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상전벽해 (3)
풍성부원군 이기가 비명횡사하고 성명방 절반이 잿더미가 된 이래 여전히 뒤숭숭한 도성을 고변 하나가 뒤흔들었다.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서원군 윤원형의 얼자로 황해도에서 그 집안의 농장을 살피는 일을 하던 윤두리손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그 농장에 의민당 무리가 들이닥쳐, 양안과 노비문기를 모조리 불태우고 농장의 토지를 송두리채 빼앗았다.
윤두리손은 의기 있는 사람 몇 명을 모아 의민당 임거정에게 항의하러 갔는데, 도리어 매만 맞았고 함께 간 사람들은 붙잡혀 돌아오지 못했다.
이에 비분강개한 두리손은, 의민당이 저처럼 간악하니 반드시 흉악한 뜻 품었으리라 단정하고 의민당 당청에 숨어들어 죄의 증좌를 찾았다.
의민당 무리가 이를 뒤늦게 깨닫고 두리손을 추격하니, 때마침 강에 거룻배 한 척이 떠 있어 천우신조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흉포한 의민당이 두리손을 쫓으면서 재령 남물리의 내수사 농장까지 범하였고, 이 무도한 처사에 항의하던 서제 김일명 또한 몰매를 맞았다.
겨우 도망친 두리손이 한양에 돌아와 저의 억울한 사정을 고하였면서 증좌를 바쳤는데, 그 아비 원형이 이를 바탕으로 손수 글을 쓰면서 그 증좌를 살피니 매우 괴이하였다.
“조선 팔도 산천을 상세히 그린 지도가 한 부요, 해괴한 글이 적힌 휘호가 석 장입니다. 신이 그 필적을 살피고 의심되는 바 있어, 대역죄인 이지함의 동문인 전 사헌부 장령 허엽(許曄)과 유생 박순(朴淳)에게 물었는데, 석 장 중 두 장이 이지함의 것이라 증언하였습니다.”
윤원형 본인이 나서서 물어보면 의심할 것이므로, 대신 허엽의 친족이기도 한 그의 족질 윤춘년(尹春年)을 대신 시켜 물었다. 대충 비슷한 것 같다는 답변만 나와도 족할 텐데, 정직하게 그들이 아는 동문 이지함의 필적이 맞는 듯하다 인정하니, 윤원형으로서는 잘 된 일이었다.
“그 휘호의 글은 차마 함부로 말하기 무서우나, 오로지 참을 밝히고자 이 자리에서 감히 직고(直告)하겠습니다.
첫째로, 치세의 도에 상도(常道)란 없다 하고, 둘째로 권병(權柄, 권력)이란 하나로 모이면 썩는다 하였으며, 허엽과 박순이 이지함의 글이 아니라 증언한 셋째는 사람의 심성에 본디 욕심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치세에 상도가 없다 함은 군신(君臣)의 도리를 마음대로 바꾸겠다는 뜻이요, 권병이 하나로 모이면 안 된다 함은 인군(人君)의 위엄을 흩어버리겠다는 뜻이며, 셋째로 인간의 심성이 욕(欲)이라는 데 이르러서는 성현의 글을 비틀고 더럽히기기가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아아, 역모의 뿌리를 제때 뽑지 못하여, 그것이 마침내 황해도 한 도의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그 비속한 습성을 버리지 못하여 패악한 언행으로써 스스로 드러내었으니, 이 어찌 천행(天幸)이 아니겠습니까! 마땅히 이때를 만나 임거정과 소위 의민당을 단죄함으로써 명명백백한 의리를 중외(中外)에 널리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 뒤로는 구구절절 죄가 의심되니 추포하거나 체직하여야 할 자의 이름이 죽 나열되었다.
허나 그 대목에서 누구보다 먼저 이름 나온 것은 이지함도, 이원수도 아니요 임거정이었다.
