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군신유의 (3)
의민당의 상경 행렬은 한양에 가까워질수록 그 수가 더욱 거세게 불어났다.
파주에서 고양을 지나 덕수원(德水院) 이를 무렵에는 꺽정이는 물론이요 서림도 어림셈할 엄두조차 못 낼 지경이었다.
무악재 넘어갈 무렵 서림이가 문득 걱정 담아 말을 꺼냈다.
“이거 이러다가 정말 큰일이라도 나는 건 아닌가 모르겠소. 이대로라면 도성 당도할 때는 족히 이삼천은 될 텐데.”
“이미 깃발 없이 그냥 우르르 따라오는 무리까지 합치면 삼천은 넘긴 지 오래일 게요. 태반은 그저 이 행렬이 어디까지 가는가 구경하러 따라붙은 자들이겠지만.”
정말 그만한 일로 이 대열에 합류한다는 말인가? 어리둥절한 서림이에게 어느새 옆에 따라붙은 오막손이가 고개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요즘 세상에 정말 우직한 벽창호 농군이라면 모를까, 대개는 열심히 일해본들 도리어 빼앗길 것만 늘어나니 하루 일하면 하루 놀지 않습니까요? 그러니 오늘은 이 행렬 구경으로 하루 허송하자, 그리 마음먹고 따라오는 게지요.”
“그들이야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따라온다 쳐도, 관에서는 그리 믿지 않을 테요. 만에 하나 우리가 불온한 뜻 품고 왔다 여긴다면...”
“불온한 뜻 품고 온 것 맞는데, 뭐 어쩌겠소?”
꺽정이가 낄낄 웃었다.
“그리고 너무 걱정 마시오. 내가 아는 조선국이 맞다면, 그런 일은 없을 게요.”
“이 나라가 그리 백성들을 아꼈소이까?”
“그럴 리가.”
그때 마침 무악재 고갯마루를 넘으니 비로소 도성이 보였다.
“우리 무리가 삼천이면 군사 풀어 해산할 때도 족히 삼백은 있어야 하겠지.”
“그야 그렇겠지만서도...”
“저기 저 성벽 위를 보시오. 그럴 군사가 있나. 해산을 시키고 싶어도 시킬 수 없을 게요.”
그제야 서림 눈에 서대문 문루와 성벽 위에 병졸 몇몇이 당황하여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어차피 도성 정국을 진흙탕에 빠뜨려, 함부로 우리 의민당을 고변하거나 하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게 상경하는 큰 뜻 아니었소? 그러니 이왕 이렇게 머릿수 불어난 것을 어떻게 더 유리하게 써먹을지, 그것을 고심해야겠지.”
뒤늦게 문루 위에서 둥둥 하며 북이 울리고, 급히 서대문이 닫혔다.
그러나 성벽 위에 우르르 올라오는 것은 군사 대신 구경하러 나온 성내 백성들 뿐. 군사들은 백에 하나도 되지 않았다.
안절부절못하는 수문장과 군졸들을 비웃듯, 꺽정이 패거리는 홍제원(弘濟院) 앞을 지나 남대문 쪽으로 크게 돌았다.
“자, 여기서 멈춘다.”
“예, 당수님!”
한껏 의기양양해져 저들 어깨의 의민당 완장을 뽐내고 있던 졸개들이었지만, 지난 몇 달간 몸으로 익힌 꺽정이의 위엄은 그들 정신을 단숨에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곧장 대열 뒤편으로 명이 전해지고, 꺽정이는 서림과 다른 소패두들 데리고서 문루 앞으로 나아갔다.
“수문장 계시오? 거 문 좀 열어주시오. 황해도 봉산에서 먼 길 왔는데 도성 민심이 참 박하구려.”
꺽정이 비아냥에 멋모르는 다른 당원들은 함께 킥킥대고, 물정 아는 서림만 놀랐다.
“임 당수, 그... 말투가...”
꺽정이의 처사 차림이 암만 그럴듯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겉모습만 그럴 뿐. 말 몇 마디만 나누어보아도 어디 변경의 군관이라면 모를까 결코 초야에서 학문 닦는 선비는 아님을 쉬이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 밑천 드러날까 서림이 걱정한 것인데, 곧장 꺽정이가 안심하라면서 전혀 안심되지 않는 말을 했다.
