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참새는 사마귀를 노리네 (3)
이기가 아직 진복창이 배신한 줄 모르고 병석에 누워 좋은 소식 들려오기만 하염없이 기다리던 무렵.
머리 잃은 이무강의 몸통이 풀썩 쓰러지자, 곳간에 모인 무뢰배들은 두려워하고 또 기뻐하였다.
저처럼 솜씨 좋은 사람이 직접 나선다면 손해는 보지 않을 것이라 여기어 기뻐하고, 그 솜씨가 언제 저들 향할 지 몰라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오늘밤 윤원형 집 터는 일에 함께할 원인이 되어주었으므로 꺽정이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반면 이정과 유극량은 크게 개의(介意)하는 듯했다.
“몸들 풀고 있어라. 순라군 피해 잽싸게 달려나가야 하니.”
“예, 나리!”
어느새 호칭이 ‘나리’로 통일되었다. ‘으그그’ 하며 다들 몸 푸는 동안, 눈앞에서 사람 하나 죽어나간 데 여전히 충격 받은 채 있는 각미사 사람들을 따로 불러내었다.
“이미 내 사형과도 이야기된 바요.”
“허나...”
이기와 그 패거리의 계획대로 따라간다면, 그리고 그것이 어쩌다 잘 이루어져 오늘밤 윤원형 목을 칠 수 있다면 그 또한 좋기는 할 것이다. 아마 전생의 꺽정이에게 똑같은 기회를 주었다면, 백이면 백 그대로 따라가 저 창신방 저택에 들이박았을 것이다.
허나 그것은 범상한 도적의 생각. 당장 눈앞에 보이는 쉬운 길 대신 오로지 가지 않은 길, 남들은 있는지도 모르는 길만 골라 가려 하는 꺽정이였으므로, 곧장 그 반대 경우를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과연 윤원형을 오늘 잡아 죽인다면, 꺽정이가 목표로 세운 바, 조선국 뒤엎는 것을 이루어낼 수 있겠는가?
도성 한복판에서 사람 죽여놓고 내가 했노라 뻔뻔히 나설 수는 없고, 그러니 윤원형 죽은 뒤 그 공백을 의민당이 차지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 자리에 정말 올바른 선비가 들어와, 꺽정이가 기억하는 그 도탄지경으로부터 조선을 건져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꺽정이가 아는 조선국이라면 그렇게 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오늘 윤원형을 잡아죽이는 것이 얼마나 이득 되느냐를 따지기에 앞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도 있었다.
“이기와 어울리는 자라면, 그 이기가 사경 헤매는 동안 가만 앉아서 기다리겠소? 아니면 새로 의탁할 주인 찾아 돌아다니겠소?
뭐, 이 이무강이야 억울할 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자에게 윤원형이 창선방에 있다고 알려주었을 진복창이는 그간 계속 윤원형이에게 재물 바치러 그 앞을 오가고 있었지. 그러므로 배신하지 않았을 공산보다 배신했을 공산이 더 크고, 윤원형이가 창선방 집에 있을 공산보다 그렇지 않을 공산이 더 크오.”
“이무강, 진복창... 두 사람 모두 세간의 평판은 땅에 떨어지다 못해 구멍 파고 내려갈 정도기는 하지. 허나 적어도 베기 전에 물어볼 수는 있지 않았는가? 곱게 물어서 답이 나오지는 않겠지만, 그대 정도라면 힘 조금만 써도 족히 이실직고하게 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살인멸구가 답이었소. 어차피 우리는 창선방에 가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저놈이 중간에 빠져서 이기든 윤원형이든 제 상전에게 고해바치는 것은 미리 막아두어야 하니까.”
“그러면 어디로 갈 생각인가? 아니, 애초에 윤원형을 노리지 않는다면 여기 이 사람들을 데리고 무얼 할 생각인가?”
“언제 내가 윤원형을 안 노린다고 했소? 그저 방법을 조금 달리할 뿐이지.”
창선방에 윤원형이 함정을 파 두었다고 하지만, 그것으로 윤원형의 대비가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특히 가장 치고 빠지기 쉬운 인달방 저택이라면, 역으로 나름의 방비를 갖추어두었을 것이다. 더구나 애초에 이기의 엉성한 계획이 누설되었다면 윤원형이 다른 재물 드나드는 저택에 머물고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윤원형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않고 그냥 파하자니 그 또한 아까웠다. 얼마 안 되는 의민당으로 나라 하나를 쥐락펴락하는 권신을 대적하려면, 손에 잡히는 기회가 께름칙하다 하여 내버릴 만큼 여유를 부릴 수 없는 노릇.
