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43화 (43/259)

15. 군주민수 (1)

“경술년(1550) 여름은 청사에 길이 남을 것이오. 우리가 일만 제대로 한다면.”

조정에서 역적 수괴와 그 수하로 공인한 꺽정이와 이지함, 서림과 더불어 사임당 신씨, 봉산군수 이원수가 봉산군 동헌에 한데 모였다.

사실 천하 전체로 보면 몽고의 엄답(알탄 칸)이 마침내 대동(大同)의 방어를 뚫고 명국 깊숙히 밀고 들어와 북경을 에워싸고 있었으므로 의민당이 봉기하지 않았더라도 기록에 남을 것이었으나, 의민당이 알 수도 없고 알 바도 아니었다.

“본디 여기 계신 내 사형과 나는 오 년 기한을 생각하고서 일을 꾸미고 있었소. 그러나 이렇게 일이 빨리 터지게 되었지. 하지만 그사이에 일이 엉뚱하게 많이 굴러가, 의외로 해봄직한 정도까지 세가 모였다고 보오.”

“그... 이제라도 일이 굳이 싸우지 않고 풀릴 가망은 아예 없겠소? 암만 조정에서 우리를 역도로 몰아가고 있다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림이 그런 말을 하니, 꺽정이 눈총이 절로 매서워졌다. 다행히 무어라 뾰족한 언사 하기 전에 이지함이 먼저 받았다.

“그것은 당분간 어려울 게요. 이번에 격문 보내어 조정의 위신을 크게 깎았으니, 더 크게 체통을 상하게 하여 그 안에서 내분 일어나게끔 하지 않는 한 저쪽이 먼저 손을 내밀지는 못할 테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노리는 바이기도 하오. 우리가 뜻을 이를 수 있는 방법. 그 계책을 여러분께 알리고, 고칠 바는 고치고 더할 바는 더하고자 함이 오늘 여러분을 모은 이유 중 하나요.”

“허나 그보다 더 중한 이유가 따로 있지.”

꺽정이가 이지함 말을 받으며, 옆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등장(等狀, 연판장)이오. 다들 여기에 이름 적고서 수결(手決) 하시오.”

“아니, 등장은 왜...?”

“앞으로 조정이 어찌 나올지 모르지 않소? 우리 중 어느 하나를 회유하려 할 지도 모르고, 우리를 달랜다며 내놓는 대책이 우리 중 누군가의 입맛에는 맞고 누군가에게는 질색할 만한 것일 수도 있지.

그리 되어 우리끼리 갈라선다면, 어찌 의민당이 버틸 수 있겠소? 그러므로 이 등장으로서 우리가 서로 바라는 바 모두 이루어질 때까지 함께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오.”

솔직히 이 다섯 중 가장 의민당에 공헌하는 바 적은 이원수가 멋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지금은 이 일에 함께 연루된 다른 고을 수령들과 연락 주고받는 일이나, 그간 제법 친해진 봉산 백성들 위무하는 일 등, 나름대로 한 사람 몫을 하고는 있었다.)

“바라는 것이라 하면, 역시 그 세 가지겠구려.”

“그렇소.”

신씨 물음에 꺽정이가 등장 들어보이며 답했다.

“양천의 구분이 없는 나라. 선비가 화를 당하지 않는 나라. 만세불변의 법도도, 금법도 없는 나라.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면, 백정의 아들도 정승이 될 수 있고, 향리의 집안에서도 문형(文衡, 대제학)이 나올 수 있을 것이오. 선비는 마음대로 장사하며 백성 괴롭히지 않고 마음껏 치부할 수 있을 것이요, 저의 궁구한 바를 아무리 마음껏 써내어도 죄를 받지 않을 것이오.

오래된 제도의 폐단도, 케케묵은 권세의 전횡도 없이, 모두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나갈 수 있는 그런 나라.

여기에 수결하면, 그날이 올 때까지, 적어도 능히 나라를 그리 바꾸어나갈 수 있는 처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한마음으로 함께 가는 것이오.”

“우선 그 계획부터 듣고 수결하면 안 되겠소?”

서림이가 삐죽 딴지 걸었다가 추상같은 꺽정이 눈초리를 마주하였다.

“헤헤, 농담이오, 농담.”