“걱정 마시오. 조정에서 사람 나오면 전할 글월은 제대로 예의 갖춘 문장으로 우리 모주님께서 대신 써주셨으니. 그 외 다른 치들이야 뭐, 나더러 상놈이라 흉을 보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소?”
그제야 문루 위에서 용기 낸 군관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수문장이니 아마 호군(護軍, 정4품)쯤은 될 것이다.
“그대가 벼슬하지 않는 이로서 저처럼 잡배(雜輩) 수천을 이끌고 왔으니, 어찌 나라의 녹을 먹는 군관으로서 들여보낼 수 있겠는가! 지금이라도 경사(京師, 서울)의 위엄을 깨닫고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면 그때는 개문을 품의(稟議, 위에 여쭘)할 것이로되 그리 아니한다면 이 문 또한 결코 열리지 않을 것이다!”
꺽정이 또한 지지 않고 대꾸하였다.
“좋소! 수문(守門)이 그대의 소임이니, 문을 제때 열지 아니하여 벌어지는 모든 일 또한 그대의 잘못이 있는 것이외다! 우리는 문이 열릴 때까지 숭례문 앞을 지킬 것이오!”
문무백관 가운데 그 ‘소임’이라는 말의 무거움 모르는 이들은 없기 마련. 꺽정이가 하필 그 말을 꺼내고 돌아서니 문루 위의 호군도 무어라 더 꾸짖지 못하였다.
등 돌려 행렬 한가운데로 돌아온 꺽정이는 곧장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 뜻했던 대로는 일이 풀리지 않았지만, 오히려 더 잘 되었다고 할 만한 면도 있다. 지금부터 며칠은 꽤 바쁠 테니 너희가 고생을 좀 해야겠다.”
“당수님께서 우리들 조련하시는 것만 하겠습니까요.”
그새를 못 참고 또 한 놈이 헛소리를 했는데, 꺽정이가 눈 한 번 부라리니 곧장 잦아들었다.
“오막손이 너는 언문 깨우친 놈들 데리고서 저기 저 주막 앞에 자리를 차려놓아라. 이왕이면 사람이 올라가서 몇 마디 할 수 있게 단상 비슷하게 하나 꾸려두고.
최만복이는 도적질하던 놈들 데리고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와라. 지금 주변 형세를 잘 눈여겨보면 언제고 써먹을 날이 올 것이다.”
그 ‘써먹을 날’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직 이지함과 서림, 사임당 등을 제하면 아무도 몰랐지만, 패거리 가운데 도적으로 구르다 온 이들은 저들 나름대로 의민당이 결국에는 도적질하려 모인 이들임을 암암리에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러므로 최만복이도 군말 없이 고개 끄덕이고 저의 무리 이끌고 빠져나가고, 오막손이는 곧장 주막 쪽으로 향했다.
“당수, 나도 이래 봬도 별감인데, 대체 뭔 생각 하고서 일을 꾸미시는지 설명은 들어야 되겠소. 계획이 있으면 좀 미리 말씀해주시면 어디 덧나오?”
서림이 뾰족하게 따져 묻자, 꺽정이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계획이란 게 있었으면 진작에 알려주고도 남았지. 이렇게 할 일 없거나 할 말 많은 백성들이 많이 따라붙을 줄 알았겠소? 그리고 우리네 이번 상경이 노리는 바는 변함이 없소.”
“노리는 바라 하면 그때 말했던 허장성세 아니오?”
“그렇지. 처음에 우봉현감 충동질하여 의민당 고변하게끔 일을 꾸몄을 때부터, 오로지 소란 일으켜 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우리들 허장성세를 진실로 믿도록 만드는 것만이 목표였소. 그런데 뜻밖에도 이렇게 수천 백성들이 우리 뒤를 따르게 되었으니 마땅히 써먹어야겠지. 그렇지 않소?”
“그래서 어떻게 저들을 써먹겠다는 것이오? 우리 당원들이야 그렇다 쳐도, 나머지들은 물정 모르는 어중이떠중이들일 텐데.”
“우리야 저들이 어떻게 따라붙었는지를 알지만, 저 성벽 안쪽에 계신 높은 분들은 죄다 깜깜이일 것 아뇨. 그러니 이번에 거하게 한바탕 속여먹을 수 있겠지. 우리 의민당 당세가 이렇게 드높다고.