“흉적의 괴수 임거정은 이미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죄를 범하였다는 의심을 받아 봉산 관아에 근신케 하는 처분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명을 가볍게 여기고 패역한 짓을 그치지 않으니, 이것으로 그 흉심을 족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대역죄인 이지함의 죄상은 이미 정미년(1547)에 밝혀진 바 있습니다. 흉악한 무리와 결탁하여 그 목숨을 부지하였으며, 그 후로도 반성하기는커녕 더욱 완흉(頑兇)한 비계(祕計)를 꾸미고 불궤(不軌, 반역)의 마음을 더욱 깊이 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의 별감을 자칭하는 서림은 본디 평양부 아전으로서 성품이 음흉하여 마침내 쫓겨나듯 평양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난 정미년 유신현에서 옛 감영을 부수고 이지함을 빼낸 적도의 우두머리 역시 서림이라 하니, 이 또한 참으로 그 정황이 의심스럽습니다.
봉산군수 이원수는 임거정의 죄상이 밝혀지기 전까지 그를 관아에 잡아두라는 명을 받들지 않았으니, 이 또한 지극히 의심스럽습니다. 즉시 체직하고 임거정과 함께 추고(推考)하여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그 일대의 수령들 역시 죄상이 없지 않을 것이므로 마땅히 조처하여야 할 것입니다.”
허나 서림과 이원수 사이에, 그러니까 의민당의 주요한 인사들과 여기에 관여한 관헌들 나열하는 사이에 본디 들어가야 했으나 빠진 단락도 있었다.
“정미년 당시 평안도 관찰사였던 이준경은 서림이 감영을 드나드는 것을 알면서도 추포하기는커녕 두둔하여 마침내 금일의 화란으로 이어졌으니, 이 또한 마땅히 의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전 황해도 관찰사 주세붕 역시 수양서원을 세운다는 핑계로 의민당과 결탁하였으니 지금 맡고 있는 성균관 대사성 직을 즉시 거두고 추문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무렵 이준경이 급히 서원군 대감을 찾아오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는 끝내 위 단락이 고변에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모를 일이었다.
다만 소문은 쉬이 퍼지는 고로, 이미 이준경이 허자와 결탁하여 윤원형의 아랫사람 되었다고 욕하는 과격한 무리는 이를 빌미삼아 흉을 보고, 보다 온건한 이들은 이언적 등 사림의 거두가 모두 쫓겨난 작금 조정에서 사화(士禍) 피하도록 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고 옹호하곤 했다.
한편, 옹호해줄 이가 도성에 없던 나머지 황해도 백성들은 그대로 죄인 신세가 되었다.
“그 악당(惡黨)의 무리는 수효가 기백을 넘고, 그들의 횡포를 방치한 지는 몇 해가 되어 황해도의 동쪽 절반은 모두 그들과 결탁하였습니다. 충량한 백성과 반민(叛民)을 구분하고, 역당에 합세한 자들은 모두 뿌리를 뽑아야 하니, 바라건대 군병을 내어 적국(敵國)을 대하듯 진압하소서.”
윤원형의 고변은 여기까지였는데, 그 무렵 윤원형 바로 아래, 이기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꿰찬 진복창이, 딴에 윤원형의 마음을 읽는답시고 곁가지로 하나 첨언하였다.
“윤두리손은 본디 천한 태생이나, 옳고 그름을 능히 분간하여 마침내 사직의 중대한 일을 고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바라옵건대 면천(免賤)으로써 포상하여 올바른 행실을 권면(勸勉)하소서. 또한 면천과 더불어 좋은 이름을 새로이 내려준다면 두리손은 감읍하고 위에서 아래를 사랑하는 마음은 더욱 드러날 것입니다.”
물론 윤원형 눈에는 쓸모가 의심스러운 사냥개에서 (지금은) 쓸모 있는 사냥개로 격이 올랐을 뿐이요, 두리손도 이를 알고 있었다. 나중에 진복창 또한 이기와 같은 명운 맞이해야 할 때를 대비하여 윤원형이 넌지시 진복창에게 면천 말을 꺼냈는데, 그것을 좋다고 받아들어 조정에 건의한 것이다.
일전에 이기가 죽고 윤원형의 집은 불탔을 때, 윤원형이 의민당 임거정의 죄상을 말하였던 데 은근히 반대했던 대비와 심연원 등도 이제는 더 반대할 근거가 없었다.
백성에게 자비 베풀 것을 아무리 병해가 말하더라도, 대비는 내수사까지 모욕당한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윤원형에게 일전에 올바른 말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며 사과하는 글을 보내게 되었으니, 손윗누이와 동생이 이렇게 다시 화합하였다.
