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33화 (33/259)

11. 군신유의 (4)

해는 어느덧 저물고 남은 것은 박명(薄明)뿐. 그러나 아직도 숭례문 앞 군중은 흩어지기는커녕 거의 그대로였다.

“모두들 이렇게 단상 위까지 올라와 억울한 사정을 가감없이 토로하니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소! 내 비록 황해도 사는 일개 처사지만, 조정의 귀를 얻었으니 여러분이 말한 그러한 억울함이 다시 없도록 조처할 방도 마련해달라 간곡히 고할 것이외다!

예컨대 고을 백성이 원을 고소할 수 있게끔 된다면 얼마나 좋겠소?”

익숙한 거한이 풀쩍 단상 위로 올라가 외치니, ‘와와’ 하며 동조하는 군중 함성이 울려온다.

아직 약조된 것은 하나도 없고, 심지어 조정에서 명 내린 것도 아니요 그저 이준경 자신이 사사로이 찾아갔을 뿐인데, 벌써 저렇게 부민고소 금지 폐하는 이야기를 꺼내고 있으니, 저 또한 백성을 끌어들이고 조정을 압박하기 위한 수완이리라.

“백성들이야 어찌 되든 저는 저의 뜻대로만 되기를 바라는 것이렷다.”

돌아가다 말고 숭례문 문루에 올라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이준경이 씁쓸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뜻 또한 반드시 백성에게 해롭기만 한 것은 아닐 터입니다.”

여전히 곁에 있던 병해가 이준경을 타일렀다.

“알고 있소. 그렇기에 이 사람은 더욱 심사가 어지럽구려.”

그에 대해서는 병해도 무어라 더 도와줄 수 없었다.

“가을 해도 꽤 짧아졌소. 늦기 전에 돌아들 가십시다.”

병해를 돌려보내고, 이준경 또한 문루 내려와 저의 집으로 향했다.

병판 대감 옆에 계심에 바짝 긴장하고 있던 수문장과 이하 군졸들은 겨우 참고 있던 숨을 일시에 내쉬었다. 군졸들 중 몇몇은 저 앞에서 몰래 사온 주전부리를 꺼내드는 이들도 있었는데, 어떻게 좀 얻어먹고자 다른 이들도 삼삼오오 몰려들었다.

길 가던 이준경이 고개 돌리고서 그들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음은 꿈에도 모르는 군졸들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천진난만하여 이준경 한숨만 깊어졌다.

“다시 돌아가 수문장에게 꾸짖는 말씀 전하오리까?”

문루 내려오자 도로 따라붙은 그의 문객 겸 호위 이 아무개가 물었다.

“아니, 되었네.”

나라의 기강은 저처럼 무너진 지 오래요, 올바름과 그릇됨은 뒤바뀌다 못해 아예 섞여 분간이 어려워졌다.

그런 진흙탕 속에서도 누군가는 가운데를 지켜야 한다 믿었다. 이준경뿐 아니라 지금 조정의 고관들 중 소윤의 일파에 속하지 않으면서 사림에 완전히 몸 담지 않은 자들은 대개 그런 마음가짐일 테다.

그 옛날 함께 김안로(金安老)에 함께 맞섰던 바 있으므로 윤원형도 그들을 건드리지 않고, 아무리 윤원형이 미워도 사직과 조종의 법도는 이어져야 하므로 그들 또한 한쪽 눈을 감았다.

부민고소를 금하는 법도 돌이켜보면 그러하였다.

당장 백성들이 수령을 고소할 수 있게 한다면, 탐학한 수령은 십중팔구 권세가들과 연이 있기 마련이니 윤원형과 그 일당은 적지 않은 해를 입을 터이다.

그러나 이제 막 군수나 현감으로 나가는 젊은 관리들, 사람됨 대쪽 같아 불의한 이익을 한사코 내칠 이들 또한 해를 입게 될 것이다. 당장 수십 년 전 이준경 그가 막 출사하던 무렵만 하더라도 금법을 무시하고 마구잡이로 젊은 선비들 고소하는 향리들이 적지 않아, 기어이 법을 강화하기에 이르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나라의 기강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취해야 하는 조치라 여겨왔었다. 부민의 고소를 허용한다 한들 실제로 고소를 행하는 자들은 군현의 토호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아래의 장삼이사들. 저의 고장 이름도 제대로 못 쓰는 – 이준경도 그 ‘백천’ 깃발을 눈여겨보았던 것이다 – 이들 또한 나름의 억울함과 생각이 있으리라는 데까지는 헤아림이 닿지 못하였다.