때마침 세 저택을 드나드는 재화의 종류가 다르다 하였는데, 그로 인해 꺽정이와 이지함이 세운 엉성한 군략에 큰 도움 될 물건이 있음직한 곳 어디인지도 추측할 수 있었다.
“사람이 부족하여 하룻밤에 한 군데만 털 수 있고, 그나마 윤원형을 확실히 잡는다는 보장도 없지. 그러므로 윤원형 목숨 대신 다른 귀중한 것을 노릴 생각이오. 그리하여 윤원형 처지 곤란하게 만들고, 노여워하며 여기저기 찔러보고 의심하도록 만들 심산이외다.”
“아, 설마! 그래서 그때 그 통나무를 옮기라 하였던 것인가요? 여전히 어디 쓰실 생각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이틀간 꺽정이와 함께 이곳저곳 저자를 돌아다녔던 유극량이 뭔가 떠오른 듯 물었다.
“그렇소. 우리는 성명방 쪽을 칠 것이오. 그리고 거기서 끝내지 않고, 윤원형이 권세 우습게 되었음을 도성 백성 모두가 알도록 할 생각이지.”
이기가 말하기를, 성명방 저택은 선대의 권신 김안로가 가난뱅이들 집 밀어내고 세웠다 했던가.
그렇다면 그 주변은 여전히 궁핍한 이들 모여 사는 동리일 것이다. 지난 이틀간 유극량과 함께 그쪽 돌아다니며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두었다.
“도성 백성 모두가 알게 한다니, 그 무슨 말이오?”
“저택을 송두리채 불사르면 모두가 자다가도 일어나 그 구경을 하지 않겠소? 싸움구경 다음으로 재밌는 게 불구경이라고들 하니.”
“그것은 아니 될 일이오. 윤원형이야 당해도 싸다 하지만, 그 주변 가난한 백성들은 무슨 죄란 말이오? 임 당수 그대가 처음 말했던 것과는 다르지 않소?”
“흐흐, 걱정 마시오. 아까 유 선달이 말한 통나무의 쓰임새가 거기에 있으니.”
말하면서 슬쩍 곁으로 보니, 그새 무뢰배들이 몸풀기 마치고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도열해 있는 게 보였다.
“어차피 계획이란 것은 한 번 시작하면 바로 어그러지게 되어 있소. 지금 설명한들 큰 의미 없으니, 차차 보고서 나중에 묻도록 하시오.”
밤을 타고 뛰쳐나간 꺽정이와 그 패거리는 곧 성명방 저택에 닿았다.
이기의 가짜 뇌물 행렬도 이제 끝이 났는지, 여전히 안쪽에 불빛은 훤하였으나 대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꺽정이는 무리를 반으로 쪼개어, 유극량으로 하여금 한 패를 이끌고 저택 옆쪽 골목에 가 있게 하였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다 그 자리에 당도하였거려니 감이 왔을 때,
“자, 가볼까.”
무뢰배들 중 한 놈에게 뜯어낸 도끼를 휘휘 돌리며 꺽정이가 신호를 보냈다.
“게 누구 있느냐!”
대문 앞에서 한 번 우렁차게 사람 찾고,
곧장 문을 도끼로 쪼갰다.
금극목(金剋木) 이치에 따라 퍽- 퍽 도끼질 두 번에 문은 걸레짝이 되고, 이어지는 발길질 한 번에 마침내 박살이 났다.
부서진 문 뒤로는 꺽정이 외침 듣고서 헐레벌떡 나오던 노복들이 어리둥절한 채로 서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들어라! 우리는 이 저택을 털러 온 도적들이다!”
“뭐라고!”
“이놈이 간이 부어도 보통 부은 게 아니구나!”
대개 상전이 윤원형쯤 되면 그 집 노비들도 어지간한 상민들쯤은 제 아랫사람으로 보고 다니기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곧 저렇게 꺽정이의 간장(肝腸) 걱정해주는 말이 나오는 것이었는데, 그 뒤로 우르르 서른 명 남짓한 무리가 들어오니 그 말은 쏙 들어갔다.