내 지금 떠올리고 있는 바를 곧 보여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역풍이 불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었으므로, 지금껏 조선국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짓을 기탄없이 벌일 수 있는 꺽정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막손이가 주막 주인을 어떻게 잘 구슬렸는지 평상 하나를 꺼내왔다. 그러고서는 주막 담장에 평상을 올리고, 그 아래에 다른 자잘한 집기 밀어넣어 받치니, 곧장 그럴듯한 단상 하나가 완성되었다.
“요 며칠은 머물면서 써야 할 것 같아, 아예 주막 주인에게 거하게 값을 치렀습죠.”
“잘 했다.”
얼마 치렀는지 들은 서림은 결코 꺽정이의 평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무어라 따지기도 전 오막손이는 쏙 사라졌다.
“에휴, 내 신세야.”
“청석골 아랫말 향리들 사이에서는 주인 노릇 하잖소. 이럴 때는 좀 참으쇼.”
위로인지 아닌지 아리송한 말 건네며 꺽정이가 즉석 단상 위에 올라갔다.
“와아아! 임 당수! 임 당수!”
“임 처사! 의민당 임 처사!”
봉산 일대에서 데려온 이들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바람잡이 노릇을 해 주니, 얼떨떨하게 있던 다른 고을 백성들, 오늘까지는 의민당이고 임 처사고 들어본 적 없던 성저(城底, 성의 바로 바깥쪽) 구경꾼들까지 덩달아 환호하였다.
“먼길 함께 와준 이들도, 가까이서 합세하여준 이들도 모두 고마울 뿐이오.”
솔직히 그렇게 고맙지는 않았지만, 그런 꺽정이 속마음을 백성들은 모르고, 저 행색 그럴듯한 처사께서 저들에게 공대해준다는 점만 깊게 생각할 뿐이었다.
“무릇 천하에 지켜져야 할 도리 다섯이 있으니 그 중 하나가 군신유의(君臣有義)요. 이는 무엇이냐?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의리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오.
그런데 지금 이 의리가 폐함을 당하기 직전까지 왔으니, 우리 당 또한 모함을 당하였고, 지금껏 수많은 백성들이 함께해준 것이 하루아침에 평범한 도적질로 둔갑하게 되었소. 아마 여기 모인 이들은 모두 그러한 억울함이 하나씩 있을 것이외다.”
성저에서 모인 이들 중에는 가난한 선비 한둘쯤 있어, 저 군신유의는 그 뜻이 아니라고 무어라 목소리를 높이려 하였으나, 꺽정이는 그럴 겨를을 주지 않았고, 선비들 주변의 다른 백성들 또한 벼슬도 못하는 만년 유생이라면 눈치라도 챙기고 다니라며 은근히 면박을 주었다.
“그러나 세상에 어디 한쪽만 지키는 의리가 있겠소? 지금 우리가 이렇게 상경하였건만 저기 저 남대문은 매정하게도 열릴 줄을 모르니, 이렇게라도 자리 만들어 통사정할 곳을 꾸려두고자 하오. 여러분이 이 단상 위에 올라와 억울함을 토로한다면, 우리 당의 사연과 함께 저 구중궁궐 안쪽까지 들어가게 될 것이오.
집안도 변변찮고 글도 못 읽는 범상한 백성에게 이런 자리가 얼마나 있겠소? 그러니 다들 집이나 고향 돌아가기 전에 올라와 한 말씀씩 하고 가시기를 청할 뿐이오.”
그러나 이런 자리가 조선국 열리고 얼마나 있었을까.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물론 꺽정이도 예상한 바였으므로, 곧장 아래에서 멍하니 있던 오막손이를 끌고 올라왔다.
“엥, 당수, 저는 별 생각도 없고 딱히 억울한 사정도 없는뎁쇼.”
“이놈아. 너는 어떻게 된 놈이 기회를 눈앞에 두고도 잡지를 못하느냐? 이럴 때가 바로 네녀석이 양민으로 둔갑할 때란 말이다.”
꺽정이가 목청 낮추어 속삭였다.
“저는 원래 양민...”