“참으로 어렵구나. 어려워. 밝은 길은 밝지 않고 외진 골목길에 도리어 달빛 비치는구나.”

그 한탄을 기다린 양, 옆의 골목길에서 사람 두엇이 나와 이준경 앞을 가로막았다. 호위가 ‘누구냐’ 묻기도 전에 그들이 공손하게 고개 숙이며 전언(傳言) 건내었다.

“병판 대감, 서원부원군 대감께서 긴히 논하고자 하시는 바가 있어 이 야심한 때 대감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물금첩(勿禁帖, 야간통금 예외 표찰)이 있사오니 받아주십시오.”

어찌 너희가 내 이곳 지나감을 알고 있었느냐, 어찌하여 너희가 사사롭게 물금첩을 주고받느냐, 그런 질문을 던지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또 너무나 지친 이준경이었다.

곧장 그들 따라 오늘 윤원형이 묵고 있을 저택에 들었다. 목 좋은 곳에 과하게 큼직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의외로 검박한 집이었다.

곳곳에 사람 손길 덜 닿은 구석이 눈에 띄었다. 아마 남들 이목 신경 쓰며 만나야 할 때에 대비하여 윤원형이 마련해둔 곳이리라.

“아, 병판 대감. 오늘 저들 난폭한 무리 가운데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셨소이까. 곽영공(곽자의)이 회흘(回紇, 위구르) 병영에 홀로 들어갔다 나온 것과 같으니 참으로 공의 용감함을 알겠소이다.”

칭찬하는 듯, 비꼬는 듯. 결코 스스로 앞에 나서는 일 없이 남들 움직여가며 지금의 이 자리에 올라온 윤원형다운 첫 한 마디였다.

그러나 그런 놀음에 어울려줄 계제는 아니었다.

“비록 그 난행이 유례없다 하나 저들 또한 본질은 선량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이오. 무슨 원악함이나 강포함으로 말미암아 저러한 일을 일으킨 것은 아니오. 그러니 어찌 회흘 오랑캐 무리에 비하겠소?”

“선량함은 몰라도, 그 어리석음은 족히 알겠소이다. 부민고소의 금법을 철폐해달라니, 이 얼마나 무엄한 말이오이까.”

“그것은 어찌 아시었소?”

“나라의 은혜를 과분하게 받은 몸으로서, 마땅히 널리 듣고 살펴 화를 미리 막는 대비를 하여야 하는 것 아니겠소이까?”

윤원형이 도처에 세작(첩자)을 풀었음을 당당하게 밝혔다.

“이는 물론 조정에서 공론을 모음이 마땅한 일이나, 바로 그 공론을 모으기 위하여 우리가 지금 여기서 말을 주고받는 것 또한 가한 일이라 보오.”

이준경 그를 떠보는 말인가, 아니면 정말로 진지하게 의중을 묻는 것인가? 윤원형 앞에서 하는 말은 언제 비수가 되어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 떳떳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부민고소의 금법은 상하와 존비(尊卑)의 도의를 지키는 것으로 함부로 바꿀 수 없소. 다만 백성들의 억울함과 수령의 탐학함이 모두 극을 향해가고 있으니, 금법을 아예 없애지는 않더라도 흉년이 끝날 때까지 잠시 시행을 멈추는 정도라면 가하지 않을까 생각하오.”

“참으로 훌륭한 말씀이시오. 이 사람 생각도 그와 같소.”

불길한 예감이 이준경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사로이 이 사람의 누이 되시는 자전께서도 하교시기를, 백성들의 괴로움이 저와 같으니 조처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라 하시었소이다. 그리하여 양종(兩宗, 불교의 선종·교종)을 다시 두고 이로써 백성들이 함부로 사찰에 의탁하여 세수가 줄고 전답이 황폐하게 되는 일을 막으려 하고 있소.”

“잠깐, 양종을 복설(復設)하는 것은 부민고소를 허락하는 것과 다른 일이 아니오?”

“크게 보면 모두 같은 일이지요. 자전의 뜻이 이리 깊소이다. 양종을 다시 두게 되면 전국 팔도의 사찰이 다시 정비되고 거짓 중들이 모두 환속하게 될 테니, 어찌 민생에 보탬되는 바가 없겠소이까?”