“자, 내가 말해준 구령은 모두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러면, 쳐라!”
“우와아아!”
꺽정이가 돌개바람처럼 짓쳐들어가고, 그 뒤로 서른 명 무뢰배들이 함께 돌격하였다.
“이놈들! 내가 바로 의민당 임꺽정이다!”
노복들도 다들 힘깨나 쓰는 자들이고, 가끔 도둑도 잡곤 하는지라 곧장 대열 맞추어 몽치나 도리깨, 부지깽이 따위 휘둘러 막아보려 하였으나, 이게 웬걸.
“아고고...”
“저, 저게 사람이냐?”
무뢰배는 고사하고 꺽정이 하나를 막지 못하여 튕겨나가고 자빠졌다.
“에이, 이놈! 환도 받아라!”
“싫다.”
그제야 튀어나온 문객 같은 자 하나가 칼 들고 달려들었는데, 역시 꺽정이 발차기 얻어맞고 멀리 나가떨어지더니 더 움직이지 못하였다.
노복들은 더욱 두려워하며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하였는데, 그때 꺽정이가 명을 내렸다.
“자, 외쳐라!”
“항복하면 포목이 공짜!”
“투항하면 포목도 주고 논밭도 준다!”
“면천도 시켜준다!”
여전히 몽둥이 휘둘러 사람 머리통 깨고 등허리 부러뜨리고 있으면서 외치기는 저런 말을 외치니, 이 이치에 닿지 않는 상황에 문객과 노복들이 한마음으로 혼란에 빠졌다.
보통은 ‘가만히 있으면 목숨은 살려준다’로 끝나곤 하는데, 생각도 못한 말이 나오니, 벌써 절반은 쓰러지고 나머지는 마당 반대편까지 밀려난 노복들 사이에서 수근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끄럽다! 우리 대감마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이 얼마나 되는데...”
그사이 노복들 거느리는 문객 하나가 더 튀어나왔다.
“도끼.”
“옙.”
옆의 무뢰배로부터 도끼 건네받고서는, 곧장 그 문객 놈 머리통을 향해 던졌다. ‘퍽’ 소리와 함께 수근대는 소리도 뚝 그쳤다.
“너희가 우리 말을 순순히 따르면 목숨도 살려주고 포목도 주겠다! 남은 사람들 머릿수 줄어들면 한 놈당 돌아가는 몫은 늘어나니, 평소 고깝던 놈 있으면 지금이 머리통 쪼개줄 때다!”
여기저기 행랑채에서 뛰쳐나오는 노비들도, 무언가 이상함을 깨닫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너희 서원군이 얼마나 관대한 상전인지는 모르지만, 너희가 평생 우마처럼 일해도 면천은 아니 시켜주지 않겠느냐?, 봉산에 요새 빈 논밭이 매우 많다. 너희가 오늘 너희 몫 챙겨서 도망친 다음 봉산으로 오면, 모두 번듯하게 저의 밭 일구며 상민으로 살 수 있게 해주마.
물론 여기서 그냥 노비 노릇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건 너희 마음이다. 그런 놈들 모가지 따는 것은 내 마음이고.”
행랑채에서 막 나온, 꾀죄죄한 남정네 하나가 가장 먼저 호응했다.
“젠장! 약속 꼭 지키시오!”
“나도! 나도!”
“아니 된다! 이놈들이 은혜도 모르고...”
“은혜는 개뿔! 그럼 저 도깨비 같은 놈은 너 혼자 상대해라!”
곧 투항하는 자, 끝까지 버티는 자, 그 버티는 자 뒤통수를 도리깨로 후려치는 자 등이 속출하며 잠시 마당 한쪽에서 버티던 전열은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훨씬 묵직한 쿵쿵 소리 울려온 것은 그때였다.
“옳지! 잘 왔다! 딱 맞추어 잘 왔어! 때려라! 계속 때려!”
꺽정이에게 화답하듯, 쿵쿵 울리는 소리가 점차 커졌다. 이윽고 영차영차 하는 함성과 함께, 곧 목극토(木剋土) 이치에 따라 저택의 담장 한쪽이 무너져내렸다.
“헤엑, 헤엑. 저희 왔습니다!”
“그래, 시원하게 잘 때려부수었다.”
