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참새는 사마귀를 노리네 (2)
한성부는 5부로 나뉘고, 그 아래에 다시 마흔아홉 방(坊)이 있다.
그 마흔아홉 방에 한 가지 경향이 있다면, 대저 궁궐에 가까운 북쪽일수록 형편 괜찮은 이들이 거하고, 반대로 남쪽으로 갈수록 빈한한 이들이 모여산다는 것이었다.
물론 윤원형쯤 되는 권세가라면 어디든 상관없이 비집고 들어가서는, 본디 있던 집을 싹 밀어내고 저의 집을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헌데 각미사 모이는 곳으로도 쓰이는 황언징의 집은, 목멱산 자락 남촌(南村)에 자리잡았음에도 꽤 터가 넓어, 최근에 이웃집 잡아삼키고 확장한 티가 역력하였다.
황언징의 위세가 생각보다 높은 것인가, 아니면 한양에서 목에 힘 주고 살기 위해 필요한 문턱이 생각보다 낮은 것인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은 황언징네 사랑채에 떡하니 앉아 꺽정이 맞이한 병해가 알려주었다.
“한동안 각미사가 뜻하지 않게 소득을 많이 올렸다.”
“봉산에서 그리 많이 챙겨주었소?”
“그런 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이게 다 지난번 한양 올라올 때 소동 벌여서 생긴 일이지.”
부민고소가 허용되자마자 곧장 경기도 곳곳에서 고소가 올라오고, 이어서 강원도와 삼남 등지에서도 사람들이 상경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각지 군현의 떳떳하지 못한 수령들에게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으니, 그저 그들이 쟁여둔 재화, 주민들 억지로 부려 만들어낸 농장 등을 조금 윗선에 바치기만 하면 해결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충분히 바치면, 기껏 뜻 있는 백성들이 상경하여 수령을 고발하더라도 빈손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었다. 고소한 바는 확인하였으나 그 내막 살핀즉 ‘오해’가 많았던 듯하다는 둥, 그 수령에게 직접 전하여 원활히 해결하였다는 둥, 핑계는 많고 속이기는 쉬웠다.
그리 되자 자연스레, 고소가 먹히는 것은 모두 연줄에 달려 있다며, 자신이 아무개 대감네 문객의 사돈인데 인정 조금 바치면 송사 원활히 풀어주겠노라 하면서 막 상경한 시골 사람들 쌈짓돈을 노리는 자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 그러나 이 각미사 한량들이야말로 정말 권세가들에게 연 닿은 자들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지. 그런 이들을 기방에서 만나면 때로는 피하고 때로는 술 얻어먹곤 하니까.”
점쟁이와 가짜 중들의 씨가 마른 뒤로 각미사 한량들은 아무런 연줄도 없으면서 시골뜨기들을 홀리는 그런 자들을 족치고 다니고 있었다. 물론 열에 한둘쯤 진짜로 연줄 있는 이가 나타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잘못된 시속(時俗)을 바로잡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느냐.”
그렇게 속임수 부리는 자들 재산을 털어서, 원 주인 찾을 수 있을 것은 돌려주고, 또 일부는 적당히 눈 감아달라며 포도청이나 경아전(京衙前)들에게 바치고. 그렇게 해도 꽤 많은 양이 남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실정이라 황언징과 유극량도 그 재산을 가지고 뭔가 해보려 했지만, 딱히 지금 하는 일 외에 더 손대볼 바가 없어, 각미사 모이는 곳으로 쓸 황언징 집만 조금 넓히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요새는 그것도 뜸해졌다. 도성 저자에 흉흉한 바람이 불고 있지 않으냐. 괜히 이럴 때 고소하였다가 충주 꼴 날 수 있음을 시골 유생들도 알고, 반대로 엉뚱한 권신의 이름을 대었다가 역으로 변 당할 수 있음을 하찮은 기부지도(欺負之徒, 사기꾼)도 아는 것이지.”