부민고소 금지법을 폐하고, 동시에 불교를 흥성케 한다는 것은, 분명 사림의 반발을 일으키고도 남을 일이었다.

“풍성부원군(이기)께서도 이 뜻을 함께하고 계시오. 이미 사직을 위해 분골쇄신하시면서 신병(身病)이 깊어지신 노신(老臣)께서 이리 나랏일을 걱정해주시니 고맙고 또 안타까운 일이오.”

이준경 머릿속에 그제야 윤원형이 그리는 그림이 어렴풋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기라 하면 의민당의 근거지인 봉산에서 군수 노릇하는 이 아무개의 당숙. 그리고 나이가 일흔이 넘었건만 아직 잔병치레 조금 하는 것 외에는 정정한 노인.

“이보시오, 서원군 대감.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것이오?”

“의민당 당수 임 모가 방자하고 또 무엄한 것은 직접 보셨으리라 믿소. 그 사람됨이 이러할 줄 알았더라면, 지난날 봉산군수 곽순수와 더불어 포상하는 일도 없었을 터이나 조정의 헤아림이 그에 닿지 못하였으니 뒤늦게 아쉬워할 따름이오.

저처럼 방자한 무리가 초야에 수없이 있으니, 또 언제 나라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비통함을 참고 엄벌을 내릴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이외다.”

부민고소 금지법을 폐하는 것은 애초에 윤원형에게 그리 중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으로 어떤 이득을 얻을지, 누구를 죽여 없애고 그 남은 권세를 얻어낼지, 그것만이 관심의 전부였다.

이기와 자전을 내세워 부민고소를 허용하고, 훗날 트집을 잡아 오늘 그토록 무섭고 경계할 만한 위세를 드러낸 의민당을 쳐 없앤다. 이를 핑계삼아 각지 군현에 피바람을 몰고 오고, 윤원형 그를 두고 허튼소리하는 자들을 쓸어 없앤다. 부민고소 허용과 불교 양종 복설이 함께 이루어지니, 멋모르고 조정 정사 비판할 유생들이 또 수도 없이 걸려들어가게 될 것이다.

“... 이 땅에 사화를 몇 번이나 더 몰고 올 생각이오이까.”

“사화라니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윤원형이 짐짓 억울한 척 반문하였다.

“무릇 사풍(士風)이란 이끌기 나름이지요. 나라에 인재는 적고 기무(機務)는 번다하니, 만일 풍성부원군께서 물러나게 되시면 마땅히 그 자리를 대신할 이들이 필요할 것이오. 예컨대 이판으로 있는 동애(東崖, 허자許磁)라던가.”

“동애라 하면...”

“지난날 옥사를 다시 살피어, 그 죄를 과하게 받은 이들은 서용(敍用, 죄지은 관리를 다시 씀)하고, 또 간혹 원통한 이가 있으면 신원(伸冤)하자, 사석에서 그리 말하고 있다고 들었소이다. 사사롭게는 대감께도 그런 말을 하였다 들었는데, 아마 헛소문이겠지요.”

이준경은 무력감에 몸을 떨었다.

나라가 무너지지 않도록 애써 받치고 있으면 무얼 하는가. 그 기둥이 떠받치는 지붕 아래에서 호의호식하는 자는 따로 있는데.

그러나 그가 기둥 되기를 거절하는 순간, 지붕은 무너지고 집주인은 달아날 것이며, 멋모르고 있던 다른 이들만 화를 당할 것이다.

윤원형이 허자를 끌어들이며, 이준경 저에게도 함께 하자 하는 것은, 그런 이들에게 화가 미치지 않게끔 할 수 있는 만큼의 권한, 딱 그만큼의 권한만은 나누어주겠다는 뜻이었다.

조정에 아직 남은 사림들이 화를 당하지 않도록, 초야에서 언제고 때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선비들이 완전히 세상에 등을 돌리지 않도록.

언제부터인가 이미 판은 그렇게 짜여 있었고, 이준경도, 의민당 임 처사도 그 판 위의 장기말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장기말 되지 않고자 한다면, 지금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윤원형도, 대비도 늙을 것이요, 금상은 장성할 것이다.

그때가 왔을 때, 그때야말로 이 땅에서 아직 말로만 이룬다 하고 제대로 이루지 못한 도학의 올바른 다스림을 펼치기 위해서는, 우선 사람을 살려야만 했다.

