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상전벽해 (2)
해가 슬슬 기울기 시작하니, 산중의 나무는 그림자 길게 드리워 벌써 땅거미 진 듯하였다.
그런 산속을 사람 수십이 누비고 있는데, 행렬 앞에 있는 것은 윤두리손이요, 그 옆에서 길잡이 노릇하는 이는 가짜 의민당원으로 작년에 두리손이 몰래 들여보낸 이동산(李同山), 본디 이름으로는 정배임(鄭培任)이었다.
“임 당수 그자가 어찌 이런 곳을 알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참으로 자리를 잘 잡았습니다. 저쪽으로 올라가셔서 직접 보시지요.”
길잡이가 먼발치에 있는 큰 바위 가리키며 말했다.
“허.”
굳이 자신이 자세히 말할 필요 없는 상대들, 예컨대 그보다도 더 신분 천한 사람이나 그의 부하들 앞에서는 본디 성품대로 퍽 과묵해지는 두리손이었다.
그런 두리손 입에서조차 탄성이 나올 만큼 청석골 산채의 자리는 절묘하였다.
서쪽 멸악산과 남쪽 운달산(雲達山) 산줄기가 굽이치며 흘러가는 그 가운데에 있고, 다시 그 안에서도 양옆에 산줄기 두르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니 산기슭에서도, 산마루에서도 보이지 않고, 오직 가까이 다가가 살펴야만 겨우 산채가 보였다.
그리고 산채도 말이 산채지, 이렇게 보니 거의 산중에 마을 하나 있는 규모였다. 안에 있는 장정 머릿수는 얼추 헤아려도 백은 가볍게 넘고, 그저 성이 이가라고만 알려진 의민당 모주의 일가와 아랫말에서 오가는 이들까지 합치면 이백이 넘을지도 모르는 일.
어느새 두리손 따라 옆으로 다가온 쑥나루 농장 노복들의 눈에도 경탄과 더불어 두려움이 서렸다.
“저, 나리. 저곳을 치는 것입니까요?”
윤원형의 성명방 저택에서 도망쳤다가 추쇄된 노비들을 심문하면서, 그 ‘임 처사’가 어떤 수법을 썼는지도 알게 된 두리손이었다.
그것을 모방하여 쑥나루 노비들을 모조리 끌어왔다. 오십 남짓 되는 장정들은 직접 끌고 오고, 아녀자들은 얼마 안 되는 가재 짊어지고서 남물리에 피신해 있도록 하였다.
“걱정 마라. 너희는 눈길만 끌면 된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두리손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바위 위에 올라가 있다 보니 자연스레 무슨 연단 위에서 말하는 듯하게 되었다.
“여기 의민당 완장찬 이 사람을 따르면 된다. 안쪽을 들이쳐 저들의 이목만 끌고, 이 사람 말에 따라 제각기 도망쳐 남물리로 가라.”
“허, 허나 소인네들은 병장기랄 것도 없습니다요! 임 당수도 어딘가 있을 텐데, 모조리 잡혀 죽으란 말씀이십니까?”
“그러면 이 세상에서 위로 올라가기가 그리 쉬울 줄 알았느냐?”
“예?”
“너희 쉰 중 살아서 남물리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많아야 서른, 적으면 열댓이나 될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종놈 삶이라는 것이 다 같은 밑바닥 아니냐? 나도 계집종의 자식이므로 잘 안다. 그 밑바닥 벗어나려면, 그에 맞는 공은 세워야지.
한양 서원군 대감 댁에 있는 노비라면 여간한 상민쯤은 우습게 볼 수 있다. 너희 아낙과 자식들 또한 그러한 위세를 부리며 살 수 있다. 오늘을 놓치면 이런 때가 네놈들 삶에 또 언제 있겠느냐?”
애초에 쑥나루에서 의민당 치러 간다고 말했을 때, 두리손이 자신도 그렇게 공 세워 윤가라 자칭할 수 있게 되었노라 밝히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노비들이 제 발로 따라오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한 번 움직인 마음 다시 움직이기는 그리 어렵지 않아, 결국 다들 한 번 해보자는 마음가짐을 다시 갖추었다.
“노을 지기 시작하면 움직여라. 남물리에서 만나자.”
“예, 나리.”