“흉흉한 바람이라면...”
“네가 상경한 것과 까닭이 같을 것이다.”
“그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주변의 이목을 좀 물려야 하겠소.”
“걱정 마라. 유극량 저이가 돌아오자마자 이미 무리를 추려서 입 무겁고 의협(義俠) 있는 이들만 남겨두었다. 네가 그들에게 과히 위험한 일은 아니 시키겠다 장담했다 하니, 이쪽에서도 마땅히 사람 뽑아 도와줘야 하지 않겠느냐.
지금 이 집에는 저기 행랑채에 있는 귀 어두운 찬모(식모) 하나 빼고는 모두 각미사 사람뿐이다.”
“좋소. 그러면 지금부터 조금 무거운 얘기를 꺼내리다.”
꺽정이가 곧장 이기가 꾸미고 있는 흉악한 일에 대해 털어놓으니, 병해 이마의 주름도 그에 따라 깊어졌다.
“... 하여, 글피 밤에 움직이기로 하였소.”
“허어. 이 나라가 어찌 되려 하는가.”
“어찌 되려 하기는. 한바탕 뒤집힐 채비를 한창 하는 중이지.”
“네녀석이 도적 되기를 바란다 할 때부터 일이 구르고 굴러가 여기에 이르렀구나. 더 좋은 세상, 더 좋은 나라 만들자는 설득에 넘어가 칠장사에서 내려올 때부터 언제고 피바다를 한 번 건너야 할 것을 알았지만... 막상 이렇게 목전에 유혈(流血) 보이니 두렵구나.”
“미안하게 되었소.”
번민하는 병해에게 꺽정이가 나름대로 위로의 말을 건네었다.
“그러나 죽어야 할 놈은 아니 죽고 안 죽어도 될 사람은 계속 죽어나가는 쪽보다야 그 반대가 낫지 않겠소?”
“허허, 녀석. 그래도 그 사이 나이 좀 먹었다고 이제 제법 머리가 굵었구나.”
기특하게 여기는 병해 얼굴에서 걱정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방금 전보다는 조금 더 결연한 낯빛이 깃들었다.
“나 홀로 두려워하고 꺼린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터. 우선 네 얘기나 마저 듣고 생각하자꾸나. 그래서 너는 어찌하기를 원하느냐? 정녕 그때 이기가 붙여준 무뢰배들과 함께 윤원형을 도모할 생각이더냐? 이곳 각미사 사람들까지 끌고서?”
“그것이...”
꺽정이가 저의 생각한 바를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까지 끝나자 병해 입에서 다시 한 번 탄식이 나왔다.
“허, 오늘 여러 번 놀라게 하는구나. 괄목상대가 이런 것일까.”
“뼈대는 내가 세웠을지 몰라도 살 붙인 것은 작은 사형이오. 뭐, 그래본들 상경하기 전 급히 얼개만 짜맞춘 것이고, 앞으로 어찌 될지에 따라 그때그때 변통해야 하겠지만.”
“그야 병법뿐 아니라 모든 세상일이 다 그렇지 않더냐.”
말은 태연하게 하는 병해였지만, 어느새 그의 머리에도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수천 백성을 도술로 속여넘기고 나라의 임금 노릇하는 문정왕후의 마음 사로잡은 병해지만, 얘기가 얘기다 보니 처음 이 세상에서 다시 눈 뜰 때부터 언제고 이날 오기를 기다린 꺽정이처럼 덤덤할 수는 없었다.
“글쎄, 솔직히 해볼 만하다고는 못 하겠다. 나라 뒤엎는 모의가 나라 열린 이래 꽤 심심찮게 있었지만, 개중 성공하여 반정(反正)이니 정난(靖難)이니 소리 듣는 것이 몇 번이나 되느냐.
하지만... 그나마 이것이 최선의 방편임은 군병의 일과 연 없는 나도 얼추 알겠다.”