어쩌다 소윤과 함께하게 되기는 했지만 그저 조용히 그들 일을 할 뿐인 상진, 홍섬 등도, 의민당이 대갓집이 사사롭게 거느린 농장을 모조리 없애고 그 노비를 저들 마음대로 면천하였다는 데 이르러서는 의민당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역시 대개 농장을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지난날 충주 파옥 이후로 땅 한 뙈기 없던 자들이 갑자기 저의 전지(田地)를 얻게된 이래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의 전호(佃戶, 소작농)·노비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부럽다 하는 속삭임 오고 감을 알고 있었다.
한 고을에서 수백 명이 갑자기 논밭을 나누어받았는데 그리 되었다. 그렇다면 한 도 전체가 그렇게 바뀐다면 조선국 전체에 그 파장이 미칠 터.
이리하여 조정의 공론도 하나로 묶이고, 속마음이야 어찌 되었든 지난날 화재 이후 윤원형을 의심하고 그 말에 반박하였던 자들도 대놓고 또는 암암리에 사과하였다.
그러나 봉산군수 이원수를 파직하라는 명과 더불어 의민당은 모조리 붙잡아들이고 그 당수 임거정과 모주 이지함, 별감 서림을 붙잡으라는 지시가 여러 차례 내려갔음에도, 그 명 받들어 거행하였다는 장계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찌 된 영문인가 선전관을 보내보아도 역시 감감무소식이었다.
보통 개성이나 그 이남에서 평산·서흥·봉산 쪽으로 갈작시면 강음 조읍포(助邑浦) 아니면 기평도(岐平渡)라고도 하는 우봉 돼지여울(猪灘)에서 예성강을 건너기 마련이었다.
선전관 장항(張沆) 또한 돼지여울에서 배를 구하여 강을 건너고 있었다.
“이보게, 사공.”
“예, 나리.”
“근래 이곳으로 관복 입은 이들이 지나간 적이 있는가?”
“그렇습죠. 제 배는 아니 타셨는데, 강 저쪽 나루터 쪽으로 지나가시는 것을 두어 차례는 뵈었던 듯합니다.”
사공이 노 저으며 답했다.
“그런가? 혹 어찌 생겼는지, 일행은 얼마나 되었는지도 기억하는가?”
“아이고, 소인네 같은 천것이 나리님들과는 감히 눈도 못 마주치는데 어찌 나리님들 생김새를 살피겠습니까요?”
듣고 보니 그럴듯하여, 장항도 더 묻기를 단념하였다.
허나 당장 그의 앞에 갔던 이들이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고, 특히 그와 호형호제하는 친한 사이인 백유충(白惟忠)도 강을 넘어간 뒤 소식이 끊겼다. 그를 걱정하는 마음과 함께, 저들 의민당이 정녕 역적질할 마음 품었다면 어찌해야 하나 슬슬 고민하던 차.
노 젓던 뱃사공이 갑자기 노를 물 밖으로 빼더니, 허공에서 몇 번 휘저었다.
“사공, 무슨 일인가?”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요. 노 젓던 중 무언가 노와 부딪힌 듯해, 혹 상한 데는 없나 살폈습죠.”
그것이 강 반대편에서 기다리던 의민당 무리에게 보내는 신호임은, 바로 그 무리에게 그대로 붙잡힌 뒤에야 깨달았다. 말까지 빼앗기고 사흘을 내리 걸어, 봉산 관아에 딸린 객사로 끌려갔다.
같은 곳에 붙잡혀 있던 백유충은, 혹여 형님께서 구하러 오신 것은 아닌가 기뻐하며 맞이했는데, 눈치 없이 장항이 ‘아니, 나도 잡혀왔네.’ 하니 곧장 낙담하였다.
이제 보니 첫 번째로 보내진 선전관 윤희(尹<日+羲>)도 함께 붙잡혀 있었다.
붙잡힌 사정 들어보니 더욱 기가 막혔다. 윤희는 개성에서 길을 잘못 들어 한참 남쪽인 배천 전포(錢浦)에서 강을 건넜는데, 거기서 바로 붙잡혔고, 백유충은 조읍포에서 강 건너다 붙잡혔다.