저 가짜 의민당 노릇하는 졸개도, 지금 아랫말 옆 풀숲에서 한나절 내내 숨어 있는 나머지 무리도 모두 두리손이 손수 모은 이들이었다.
이 더러운 세상에서 진흙탕 벗어날 길 찾아 모여든 이들. 남의 피 묻혀가며 어떻게든 올라가려는 이들.
그리고 의민당의 피는 곧 그들이 타고 올라갈 만한 듬직한 공이 될 것이다.
산길 따라 내려온 두리손은 아랫말 바로 바깥, 청석골 가는 산길 근방의 수풀에 몸을 숨겼다.
멀찍이 사람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오더니, 곧장 마을이 부산해지는 것이 보였다.
‘벌써 눈치를 챈 것인가. 역시 제법이로군.’
한양은 시끄럽고 다른 일곱 도는 흉년에 도적, 수령의 탐학 등등으로 역시 혼란스러운데 오직 황해도 한 곳만 평온하였다. 방금 보았던 그 산채의 모습도 그렇고, 이렇게 빠르게 소식 전해지는 것도 그렇고, 결코 의민당을 범상한 도적 무리로 볼 수 없음은 명백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할 것인가?
‘양천의 구분이 없는 나라라... 그토록 허황된 꿈만 따르지 않았더라면 필히 그 재주로 대성할 수 있었을 터인데.’
지난해 숭례문 밖에서 임 처사가 말했던, 의민당이 원하는 나라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러나 그런 나라 되기를 원하였던 자가 이 땅에 사람 살며 양천의 구분 생긴 이래로 얼마나 많았는가. 그들 중 그 뜻 이룬 자는 또 얼마나 되었는가.
한 사람이 스스로 몸을 일으켜, 누구도 함부로 업신여길 수 없는 자리까지 올라가려 아등바등 힘쓰는 것도 이처럼 어렵거늘, 어찌 나라 하나를 그렇게 바꿀 수 있겠는가?
청석골 쪽 산길로부터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두리손은 상념에서 깨어나, 활시위에 화살을 재었다.
청석골 산채에도 적 수십이 쳐들어왔으니, 아랫말도 경계하라는 말을 전하러 오는 자일 테다. 스쳐 지나갈 때 언뜻 살피니, 기골 장대한 것이 필시 흑의군 사람이었다. 이름과는 달리 평범한 흰옷을 입고 있었다.
어느새 등짝만 보이는 기수를 향해 시위를 당기고, 놓았다.
“으악!”
애초에 절명시킬 뜻으로 쏘지는 않았으나, 갑옷도 없이 맨몸으로 화살을 맞았으므로 기수는 충격에 곧장 낙마하고야 말았다. 기수 잃은 말 홀로 아랫말 안쪽까지 들어가 날뛰고, 곧 마을 안쪽에서 사람들이 놀라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정 몇몇이 나와 피 흘리며 쓰러진 기수를 들쳐메고 가는 것까지 확인한 뒤 두리손은 몸을 일으켰다.
이지함은 서림네 집 별채에 앉아 늘 그렇듯 이이와 논쟁 벌이고 있었다.
신씨 부인이 볼 때마다 좀 정리 하고 살라며 핀잔을 주곤 하는 글방은 – 당장 오늘도 한 소리 들었다 – 날이 갈수록 지저분해져, 서책은 서책대로 어지럽게 쌓여 있고 벽면은 벽대로 엉망진창이었다.
중원의 치란(治亂)을 모두 살피고 이제 조선국으로 논쟁이 옮겨온지라, 중원 지도 옆에 조선국 산천 담은 지도도 정성껏 그려서 붙여두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어느새 확정된, 그러나 그 이후로 더 늘리지는 못한 합의점 세 가지. 이지함 그의 글씨로 쓴 것 두 개와, 이이의 글씨로 된 것 하나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명필이라 하기엔 부족함이 많으나, 제멋대로 뻗고 휘는 것이 딱 총기 넘쳐흐르는 제자의 풍모와 같아 나쁘지 않았다.
“... 그래서, 제자 생각하기로는 권병(權柄)을 군신(君臣)간에 나누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고 봅니다.”