그러고서는 사뭇 진지하게 낯빛을 바꾸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우리 당이 성공하리라는 확신은 없소. 하지만... 아랫말에서 별감 노릇하며 여러 고을 아전들을 아래에 거느리다 보니 깨닫게 되는 바는 있었소.

여기서 더 올라가고 싶다고. 그리고 나는 장사에도 손 대는 사람이므로, 스스로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지 않고서 이득 볼 수 있는 방도 없음은 알고 있소.”

그러고서는 이지함과 꺽정이보다도 먼저 나아와 붓을 잡더니, 등장 끝나는 줄에서 세 줄 띄운 자리에 저의 이름 두 글자를 적었다. 누가 도필리(刀筆吏, 아전) 아니랄까봐 칼같이 줄을 지켰다.

이어서 꺽정이가 나서서 서림이가 비워둔 맨 앞에 임거정 석 자를 쓰고, 이지함도 그 옆에 석 자를 썼다. 그 다음은 이원수 차례였다. (서림의 글씨가 의외로 단정하여, 비교될까 은근히 걱정하면서 정성스레 이름 적어넣는 이원수였다.)

“그대도 수결하시오.”

“이 사람도 말이오?”

마지막으로 신씨 홀로 남았는데, 당연히 저에게 붓 넘기지 않으리라 여기던 신씨 앞으로 꺽정이가 벼루와 붓을 넘겼다.

“그러면 이름 안 적고 빠져나가려 하셨소? 애초에 남녀간 내외하는 법도 지킬 것 같으면 이런 일에 함께하지도 않았지.”

그리하여 사임당 신씨도 저의 이름 석 자를 적었다. 개국 이래로 역적 모의하는 등장에 처음으로 이름 올린 여인이었다.

“자, 그러면 잘들 해보십시다. 좋은 말 주고받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소. ”

뭔가 비장한 한 마디 해야 할 것 같은데, 꺽정이가 등장은 옆으로 치워두고 곧장 지도를 꺼냈으므로 그럴 겨를도 없이 넘어가고야 말았다.

지도는 두리손 그놈이 뜯어간 것 대신 이지함이 새로 그린 것으로, 이왕 그리는 길에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만 세밀하게 그려두었다.

이어서 이지함이 이이와 논쟁할 때 쓰던 나무말을 이곳저곳에 늘어놓았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외다.”

말을 한움큼 가져다가 몇 번 탁탁 놓으니, 서림과 이원수는 죽상이 되고 신씨 얼굴에도 근심이 서렸다.

“조정에 보낸 격문에서는 과장하여 우리가 황해도 전체를 거느린다 하였으나, 실제로는 그 절반을 겨우 점하고 있소.”

이지함은 딱 보아도 적을 뜻하는구나 싶게 생긴 나무말을 한양과 개성, 평양 자리에 올려놓았다.

“또한 구월산 서쪽에 있는 풍천·장연 등의 고을은 우리가 도적 유입되는 것을 막아주었기에 딱히 의민당에 신세를 깊게 지지 않았고, 지형이 험하여 민호는 적고 물산은 부족하오. 그리하여 그간 우리 당의 사업과도 엮이지 않았지. 허나 그런 고을일지라도 수령이 작정하고 장정을 모으면 언제든 우리의 후방을 찌를 수 있을 것이오.

그뿐만이 아니오. 바닷가에는 수영(水營)이 연달아 있고, 또 내수사나 종친들이 거느린 어장(漁場)과 염장(鹽場)이 즐비하오. 지금 우리가 해주와 배천에 조금 세력을 뻗쳐두었지만, 수영의 군사가 뭍으로 나와 이쪽을 치거나, 급한 대로 내수사 노비들을 끌어다 쓴다면 이 두 곳도 지키지 못할 테요.”

이지함이 이어서 해주·배천·옹진·풍천에 새로 말을 놓았다. 영락없는 사면초가 형상이 갖추어지니, 바라보는 서림과 이원수, 신씨 부인의 근심이 깊어갔다.

“흐흐, 벌써 그렇게들 주눅이 들면 어찌하시오? 마저 들어보시오들.”

이지함과 이 일로 자주 얘기 나누었던 꺽정이가 마치 남의 일인 양 웃었다.