그러니 나라의 위엄을 능멸한다고 분노하기에 앞서, 의민당이 정말로 황해도 절반을 이미 삼킨 것은 아닌가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세 사람이 방 하나에 앉아 신세 한탄, 도적 욕, 앞날 걱정 등으로 반나절쯤 허송(虛送)하였는데, 갑자기 그들을 가두어둔 객사 앞이 바글거리기 시작했다.
“선전관 나리들 계시오? 나와보시오.”
‘이 도적놈들이 어디 감히 나라의 관리를 나오라 마라 하느냐’ 하고 꼬장을 부리기에는, 이미 이들 모두 기가 한참 죽어 있었다.
“누구인가?”
그나마 주눅 덜 든 장항이 목소리 내어 물었다.
“붙잡힌 주제에 무슨 문정을 하고 있소? 오늘 문 없는 방에서 자고 싶지 않거들랑 얼른 나오시오.”
더 버텼다가는 정말로 좋지 못한 일 날까 두려워, 세 사람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차례로 나왔다. 바깥에 있는 것은 말로만 그 이름 들었던 임거정.
짙은 눈썹과 텁수룩한 수염이 숲과 같고, 덩치는 거하니, 이름이 참 정직한 셈이었다.
“나리들 풀어줄 생각이오.”
“오, 그것이 사실인가! 아니지, 흠흠.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다행...”
“시끄럽소. 풀어주기 전에 한 가지 해주어야 하는 일이 있소. 나리들 들고 온 글월들이 있지 않소? 그것을 평산부 백성들 앞에서 크게 읽으시오.”
“아니, 어찌 교서 봉독(奉讀)을 그리할 수 있는가?”
“읽지 않겠다면 교서만 빼앗고 풀어드리지.”
선전관 본인이 못나서 도적에 붙잡혔다면 그나마 벼슬 떨어지고 끝이겠지만, 임금 – 그 뒤에 누가 있든 – 의 말이 담긴 교지를 빼앗긴다면 그것이야말로 더 큰 중죄다. 결국 저 교묘한 협박에 세 선전관 모두 굴하고야 말았다.
“후... 언제 읽으면 되겠소?”
“그대 조정의 우두머리 노릇하는 윤원형이 사람을 몰래 보내어, 우리 당원 다섯이 죽고 여덟이 크게 상했소. 내일 그 다섯의 상례를 치를 때 읽을 것이오.”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미 한 번 입 밖에 낸 것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다음날 아침.
“허어, 세상에...”
“이것은... 설마 교서를 가지고 감히 조리돌림을 하겠다는 겐가?”
붙들려 나온 세 선전관 모두 눈앞의 광경에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봉산 저자가 사람으로 가득 찼다. 상례라기보다는, 마치 무언가 널리 보이고 외치고자 사람을 모아놓은 모양새.
동헌 앞에는 나무로 된 단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모인 이들의 수효가 얼추 짐작이 되자, 이번에는 다른 쪽으로 두려워졌다.
“봉산 한 곳에만 저만한 수라면... 정말로 일곱 도의 관군을 모두 동원해야 하는 것 아니오?”
“이제 보니 의민당 완장 찬 자는 열에 하나쯤이나 되겠군.”
허나 그렇다는 얘기는 의민당에 직접 속하지 않은 이들도 의민당 말을 따른다는 뜻이라, 어느 쪽이든 심란한 일이었다.
이윽고 상례가 거행되었다. 도적 출신 뜨내기 둘에,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다 좋다고 의민당에 들어온 봉산 젊은이 둘, 그리고 평산 살던 농군 하나.
도적 출신들은 가솔이 없어, 대신 그들과 친하게 지내던 흑의군 동무들이 올라오고, 다른 셋은 그 아비와 어미들이 올라왔다.
그들이 죽은 아들 또는 형제의 이야기를 하고, 찢어지는 심정을 말하며 마침내 울부짖었다. 어찌하여 죽었느냐, 이제 막 살만한 세상 되었는데 이 무슨 일이냐.
그리고 말했다.
“나라에 고하여 억울함을 풀어주시오!”
거기에 이르자, 이번에는 임꺽정이 선전관들을 데리고 위로 올라갔다.