“시끄럽고, 네녀석도 처음부터 도적질을 하진 않았을 것 아니냐. 정직하게 살려는 시늉 한 번은 했겠지.”
“그런 적도 없는뎁쇼.”
“그냥 남의 탓을 해라, 이 말이다. 어차피 네놈 고향에서 올라온 놈은 주변에 없을 테니.”
그제야 돌아가는 사정을 깨우친 오막손이가 대충 알겠노라 고개 끄덕였다.
그러고서는 목청 높여,
“에헴헴. 음. 이 사람은 의민당에서 일하는 죽산 양민 오막손이라 합니다. 이 사람 억울한 사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정직하게 땅 갈아 먹고살고자 해도 바늘 하나 꽂을 만한 땅이 없어...”
언변 하나는 서림이 다음으로 타고난 놈답게, 한 번 서두를 떼자 그 다음부터는 줄줄 흘러나왔다. 그러다가 또 한 번 막히는 대목이 있었다.
“잘 얘기하다 말고 또 왜 그러느냐?”
“그것이... 바로 옆이 한양 아닙니까요? 제 임기 동안 백성들 부려 저의 농장 만들었던 군수 욕을 하려고 하는데, 혹시나 그 작자가 듣고서 저를 해코지하면 어찌 될지...”
“오. 그거 좋은 물음이다. 그놈은 너를 해코지할 수도 있고 영문 모르고 가만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내 주먹은 바로 지금 네 눈앞에 있고, 이 일 끝나고 봉산 돌아간 뒤에도 마찬가지일 테다. 알겠느냐?”
“아이고, 역시 우리 당수님이십니다요. 쏙쏙 이해가 잘 됩니다.”
꺽정이가 저의 패거리 무섭게 위협할 때면 그래도 나중에 따로 챙겨주는 것 있음을 아는 오막손이가 – 물론 꺽정이 앞에서 그런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만큼의 눈치는 있었다 – 곧장 고개 끄덕이며 저의 옛 군수 욕을 하기 시작했다.
“임 당수, 저 사람 저러다가 국법으로 벌 받는 것 아니오? 부민이 수령 고소하면 곤장이 일백 대에 전가사변(全家徙邊, 일가 전체를 변방으로 강제이주시키는 형벌)이오.”
서림이가 걱정하여 단상 아래에서 말을 걸어왔다.
“도적질하다 걸리면 잘은 몰라도 기본이 모가지 아니오? 이렇게 중인환시 하에 저는 억울한 양민이라고 널리 알리고 있는데, 누가 이 오막손이가 그때 그 도둑놈이라고 생각을 하겠소? 이럴 때 얼굴 팔아두는 게 남는 장사지.
그리고 뭐,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게 되면, 서 별감 그대가 힘을 조금 써서 호적에 장난질 한 번 쳐주면 될 일이오. 죽산 오막손이는 그날부로 병 걸려 객사했다 치고, 봉산에 이름 같은 사람이 갑자기 뿅 하고 나타나면 그만이지.”
그사이 오막손이 어딘가 후련한 표정으로 단상 아래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저부터 얘기하겠다며 앞으로 우르르 몰려나오는 이들이 많아 꺽정이가 직접 나서서 막아야 할 정도였다.
몇 번 힘을 쓴 뒤 주막에 돌아온 꺽정이가 껄껄 웃으며 술 한 병을 시켰다.
“서 별감, 보시오. 이제 일반 백성들까지 저렇게 올라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게 되었지 않소? 그러니 위에서 보면 누가 의민당이고 누가 아닌 줄 어떻게 알겠소? 다들 우리 뜻에 동조하는 무리라고 생각하겠지.
허장성세도 이만하면 나쁘지 않다 해야하지 않겠소?”
“휴, 우리 당수께서 비범한 일 많이 벌이심을 내 모르지 않았으니, 어찌하겠소.”
“재물 벌어들이는 일이라면 나보다도 더 기상천외한 짓을 많이 일으키는 서 별감 아니오? 나더러 비범한 일 많이 벌인다 할 계제는 아닌 것 같소만.”
한 번 더 껄껄 웃으며 술 들이키는 꺽정이를 앞에 두고, 서림은 난데없는 자기반성에 빠지게 되었다.