“알겠소. 그런 소문이 돈다 하니, 마땅히 바로잡을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언젠가 동애도 만나 뜻을 나누어야 하겠구려.”

“이 사람은 그저 고맙게 여길 따름이외다. 부민고소의 일과 양종 복설의 일 또한 대감께서 함께 해주시리라 믿소.”

“... 그리하십시다.”

입에 씁쓸함이 감돈다.

윤원형의 집을 나설 때까지 그 씁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고개가 절로 숭례문 쪽을 향했다.

“내 자네가 깨우쳐준 바를 잊지 않겠네. 백성을 위한다는 것의 무거움을 잊지 않겠네.

그러나 군신유의 네 글자는 끝내 버릴 수 없네. 그 의마저 버리려는 자네를, 이 나라 정학의 맥이 끊어질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위해줄 수는 없네.”

이름만 처사일 뿐 속은 도적이요 무뢰한. 그것이 이준경이 본 의민당 당수 임거정이었다. 그러나 어찌하여 미안하다는 생각이 그치지 않는 것일까?

오늘밤 잠을 이루기는 참으로 어려울 듯하였다.

한편, 서림이와 다른 졸개들 데려다 놓고 오늘 하루 고생 많았다며 술잔 주거니받거니 하다가 막 잠자리 편 꺽정이 역시 밤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허, 오늘은 찾아오는 이들이 참 많군.”

제집인 양 주막 문 확 열고 들어온 한량 복색의 사람들을 향해 꺽정이가 피식하며 비꼬았다.

“그대가 임 처사인가?”

“그렇다.”

한번 휙 둘러본 꺽정이가 곧장 되물었다.

“오는 말이 아니 고우니 가는 말도 굳이 곱게 꾸미지 않으마. 너희는 윤가의 졸개렷다?”

“뭣? 이놈이?”

대여섯쯤 되는 놈들 중 네다섯이 동시에 발끈하는데, 개중 표정 없이 서 있던 자가 앞으로 나왔다.

“그만들 하시오.”

“이봐, 두리손 자네, 어떻게 이런 말을 듣고 가만 있을 수 있나?”

남 앞에서 말다툼하는 꼬락서니가 한심하였는데, 그제야 꺽정이가 익숙한 낯을 알아보았다.

“아, 네놈 이름이 두리손이었구나! 그때 단양에서 반병신을 만들어놓은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멀쩡하구만?”

“서원군 대감께서 부르셨소이다. 조용히 따라오신다면 오고가는 길에 어떤 해코지도 없을 것이오.”

다들 분기 가득한데 두리손은 아무런 변화 없는 그 표정과 어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서원군 대감이라! 그래서 그분은 벼슬이 어찌 되시는가?”

“예조판서 벼슬을 맡고 계시오.”

“저 병조판서께서도 친히 나를 찾아오셨는데, 삼정승도 아니요 같은 판서이면서 나를 제멋대로 불러들이려 한다고? 그것도 맨입으로? 이봐, 돌아가서 네 상전께 전해라. 나를 정 보고 싶다면 직접 이리로 찾아오라고.”

“그만! 이 방자한 놈이 어찌 그리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결국 싹 억누르던 분기가 절로 터져나오고야 말았다. 고작해야 다른 대갓집 들어가서 흉험한 짓 꾸미던 이들로서는, 속으로야 생간 씹어먹을 생각을 해도 겉으로는 점잖게 수작부리는데 익숙하였으므로, 꺽정이의 날것 가득한 비웃음을 차마 감당할 수 없던 것이다.

“이보시오들! 그만 하라 하지 않았소!”

“천것은 닥치고 있어라! 이리 무엄한 말을 내뱉는 자를 어찌 가만히...”

“야, 이것 참. 이런 얼간이들을 수족이랍시고 부리고 있으니 서원군 대감도 참 팔자가 사나우시구만그래.”

어느새 소란을 듣고 의민당 패거리들도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제야 저들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분기는 순식간에 빠지고 낭패한 표정만 감돌았다.

“어이, 다들 들어가 잠이나 마저 자라.”

그리고서는 꺽정이가 다시 말했다.

“여기 주막 뒤편에 공터가 있다. 거기서 너희들이 단번에 달려들어 나를 때려눕힌다면 내 너희의 무례함을 잊고 순순히 따라가 주마. 싫다면야 그냥 허탕치고 돌아가는 것이고. 너희 상전께서 좋게 보시지는 않겠지만.”