“그... 의민당 당원도 이천을 훌쩍 넘었고, 더구나 지난번에 교서 봉독한 일 이후에 더욱 사람이 몰려들었다 들었소. 나야 잘 모르지만, 지금 추산하면 삼천은 족히 될 것이고, 임 당수가 손수 조련한 흑의군도 수효는 적을지언정 매우 정예하지 않소이까?”

이원수가 초조하게 물었다. 매일같이 백성들 삶을 옆에서 살핀다며 장터나 논밭을 돌아다닌 덕에 의민당 사정에 꽤 밝은 듯하였다.

이지함이 암울한 내용에 어울리지 않는 밝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또한 정면으로 부딪히면 승산이 없소. 조정이 한 번 작정하고 나서게 되면 우리가 이기기 어렵소.

아무리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된 지 여러 해가 지났다지만, 그래도 군액(軍額, 군사의 수)은 정군과 보인을 합해 족히 삼십만이 넘소. 더구나 정군 중 적잖은 수는 마병(馬兵)이라, 예성강에서 막지 못하거나 평안도 쪽에서 재령으로 넘어온다면, 산세에 의탁하여 막아내는 것 외에 대적할 방법이 없소.”

이제는 완전히 우거지상이 된 서림과 이원수를 내버려 두고 신씨가 입을 열었다.

“지금 이 모주의 안색을 보니, 미리 대비한 바가 있는 듯하구려.”

‘그러니 얼른 꿍꿍이를 이실직고해라’ 하는 채근에, 이지함이 뜸 따로 들이지 않고 바로 밝혔다.

“서 별감, 우리 당이 이미 봉산을 비롯해 여러 고을의 호적에 손을 대고 있지 않소? 이전에 있던 호적 말고, 우리끼리 쓰기 위해 새로 만들어둔 그런 호적이 있으리라 보오. 그것을 기준으로 했을 때, 지금 의민당 관할하는 영역 안의 장정이 얼마나 되겠소?”

“어디 보자... 정확히 답변하려면 아랫말에 가서 확인해야 하겠지만, 양천 모두 합하면 얼추 십이만 명 전후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앞서 조정이 작정하면 삼십만을 모을 수 있다 하였는데 개중 보인이 삼분의 이, 그리고 남은 정군 중 이름만 올린 경우가 대략 절반이라 치면 오만이 남소. 그리고 그 정군 중 북변이나 삼남 바닷가에 매여 있지 않은 이들은 넉넉하게 잡아 다시 절반.

그렇게 치면 우리 당의 싸움은 어림짐작하여 십만 대 이만 오천의 싸움이오. 우리에게는 산성이 있고, 저쪽에는 대신 정예한 경군(京軍)이 있지. 개중 적잖이 마병(馬兵, 기병)도 섞여 있고. 이렇게 치면 얼추 가감하여 비등하다 할 만하지 않겠소?”

마병의 무서움(또는 유용함)을 조금이라도 아는 것은 이 다섯 중 꺽정이가 유일하고, 이지함이 그나마 병서를 읽어 짐작하는 정도였다.

그러므로 경군의 정예함이나 마병의 강력함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십만 대 이만 오천이라는 것만 남아, 이원수와 서림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피었다.

“하하, 너무 쉽게 단정하지 마시오들. 우리가 정면으로 붙었을 때 관을 상대로 내세울 만한 것은, 저 수를 이용해 단숨에 위압하는 것, 그리고 산성에 최대한 의탁하는 것, 이 둘 뿐이오. 오래 끌게 되면 불리한 것은 똑같소.

더구나 말이 십만이지, 평생 논밭이나 갈던 농군이라면 열이 뭉친들 병사 하나를 못 당하오. 이들을 제대로 써서 조정의 뜻을 꺾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적지 않소.”

수만 대군이 움직일 때면 늘 발목을 잡기 마련인 군량은, 이곳이 황해도였기에 절로 해결되었다.

이럴 때에 대비하여 미리 조창에 연줄을 만들어 놓았으니, 지금쯤이면 그곳에서 일하는 향리들이 알아서 곳간 문을 걸어잠그고 의민당에 바칠 준비를 마치고 있을 것이었다.

그토록 한양과 경기도로 곡식을 많이 보내면서도 남은 것으로 족히 먹고 살았던 봉산과 그 일대 군현이었다. 이제 사태가 일단락되기 전까지는 그쪽으로 곡식이 갈 일도 없으니, 관군에 붙잡혀 죽을지언정 굶어 죽을 걱정은 없는 셈이었다.