고구려가 연개소문 사후에 망하지 않으려면 나라의 제도를 어찌 해두어야 했을까를 두고서 둘은 한창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 둘이 합의를 보지 않았더냐? 국법에 따라 정사를 보필하는 쪽과 그 국법 자체를 손대는 쪽을 나누어야 한다고.”
“하지만 두 쪽 모두 일색(一色)이 되면, 예컨대 권신 하나가 나타나 모든 것을 저의 뜻대로 농단한다면 그때는 무용지물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때,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모주님! 모주님, 계십니까?”
“여기 있네.”
문 열고 나가니, 경황 없이 달려온 듯 흙먼지 미처 못 떨어낸 의민당 당원 오막손이가 숨 헐떡이고 있었다.
“큰일입니다! 청석골에 적이 쳐들어와 접전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무어라? 적도의 수효는 얼마나 된다 하더냐? 싸움의 유불리는 어떠하고?”
“그것도 알 수 없습니다! 말 전하러 온 이도 화살 맞은 채 마을 앞까지 와서 쓰러졌습니다.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평소 아랫말 터줏대감 노릇하는 서림이 꺽정이와 함께 나가 있었으므로, 당수 버금가는 자리에 있는 이지함에게 이렇게 묻게 된 것이다.
“필시 싸움이 불리한 것이렷다. 당장 당수에게 연통을 전하고, 아랫말에 있는 당원들을 한데 모아라. 산채가 쉬이 함락되지는 않겠지만, 그쪽으로 지원을 보내어 기세를 북돋아줌이 마땅하겠지.”
“예, 모주님.”
그러나 뭔가 맞지 않는 느낌이 들어, 돌아서서 나가려는 오막손을 붙잡고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적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바로 청석골을 들이친 것을 보면 우리 사정을 잘 아는 것이다. 어차피 적의 수효가 아무리 많다 한들 이곳까지 몰래 들어왔다면 우리보다 많지는 않을 터. 그러니 절반만 산채로 올려보내고, 나머지는 이렇게 해라...”
의민당 당원 수십이 각자 무기 들고서 우르르 몰려가는 것을 본 뒤에야 두리손은 몸을 일으켜 아랫말 반대편으로 향했다.
“나와라.”
말 한 마디에 수풀 사이에서 열댓 명이 몸을 일으켰다. 이날을 위해 두리손이 직접 모은 이들이었다.
“산속으로 한 무리가 들어가더구나.”
“이쪽 방면을 지키던 당원들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좋다. 의민당 당청이 어디인지는 내가 알고 있다. 몸 숨기고 따라와라. 당청 들어가기 전까지는 명하기 전까지 칼을 뽑지 마라.”
“예, 도련님.”
두리손이 ‘윤두리손’ 자칭하기 시작한 이래 그의 아랫사람들도 그를 ‘도련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아첨하는 뜻도 있겠지만, 두리손과 마찬가지로 받아주는 곳 없는 얼자 출신으로서 언젠가 그 비슷한 자리 올라가려는 마음이 흠뻑 담겨 있었다.
“첫째는 사람 붙잡는 것이요, 둘째가 역모의 증좌를 찾는 것이다. 잊지 마라. 가자!”
나지막한 ‘가자’ 소리에 모두가 일심동체로 뒤따랐다.
이미 잔뜩 경계심 품은 아랫말이라, 개 한 마리도 함부로 짖지 않고, 남은 이들은 문 꼭 닫고서 숨죽이고 있었다.
어느새 조그만 현의 읍치(邑治) 정도는 될 법하게 커진 아랫말이다. 사내 열대여섯 정도가 작정하고 은밀히 틈입한다면 남의 눈을 족히 피할 수 있었다.
하물며 두리손의 계책대로 마을 지키는 당원들도 모두 산속으로 올라간 판이니, 더욱 허술할 것이었다.
“저기가 당청이다.”
마을 가로지르는 대로 반대편 골목에서 고개 내밀며 두리손이 말했다.
아랫말이 정말 하나의 현이라면, 그 동헌은 저 당청일 테다. 당초 계획대로 서림을 붙잡아가는 것은, 임 처사가 서림 데리고 월당강(現 재령강) 일대를 돌고 있다 하였으니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그 바로 아래서 일하는 사람, 아니면 서림을 대신하여 아랫말을 지키고 있는 당의 중진 하나쯤은 있을 테다. 그 이씨 성 쓰는 모주도 종종 아랫말 내려온다 하였다.