“고맙소, 사형. 그러면 나는 나가서 우리 유 선달이 모아온 이들 만나보도록 하겠소.”
유극량은 저 자신을 포함해 총 여덟 명을 모았는데, 그들 만나본 꺽정이는 대뜸 이번 일은 윤원형과 얽힌 일이고 자칫 사람이 죽을 수도, 또 사람을 죽여야 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 자리에서 여덟 중 하나가 뒤로 빠지고, 하나는 오히려 저를 꼭 끼워달라며 앞으로 나왔는데, 그 사람이 바로 이정이었다.
다음날 밤, 인정 친 뒤 다시 사람들이 모였는데, 일곱에서 다시 하나가 더 빠져 여섯이 되었지만 여전히 이정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 거 아니 무섭소?”
“병해 스님과 교분 있는 이라면 성품이 곧은 축에 들 것이요, 반대로 서원군 윤 대감은 성품 비뚤어지기로 조선 제일이라 해도 과언 아니겠지. 곧은 사람이 비뚤어진 사람 해코지하는 일이라면 세상에도 이롭지 않겠는가?”
“언변이 청산유수시니, 문과 공부를 하셨어도 좋았겠소.”
꺽정이가 조금 안다고 할 만한 유일한 양반 문중이 바로 덕수 이씨였다. 이원수와 밤골 도령 이이, 그리고 이기에 이어 이정까지 만나게 되었는데, 사람됨은 제각각이되 모두 한 가지는 비슷하니 바로 말이 많다는 것이었다.
황언징의 집을 나와 이기의 심복 이무강을 만나러 가는데, 어째 가는 내내 이정의 말이 끊이지를 않았다. 딱 야경(夜警)하는 순라군들 귀에 들어가지 않을 만한 정도 목소리로 끊임없이 조잘대는 이정이었다.
“뭐, 그런 얘기는 종종 듣네. 허나 내가 암만 내 조부 되시는 분(이거李琚)만큼 문재(文才)가 있다 한들 도저히 한 군데 앉아서 있지를 못하고 마음 닿는 대로 여기저기 날뛰니 고질이 깊으이. 젊었을 때 그냥 바로 무과나 보았으면 어찌 되었을지 모를 일이지만, 뭐, 이미 늦었지 않은가? 그냥 이대로 살 수밖에.
그래도 내 아들 녀석들은 그러지 말고 꼭 차분하고 현명하게 처신하여 나라와 집안에 모두 좋은 일 하라는 뜻으로 돌림자까지 신(臣)으로 지었다네.”
“저의 품성에 흠결 있음을 깨닫고 고치는 사람은 군자라고 하는데, 그걸 알면서도 차마 못 고치는 사람은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소.”
“그런 사람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 부르곤 하지. 용렬한 보통 사람으로 태어나, 그나마 운 좋게 무산계로 벼슬살이하며 입에 풀칠은 하고 있고, 또 이렇게 소소하게나마 세상에 도움 될 일을 하니, 그래도 나름 좋지 않은가?”
그래도 이렇게 계속 떠벌거리고 있으니, 잔뜩 긴장하고 있는 유극량과 다른 이들의 어깨가 조금은 풀리고 있는 듯하였다. 그것을 알기에 더욱 입 놀리기를 멈추지 않는 것인가? 꺽정이로서는 모르는 일이었다.
“임 당수, 여기입니다.”
앞에서 조용히 길잡이 노릇을 하던 유극량이 고개 돌려 말했다.
“자, 이제 다 왔소. 담소는 내일 마저 하시고, 다들 복면들 쓰시오.”
“임 당수는 안 쓰시오?”
“누군가는 얼굴 드러내야 저쪽에서도 알아볼 것 아니오.”
꺽정이가 앞장서서 곳간 문짝을 열었다.