“다음은 병장기요. 재령과 아랫말 대장간에서 암만 힘쓴다 한들, 이번에 면천된 노복 출신 당원들에게 무기 다 나누어주기도 벅찰 터. 조만간 내가 가서 해주 병영의 무기고를 털어오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충분치는 않을 테요. 대개 관에서 보관하는 군기라는 것이 녹슬고 좀 먹은 것이 태반이기도 하고.”

“다른 것은 몰라도 환도는 적잖이 구할 수 있을 듯하오.”

엉뚱하게 신씨가 꺽정이 말을 끊었다.

“그 무슨 말씀이시오?”

“봉산과 서흥 여인들이 검무를 배운다고 도검을 사들이고 있다는 소문 들어보지 않으셨소? 그 검무, 누가 시켜서 민간에 유행시켰겠소? 언제고 이런 날 올까 두려워 얄팍한 수를 미리 부려두었소이다.”

“허!”

이지함과 이원수가 동시에 경탄하였다. 아마 이원수의 경탄은 이지함과는 연유가 꽤 다를 터이지만.

“미리 그처럼 대비하였다니 고마울 따름이오. 허나 이렇게 군량과 병장기가 갖추어진다 한들 십만 넘는 장정 중 군사로 부릴 만한 이는 턱없이 적을 것이고, 그들을 다 조련할 여력도 되지 않을 테요. 그러니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지.”

“그것이 무엇이오, 임 당수?”

이원수가 물었다.

“바로 인화(人和)요.”

“인화라?”

“인화라 해도 별 것은 없소. 그냥 우리 편에 계속 붙어서 하라는 대로 따르면 반드시 잘 풀리겠구나, 그것을 백성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이지. 역적질할 때 발목 안 잡는 것과, 그 역적질에 드러내놓고 찬동하는 것 사이에는 꽤 거리가 있거든.”

꺽정이가 전생에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기도 했다. 그토록 청석골 패거리에 함께하는 아전과 장인, 장사치들이 많았건만, 이흠례가 봉산군수 부임하여 서슬 퍼런 진압을 하고 남치근이 수천 대병을 이끌고 구월산을 에워싸니 하루아침에 흩어져버리고야 말았다.

“이것이 갖추어진 뒤에야 비로소 우리 대계의 세 번째 단계가 이루어지는 셈이오. 이 일을 할 때는 반드시 우리 다섯이 힘을 합쳐야 할 터. 내가 그 첫발을 내디디도록 하겠소.”

대계의 첫 번째. 한양을 한바탕 뒤집어 윤원형으로 하여금 의민당을 노리게 만든다.

두 번째. 일을 제대로 키워 윤원형조차 쉽게 물러날 수 없도록 만든다.

세 번째. 황해도 일대를 하나로 꽁꽁 묶어 조정이 쉽게 무너뜨리지 못하게끔 한다.

그 다음으로 향하기에 앞서 우선 이 세 번째부터 완전히 이루어야 할 것이었다.

그 동안은 함께 역모에 끌려들어가도록 사족부터 향리, 일반 백성까지 두루 의민당과 한편으로 엮는 데 그쳤으나, 이제는 완전히 그들 스스로 나서서 함께하도록 만들어야 할 때.

그리고 그렇게 만들기 위해 꺽정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단연 싸움박질이었다.

한편, 조정은 저 격문(檄文)이라 하기도 모호한 임거정의 글을 두고 혼란에 빠져 있었다.

정녕 저들이 꾸미는 것이 역모가 맞는가? 그렇다면 마땅히 금상이 무도하여 실덕(失德)하였으니 누군가를 새로 임금으로 추대하겠노라 공언하여야 했다. 억지로 꾸민 유신현 역모 고변에서 빌미가 된 모산수 이정랑이라든가, 하다못해 임거정 본인이 보위에 오르겠다 말이라도 해야 했다.

그리하지 않는다면, 권신 몇몇을 지목하여 그들을 쳐내고 주상을 바르게 보필하겠노라 밝히기라도 해야 할 터. 윤원형도 내심 저의 이름 정도는 거론되리라 예상하고 있었는데, 저 무엄한 글의 내용은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 말이 한없이 거칠고 오만불손하나, 임금이 아닌 조정을 상대로 쓴 글이요, 그들을 꾸짖기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례가 있었던가? 어찌 대처함이 마땅한가?