“나라에서 이미 답을 내렸소! 이자들이 조정에서 온 선전관이오. 자, 읽어라.”
어느새 선전관 대하는 말이 하대로 바뀌었다. 그러나 읽을 수밖에 없었다.
하필 세 편의 글 중에서 가장 언사 거친, 장항이 들고 온 교서(敎書)를 읽으라 하니, 어찌 될까 두려워하면서도 형 된 도리로 목청 높여 읽었다.
“임금은 이와 같이 이르노라!”
그 말에 시골 선비들을 시작으로 몇몇이 부복하고, 이어서 엉거주춤 옆에 있던 이들까지 엎드리기 시작했다.
“...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므로, 백성이 굳건하여야 사직이 평안한 법이다. 그러나 과인이 부덕하여 하늘이 연달아 화를 내리고, 백성 또한 곤궁하여 금일에 이르게 되었노라.
마침내 이때를 즈음하여 간악한 무리가 일어나, 백성을 괴롭히고 또 미혹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어찌 이것이 너희의 잘못이겠느냐? 만백성의 아버지로서, 오직 스스로 안타까워하고 삼갈 따름이다.”
그 말에 의민당 완장 찬 몇몇이 일어섰다. 당혹감, 그리고 분노가 서린 표정. 그러나 장항은 교서 더듬더듬 읽느라 이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임금과 백성의 의리는 부자(父子)와 같다. 어찌 아버지가 잠시 실행(失行)하였다 하여 감히 불효하겠느냐? 대개 봉행(奉行)하는 이들이 민생을 몹시 괴롭힌다 한들 이는 지나가는 일이요, 다스림의 요체는 너희를 병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롭게 하려는 것이다.”
듣다가 기가 찬 백성 몇몇이 의민당 일어날 때 함께 일어났다. 글의 봉독이 이어질수록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해, 거의 절반 가량이 몸을 곧추 세웠다.
“그러니 바라건대 너희는 올바르게 생각할지어다. 삭풍(朔風) 지나면 화풍(和風)이 오고, 가뭄이 지나면 감우(甘雨, 단비) 내리는 법이니, 너희가 의민당이라는 흉악한 당과 교우한다면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하고 반드시 함께 죄를 받을 것이다.
한때의 잘못으로 무거운 허물을 쓴다면, 이 또한 얼마나 슬프고 원통한 일이겠는가!”
마침내 일어난 이들이 손가락질하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우우, 꺼져라!”
“일어나라! 저런 말 따위 들으려고 엎드렸어?”
“사람을 죽여놓고 하는 말이 그것이냐!”
“간신배들 같으니! 저런 헛소리를 나랏님 입을 빌어 퍼뜨려?”
장항이 두려워하며 꺽정이를 애타게 보았다. 그러나 꺽정이가 알 바는 아니었다.
“마저 읽어라.”
“허나...”
“마저 읽어!”
눈 질끈 감고 마지막 부분까지 읽어내려갔다.
“어찌 임금이 백성 해치기를 즐기겠는가? 그러나 다른 백성을 해치는 악적은 벌할 수밖에 없고, 간특한 말로 세상을 속이는 무리는 내칠 수밖에 없노라. 너희는 이 이치를 깨닫고 올바른 길로 돌아올지어다!
지극히 정성스러우면 비로소 감화(感化)가 이루어져 상하(上下)가 함께 즐거워지리니, 이에 고하노라.”
이제 돌아오는 것은 욕설도 아니요, 차디찬 침묵뿐이었다.
“이것이 지금의 나라다! 언제고 잠시 너희에게 은혜를 주었다며, 천년만년 떠받들라 하고, 마음대로 사람을 보내 우리를 죽이고 약탈하면서 이 또한 은혜라고 우기는 것이 나라라 이 말이다!
이러니 우리가 떨쳐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가 함께 이루어낸 것을 모두 역적의 소행이라 하고, 아무도 돕지 않아 우리끼리 뭉친 것을 이르러 흉당이라 한다! 이것이 역적이요 흉당이라면, 세상의 올바름과 그릇됨이 뒤집힌 것과 다름없다.
뒤바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자식들, 후손들이 영영 똑같은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마침내 쓰러져 죽게 될 것이다!”