땀에 흠뻑 젖은 이들은 통나무 던져놓고 쓰러지듯 주저앉고, 그사이 꺽정이는 그나마 멀쩡한 유극량을 찾아, 앞서 던진 도끼를 주워다 건네주면서 다음 지시를 내렸다.
“곳간 문을 모조리 부수어 열고, 포목은 적당히 챙긴 뒤 나머지를 나누어주시오.”
“미곡은 말씀해주신 계획대로 하면 되겠지요?”
“그렇소. 불 지를 준비도 똑같이 해주시고. 그럼 우리는 찾으러 온 것 찾으러 가보겠소.”
하고서는 이정과 다른 각미사 사람들만 데리고 저택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갔다.
그사이 안쪽은 이 기회에 한몫 챙기려는 자, 상전의 은혜 있다면서 그런 자들을 때려눕히려는 자, 그냥 조용히 도망가려다가 싸움판에 휘말린 자, 상전이고 포목이고 그냥 다른 종들의 얼마 안 되는 재산이나 훔쳐가려는 자 등등이 뒤엉켜 한바탕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집사노(執事奴, 집사 노릇하는 종)! 집사노 있느냐!”
개중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종들 꾸짖는 자 있기에, 그놈 복장을 뻥 발로 걷어찬 뒤 외쳤다.
사람이 갑자기 가로로 휙 날아가자 놀란 종들이 드잡이질을 잠시 멈추었다.
“이놈입니다요!”
구석에서 몰매 맞고 있던 종놈의 멱살을 잡아올리며 다른 종이 말했다.
집사노라 하면 노비들 가운데서는 위세 부릴만한 자리다. 필시 이 저택 안 노비들 중 자신이 가장 윗사람이라며 행패를 부렸기에 지금 저 꼴이 난 것일 테다.
“뭐라? 젠장. 이놈 죽은 것 같은데.”
미동도 안 하는 놈을 슥 본 꺽정이가 말했다.
“확실하게 알아보려면 역시 배를 갈라보아야겠지. 염통이 뛰나 안 뛰나 보면 될 것 아닌가.”
“헉! 살아있습니다! 살아있다고요!”
팅팅 불은 눈을 애써 뜨며 집사노가 힘껏 말했다.
“옳거니. 네놈 상전이 미곡이며 포목이며 거두어들이는 농장들이 어디에 있고 소출은 얼마나 되는지, 죄다 적어서 기록해둔 문권(文券, 문서)이 있으렷다?”
“그, 그것이... 미곡과 포목 출납은 더 높으신 분들이 하시는지라...”
“그래도 그것이 어디 있는지는 알 것 아니냐? 모른다면 어쩔 수 없지. 그렇지 않으냐?”
부르튼 눈으로 방금 전까지 제게 몰매 맞히던 다른 노복들을 고쳐본 집사노가 결국 승복하였다.
“말씀 듣고 나니 조금 떠오르기도 합니다요. 부디 목숨만은...!”
한 번 울음보 터져 그때부터 저의 토끼같은 안사람과 여우같은 자식들 – 뭔가 바뀐 것 같기는 했다 – 사정을 털어놓는 집사노를 따귀 한 번으로 달래고서 그 뒤를 따라 더 깊이 들어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이놈이 누굴 바보로 아느냐.”
“예?”
사대부가가 대체로 어떻게 생겼는지 전생에 자주 털어보아서 알던 꺽정이였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저것은 암만 보아도 안채가 아니라 십수 명 일가가 족히 살 만큼 큼직한 별채였다.
“왜 안채로 향하지 않느냐?”
“그것이... 포목과 미곡 출납을 정리하는 일은 워낙 중하여 문객 분들께서 손수 하십니다요. 하지만 어디어디 농장이 있고 어느 고을에 신공(身貢) 바치는 노비가 얼마나 있는지 따위는 문객 나리들께서 모두 다루시기에 번잡한지라 저희 종놈들 중 글자와 셈 아는 이들이 처리하곤 합지요.”
저를 속였다며 언제 그 무서운 주먹이나 발이 날아올지 모르는 고로, 한껏 움츠러들며 집사노가 변명하였다.
“그래서, 저 별채에 그런 것들이 있단 말이냐? 별채 어느 방이냐?”
“저 별채 전체가 그런 문권 보관하는 곳입니다요.”
“무어라?”
“허어...”