두리손에게 이 임 처사라는 자가 무엇하는 사람이며 재주는 어떠한지 미리 묻는 정도의 성의를 보였더라면, 저쪽의 한량들도 달밤에 망신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나 암만 귀한 분과 연이 있다지만 그래본들 천출인 녀석 아래에 딸리게 되었음을 자못 분하게 여기던 한량들로서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적을 모르고 제 주제도 잘 모르니, 어찌 위태롭지 않을 수 있을까.

호기롭게 다섯 명이 ‘으럇’ 하고 달려들었다가 번쩍 하는 사이 허리가 꺾이고 어깨가 빠졌다. 개중 하나는 붕 떴다가 땅에 닿을 때 재수 없게 뒤통수가 깨져서 그 피로 모래를 더럽히고 있었다.

“두리손이, 이거 영 형편없구나. 이래서 서원군 대감께서 일이나 제대로 꾸미시겠느냐? 가서 좀 문객은 잘 걸러서 들이라고 일러다오.”

공터 가장자리에서 가만 서 있던 두리손에게 꺽정이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여전히 속뜻 알 수 없는 건조한 대꾸.

“임 처사, 방금 전에 내기 걸 때, 우리 쪽이 처사를 쓰러뜨릴 때만 말씀하시고 반대 경우에 어찌할지는 미리 말씀을 아니 하셨소이다.”

“그래서? 이 사달을 내고서 설마 순순히 따라오기를 기대한 것은 아닐 테고.”

“어찌 그러겠소. 다만 한 가지만 묻고 싶소. 임 처사 그대쯤 되는 이라면 서원군 대감이 결코 ‘일개 판서’라 불리실 분 아니심을 알고 계실 테요. 정녕 그분을 이리 냉대하기를 원하시오? 재액을 스스로 초래하는 것이야 임 처사 그대 마음이지만, 굳이 그리하는 연유만은 궁금하구려.”

“이유라? 그것이 정 알고 싶냐?”

의민당 행렬에 섞여 봉산에서 함께 올라온 아랫사람을 통해 임 처사가 이준경과 주고받은 대화를 그대로 윤원형에게 전할 수 있었던 두리손이었다.

어차피 임 처사를 데리고 가기는 글렀으니, 이 기회를 틈타 그 속내라도 한 단락이나마 더 듣는 것이 두리손에게도 이득이 되리라.

“네놈이 단양 대숲에서 내게 귀한 이를 해코지했으니, 앙갚음이라 생각해두어라.”

“정말 그뿐이오?”

“그야 그뿐이지, 뭐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하더냐?”

“그대가 무리를 이렇게 모았으니, 반드시 바라는 바가 있을 것이오. 또한 수천 백성을 이끌어 숭례문을 틀어막기에 이르렀으니 그 몸값 또한 크게 드높였소. 그 바라는 바가 무엇이든, 서원군 대감께서는 이루어주실 수 있으시며, 그대가 높인 값만큼도 족히 치러주실 수 있으실 것이오.

반면 그만큼 고개를 높이 드셨으니 제값을 받지 않으려 하신다면 그만한 재액도 돌아올 것이오. 서원군께서는 결코 은원을 잊지 않으시오. 내일 당장은 아니라 하더라도 조만간 반드시 그리 될 터.”

그 재액을 내릴 사람은 바로 두리손이었으므로, 임 처사가 윤원형을 노엽게 할수록, 그리고 그 마음에 거슬리면 거슬릴수록 두리손에게 돌아오는 보상도 많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리손은 물어보아야만 했다. 어째서 이리 궁금한가? 단지 윤원형에게 돌아가 고할 말 한두 마디를 더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그 이상이 있는가? 두리손은 스스로 속마음 알지 못한 채 계속 물었다.

“쉬운 길은 버리고 어렵다 못해 정말 길인지도 확실치 않은 그런 외진 쪽 향해 가려 하시니, 그 이유가 궁금한 것이외다.”

옆에 마침 장작 팰 때 쓰는 나무등걸이 있어, 털썩 앉으며 꺽정이가 말했다.

“아, 그래서 네놈이 천것 소리 들으면서도 계속 그 아래에 있는 모양이로구나. 면천되기를 원하나 보지? 어째 눈빛이 독하다 싶었다.”