언제고 세상 뒤집히기만 바랐던 도적 본성이 죽지 않아, 의민당, 그 중에서도 흑의군 사람들이 먼저 환호하였다.
한양 무슨 대감이 사람을 보내 마음대로 봉산 백성을 살육하고는, 도리어 봉산을 반역한 고장으로 몰아간다는 이야기만 들었던 백성들도 덩달아 환호하였다.
허나 무슨 구경이 났는가 하여 고개 내밀었던 유생들은 오히려 당황하였다. 저 의민당이 그간 거미줄처럼 만들어놓은 황해도 일대의 각종 사업에 어느새 한두 발씩 걸친 유생들이었다. 누구는 자식을 서원에 보내고, 누구는 의민당에서 인력을 빌려 농지의 방죽 따위를 고쳤으며, 또 누구는 저의 집 서자를 아랫말에 보내어 일 배우게 시켰다.
하지만 수천 군중 앞에서 당당히 임 당수가 잘못하고 있다 밝힐 수는 없는 노릇. 그만한 지조와 학식이 있다면 애초에 낌새 이상함을 깨닫고 황해도를 벗어났을 것이었다.
마침내 집회는 파하고, 선전관들은 이지함이 대신 적어준 의민당의 답변을 받아들고서 쫓겨났다.
그리고 남은 것은 수없이 사람이 모였다 흩어졌기에 마치 텅 빈 것처럼 보이는 봉산 동헌 앞 대로와, 쓸쓸히 남은 연단. 그리고 거기 걸터앉아 뭔가 생각에 빠진 꺽정이였다.
“군략이라도 떠올리고 있는 게냐?”
이제는 당당히 돌아다니는 이지함이 다가와 말했다.
선전관 떠난 객사는, 지난 몇 해간 산속에서 고생하던 장인 이정랑과 아내, 그리고 다른 일가족의 차지가 되었다.
지난번 습격 이후로 산채도 썩 안전하지 않음이 드러났고, 또한 곧 싸움을 시작하는 입장에서 군영(軍營)에 군사 아닌 이들이 있음이 서로 불편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누가 가서 역모 고변할 것도 없으니, 거리낄 것 무엇 있으랴.
“오늘 일 주관하며 떠오른 물음이 있어 내심 고민하고 있었소.”
가볍게 물었더니 의외로 진지한 답이 돌아온다.
“백성들이 정말 끝까지 우리를 따라올까, 그것을 걱정하는 게냐? 우리 계획대로 조만간 첫 싸움에서 네가 무위 한 번 보이면, 그때는 의심이 조금 줄어들 것이다. 사족들이야 내가 돌아다니며 설득하면 되고.”
언제까지 권신 마음대로 군현 하나를 찍어누르고 무자비한 연좌로 선비 잡아 죽이는 꼴을 볼 것이냐. 내가 당해보아서 그 억울함을 안다.
그런 식으로 이미 지난 며칠간 찾아오는 선비들을 설득하였고, 앞으로도 꽤 혀 놀려야 할 이지함이었다.
“아니, 그것 때문은 아니오. 지난날 두리손 그놈 쫓을 때 사정 이야기하지 않았소? 오늘 문득 돌이켜보니, 새삼스레 자문(自問)하게 되더이다.”
꽤 묵직한 이야기가 될 듯하여, 이지함도 연단 위에 올라와 꺽정이 옆에 걸터앉았다.
“두리손 그놈이 도망칠 때, 보따리 하나를 신주단지 모시듯 머리에 이고 강물에 들어가더이다. 그것을 보고 깨달았지. 그놈이 우리를 역적으로 몰아갈 증좌를 구했음을.
그래서 따로 욕하지 않고, 돌 하나 던지지 않고 그냥 보내주었소. 우리 사람 해친 것은 열이 뻗치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두리손이 그런 짓을 해주었으니 우리 계획의 첫 단추에 이어 두 번째 단추까지 스스로 끼워준 셈이지.”
“거기까지는 들었다.”
“그래서 기쁘오. 사람이 죽었는데도, 또 앞으로 내 손으로 꽤 많이 죽일 것인데도 기쁘오. 내가 선량한 사람 못 됨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를 새삼스레 깨달으니 심란할 수밖에.”