말로만 듣던 윤원형의 축재를 이렇게 보게 되니, 따라온 각미사 한량들의 복면 밖으로 탄식이 빠져나왔다.
“에라이, 일이 커졌네. 마침 그대들 데려왔으니 다행이오.”
꺽정이가 섬돌 위로 올라가, 자물통을 통째로 박살내며 말했다.
“어이, 집사노, 너는 이제 꺼져라. 바깥쪽 곳간에서 지금 포목을 나누어주고 있으니 임 처사가 보냈다고 얘기하면 네 몫을 줄 것이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임 처사 하명하신 바를 집사노는 충실히 이행하였다.
“이제 서둘러야 하네. 순라군들이 언제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으이.”
이정이 걱정하며 말했다.
“걱정 마시오. 다 준비한 바가 있으니.”
별채 안쪽으로 횃불 들고 들어오니, 천장부터 바닥까지 빼곡하게 종이와 수첩, 책 등이 가득 차 있는 게 보였다. 책이라 해도 성현의 말씀이 아니라, 그저 윤원형이 거두어들이는 소득을 기재해둔 것에 불과하였다.
“자, 여기 부위 어르신 말씀마따나 여유가 그리 많지는 않소. 여기서 황해도에 있는 농장이나 사람 이름 적힌 것 보이면 모두 챙기시오!”
“임 당수, 여기 보니 도(道) 별로 나눠둔 듯하오!”
눈치 빠른 각미사 한량 하나가 이 문권들이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지를 알아차리고서는 말했다.
“잘 되었네. 황해도 것만 모두 챙기시오!”
유극량을 뺀 한량들 모두가 달려들어 미리 챙겨온 주머니에 싹 밀어넣기 시작했다. 손이 여럿이니 그리 오래지 않아 서가(書架) 둘이 통채로 비워졌다.
“이거, 생각보다 너무 빠진 티가 많이 나는데. 무엇이 없어졌는지 윤원형이 알게 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또 다시 걱정해주는 이정이었다.
“흐흐, 윤원형이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오.”
꺽정이가 아직 종이로 꽉 찬 다른 서가 쪽으로 횃불을 휙 던지며 웃음을 지었다.
불꽃은 바짝 마른 종이를 게걸스레 삼키더니, 곧 별채 전체를 휘감았다.
자루와 주머니를 들고서 다시 곳간 앞으로 나오니, 노비들은 온데간데없고 옷 여기저기에 포목 쑤셔 넣은 무뢰배들만 남아 있었다.
“준비 끝났습니다, 당수.”
“자, 그러면 다들 목청 가다듬고, 횃불들 들어라!”
무뢰배 중 하나가 눈치껏 꺽정이에게도 횃불 하나를 건네주었다.
금극목 이치로 대문을 박살내고 목극토 이치로 곳간 옆 담장을 무너뜨렸으니, 이제는 목생화(木生火) 차례였다.
신호하듯 횃불 휙 던지니, 꺽정이가 별채 털고 나온 사이 열심히 섶 따위를 얹어놓은 마루부터 행랑까지 불이 금세 번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올해도 봄가뭄 극심하여, 날씨가 늦겨울처럼 쌀쌀하고 건조하였으므로 불에게도 참 좋은 때가 아닐 수 없었다.
이웃이지만 이웃이라 차마 부르기도 무서운 서원군 대감 댁에 변고 생겼다 하여 숨죽이고 있던 건너편 민가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웅성대는 소리 들리기 시작했다.
“불이야!”
“서원군 댁에 불이!”
예상대로의 반응. 꺽정이가 무뢰배들 모아놓고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사흘간 고생들 많았다. 봉산 찾아오면 내 술 한 잔씩 사주마.”
인심은 곳간에서 나기 마련이지만, 남의 곳간 털 때도 마찬가지로 나곤 하는 법. 언제 그를 경계하며 쳐다보았냐는듯, 불한당들 모두 (딴에는) 해맑게 대꾸하였다.
“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네놈들 할 일 하면서 흩어져라. 가라!”
불타는 행랑과 무너진 담장 틈으로, 주머니와 소매 빵빵해진 불한당들이 곧장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리 약조하였던 대로, 밤거리 달리면서 외치기 시작했다.
“윤원형이 천벌을 받아 죽었다!”
“그놈 집에 아무도 없으니 쌀 챙기러들 가라!”