수십 년 전에 어디 관아의 곳간으로 쓰던 곳인데, 나라의 재정이 궁핍해진 지 오래라 지금은 텅 비어, 본디 어디에 쓰던 곳인지도 알지 못하고 따로 관리하는 이도 없다 하였다. 과연 문 여니 쌀 한 톨 보이지 않고, 그저 달빛에 인영 수십만 언뜻 보일 뿐이었다.
“내 임 처사요.”
“늦었구려.”
“그쪽이 빠른 것이겠지.”
“실없는 소리 말고, 이쪽으로 오시오.”
어둑한 잉걸불 겨우 남은 화로가 곳간 한쪽에 있었는데, 그쪽에 가서 얼굴 비추었다. 상대가 복면을 슥 벗으니, 과연 어제 보았던 이무강 면상이 드러났다.
“그 진 아무개는 어찌하고 그대만 덜렁 왔소?”
“이목이 있소. 말을 삼가시오.”
같은 편인 무뢰배들 앞에서도 말 삼가라 하는 것을 보니, 얼추 짐작이 갔다. 누구 편에 서서 누구를 도모하는지, 그것조차 알리지 않고 그저 재물의 약속만으로 무뢰배들을 모은 것일 테다. 이기의 말마따나 그냥 쓰고 버리기에 족한 무리들.
이 시국에 그런 자들을, 그것도 하루만에 수십이나 모았다는 것을 보면 수완이 결코 나쁘지 않았다.
“내 벗은 행어(行魚) 선생의 동정을 살피고 있소. 혹여 뭔가 수상한 낌새는 없는가 미리 살피고 있는데, 그대 오기 전에 먼저 기별하기를 금일은 창선방 쪽에 계신다 하더이다.”
벗이라 하면 진복창이요, 행어란 형(衡) 파자한 것이니 곧 윤원형이다.
“혹여 그 소식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지 않겠소?”
“그야 그렇지만, 아직 이틀이 더 남았으니 차차 확인해가면 될 것이오.”
“모르는 일이오. 나도 그사이 사람 여럿을 구했으니, 저들을 풀어서 더 살피도록 하겠소.”
그날 모임은 그것으로 파하고 흩어졌다. 정확히는 꺽정이와 이무강, 그리고 각미사 사람들만 흩어지고, 나머지는 그대로 남았다. 나가는 길에 이무강이 자물통 잠그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저쪽에서 군말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미리 합의된 바일 테다. 서로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아예 가운데서 도망 못 하도록 저렇게 막아놓는 편이 외려 나을 것이다. 사흘을 연이어 건량으로 버티며 요강 몇 개에 의지해야 하는 불한당들이 조금 불쌍하기는 했으나, 꺽정이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리고 다음날 밤.
“어휴, 남정네 냄새.”
들어오자마자 꺽정이가 투정을 하니, 이무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지 않소.”
“오는 길에 살피니 주변에 순라군은 없었소. 잠시 문 열고 나가서 몸 좀 풀라고들 하시오. 요강도 좀 비우고. 이거 이러다가 냄새 때문에 걸리게 생겼소.”
“휴, 알겠소이다.”
아닌 게 아니라 미처 못 버틴 미욱한 놈이 밖에 뛰쳐나갔다가 사람들 눈에 띄면 그때는 꽤 곤란해질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무강도 순순히 그 말에 따라, 장정들을 밖으로 순번 정해 내보냈다.
“오늘도 행어 선생은 창선방에 계셨다 하오.”
그나마 상쾌한 밤바람이 조금 들어왔는데, 그러건 말건 이무강은 사뭇 건조하게 용건을 말했다.
“그렇소? 내가 듣기로는 꼭 그렇지 않다고도 하던데.”
“내 벗이 직접 보고 알려준 바요.”
“뭐,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알겠소. 장정들 단속이나 제대로 하시오.”
그리고 다시 다음날 밤. 거사의 때가 되었다.
“준비는 다 되었소?”
“할 수 있는 만큼은 했소.”
“오늘도 행어 선생은 창선방에 계신다 하더이까?”