해가 뉘역뉘역 저물고 있었지만, 모임의 열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모여든 이들이 단상에 하나씩 올라와 저의 수령 욕도 하고, 칭송도 하는데, 한 번에 올라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요 올라가려는 이는 여럿이라 차례 두고 아귀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같은 수령을 두고도 그만하면 선정 펼친 사람이라는 쪽과 그래본들 탐관오리라는 쪽이 갈려 정직하게 주먹으로 옳고 그름을 가리고도 있었는데, 이 모든 싸움박질이 구경꾼을 더욱 늘렸다.
거기에 말 그대로 장안의 화제가 된 오막손이는 이야기꾼 기질이 도져서, 아예 멀찌감치 궤짝 하나 가져다 두고 그 위에 올라서서는 의민당이 황해도에서 도적 때려잡고 다닌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는데, 언제 꼬셨는지 밤이까지 데려가서는 이야기 푸는 값을 받게끔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난리통이면 항상 따라붙는 자들이 바로 장사꾼들이었다.
“엿 사시오! 엿!”
“감복! 감복이 별미요! 임자들 촌구석에서는 맛 못 보는 감복이 여기 있소!”
“방물! 패물! 서울 올라온 길에 안사람들 안겨줄 선물 하나씩 사서 돌아가시오들!”
숭례문을 닫아두었지 돈의문이나 소의문(서소문)은 그대로 열려 있었으므로, 그쪽으로 엿장수들을 비롯한 오만 잡인들이 빠져나와 구경도 하고, 또 장사도 하고, 숭례문 앞을 시장통으로 바꾸어놓고 있었다.
“헤헤, 하나 건졌습죠.”
주전부리 사이에서 싸구려 분갑 하나를 들어보이며 최만복이가 자랑을 했다.
“오냐, 잘했다.”
최만복이가 싸들고 온 주전부리에서 감복 하나를 슬쩍한 꺽정이가 질겅질겅 씹으며 대꾸했다.
“그래, 성벽 구경은 잘 하고 왔냐?”
“거, 생각보다 허술합디다? 우리가 오늘 남대문 앞에서 멈추지 않고 곧장 서쪽을 들이쳤으면 성벽을 넘을 수도 있었을 법 하던뎁쇼? 중간중간에 무너진 곳도 꽤 있고.”
“그런 무너진 곳은 다 잘 기억해두어라. 지금은 허술해 보여도 막상 나라에서 대비하고 막으려 하면 꽤 삼엄하게 틀어막을 수 있을 것이다. 군액(軍額, 군사) 셋 중 하나만 진짜 사람이라 쳐도 족히 지키는 군병이 수천은 될 테지.”
그러니 만약 일이 터진다면 그런 허술한 곳으로 기습하는 것만이 답일 테다.
그런 말을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능히 주고받을 수 있는 두 도적놈들이었다.
“어라? 당수님? 저기 문이 열리는뎁쇼?”
그 말 듣고 꺽정이도 놀라 고개를 돌렸다.
오밤중에 윤원형이 끄나풀이나 한둘 쯤 찾아올 줄 알았는데, 이렇게 한나절 만에 사람이 나올 줄은 몰랐다.
그리고 사람 둘이 나오자마자 곧장 문이 살포시 닫혔다.
“어디 보자... 하나는 그냥 중이고, 다른 하나는 선비님이구만요.”
“시끄럽고, 얼른 가서 서 별감이나 데리고 오너라. 주막 안쪽에 조용한 방도 하나 준비해두고.”
멀리서 두 사람 중 하나가 병해임을 알아본 꺽정이가 최만복에게 지시를 내렸다.
곧 병해와 그 선비를 주막에서 그나마 가장 조용한 방으로 이끌고 들어온 꺽정이가 병해에게 가볍게 인사 건넸다.
“일 잘 풀리면 돌아가기 전에 찾아뵈려고 했는데, 이렇게 또 회포 풀게 될 줄은 몰랐소, 사형.”
“나도 네가 조만간 장정들 데리고 올 줄은 알았는데, 이렇게 무지막지한 짓을 벌일 줄은 몰랐다. 도성 안이 너 때문에 발칵 뒤집힌 것은 알고 있느냐?”
“발칵 뒤집히기를 바라면서 한 일이였으니, 무어. 그나저나 어쩌다 옆에 객을 한 분 붙여서 오셨소?”