“담을 넘습니까?”
“아니, 어차피 마을 전체가 비었으니 정면으로 들이친다.”
빈집털이 당했음을 깨달은 임꺽정이 분기탱천하여 이쪽으로 달려들수록, 오히려 지난 며칠간 잠행하며 일대 지리를 파악해둔 두리손이 몸 빼돌리기는 쉬워질 것이다.
“마침 솟을대문 빗장도 안 걸려 있습니다. 어지간히 경황 없이 떠난 듯합니다.”
눈치 없는 졸개 하나가 허튼소리를 덧붙였다.
“이거 느낌이 좋지 않은데...”
그리고 대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차.
“웬 놈이냐!”
“적이다!”
마당 한쪽 행랑에서 발칵 문 열리며 의민당 졸개들이 나오고,
“에워싸라!”
“한놈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라!”
당청 앞 대로에도 갑자기 당원 수십명이 나타나 두리손 일당을 둘러쌌다.
“도련님?”
“안쪽으로 들어가! 대문에 빗장 걸고!”
행랑에서 나온 당원 셋을 손수 해치운 두리손이 뜸 들이지 않고 바로 지시를 내리니, 모두 그 말에 따랐다.
“오래 못 버팁니다!”
“이대로 계속 안쪽으로 들어가며 모든 빗장을 걸어잠가라! 너희 둘만 나를 따르고 나머지는 흩어져라!”
“예, 도련님!”
함성이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문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성질 급한 당원 몇몇은 그사이 담을 훌쩍 뛰어넘고 – 전직 도적들이라면 그 정도는 기본이었다 – 재수 없게도 그 담 옆을 지나던 두리손의 사람 몇몇은 어어하는 사이 포위당해 어육(魚肉)이 되었다.
그러건 말건, 아니, 그런 자들이 시선을 끌어줬기에 더욱 수월하게, 두리손은 안채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서림의 집인 동시에 의민당이 저들 ‘사업’에 필요한 온갖 잡무 처리하는 곳 답게, 정말로 여느 동헌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아(內衙) 위치도 별반 다르지 않을 테다.
“곰손(古音孫), 빗장 걸어잠그고 집기 꺼내서 막아라. 박승(朴承) 너는 안쪽을 뒤져서, 잡아갈 만한 사람을 찾아라. 나는 별채 쪽으로 가서 증좌를 찾겠다.”
“예!”
주변의 살벌한 함성은 결코 멀어지지 않고 있었다. 빠져나가려던 이들 대부분이 붙잡혀 가망 없는 저항을 하고 있는 것일 테다.
그러나 두리손은 그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그들 또한 두리손을 원망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별채 문을 발칵 열었다. 방금 전까지 사람 있던 흔적 농후한데, 서적이 잔뜩 흩어져 있고 벽면에는 지도 따위가 붙어 있었다.
조선국 지도와 그 옆에 붙은 글귀 여럿을 바로 떼어내고, 소매 안에 대충 접어서 넣었다.
“빠져나간다!”
“알겠습니다!”
“하나 잡았습니다! 도와주십쇼!”
마당 뒷편에서 박승의 목소리 들려왔다.
“이놈들! 무엇하는 것이냐!”
아직 관례도 치르지 않은 듯한 소년의 목소리도 함께 들렸다.
지체 없이 달려가서 보니, 양반집 도령 하나를 박손이 담장 쪽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이보시오, 도령. 우리도 그대를 해치고 싶지 않소. 순순히 따라오시오. 보다시피 사세가 급히 돌아가므로, 이대로 오래 있을 수 없소. 여차하면 험한 수 쓰는 수밖에...”
박승이 포대자루를 품에서 꺼내며 말했다.
아마 난생 처음 당하는 두려운 일에 소년이 얼어붙어 있는데,
“내 아들에게서 떨어져라, 이 잡놈의 자식아!”
갑자기 안채 모퉁이 쪽에서 인영이 튀어나오니, 박승은 그대로 들이받혀 쓰러졌다.
“어머니?”
“네놈은 어디서 온 누구더냐! 당장 물러나지 아니하면 내 스스로 벨 것이다!”
양반댁 귀부인 차림을 한 중년 여인이 피 묻은 칼날을 두리손에게 돌리며 꾸짖었다.