“벗의 아버지가 병환 심해지시어, 오늘밤은 미처 확인 못 하였소. 그러나 앞서 해질녁에 살핀바 행어 선생은 여전히 창선방에 머물고 계신다 하더이다.”
벗의 아버지라 하면 이기다. 하기야, 그저 악으로 연명하던 늙은이였으니 그새를 못 버티는 것도 족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자, 그러면 해보실까. 불 켜시오!”
“아니, 잠깐, 잠깐!”
“어차피 오늘 지나면 이 창고도 비울 텐데 누가 보건 말건 뭔 상관이오?”
여전히 복면 쓰고 있는 각미사 사람 하나 – 체구로 보건대 틀림없이 이정이었다 –가 곧장 부시(불 붙이는 도구) 꺼내어 몇 번 탁탁 하더니 곧 횃불을 밝혔다.
곳간 안이 불시에 훤해지니, 무뢰배들 모두가 눈을 껌뻑였다.
“자, 다들 보아라! 나는 임꺽정이라고 한다. 봉산 의민당 임 처사라 하면 들어 아는 자도 있겠지.”
그 말을 듣고 좋아라 하는 자는 없고 오히려 두려워하는 자만 종종 있으니 – 저들끼리 ‘저자가 누구기에 그러느냐’ 수근대는 소리도 들렸다 – 틀림없는 강도와 좀도둑, 불한당 패거리였다.
“너희가 왜 이렇게 모여서 사흘 동안 측간도 못 갔는가, 여기 계신 이 나리께서 설명해주시더냐?”
“어... 아니요?”
“그것을 묻지 않는 게 당초 조건이었습니다요.”
“우리는 서원군, 그러니까 윤원형이의 집을 털러 간다.”
아마 이무강이 이들 모을 때, 그냥 어디 대갓집 털러 간다며 모았을 테다. 의심하는 자 있으면 더 큰 대갓집이 뒤에 있음을 넌지시 암시하고, 더 설명하는 대신 후한 보상만을 약속했을 것이다.
과연 뜻밖의 거물 이름이 나오니 경악하는 탄성이 곳간을 메웠다.
“예?”
“어째 삯을 후하게 쳐주겠다 하더라니!”
“아이고, 맙소사! 이제 우리 모두 죽었다!”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질 기세였다. 그러나 밤은 짧고 할 일은 많았으므로, 꺽정이가 다시 말 한마디로 좌중의 주의를 끌었다.
“죽기는 누가 죽느냐? 너희들 중 내 이름 들어본 놈은 알겠지만, 나도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다. 너희 모두 내 말만 따르면 재수없는 놈 서넛쯤 빼고 누구도 죽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모두 살아서 돌아갈 수도 있고. 이 나리가 얼마를 약조하였든 그 이상을 챙겨서 말이다.”
“허, 허나... 나리! 서원군입니다. 서원군 대감이라고요!”
“서원군은 무슨. 너희끼리 있을 때는 윤원형이가 어쩌고 정난정이가 저쩌고 별의별 욕설에 음담까지 입에 담고 살면서 이럴 때만 공대냐? 윤원형이가 퍽 좋아하겠구나.
좋다! 이번 일 끝나고 한양 뒷골목에 남아 있기 무서운 놈들은 모두 황해도 봉산으로 와라. 너희 같은 놈도 모두 받아들여 세상에 도움 되는 놈으로 만들어주는 곳이다.”
다시 한 번 좌중을 노려보니, 이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지금이라도 이건 미친 짓이라며 나가고 싶은 놈 있으면 손 들어라. 다만 우리 나간 다음 어디 가서 발설하면 곤란하니, 내 주먹으로 기절을 시켜두고 갈 테다. 힘을 조절 못하여 너희가 낯선 천장 보며 깨어나거나 숫제 저승으로 가는 일이 있을 수 있으니 잘 생각해서 처신하거라.”
“...”
“에라, 모르겠다!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그래, 우리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고관대작 집 구경이나 해보겠느냐!”