“이 사람이 청하여 모셔왔다네. 그대들 의민당과 연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바 있어서 말일세.”
병해를 향한 질문에 대신 선비가 답했다.
선비는 나이가 지천명이나 되었을까. 그 눈매가 온화한 듯하면서도 사나워, 범상한 인물은 아닌 듯했다.
그때, 뒤늦게 소식 듣고 달려온 서림이가 문을 활짝 열었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당수, 부르셨... 소? 힉, 감사또 나리?”
“아, 서림이라고 했던가. 오랜만일세. 아래에서 일하던 사람 얼굴은 쉽게 잊지 않는 편이라서 말이지.”
“잠깐. 감사또라면...”
“그때 평양에서는 글만 전해주고 곧장 사라져 아쉬운 바가 있었다네. 이리 훤칠한 헌헌장부였을 줄이야.”
전 평안도관찰사, 현 병조판서 이준경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간만에 꺽정이도 전생의 악연이 떠올라 일시 등골 오싹한 느낌을 받을 정도였으니 서림이 심정은 어떠할까.
그러나 서림이와 달리, 꺽정이는 이제 이준경 정도면 께름칙하다 여길 뿐 딱히 더 두렵거나 하지는 않았다. (암만 무섭고 대단한 사람이라 한들 염라대왕만 하겠는가.)
“이미 들통난 듯하니 굳이 아니라 잡아떼지는 않겠소. 헌데 그때 평양에서 일 벌인 것이 이 사람인 것은 어찌 아셨소?”
“그때 글로 밝히기를, 오로지 의(義)를 바라는 당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평양 아전들이 처분한 재물 중 일부가 봉산으로 흘러들어가더니, 이윽고 의민당이라는 이들이 봉산에서 나타나더군.”
“허, 역시 속이기 어려운 분이시군.”
“자네 또한 대하기 어려운 자로군그래. 여기 이 병해 스님으로부터 성정에 대해 얼추 귀뜸은 받았지만...”
“웬일로 나리 같은 선비님께서 일개 중을 스님이라 불러주고 계시오?”
“지금 팔도의 승려라는 자들 중 말 그대로 백성을 깨우치는 일을 하는 이는 이 병해 스님뿐 아닌가. 그런 이라면 마땅히 존중할 수밖에 없는 것일세. 몇몇 유학자들보다도 나은 면이 있으니.”
그러나 영 어색한 병해의 눈치를 보니, 아마 오늘의 일 전까지 둘 사이에 무슨 교분이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반면 자네는 내 어찌 대해야 할까? 아직은 잘 모르겠네. 무리 오백을 거느리고 상경하였어도 조정에서 크나큰 논쟁이 벌어졌을 터인데, 이제 유례가 없는 난행(亂行)을 지엄한 도성 앞에서 벌이고 있으니,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하여야 하지 않겠나?”
갑작스레 꼬집는 말에, 꺽정이가 허심탄회하게 대꾸했다.
“그야 그렇지. 의도가 불순한 것은 맞소.”
“무어라?”
“임 처사!”
병해와 이준경 모두 놀랐는데, 꺽정이는 여전히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 그러면 불순한 것을 불순하다 해야지, 무어. 그냥 그대로 해산하고 이 사람 홀로 성문 안에 들었다면 되었을 것을 굳이 이렇게 일장 행사 벌인 것도 뜻이 불순하고, 애시당초 수백 명 이끌고 상경한 것도 불순하고.
이 사람은 조정에서 격론 일어나기를 바라고서 이리 올라왔소. 우리 의민당이 지금껏 일궈놓은 바가 적지 않은데, 욕심 많은 현감이 한 번 무고했다 하여 졸지에 죄인 대접을 받게 되었지. 이대로라면 또 언제고 훨씬 흉험한 모해가 닥칠 수도 있지 않겠소? 그리하여 누구든 우리를 가볍게 대할 수 없도록 하고자 이리 세를 과시하게 되었소.”
이미 평양에서 도적질 아닌 도적질 하였음이 들통난 마당이라, 굳이 겸손하고 조용하게 말을 꾸밀 이유도 없었다. 애초에 그럴 만한 품성도 되지 않았고, 설령 꾸민다 한들 이준경 앞에서 먹힐 리도 없었다.