무엇 하나 밝혀진 바 없는 판국에, 저 의민당 어찌 대할지를 두고 모두의 셈법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군을 크게 일으킨다면 금방 진압이야 할 수 있겠지만 - ‘백성의 바다’ 운운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대신은 없었다 – 그렇게 군공 세운 자의 위세가 한껏 드높아질 테니 그 나름대로 문제였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듣기로 의민당은 무리가 수백에서 일이천에 불과하다 하였다. 물론 그것만 해도 도당(盜黨, 도적 무리)으로서는 전례없는 규모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병 수백이면 능히 위압하여 흩어버리고 그 괴수만 잡을 수 있을 터.

그러니 지나치게 많은 군사를 동원하게 되면 그때는 오히려 군공이 아니라 역으로 탄핵당할 소지만 만드는 셈이었다. 가뜩이나 흉년이라 나라의 곳간이 텅 빈 지 오래이므로 군량 마련하는 것도 일이었다. 또한 자칫하면 조정이 진심으로 상대해야 할 만큼 의민당 당세가 강력함을 만방에 보이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반대로 관군을 어설프게 보냈다가 패배하는 경우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런 공산이 얼마나 되겠느냐 하는 것이 윤원형 포함한 대신 대부분의 생각이었다.

의민당을 역적으로 몰아가는 데 성공하였으므로 마침내 그 뜻을 다 이룬 줄 알았건만, 그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하니 윤원형은 답답하게 여겼다. 결국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

“소위 의민당이 한없이 무엄한 글을 보내온 지 보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벌해야 한다는 의론은 나오지만 군문(軍門)으로 들어가는 지시는 없으니, 이 어찌 옳다 하겠습니까?

후에 저들 무리를 남김없이 토멸하든, 아니면 다시금 귀정(歸正, 투항)케 할 심산으로 효유하든, 우선 저들에게 나라의 위엄을 다시금 보여야 할 것입니다.”

정전(正殿)에 나아가 고하는 윤원형이 바라는 바는 두 가지 중 당연히 전자였다.

“신이 비록 군무에 밝지 못하나, 장단부사 조안국(趙安國)은 무재가 있는 사람으로 명성이 높음은 알고 있습니다. 다만 장단 한 곳에서 충분한 군사를 얻지 못할 수 있으니, 개성유수로 하여금 병력을 보태게 하여 총 오백으로 적을 토멸케 하소서.”

조안국은 사람됨이 탐욕스럽고 간사하지만 적어도 그 아비 닮아 권신 앞에서는 설설 기는 자였다. 그러면서도 선대에 윤원형과 그 일파 대신 김안로라는 썩은 동아줄을 잡아 그 아들인 본인도 마땅한 뒷배가 없었으니, 성공하든 실패하든 윤원형에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조안국은 비록 무명(武名)이 있으나, 신이 살피건대 그 재주는 용렬하고 현능(賢能)한 구석은 없습니다. 그가 섣불리 나아갔다 만에 하나 지게 되면 흉적의 기세가 크게 오를 것이니 차라리 하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이번 ‘역모’를 진압하려면 처음부터 대병(大兵)을 내어 진압해 들어가야 한다 주장하던 이준경이 잠시 반대하는 말을 꺼내었으나, 그에 동조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침내 저에게 기회가 왔다 쾌재 부르며 출진한 조안국은 한창 기세가 올랐다.

병력 오백이 결코 많은 수는 아니지만, 오늘날의 피폐한 군정을 생각하면 적은 수도 아니다. 오히려 어디 오랑캐가 쳐들어오나 하지 않는 한, 이만하면 ‘군세’라 칭할 만도 하였다. 적어도 조안국은 그렇게 생각했다.

“저 앞이 저탄, 돼지여울입니다. 강 바로 맞은편은 평산이요, 조금 하류로 내려가서 건너면 강음 조읍포가 되겠습니다. 정탐한 바로는 근방의 반대편 강안은 모두 의민당이 장악하고 있으니, 마땅히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본관이 그것을 모를 것 같은가? 자네는 자네 일이나 알아서 하게.”