이번 생에나 저번 생이나, 이래서 밑바닥 도적놈들은 좋았다. 상과 벌이 확실하면 저의 욕심 따라 솔직하게 움직이니 얼마나 편한가.
“자, 가자!”
꺽정이가 곳간 문을 박차듯 열며 외쳤다. 그러나 그렇게 호탕하게 나선 보람도 없이, 문턱 넘지 않고 갑자기 멈춰섰다.
“잠깐, 잠깐! 하하, 내 그걸 잊을 뻔했군.”
갑작스러운 사세 변화에 어벙벙하게 있던 이무강이 무심결에 물었다.
“무얼 잊었다는 말이오?”
“네놈 목.”
핏빛 호선이 곳간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그 무뢰한 임가를 만난 뒤로 오늘이 사흘째. 인정 종소리 울려온 지도 벌써 꽤 되었다.
“쿨럭! 수초(遂初, 진복창의 字)가 고생이 많구나.”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경휴(景休, 이무강의 字)도 너도 이런 구차한 일에 매달릴 벼슬은 아니건만, 다 죽어가는 노인 병수발이나 들고 있으니.”
이무강은 임가를 ‘돕는다’는 핑계로 함께 거사 치르러 갔고, 진복창만 남아 이기 곁을 지키고 있었다.
“무릇 거목이 쓰러지면 그 가지에 둥지 튼 제비와 참새도 함께 화를 입는 법입니다. 이치에 따라 처신할 뿐이니 무슨 부끄러움이 있겠습니까?”
“그래, 너의 말이 맞다.”
이기가 정말로 진복창을 생각하여 그런 물음을 툭 던진 것이 아님은 서로 알고 있었다. 그저 일이 잘못되면 함께 비참한 지경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상기하게 하고자 했을 뿐.
“그래서 윤원형은 창선방 집에 있었다 하였더냐?”
“예, 임 처사와 경휴에게 그렇게 말해두었습니다. 지금쯤이면 뜻하던 것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뜻하던 것이라... 그렇지. 이제 그 임가만 입막음하면 될 것이다. 무예가 뛰어나니 애를 먹겠지만, 네가 미리 손 써두었다 했으니 내 근심은 않는다.”
진복창이 답을 하지 않기에 이기가 고개를 들어보니, 딴생각에 빠진 듯 솟을대문 쪽을 보고 있었다. 아마 같은 무리인 이무강을 걱정하는 것이리라. 그리 여겼는데 마침내 고개 다시 돌린 진복창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렇습니다. 임가가 아무리 몸 날래다 한들, 창선방 저택에는 서원군 대감의 가장 무예 뛰어난 문객들이 진을 치고 있으니 살아서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서원군께서는 미리 귀띔 받으시어, 재물 드나드는 세 곳 중 어디에도 머물고 계시지 않으므로 이 또한 다행이지요.”
“무어라?”
“들으신 대로입니다. 거목이 쓰러질 때 함께 화를 입지 않으려면, 참새로서는 마땅히 다른 나무를 찾아야 새로 둥지를 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잦은 토혈로 흐려진 정신을, 진복창의 간사한 웃음이 파고들었다.
“그뿐이겠습니까? 경휴, 아니, 이무강 또한 은혜를 알아보지 못하고 풍성부원군 대감을 독살하려 하였고, 이어서 서원군 대감까지 해침으로써 나라의 동량을 부러뜨리려 하였으니 마땅히 추포하여 그 죄를 물어야 하겠지요.”
한때 함께 이기를 따르던 벗 이무강에게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우겠다는 얘기를 태연히 꺼내는 진복창이었다.
때마침 왁자한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아, 서원군께서 오셨습니다!”
마치 저의 집인 양, 남녀 한 쌍이 휘적휘적 걸어들어와 인사를 올렸다.
“풍성부원군 대감! 언평(彦平, 윤원형의 字)이 병문안을 왔소이다!”
