때 궁궐 경호를 담당했던 군사들은 김유현을 체포하기는커녕 둘러싸고 구경만 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는데, 이걸의 일에 윗선의 개입이 있었으므로 김유현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지레짐작한 것은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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