사람 마음 꿰뚫어보는 것을 어찌 두리손만 할 수 있을까. 지금껏 두리손을 같은 사람으로 보고 그렇게 유심히 들여다본 이가 없었을 뿐. 예상치 못했던 깊은 말에 두리손의 평정도 잠시 깨졌다.

“이놈아, 꿈 깨라. 나도 그렇게 올라가 보려고 아등바등 용써봤는데, 될 턱도 없더라.”

물론 이 생이 아니라 지난 생에 있던 일,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어쩌면 영영 일어나지 않을 지도 모르는 왜변에서의 일이기는 했지만.

“... 그대는 내 물음에 답하지 않았소.”

“지금 답하고 있지 않으냐. 성정 퍽 급하군그래.”

어차피 눈앞의 두리손이가 어떻게 생각하든, 윤원형이는 그 완장 보았을 때부터 저를 살려두거나 아래에 거느릴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있을 테다. 그러니 속마음 조금 더 보여준들 뒤탈은 딱히 없을 것이라고 꺽정이는 생각했다.

“양천의 구분이 없는 나라. 선비가 화를 당하지 않는 나라. 만세토록 지킬 것도, 금할 것도 없는 나라.”

양천의 구분을 앞에 꺼내니 두리손의 표정이 또 흔들린다.

“나와 우리 당은 그런 나라 만들고자 뭉쳤다. 우리가 그런 나라 만들기를 원하는데, 아뿔싸, 이미 이 나라는 너희 상전 손에 들어가 있지 않더냐? 그러니 훔치든 빼앗든 해야겠지.

그러므로 내가 서원군 윤가 아래에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쪽이 내 아래로 들어와 나라를 고대로 바친다면 그때는 또 모르겠지만. 됐냐?”

“...”

“저기 저 두 놈은 꿈틀대는 것이 곧 깨어날 듯하니, 얼른 깨워서 나머지 놈들 잘 간수해서 데려가라. 업고 가다가 떨어뜨리면 괜히 대가리만 깨진다.”

“알겠소. 오늘은 이만 물러가보아도 되겠소?”

“그러든가.”

손 한 번 휘젓고 주막으로 돌아가는 임 처사 뒷모습이, 어째 두리손이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커 보였다.

밤사이 많은 일이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그러건 말건 무정한 태양은 다시금 한양 비출 채비를 하였다.

파루(罷漏) 종소리와 함께 일어난 꺽정이는 기지개 펴고 한둘씩 나온 의민당 패거리들을 한데 모았다.

“다들 잘 잤느냐.”

“예, 당수님!”

“간밤에 별고 없으셨습니까?”

“뭘 그런 걸 묻느냐. 별고 없었으니까 여기 이렇게 멀쩡하게 서 있지.”

딴에 상냥하게 걱정해준답시고 말 걸었던 오막손이는 본전도 못 건졌다.

“자, 오늘도 어제처럼 그대로 모임 이어간다. 오막손이는 어제 했던 것처럼 언문 아는 놈들 데리고서 사연 털어놓는 이들 이름과 사는 곳을 빠짐없이 적어두어라. 그리고 최만복이는 우리 당 사람들이 차고 온 완장을 모두 걷은 다음, 사연 말하는 이들, 그리고 말하려다 뜻 못 이룬 이들에게 고루 나누어주고.”

“예? 완장 말씀이십니까? 그건 왜...?”

이번에는 엉뚱한 일 맡은 최만복이가 저도 모르게 반문하였다.

“하라면 할 것이지, 뭔 말이 많아?”

꺽정이가 역정을 내면 그 주변에 쉬이 불똥 튀는 이치를 모두 알고 있었다. 주변에서 사정없이 쏟아지는 눈총에 최만복이는 절로 고개가 움츠러들었다.

“아마 내일이나 모레까지는 계속 이렇게 해야 할 것이다.”

“아이고, 당수님, 벌써 사람들 몰려오고 있습니다요.”

“그래서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너희들이 알아서 잘 해야지. 싸움이 난다거나 해서 힘 쓸 일 생기면 그때나 날 불러라.”

집 오래 비우기 곤란한 이들은 몇몇은 돌아갔지만, 나머지는 그대로 남아 풍찬노숙을 했다.

그들 또한 하나씩 일어나, 누구는 밥 빌어먹으러 가고, 또 누구는 들고 온 포목이나 잡곡 따위로 밥값을 치르려 하며, 또 누구는 어디서 구해왔나 모를 솥 아래에 후후 불을 붙이고 있었다.