“지아비 모시는 법도에 따라, 정난정 또한 함께 병문안 올립니다. 나라의 중추(中樞)께서 떠나시는 길, 마땅히 배웅하여야 하지 않겠어요?”
죽고 못 사는 두 사람과, 곧 죽을 한 사람이 마주하였다.
“쿨럭! 네... 이놈!”
“내 평소 어르신께 여쭙고 싶은 게 많았소. 그중 하나는 이것이오. 그토록 내 말을 따라 수없이 많은 사람을 쳐냈으면서, 어찌하여 이 윤원형이를 쳐낼 생각은 아니 하셨소? 물론 그러셨다 한들 오늘과 같은 모양새가 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이기를 향한 물음에 엉뚱하게 정난정이 답했다. 마치 규방 안뜰에서 기화요초 감상하는 다정한 부부처럼, 윤원형의 팔짱을 낀 채 이기를 바라보며, 아리따운 목소리로 한없이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
“그리 어렵지 않은 물음이지요. 부군께서는 자전과 피 이어진 사이요, 풍성부원군께서는 그렇지 않으시니까요. 더구나 이미 선비들 사이에서 인망이랄 것도 남지 않았고.”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의 환심이란 언제든 살 수 있는 것인데, 풍성부원군께서는 치부에만 힘쓰시고, 그저 이 사람이 청하여, 아무개를 탄핵해달라 할 때만 비로소 앞장서서 사람을 쳐내려 하시더이다.”
“그렇다면 남은 답은 단 하나지요. 그토록 문무 겸전하신 풍성부원군께서는, 정작 가장 중요한 하나, 권세가 무엇인지를 끝내 알지 못하여 오늘 이 자리에 누워계시게 된 것 아니겠어요?”
“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연소하실 때 사육신의 참변을 보시고, 그 장인 되시는 분이 탐관오리로 탄핵 당하시어 본인의 벼슬길까지 막히는 일을 겪으신 이래, 그저 권세란 자신을 해치려 드는 자를 찍어누르고 스스로 드높이는 데 쓰이는, 그런 수단이라고 단정하고 더 깊게 궁구하지 않으신 것이지.”
“이... 이 물괴(物怪)야! 대체 너희에게 권세가 무엇이기에, 그토록 끝없이 모두를 죽여가며 권세를 얻고 지키려 하느냐?”
손에 묻은 피로 따지면 훨씬 흥건할 이기가 묻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으나, 이기 딴에는 진심이었다. 독기와 분기, 그리고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모두 섞인, 피 토하며 던지는 질문이었다.
“권세라! 크도다, 그 질문이여! 가산을 쌓아나가는 것도, 전답과 저택을 늘리는 것도 나름의 재미는 있지만, 어디 권세만 하겠습니까?”
“권세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지요. 하나의 마음이 여러 사람을 움직이니, 어찌 현묘(玄妙)하다 하지 않을까요?”
이미 저택은 윤원형의 손에 떨어졌는지, 숨죽인 침묵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 가운데 마치 소풍 나온 것처럼 키득대며 쫑알대는 두 남녀.
어찌하여 사람이 다른 사람을 씹어 죽이고 싶다 말하는지, 이기 그에게 그런 저주의 말 퍼부으며 죽어간 이들이 어떤 심정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깨닫게 되는 이기였다.
“자, 풍성부원군께서 병세 깊으시니, 지나치게 희롱함 또한 옳지 못하겠지. 부인, 우리 더 길게 말할 것 없이, 직접 하문하신 바에 대해 답을 드리도록 합시다.”
“아, 그렇지요. 여봐라, 주안상을 내오거라.”
곁을 지키던 자 하나가 곧장 작은 소반 하나를 내어 이기 앞에 놓았다. 그리고 곧 그 위에 술병과 잔이 하나씩 놓였다.
정난정이 곧 웃음 가득한 채 마루 위로 올라와서는, 소맷자락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 비상!”