두리손도 조용히 칼을 뽑아 여인에게 향했다.
그러나 오직 아들을 위해 버티려는 어머니 기세에, 무예로는 훨씬 뛰어날 두리손이 오히려 눌렸다.
“이(珥)야! 신씨 부인!”
“도련님! 오래 못 막습니다!”
삼추(三秋) 같은 촌음이 지나고, 마당 반대편에서 양쪽 사람들 외치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빠진다!”
지체 없이 단념한 두리손이 외쳤다.
한참을 달린 두리손은 조개여울(蛤灘) 반대편에서 기다리던 정배임을 만났다. 미리 마필(馬匹)과 함께 와서 기다리던 김민(金珉)도 함께였다.
“어떻게 잘 빠져나왔군.”
“제가 몸 내빼는 것이 노복들 빠지는 신호였으니까요. 무리 가운데서 제가 가장 먼저 도망하는 셈이니, 다들 잡혀 죽어도 저 혼자는 살아서 나오기가 쉽지 않았겠습니까.”
살벌한 농담이건만, 정배임은 무엇이 재밌는지 피식 웃었다.
얼마나 살아남았는지는 서로 묻지 않았다.
“자, 받으십쇼. 피 안 튀게 정성껏 쳐 죽였습니다.”
정배임이 의민당 완장을 두리손에게 건네었다.
“잡담은 남물리까지 가서 해도 족하다.”
“예, 알겠습니다.”
여전히 재미없는 도련님이라고 정배임 홀로 궁시렁대고, 김민은 말고삐를 조용히 두리손에게 내밀었다.
의민당 완장 맨 기수 셋이 얼마 지나지 않아 돌여울 쪽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돌여울 지나 갈여울을 눈앞에 두어서야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멈춰라.”
“예, 도련님.”
“오는 길에 지나가는 사람을 보았느냐?”
갈여울이라면 봉산에 딸린 마을인 은파(銀波)와 재령에 딸린 삼지(三支), 그리고 재령 읍내를 잇는 곳이다. 그러나 사방을 둘러보아도 인적이 눈에 띄지 않았다.
“어... 그러고 보니 통 못 보았습니다.”
“시골길이라 어쩔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아니면 청석골 소식이 벌써 퍼졌거나...”
두리손의 직감은 지금 정배임과 김민 두 사람의 말이 모두 틀렸다고 외치고 있었다.
“오늘 청석골 친 무리를 가장 쉽게 색출하는 방법이 무엇이겠느냐?”
“그야...”
“부리나케 어딘가로 달려가는 자를 붙잡는 것이지. 바로 우리처럼 말이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의민당이라 한들, 행인 하나 지나가는 것까지 모두 막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의민당 사이에 오래 있던 정배임은 두리손 말을 듣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의민당이라면 충분히 그리할 수 있습니다.”
“맙소사, 그러면 이미 늦은 것 아닌가? 도련님,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합니다! 남물리 말고, 해주 쪽으로 가서 배편을 구하거나, 아니면 구월산 쪽으로 빠져서 놈들을 따돌리거나...”
“아니, 남물리로 간다. 이게 본디 계획이었다.”
“예?”
성공하면 좋고, 실패해도 윤원형 뜻대로 되게끔 할 수 있는 계책. 그 마지막 단계가 눈앞에 있었다.
때마침 멀리 산속에서 호적 소리가 울려왔다.
“저쪽이다!”
“저기, 저놈들 잡아라!”
완장을 팔 대신 이마에 동여매어 두건처럼 쓴 무리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가자!”
오늘 흐른 피처럼 붉게 물든 노을도 어느새 사라지고, 검푸른 어둠이 들판을 메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쫓고 쫓기는 것은 그대로 이어졌다.
거리로 따지면 이십 리가 채 안 되건만, 이미 말도, 사람도 지쳤던 터. 슬슬 헐떡이고 있던 차 갑자기 천지가 울렸다.
“이놈들!”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 무심코 등 돌린 정배임이 경악했다.
“임 당수! 임 당수입니다!”
“달려라! 남물리가 지척이다!”
휙- 소리와 함께 단창이 화살처럼 날아왔다. 피하라 말하기도 전에 다시 하나가 날아오더니, 김민이 탄 말 엉덩이를 꿰뚫었다.