오늘은 반드시 저의 사정을 낱낱이 알리겠노라 작심하고 동틀 녘부터 모여든 도성과 그 인근 성저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오늘도 종일토록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고, 어제에 이어 오늘도 대목임을 깨달은 부지런한 장사치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렇게 어제와 비슷한 오늘이 시작되어, 어느새 해가 중천에 뜰 무렵.

“어? 남대문이 열립니다?”

“뭐, 어제도 잠깐 열리지 않았더... 냐?”

졸개들끼리 말하는 소리 듣고 꺽정이도 숭례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이 살짝 열리다 그치고 사람 몇 명 나올 줄 알았는데, 중간에 멈추지 않아 기어이 활짝 열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이들은 단정하게 사모관대 차려입은 관헌 여럿과, 지금껏 성벽 위에서 보았던 치들과는 달리 군기 엄정하기 이를 데 없는 군관들.

“너희 백성들은 윤음(綸音)을 받들라!”

모두가 부복하고, 꺽정이도 저도 모르게 부복하다 잠시 멈추고서는 엉거주춤 마저 부복하였다.

임금의 말씀이 곧 귓가에 닿았다.

‘가여운 너희 백성들’이니, ‘과인이 박복하고 덕이 부족하여 하늘이 계고하고 백성이 놀라니’ 등등. 아마 마음에도 없고 임금이 스스로 쓰지도 않았을 말이 들려온다.

“... 하여, 부민고소의 금법을 폐하고, 스스로 억울한 바를 고할 때면 무고(誣告)가 아닌 한 어떠한 벌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 이로써 상하의 의리가 다시 갖추어지고, 다시 한 번 나라에 상도(常道)가 지켜지기를 바라노라. 이와 같이 임금께서 이르셨느니, 너희 백성은 따를지어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처사 임거정은 사사로이 무리를 모아 민심을 크게 놀라게 한 죄가 있으나 그간 세운 공이 있고 또 어그러뜨려서는 아니 될 도리가 있음을 잊지 않았으므로, 공과 죄를 서로 지워 따로 처분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꺽정이 귀에 그 부분은 그리 중하게 닿지 않았다.

“돌아가면 모주께서 날 족치려 하실지도 모르겠군.”

“엥, 어찌 그렇소, 당수?”

꺽정이 혼잣말에 서림이 물었다.

“나중에 다시 알려주리다.”

뜻한 바가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보통은 그 반대로 일이 흘러가고 있음을 의미하였다.

“서 별감 그대는 능침 옮기는 일 끝나면 지체하지 말고 봉산으로 돌아오시오. 나는 먼저 돌아가겠소.”

꺽정이는 처음 생각하기를, 끽해야 삼사 년 기한 두고서 부민고소를 잠시 허용할 것이고, 꺽정이 저는 적당히 몇 달쯤 자원부처(원하는 곳에 유배를 보냄) 보내고서 곧장 풀어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말은 일체 없고, 오히려 기대했던 이상으로 베풀면서 ‘도리를 잊지 않았다’ 같은 과분한 말이나 하고 있었으니, 그 속뜻이 어째 반대로 보였다.

‘네놈이 도리를 어그러뜨리고 나라의 상도를 벗어나게 하였으니, 그 죄 갚을 길은 곧 죽음뿐이라.’

물론 그리 말한다 해서 가만 앉아 죽어드릴 꺽정이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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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의 조선에서도 1550년 부민고소금지법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진 바 있습니다. 민생이나 유학적 이념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불교 부흥과 관련하여 벌어진 논쟁이었지요. 보우를 내세워 선·교 양종을 재설치하려던 문정왕후는 곧장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는데, 물타기를 위해 부민고소금지법 철폐라는 안을 꺼내든 것입니다.

즉 부민고소가 금지되어 수령의 탐학을 막을 길이 없고 백성들이 견디다 못해 마구잡이로 출가하는 일이 있으므로, 부민고소를 허용하던가 아니면 임시변통으로 양종 복설을 허용하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때 소윤의 명목상 좌장이던 이기와, 소윤과는 거리가 있던 상진 등의 고위 관료들이 한목소리로 부민고소금지법 철폐를 반대하는 일이 벌어졌고, 그 결과 유생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종 복원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진행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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