개성에서 군사를 붙여주며 비장(裨將)으로 딸려 보낸 이억근(李億根)이 옆에서 말을 걸었다. 조안국 귀에는 그것이 딴지 거는 것으로 들려, 자못 불쾌하였다.

“허나...”

“자네가 아무리 개성에서 도적 잡는 것으로 이름을 떨쳤다 하나, 고작해야 좀도둑 십수 명 추포한 것 아닌가? 군무(軍務)의 일은 오롯이 본관의 몫이야.”

“그 말씀대로 소인은 고작 패두(牌頭)로 군사의 일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범상한 좀도둑과 무리 이룬 도적을 잡을 때 방법이 달라야 함은 알고 있습니다.”

저의 경험으로 지금 조정이 의민당 대처하는 것에 잘못이 있음을 부지불식간에 꼬집은 이억근이었다.

의민당이 정말 역모를 꾸미고 있는가? 그저 세력 키운 도적으로 보고 진압해야 하는가? 아니면 한 도의 절반을 점거한 전무후무한 역당으로 보고 온 힘으로 부딪혀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을 내리지 않고, 그저 어찌 되나 지켜나 보자는 식으로 이렇게 찔러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험에 비해 배움이 짧아, 그러한 모순을 차마 말로 다 형용하지 못하였다. 결국 이억근도 조안국에게 더 말 올리는 것을 관두었다.

“엇? 적이다! 적입니다!”

그때 나루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수상쩍은 백성 몇몇이 이쪽 언덕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것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루 전체가 어수선해지고, 병장기 든 것으로 보이는 장정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적당(賊黨)이다. 쳐라!”

“와아아!”

척 보아도 군졸이나 강포한 도적도 아니요, 그저 손 닿는 아무 병장기로나 무장한 농군 무리였다. 수효도 일백이 조금 넘을까.

“놈들이 달아난다!”

“쫓아라! 바로 밀고 들어가!”

조안국이 일성호령 내리니,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나갔다. 특히나 장단 군사들에 비해 무장의 질이 높았던 – 즉 병장기랍시고 날이 없는 환도나 길이가 어린아이만한 창을 들고 나오지는 않은 – 개성 군사들은, 이억근이 만류하건 말건 이 기회에 상급이나 타 보겠다며 잽싸게 전력으로 질주했다.

도적이 몰래 강을 건너 나루를 점령하고 있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그리고 그것을 조안국이 미리 알지 못하고 있다가 눈앞에서 적이 달아날 때야 비로소 깨달았는가 하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쏴라! 한 놈이라도 거꾸러뜨려라!”

그러나 조안국 마음과 달리, 그들이 활을 쏘기 시작할 때는 이미 나룻배에 몸 실은 도적들이 멀리 달아난 뒤였다.

“쳇, 글렀군! 얼른 건너갈 준비를 해라!”

“어랍쇼?”

“배가 없습니다, 사또! 놈들이 모두 타고 간 듯합니다요.”

이미 머릿속으로는 벌써 조정의 포상까지 다 받았던 조안국도 현실로 돌아오게 되었다.

“시끄럽다! 이 나루에 사람이 얼마나 오가는데, 배가 그것밖에 없었겠느냐? 당장 흩어져서 찾아라! 네놈들이 배를 찾지 못하면 멀리 북쪽 신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느니라!”

아무리 못해도 이놈의 강은 한 번 건너갔다 와야, 일말의 공을 세웠다 자랑할 수 있을 것이었다.

닦달하는 조안국의 기세가 워낙 매서워, 결국 개성이고 장단이고 구별 없이 오백 명 병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사공 찾으랴,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거룻배 찾으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앗, 원군입니다!”

“우봉에서 원군이 왔다!”

그들 등 뒤에서 ‘우봉현’ 깃발 든 무리 수십이 나타났다. 말 탄 이가 셋이요, 그 뒤에 따라오는 자들은 모두 걷고 있었다.

“흥, 우리는 오백인데 저들은 오십이나 채 될까. 그 동안 경내에 도적이 날뛸 때는 가만 있다 막바지에 공훈을 탐내어 온 것이렷다.

저쪽은 신경쓰지 마라! 얼른 배나 찾아라!”

그렇게 호기롭게 지시 내린지 얼마나 되었을까. 사색이 다 된 이억근이 후다닥 달려왔다.