“윤원형이 죽었다!”
“쌀 챙기러 가라!”
‘불이야’ 외치던 자들은 곧 잦아들고, 피골 상접한 무리들이 무너진 담장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윤원형이 죽었다’ 소리 듣고 혹여 저에게 큰 문책 떨어질까 두려워하던 순라군과 멸화군(滅火軍, 소방수)들은 말 그대로 부랴부랴 달려와 사력을 다하였지만, 불길이 마음처럼 쉽게 잡히지 않았다.
불을 끄려면 당연히 불난 곳까지 가야만 하는데, 성명방 살던 가난한 백성들이 윤원형은 죽고 그 집은 텅 비었다는, 누가 퍼뜨렸는지 알 수 없는 말을 듣고 모두 일어나 불난 곳 한가운데로 달려들었기에 길이란 길이 모두 막히고야 말았던 것이다.
허나 누가 백성을 탓할 수 있으랴.
그냥 잡곡도 아니요, 바로 쌀이다.
흔히 관에서 쌀 나누어줄 때와 달리 겨도 모래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입쌀.
그 갈망에 이끌린 굶주린 백성들이 부나방처럼 달려들어, 성명방 거리를 틀어막았다.
불이 바람 타고 번져 그들의 보잘것없는 집을 불태우건만, 그들은 저들 집 대신 아직 못 꺼낸 곡식이 남아 있는 윤원형네 곳간의 불을 끄려 달려들었다.
삼경(三更)에서 사경(四更) 넘어갈 무렵(오전 1시경) 난 불은 결국 성명방을 절반 넘게 태우고야 말았다.
“꺽정아. 처음부터 저리 될 줄 알았느냐?”
도성 민심이 곧 흉흉해질 것이 그야말로 불 보듯 뻔하여, 꺽정이는 병해를 모시고 목멱산 쪽으로 성벽을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신경이 쓰여, 등 뒤를 보고야 말았다.
멀리 해가 뜨고는 있었지만, 매캐한 연기 때문인지 어째 어제보다 덜 밝아보였다. 아직도 성명방 곳곳에는 불씨가 남아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믿어주실 테요?”
“되었다. 네놈 정도 속마음은 훤히 들여다보이니.”
“나라가 엉망임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도성 사는 백성들인데 저의 집 불타건 말건 이밥 한 번 먹어 보겠답시고 그렇게 달려들 줄은 몰랐소. 그냥 윤가놈 집 옆에 사는 가호 몇몇에서 사람 끌어와, 순라군들의 이목을 어지럽게 할 생각이었지.
아예 길목 틀어막고 불 번지도록 할 만큼 사람 몰릴 줄 알았다면... 글쎄...”
아마 그렇다 하더라도 꺽정이는 저의 마음먹은 바를 그대로 옮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병해 앞에서 인정하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아프고 꺼려졌다.
두 사람은 묵묵히 산등성이를 함께 걸어 올라갔다.
곧 성곽이 눈에 들어왔다. 늘 그렇듯 지키는 병사는 없었다.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 하나쯤 숨어있다 한들, 여차하면 제압하면 그만이다.
“먼저 가겠소.”
성벽을 훌쩍 뛰어넘어, 아직 다 썩지 않은 낙엽을 밟으며 풀썩 내려앉았다.
“사형, 이쪽이오.”
“오냐, 내려간다.”
곧이어 떨어지는 병해를 받아내고서 손을 툭툭 털었다.
“이 짓도 젊었을 때나 쉽게 했지, 지금은 못하겠구나. 그때는 나 혼자서도 훌쩍 잘 넘어다녔는데.”
“구름 타고 왔다갔다 하신 것 아니었소?”
“이놈, 놀리기는.”
이어서 산길 내려가는 동안에도 인적은 쉬이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이번에 집 잃은 백성들도 그렇게까지 손해는 안 보았을 지도 모른다.”
“어째서 그렇소?”
“윤원형이 아무리 금은보화를 산처럼 쌓아두고 있고 또 전국 각지에 농장이 수두룩하다지만, 당장 그 아래서 부리는 문객이며 노비들에게는 포목과 미곡으로 삯을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헌데 그것이 네놈 불장난으로 모조리 사라졌으니, 결국 다른 보화를 꺼내어 포목과 곡식으로 바꾸어야 하겠지.