“그렇습니다. 역시 잘 아시네요. 자, 이 난정이가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약첩을 뜯어 비상을 술잔에 홀홀 털어넣고서는, 그 위에 술을 따랐다.
“권세가 무엇이냐 물으셨지요. 지금 보여드리겠습니다, 대감. 그 술잔을 들이키시지요.”
굴욕감과 분노, 공포. 모든 것이 어우러져, 이기는 부들부들 떨 뿐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있었다. 윤원형도 곧 가세하였다.
“죽 들이키시오. 그리하시면 내 그대 일족을 멸문에 처할지라도 제사 받들 방계 사람 한둘은 남도록 해드리리다. 혹시 아오? 그렇게 남은 이들 가운데서 이름 떨칠 이 하나쯤 나올 지도.”
떨리는 손이 주인의 허락 없이 술잔을 잡는다.
들어 올려진 술잔은 곧장 입가로 향한다.
세상의 영광을 모두 맛본 것만 같던 이기의 혀에, 한없는 굴욕 담긴 극독이 닿았다.
“큭, 커헉!”
촌음도 지나지 않아 이기는 토혈하고서 그대로 쓰러져 죽었다.
“어머, 원래 비상이 저리 강한 독이었던가요?”
“그럴 리가 있겠소? 그만큼 두렵고 노여웠던 것이지. 아니면 진작 죽었어야 했건만 헛된 집념으로 겨우 버티고 있었던 것일지도.”
그때, 집안 ‘정리’를 진두지휘하던 진복창이 뛰쳐 들어왔다.
“대감! 대감!”
“아, 오늘은 자네도 참 공이 많았네. 그래, 창선방 쪽에서 전갈이 왔나보군. 두 놈 모두 붙잡았다 하던가?”
“그것이 아닙니다! 바깥을 보십시오!”
“바깥이라? 대체 어느 쪽을... ?”
그러나 굳이 어느 쪽을 보라는 것인지 물을 필요 없음을 두 남녀 모두 깨달았다. 그리고 그대로 그 자리에 굳었다.
“아니, 저 대체 무슨...”
“세상에...”
서남쪽, 성명방 쪽이 온통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제 빛을 잃은 채 텅 빈 이기의 두 눈에도 그 훤한 불빛이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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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에서 이기가 사망한 이후 이무강과 진복창의 운명은 잠시 갈리게 됩니다. 이무강은 이기가 몰락할 때 함께 공격당해 파직당하였으나, 진복창은 윤원형이 이기를 몰아내려 함을 직감하고 곧장 편을 갈아타 이기를 공격하는 데 동참하게 됩니다. 이때 진복창은 이기를 탄핵하려 한 그의 스승 구수담의 편을 드는 척을 했다가, 이기가 몰락하자 구수담을 배신하여 사사(賜死)에 이르게 했고, 그 뒤로 대사헌 등 삼사의 요직을 거치며 윤원형을 충실히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장성한 명종이 자신의 친위 세력이자 윤원형의 대항마로 이량(李樑)을 내세우게 되면서, 윤원형은 잠재적 배신자이자 여론이 좋지 않은 인물인 진복창을 먼저 내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결국 진복창은 윤원형의 탄핵으로 파직당해 삼수로 유배되었고, 이후 형이 위리안치로 격상되었습니다. 또한 쥐죽은듯 살던 이무강도 이때 ‘정리’당해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를 가게 되지요,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중간에 이정이 언급하는 ‘조부’란 곧 성종~연산군 시기 활동했던 문신 이거입니다. 세자시강원 보덕으로서 세자 시절 연산군을 가르치는 일을 맡기도 했으며, 갑자사화가 벌어지기 전에 세상을 떠나 큰 해를 입지는 않았습니다. 벼슬이 정3품 병조참의에 달했기 때문에, 그 아들 이백록과 손자 이정 모두 음서로 관직을 얻을 수 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