염라대왕 앞에 돌아가기 전 빨리 업을 더 쌓아야 하는 꺽정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심지어 자신이 앞날을 보았다고 밝혔던 사형 이지함 앞에서도 이를 밝힐 수는 없었다.
이제 제대로 업을 쌓기 시작할 때가 되었으니 기뻐야 하건만,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허나 그저 저의 마음 내키는 대로 빼앗고 죽이던 시절에는 이런 고민이 없었다. 돌이켜보니 차이는 이것이었다.
“오늘 우리는 죽은 당원들 가족을 데려다, 눈물로써 사람들 마음을 샀지. 그러나 내가 죽인, 그리고 죽일 사람들 또한 다 누군가의 아비요 아들일 터.
말로는 나도 백성을 위한다 하고, 저들은 백성을 아니 위한다 우기지만, 어쩌면 윤원형이나 두리손이나 나나, 별반 차이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소이다.”
“그러냐...”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 모두 연단에 앉아 하늘만 보았다.
장성한 사내 둘이서, 그것도 사람들 다니는 대로에서 이러고 있는 것도 위엄 빠지는 일이라, 꺽정이가 답변 듣기를 포기하고 몸을 슬슬 일으키려 하는데, 이지함이 그제야 입을 열어 꺽정이 발목을 붙잡았다.
“꺽정아, 너는 악독한 놈이 맞다.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행하기 위해 거리낌 없이 남을 이용하고, 해치고, 죽이기까지 하지 않느냐.
그러나 나쁜 놈이 꼭 나쁜 짓만 하라는 법도 없다. 그리고 너는 여느 범상한 악한으로 끝나려 하지 않고, 훨씬 거대하고도 거창하여, 여간내기는 그것이 하늘 아래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인지도 의심할 만한 그런 짓을 범하려 하고 있지.
그만한 일이라면 어찌 선악을 분간하겠느냐? 그저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이 크게 보아 더 이로운지, 그것을 따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소한 악행이 좋은 뜻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단속하기를 그치지 말아야겠지.”
“... 고맙소.”
꺽정이와 이지함 모두 연단을 내려왔다. 저이들 언제 자리 떠나나 기다리고 있던 관의 노복들이 나와 정리를 시작하였다.
간만에 편한 곳에서 장인어른 모시고 하룻밤 지낼 이지함은 객사 쪽으로 향하고, 여기저기 보내둔 의민당 졸개들로부터 보고 받을 것 많은 꺽정이는 청석골로 향하고자 저의 말 매어둔 곳을 찾아가려 했다.
그때 이지함이 엉뚱한 말을 덧붙였다.
“뭐, 그리고 이번 일이 잘 되어야 나도 역적 소리 그만 듣지 않겠느냐. 안 그러면 족보에서 파일 텐데, 죽기 전에 스스로 신원(伸冤)해야지. 그만하면 선행 아니냐?”
“거 스스로 뭐 해 볼 생각은 안 하고 남의 덕 볼 생각이나 가득하다니, 참 도적 같구려. 그리고 따지고 보면 내가 이리 생각 많아진 것도 주변에 학문하는 사람 여럿을 두었기 때문이지 않소? 차마 스승님 탓은 못 하겠으니 대신 사형 탓이나 하고 넘어가겠소.”
“그래, 맘껏 탓하려무나.”
예성강 건너가는 선전관마다 연락이 끊겨, 졸지에 국초 함흥차사의 고사를 재연하게 되자, 봉산으로 보내진 네 번째 선전관 이흠례(李欽禮)가 마침내 변복하고서 북쪽 신계(新溪) 쪽에서 강을 건너 동정을 살피고 왔다.
그리하여 장차 의민당이 조정의 엄한 명을 무시하고 작변(作變) 꾀함이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장계가 조정에 닿을 무렵 마침내 예성강 건너편에서도 소식이 들려왔다.
금교찰방 민 아무개는 겁이 많은 사람이라, 의민당에 끼어 반역이라는 무서운 길로 걸어 들어가느니 차라리 그냥 유배 가고 말겠다 생각하였다. 그가 빠지기를 원하므로 꺽정이 또한 그간 그자가 의민당 사정 보아주었던 것을 생각하여 순순히 보내주었는데, 이때 그동안 붙잡아두고 있던 선전관들도 함께 방면하였다.