따라서 도성 안의 미가(米價)는 껑충 뛸 것이요, 네 덕에 횡재하고 동시에 횡액(橫厄) 당한 가련한 백성들은 그 틈을 타 꽤 쏠쏠하게 벌이할 수 있지 않겠느냐? 대신 이밥은 포기해야 하겠지만.”
“그리 된다면야 참 다행이겠소. 그래도 백성들 걱정할 여력 있으면 어지간하면 우리 쪽도 좀 걱정해주시구려.”
“어차피 네놈은 처음 얼굴 보았을 때부터 내 걱정거리였다.”
피식 웃은 병해가 이번에는 자못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허나 농담 제쳐두고 생각하면 너희 의민당이 장차 어찌될지 걱정이 되기는 하는구나.
이번 일로 윤원형의 위엄은 적잖이 깎일 것이다. 재화도 재화지만, 무엇보다 하늘의 나는 새도 떨어뜨릴 줄 알았던 윤원형이 사실은 저의 집도 제대로 간수 못한다 이야기가 나돌 터이니.
허나 크게 보면 콧잔등 한 대 때려 코피 흘린 정도고, 분기탱천한 윤원형이 숫제 전심전력으로 너희를 토멸하려 달려들게 될 수도 있지 않으냐?”
“뭐, 내 얼굴 드러내놓고 또 이름까지 공공연히 드러냈으니, 필경 윤원형이도 내가 일 벌였음을 곧 깨닫겠지. 그렇게 되면 저의 실추된 체면 때문에라도 어떻게든 나를 대역죄인으로 만들어 벌하려 할 것이오.
그리고 그것이 내 본디 바라던 바이기도 했고. 그놈이 악 받쳐 달려들면 달려들수록 우리 쪽에는 이득이니까.”
황언징의 집에서 만났을 때, 꺽정이와 이지함이 어떤 계획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이미 한 번 들었던 병해였지만, 이렇게 그 계획의 첫 단추가 꿰이는 것을 목도하니 걱정이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우리 잘 되라고, 봉은사 가서 염불이라도 열심히 해주시오.”
“이놈아, 시주라도 바치면서 그런 얘기를 해라. 도성 민심이 워낙 소란스러워 조만간 자전께서도 봉은사에 한 번쯤 들리실 테니, 그렇게라도 네게 도움 되는 일 해보려 노력하마.”
“그렇게 윤원형이 발목 잡아주면 나야 고맙지만, 그래도 너무 힘 빼진 마시오. 너무 모습 드러내어 윤원형이 사형 해코지하려 달려들면 그게 더 곤란하니까.”
말이야 퍽 건조하게 하지만 그 가운데 아끼는 마음 있음이 보였다. 우악스럽기는 퍽 우악스럽고 인명 거두는 것도 태연하게 하는 놈이, 어찌 저의 말과 달리 정은 이리 많다는 말인가.
“그래, 그건 걱정 말거라. 이왕 시작한 난리통, 내 한 몸은 알아서 건사할 테니.”
장차 한바탕 닥칠 이 난리가, 사람 피 덜 흩뿌리고 끝나기만 기원해야 하리라.
다 타고 재만 남은 성명방 집터에, 노복들이 하나둘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윤원형은 그들을 모두 모아 교하의 본가로 보냈다. 그의 위엄에 대해 의심하는 말이 이미 도성 안에 떠돌아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니, 적어도 여기서 더 퍼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마음 같아서야 본가로 가는 중 모두 죽여 임진강 물고기밥으로 만들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럴 여력이 되지 않았다.
전국의 농장에 사람을 보내 그쪽에 보관되어 있는 각종 문권들을 베껴 새로 올리라 연통 보내는 것도 일, 그리고 다른 곳에 남아 있는 치부책(置簿冊)과 그 내용을 대조하여 일일이 확인하는 것도 일. 성명방에 본래 있던 이들 대신 새로운 수족을 구하는 것도 일. 끝내 도망쳐 돌아오지 않은 노비들 추쇄하는 것도 일.
허나 이러한 일들은 따지자면 잡무(雜務)에 불과하니, 짜증 참고서 몇 달 정도만 버티면 금방 회복할 수 있는 정도였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은, 불 꺼진 자리에서 불 대신 번지는 소문이었다.