“부사 나리! 큰일입니다! 저것은 우봉현감도, 우봉 군사도 아닙니다! 얼른 피하셔야...!”

“뭐라? 저들도 적이란 말인가! 관원을 사칭하다니 참으로 고약한 놈들이로고.”

“그것이 중한 게 아닙니다! 우봉현감 시늉하고 있는 자가 바로...!”

이억근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조안국의 호령과는 비교를 불허할 만큼 우렁찬 목소리가 나루 전체를 울렸다.

“이놈들! 내가 바로 임꺽정이다!”

“하하, 저놈이 스스로 죽을 곳을 찾아왔구나! 여봐라! 우리는 오백이고 저쪽은 오십이다! 배는 관두고 당장 모여서 에워싸라!”

나루 곳곳에 흩어져 배를 찾던 군사들이 그 말을 듣고 조안국 주변으로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역적 괴수 임가는 들어라! 네놈이 우리 병력이 적은 줄 알고 이리 과감히 들어온 모양인데, 지금이라도 투항한다면 관대하게... 어?”

“도망쳐라!”

“못 당해낸다! 저놈이 임꺽정이다!”

조안국 주변으로 몰려나오는 듯하던 군사들이, 바로 그 조안국을 지나쳐 그들이 처음 넘어온 언덕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이놈들, 어디 가느냐! 당장 돌아오지 못해!”

그러나 삼삼오오 흩어져 있다가 갑자기 뒤통수 얻어맞아, 적이 몇 명인지, 아군은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그저 저쪽에 그 천하장사 임 처사 있음만 아는 군졸들은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특히 소문 밝은 개성 군사들이 그 탈주의 대열을 이끌고 있었으니, 방향이 반대라는 것을 제외하면 앞서 달려나갈 때만큼이나 보무가 당당하였다.

“부사 나리, 우리도 우선 몸을 피해야 합니다! 흥의역 쪽으로 빠져서 군세를 수습하시지요!”

“어... 어어, 그래야지! 얼른 달아나...”

“여기 있었구만.”

이억근의 채근에 겨우 정신을 차린 조안국이었는데, 그것이 무색하게도 곧 그의 눈앞까지 달려온 거한의 주먹 한 번에 나가떨어지고야 말았다.

“와아아! 이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얼얼한 머리통을 매만지며 조안국은 눈을 떴다. 어느새 나루 한가운데 대로에 꿇어 앉혀져 있었다.

보이는 관군 몇몇은 모두 묶인 채요, 그 외는 저 적당 의민당 무리와 구경거리 생겼다는 듯 나와서 붙잡힌 관군 바라보는 백성들이었다.

강 반대편으로 달아난 듯하였던 의민당 당원들도 다시 돌아온 듯, 주변을 에워싼 군중 중 대략 절반은 완장을 차고 있었다.

“그대 비장은 그대가 얻어맞고 쓰러진 사이에 잽싸게 도망쳤소.”

“누구, 헉!”

짧은 만남이었지만 깊은 인상을 남긴 임꺽정이 그의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내 나리를 풀어드리고자 하오.”

“어림없는 소리! 내 나라의 은혜를 받은 몸으로 어찌 역적에게 굴하여 살기를 바라겠느냐?”

“알겠소. 그럼 죽여드리겠소이다. 마침 예성강 강물이 요즘 딱 따뜻할 때요. 물고기들과 좋은 벗 되시기 바라겠소.”

“... 허나 네가 스스로 부끄럼을 알고 나를 풀어준다면 마땅히 그 죄상에 참작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꺽정이가 슬쩍 위협하니 곧장 조안국도 꼬리를 내렸다.

“뭐, 딱히 나리가 우리에게 굴복하길 바라지는 않소. 그저 우리가 주변에 전하고자 하는 바를 대신 전해주면 그것으로 족하오.

뱃사공! 뱃사공 김가 있느냐!”

꺽정이가 외치니, 얼마 지나지 않아 군중 사이로 사내 하나가 뛰쳐나왔다.

“예, 당수 나리! 여기 있습니다요!”

의민당에 속한 뱃사공으로, 지난번 선전관 붙잡는 데 꽤 공을 세웠던 자이기도 했다.

“부사 나리의 옷을 벗겨서 네가 입어라. 그리고 네가 입고 있는 그 넝마 같은 옷은 부사 나리께 입혀드리고.”