“도련님! 저는 버리고 가십시오!”
말하지 않아려도 그러려 했다는 불필요한 첨언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사오 리를 달려, 마침내 내수사에 딸린 남물리 농장이 보였다. 그리고 횃불 들고 길을 지키는 수십 명 무리도.
“오셨소?”
“그렇소. 임 당수도 뒤에 따라오고 있소.”
“걱정 마시오. 아무리 의민당이라 한들 내수사를 범할까.”
어제 두리손은 이쪽 월당강 일대의 갈대밭과 농장을 총괄하는 서제(書題, 내수사 중간관리직) 김일명(金鎰溟)에게 패물을 두둑히 쥐어주고는 – 모두 윤원형의 사재에서 받은 물건이었다 – 의민당이 장차 일대의 다른 농장과 마찬가지로 이곳 남물리까지 범하려 한다 말해두었다.
내수사 서제라 하면 비록 경아전(京衙前) 이속(吏屬, 아전)이라지만 그 위세가 여느 중인과 같지 않다. 내수사에 딸린 노비조차 다른 양민들을 마음대로 때리고 귀물을 갈취하기도 하니, 서제쯤 되면 어지간한 고을 수령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허나 아무리 그래도 노비는 노비. 바로 옆의 농장에서 하루아침에 노비가 양민이 되고 제 소유의 전지까지 생기는 모습을 보니 부러움과 욕심이 아니 생길 수 없었다. 김일명도 이를 알고, 조만간 임 처사 그자에게 찾아가 항의할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적당히 토지와 재물 뜯어내고, 제 속 차리고 남으면 농장 노비들에게 조금 떼어줄 생각이었다.
내수사 우습게 못 보도록 한 번쯤 기를 죽일 마음 품던 차, 서원군 대감이 자식으로 인정한 얼자이자 그 분부 손수 받든다는 이 윤두리손이 나타나 의민당이 조만간 남물리 농장을 범하려 한다 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놈들, 죄인을 내놓아라!”
곧 뒤따라온 임꺽정이 외쳤다.
“너희야말로 죄인이다! 이곳이 어디라고 무리를 이끌고 함부로 범하려 하느냐!”
김일명이 자신 있게 대꾸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신만만한 표정이 굳어졌고, 서제 나리 말씀 받들어 모였던 내수사 노복들도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이, 이것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눈빛만으로 사람 하나쯤 찢어죽일 법한 기세로 꺽정이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그 뒤로 두건 쓴 의민당 무리가 함께 걸어들어왔다. 머릿수로 따지면 내수사 쪽과 비슷하겠지만, 흉흉한 기세를 어찌 감히 비기랴.
“사람 말이 들리지 않느냐! 어찌 감히... 컥!”
꺽정이를 막으며 나라의 위엄이 어쩌고 쫑알대던 김일명은 어느새 멱살이 잡혀 버둥대고 있었다.
뒤의 노복들도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차, 그들 사이로 말 탄 사람 하나가 나왔다.
“그만 하시오!”
“오냐, 두리손이. 네놈일 줄 알았다.”
일렁이는 횃불 든 두 무리 사이에, 말에서 내려 멱살 잡고 있는 거한 하나, 그리고 말 탄 채 선달의 복식을 한 자 하나가 마주 섰다.
“이미 죄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아오.”
“이왕 짓는 죄, 살인 한 번 더 하는 게 대수냐. 칼을 뽑아라.”
“나라에 죄를 더 짓지 말고 그냥 물러감이 어떻겠소.”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폭소뿐.
“나라에 죄를 지었다, 내가? 하하하! 이봐, 두리손이.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나라에 죄를 지기 전에 나라가 먼저 내게 죄를 지었다.
그뿐인가? 이 나라 열린 이래 모든 천한 것들, 억울하게 죽은 모든 서생들, 네 상전 같은 것들이 호의호식할 때 굶어죽은 모든 자들. 다 너희가 죄를 지어 죽어갔다. 그런데 네가 내게 죄를 말하느냐?”
“그럴지도 모르오. 하지만 임 당수가 아무리 뛰어나고 의민당이 얼마나 기세 매섭다 한들 어찌 나라의 위엄을 범하고 명 부지하기를 바라겠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
“그래서 이곳 남물리로 온 것이냐? 이 ‘나라의 위엄’이 너를 지켜주리라 믿고서?”