윤원형은 이미 타 죽었으며 지금 윤원형 행세하는 것은 대비가 구해온 닮은 사람이라는 헛소문이 돌고, 을사년 옥사의 원혼이 나타나 호롱불을 뒤엎었다는 말도 돌았다.
도성 풍속이 허황된 말은 배격하는 쪽으로 조금 바뀌었기에 그나마 이치에 닿는 소문도 돌았으니, 개중 그럴듯한 것으로는 충주 옥사에서 살아남은 누군가가 원한 품고 불을 질렀다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그처럼 그럴듯한 소문일수록, 어쩌면 서원군 윤원형의 하늘 찌르는 위세라는 것도 사실 그렇게까지 뾰족하지는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암암리에 퍼뜨리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윤원형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손에 권세가 있으니, 참을 거짓으로 만들고 거짓을 참으로 만들 수 있으며, 국법은 고치고 옳고 그름은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다.
농장 문권은 불타 사라졌을지언정 농장 자체는 남아 있듯, 조금 깎이고 금이 가긴 했어도 아직 권세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권세로도 저 임거정은 어찌할 수 없지 않은가?’
어느새 의문의 싹이 터서, 고개를 내밀었다.
의민당의 수괴 임거정은 대체 무엇을 원하는가? 무엇을 위하여, 또 무엇을 믿고 조선국에서 가장 권세 높은 자신을 대적하는가?
의민당의 당세는 대체 얼마나 뻗어 있는가? 정말 황해도 한 곳에만 머물고 있는가? 어쩌면 저 각미사라는 한량들도, 성명방의 불길을 뚫고 그의 곳간을 털어갔다는 궁핍한 백성들도, 그리고 아직껏 눈치 없이 지난날 임거정의 패거리가 나누어준 ‘의’자 완장 차고 다니는 자들도 모두 같은 무리 아닐까?
그 무지의 공백으로부터 끝없이 의문이 솟아난다. 참으로 불쾌하고... 또 두려웠다.
그렇게 고뇌에 빠져 있던 윤원형은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퍼뜩 깨어났다.
“대감, 붙잡을 자들은 모두 붙잡았고, 캐내야 할 바는 모두 캐내었습니다.”
도망치다 붙잡힌 노비, 곧장 내빼지 않고 뒷골목 어슬렁거리다 덩달아 잡힌 무뢰한, 그리고 딴에는 무고하다 외치지만 실지로는 불타는 집 곳간을 꽤 털었음이 틀림없는 인근 백성까지 모두 붙잡아, 윤원형이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신문한 두리손이었다.
노비야 그렇다 쳐도 양민을 함부로 가두어 고신(拷訊)을 가한다는 것은 국법 어디에도 없었으나, 그것이 무엇이 중하겠는가.
“후, 그래. 수고하였다.”
그러나 두리손은 물러가지 않고, 오히려 고개 꼿꼿이 세우고는 그의 아비 아닌 아비를 응시하였다.
“무엇이냐?”
“대감께서 저 흉악한 의민당 무리로 인하여 이처럼 심려(心慮) 크시니, 마땅히 계책을 마련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로 닮은 두 쌍의 눈이 마주쳤다.
“의민당의 본거(本據)는 바로 봉산과 재령 사이에 있는 청석골입니다. 그자들이 대감의 사제(私第, 사저)를 들이쳐 흉악한 일을 벌였으니, 마땅히 같은 방법으로 앙갚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공하면 그들 무리에 크나큰 타격을 줄 수 있고, 실패하면 조정의 여론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그런 계책이 있습니다.”
“말해보아라.”
“예, 그러면 ‘소자’가 말씀 올리겠습니다...”
‘소자’ 두 글자에, 윤원형은 움찔하였고, 두리손은 그 변함없는 낯 한쪽으로 미소를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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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금화군(禁火軍)으로도 알려져 있는 멸화군은 세종 연간에 화재 예방 및 진압을 위해 창설되었습니다. 그러나 한양의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고작해야 금화군 30~50명과 그들에게 딸린 노비들(급수비자)로는 효과적인 소방이 불가능하다는 문제가 부각되었습니다. 여러 차례 해편과 재창설, 개편을 거치던 멸화군은 결국 ‘가장 쓸데없는 관청’이라는 혹평과 함께 인조 연간에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이후 소방 업무는 도성의 여러 군영과 포도청 등으로 이관된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