꺽정이 하던 대로 실컷 말을 풀어놓고 나면 나중에 알아서 병해가 ‘사실 저이가 말은 저리해도 선량한 사람이다’ 옹호해주지 않겠는가. 동문의 의리를 한껏 담아 병해를 바라보니, 병해는 그저 한숨만 쉴 뿐.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준경이 곧장 진솔하게 답했다.
“자네가 그리 이실직고를 하니, 나 또한 답해줌세. 도성의 군비가 피폐하다 하나, 만일 자네들이 정녕 흉악한 뜻을 품고 있다면, 지금 이곳에 삼사천이 아니라 삼사만 백성이 모여있다 한들 족히 제압할 수 있네. 나라의 은혜를 입은 몸으로서, 그리하는 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을 것이고.”
“하루 사이 군병을 많이 모으신 모양이구려.”
“아무리 오위(五衛)의 제도가 피폐해졌다 한들 도성만은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이준경이 하는 말이라면 허풍은 아닐 것이었다.
“헌데 우리를 제압하면 나리께는 어떤 이익이 남소?”
“이익이라? 도의를 따지는 데 무슨 이익을 말하는가?”
“무고한 백성들 때려잡는 것이 군신 사이의 의로움이라면, 백성들 역시 신하로서 그 의로움을 다 해드려야겠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압해주시는 쪽이 우리 의민당으로서는 더 이롭소.
허나 나리께서도 어딘가 초야 한가운데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을 들으셨으리라 믿소. 우리 의민당과 여러 선비님네들은 뜻하는 바가 적어도 조금은 겹친다고.”
영월에 무사히 당도한 이언적과 그 제자인 단양군수 – 지금은 풍기군수로 옮겨갔다 – 이황이 청요직에 남아있는 사림들에게 전한 소식은 이준경 또한 전해들어 알고 있었다.
“... 무엇을 원하는가.”
“우리 의민당에게 그 우봉현감 김대가 씌운 혐의들이 있지 않소? 그것이 모두 거짓이며 우리 의민당은 이름처럼 의롭기만 할 뿐이라고 조정에서 확언해주기를 바라오.”
“지금 이 사람과 그런 문답을 하고서도, 조정에서 자네들을 옹호하는 말이 나오기를 바라는가? 어떤 이익을 거론하든, 나라의 녹을 받는 이로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네.”
“뭐, 정 그러신다면야. 허나 이만한 무리를 이끌고 왔으니, 체면치레는 해주셔야겠소. 부민이 수령 고소하는 것을 막는 금법. 그것을 풀어주시오.”
백성 생각한다 여기지만 실제로 위해주지는 못하는 선비는 그 무엄한 말에 경악하고, 딱히 백성 위하지는 않으나 백성 편을 들어주는 도적은 뻔뻔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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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 지나가듯 언급된 것처럼, 임란 이전까지 조선의 중앙군은 오위를 근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즉 의흥위(義興衛)·용양위(龍驤衛)·호분위(虎賁衛)·충좌위(忠佐衛)·충무위(忠武衛)가 그것입니다. 다섯 위는 모두 각 지역에서 차례에 따라 번상하는 군인으로 구성되었고, 각 위별로 편졔가 조금씩 달랐습니다. 그러나 잘 알려진 것처럼 조선 중기에 이르러 대립과 방군수포가 성행하면서 오위의 제도는 빠르게 무너지게 됩니다.
이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각종 개혁이 추진되었고, 또 소규모로나마 북변과 남해안에서 변란이 이어졌기 때문에 지방군의 체계는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계속 유지·보수되고 있었으나, 정작 번상병 중심으로 구성되는 수도의 방위체계는 제대로 관리되지 못했습니다. 특히 성종 대에 번상병들에게 의존하는 수도 방위를 일종의 주민 중심 예비군 (방리잡색군, 방리인 등)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이는 문서상의 시도에 그치게 되었지요.
또한 한양도성의 보수도 어려워지면서, 이미 성종 연간에 ‘적이 도성 문앞에 이르게 되면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하게 된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가 되었습니다. 작중의 내용도 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윤훈표, 2013. “조선전기 한양방어체제의 논의와 군사제도 운영의 실상.” <향토서울> 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