“이미 서제를 때리고 경계를 범했으니, 나라의 위엄은 해친 것과 다름없지. 그것이 노림수가 맞기는 했소. 그리고 다른 하나는... 뭐, 이제 다 되었소. 지금까지 당수 발목 잡았으니 족하군그래.”
그제야 어슴프레한 박명 사이로 재령강 강물 위에 거룻배 한 척이 떠 있는 것이 보였다. 김일명 멱살 잡았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니, 그제야 두리손의 얕은 수작질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놈이 어디로 더 내빼려 하느냐!”
“뭍은 모두 당수가 붙잡고 있으니, 물로 갈 수밖에!”
그저 약조한 시각에 배가 도착할 때까지 꺽정이 발목 붙잡으려 했던 것일 터.
말 달려 강가로 향한 두리손은 곧장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미리 자루에 넣어둔, 증좌로 쓸 종이들은 머리에 곱게 이고서 거룻배로 향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바로 뒤에 있을 줄 알았던 꺽정이는,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강가에 조용히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건 말건, 미리 두둑하게 삯을 받은 사공은 다른 말 없이 노를 젓기 시작했다. 그제야 꺽정이가 외쳤다.
“두리손 이놈!”
“더 늦기 전에 다시 생각해보시오! 아무리 임 당수라도 나라를 거스를 수는 없소!”
그러나 돌아오는 말은 뜻밖이었다.
“아니다! 네놈 덕분에 오히려 일이 더 잘 풀리게 되었으니, 고마워해야겠구나! 꼭 돌아가서 윤원형이로 하여금 우리를 역적으로 몰아가라 하거라! 관군도 많이 몰고 오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꾸에, 이번에는 두리손이 당황하였다.
“이보시오! 그게 무슨 말이오? 임 당수, 임 당수!”
그러나 뱃사공은 귀가 있어도 듣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재령강 강물은 애초에 귀가 없었으므로, 거룻배는 그대로 강둑에서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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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 언급되는 봉산 일대의 지명들은 『대동여지도』를 참고하였습니다.
또한 작중에 등장한 두리손의 패거리와 서제 김일명 등은 모두 가공의 인물입니다.
이이의 필체는 후대에 이이가 노론에 의해 추숭되면서 친필 서한 등이 모두 잘 보존되었기에 지금도 여럿 전합니다. 그러나 이이 – 그리고 흥미롭게도 그의 학통을 이은 서인과 노론 거두들 대부분 – 의 서예 솜씨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다고 합니다. 즉 “남성적이고 힘이 있으나 어울림과 조화는 부족한” 것인데, 이이의 성품을 생각하면 여러모로 사람과 필체가 닮은 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김영복 (2021). “김영복의 서예이야기: 조선의 글씨 – 율곡 이이와 그의 라인.” http://www.koreanart21.com/column/korcalligraphy/view?id=8427&page=1).
내수사는 조선 왕실의 개인적인 재산(내탕)을 관리하는 기관으로, 그 운영 방식이나 주 수입원 등은 기나긴 조선시대를 거치며 꾸준히 변천을 겪었지만 그 위세는 거의 항상 높았습니다.특히 조선의 기강이 문란해지던 시기면 어김없이 내수사의 목소리도 높아지곤 했는데, 일례로 연산군 대에는 내수사 서리인 서제를 임명할 때 이조를 통해 다른 관헌처럼 공식으로 제수하는 절차를 밟기도 했습니다.
명종대에도 마찬가지로 내수사는 막강한 권력을 자랑했는데,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1551년, 지방을 돌면서 각지 재산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는 중간관리자 서제(최대 종6품) 중 충청도 지역을 담당하던 서제 송헌(宋憲)이 충청도 일대의 지방관들에게 왕명이라는 이유로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런 황당한 상황을 겪은 병사·수사 등 지방관들은 송헌을 아문 밖으로 끌어냈는데, 앙심을 품은 송헌이 이를 고스란히 문정왕후에게 고해바쳤고, 결국 송헌을 푸대접한 관리들은 조정의 감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작중의 김일명이 보이는 자신감도 나름의 근거가 있는 셈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