그중 세 번째로 보내졌던 선전관 장항은 의민당에서 보냈다는 글을 들고 나왔는데, 글을 받아본 조정은 다시금 발칵 뒤집혔다.
“조정에 고함.
그대들이 한때 황해도로 알던 곳은 이제 그 이름 따라 황해 바다와 같이 되었다. 바다에서 어찌 세금을 걷겠는가? 또 어찌 바다에 구획을 나누고 군현을 두겠는가?
상전벽해가 바로 이것을 이르는 말이다. 그대들이 졸렬한 다스림으로 백성을 괴롭게 한 지가 몇십 년이요, 그러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툭하면 트집 잡아 사람 가두고 죽인 것도 몇십 년이다. 그토록 괴롭히니, 어찌 멀쩡한 땅이 하루아침에 바다 되는 일이라고 없을까.
논밭은 사람이 갈고자 하면 갈리지만, 바다는 사람의 뜻이 통하지 않으니 천만 대병도 한나절 폭풍으로 능히 삼킬 수 있다. 하물며 쇠잔한 지금의 조선국 군병에 이르러서는 굳이 말할 것이 더 있겠는가?
오라. 백성의 바다가 기다린다.
의민당 당수 임(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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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이나 역사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선전관은 당상관부터 종9품까지 다양한 품계의 무신들이 맡는 자리였습니다. 본디 가전훈도(駕前訓導)라는 직책으로, 임금이 친정할 때 그 주변을 시위하는 군사들이 진법을 제대로 따르도록 관리하고, 임금이 지시하는 것을 주변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457년(세조 3년) 그 칭호에 근거가 없으니 개칭하자고 하여 비로소 선전관이라는 이름이 쓰이게 되었는데, ‘근거가 없다’는 표현으로 보았을 때 본디 고려 말에 이성계의 사병 집단(가별초)의 자체적인 편제는 아니었을까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본디 『경국대전』에서는 정3품부터 종9품까지 품계가 서로 다른 무관 8명을 선전관의 정원으로 규정하였는데, 이후 조선 중기 어느 시점부터 다른 직책을 겸하는 선전관(겸선전관)이 상설화되면서 총 18명으로 늘어납니다.
이후 선전관은 주로 국방이나 치안, 기타 시급한 사안에 관련된 왕명의 출납, 군대 징발, 유사시 경군(京軍) 인솔 등 다양한 업무를 맡았습니다. 선전관 임기를 마친 자는 반드시 품계를 1품 올린 뒤 요직을 맡게 하고, 설령 벼슬이 당상관에 이르지 못했더라도 음서제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등, 국왕의 수족으로서 많은 특혜를 받기도 했지요.
작중 언급된 네 선전관은 모두 실존인물입니다. 이중 윤희는 무신으로 높은 지위까지 오른 윤선지의 아들로, 부자가 공히 ‘윤원형을 상전처럼 섬겨’ 벼슬을 받았다는 악평이 실록에 실려 있습니다. 반면 이흠례는 임꺽정의 난 당시 그나마 역할을 다한 지방관으로, 신계 현령으로 있으면서 항상 활을 들고 다니며 강원도 쪽으로 뻗어 나오는 임꺽정 세력을 많이 차단했던 듯합니다.
그 공을 인정받아 봉산군수로 영전하였는데, 이때 임꺽정 세력은 부임하는 이흠례를 도상에서 잡아 죽이고자 모의하였으나 서림의 밀고로 끝내 실패하게 됩니다. 이때 조정은 함정을 파서 임꺽정을 역으로 잡으려 하였는데, 이때 바로 오백명 관군 대 임꺽정 일당 7인의 싸움이 벌어지게 되지요.
이후 이흠례는 충청수사 등을 거치며 그럭저럭 군생활을 이어갔는데, 선조 연간 초에 욕심이 많고 품행이 더럽다는 내용의 탄핵을 받아 결국 파직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능력을 인정받았는지 이후 다시 김해부사로 복직하였고, 그곳에서도 역시 탄핵을 당했으나 선조의 ‘쉴드’로 그 직을 유지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