“예?”

“뭐라? 여봐라, 아니, 이보시오! 차라리...”

그러나 조안국이 무어라 말하든 큰 소용은 없었다.

마침 두 사람 키도 비슷하여, 바꿔 입은 옷의 맵시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뱃사공 김가에게 조안국의 철릭이 많이 헐렁하여, 허리띠를 꽉 동여매어야 했던 것을 제외하면 얼추 잘 맞았다.

그 남사스러운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며 의민당 사람들이 환호하니, 조안국은 차라리 죽는 쪽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품었다.

“자, 보아라! 조정에서 무어라 하건 우리는 역적이 아니니, 이름 그대로 의로운 백성이다! 나라를 더 좋게 바꾸고자 하는 뜻으로 이 부사 나리를 풀어주는 것이니, 너희 모두 똑똑히 보아라!

뱃사공도 수령이 되고, 양반도 뱃사공이 될 수 있는 나라를 만들 것이다!”

다들 좋다며 손뼉 치고 환호하고, 구경 나온 나루 일대 백성들도 저도 모르게 따라 환호하였다.

백성들 모두가 의민당의 뜻에 공감하는 것은 아니요, 애초에 무슨 일로 나라에서는 역적이라 부르고 의민당은 봉기하였는지도 잘 모르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허나 그런 이들도 휩쓸려 함게 환호하였다.

그들 눈앞에서 오십 명이 오백을 기습하여 쓸어버리는 것을 보았는데, 어지간하면 그 오십 명 이끄는 우두머리 비위를 맞추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부끄러운 일이 끝나고, 조안국은 제 발로 도망치듯 마을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내 분명 황해도는 바다와 같이 되었다 했는데, 어디 쪽배 한 척을 몰고 오니 상대가 되겠소? 대선(大船) 여러 척은 몰고 와야 할 게요.”

“으으, 이놈!”

“자, 가서 알리시오. 오늘 어떻게 그대가 패전하여 봉변을 당하였는가. 가감없이 알리시오. 과장해서 알리면 나는 더 좋고.”

“네놈 뜻대로 해줄 줄 아느냐!”

예성강 강변에서 멀어지니 다시 용기가 샘솟는 것인가, 아니면 두려움을 부끄러움이 이겨내어 마침내 용기가 된 것인가. 어느 쪽이든 한참 늦었기에 꺽정이는 그저 콧방귀 뀔 뿐이었다.

“그 옷차림으로 평생 살기 싫다면, 어딘가에 가서 장단부사라고 밝히기는 하셔야 하지 않겠소? 그러려면 어쩌다 그런 꼴 되었는가 해명도 하셔야겠지.”

꺽정이는 껄껄 웃으며 등 돌려 나루로 돌아갔다. 한참 그 등짝을 노려보던 조안국은 그제야 저의 이런 모습을 한 놈이라도 덜 보게 하려면 서둘러야 함을 깨닫고서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다.

--- *** ---

흔히 신사임당의 본명이 ‘인선(仁善)’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1990년대에 그의 삶을 각색한 동화에서 지어낸 창작으로 그 출전이 명확하지 않다고 합니다.

1550년 시점 황해도 일대의 (실제) 인구에 대해서는 통계청(2016)의 『인구대사전』에 수록된 조선시대 인구 추정표와 국사편찬위원회(2002)의 『신편 한국사』에 실린 조선 중~후기 각 도별 인구분포를 참고했습니다. 작중 시점의 황해도는 이미 재령 평야의 개발이 세도가들의 간척과 농장 개발로 어느 정도 완료된 시점이며, 상업의 진흥 또한 인구 유입에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의민당이 거점으로 삼고 있는 지역에 황해도 인구의 약 3분의 2가 몰려 있는 것으로 설정하였습니다.

나루의 뱃사공, 즉 진척(津尺)은 본디 신량역천(身良役賤)에 속하여 사실상 천민 대접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와는 별개로 직업의 특성상 충분히 ‘갑질’을 할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천역에 비해 대우가 좋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데, 당장 세종 연간에도 뱃사공들이 후한 뱃삯을 받으며 사사롭게 나룻배를 사들여 영업을 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안국과 이억근은 모두 실존 인물입니다. 조안국은 작중에 나온 것처럼 김안로의 가신 노릇을 하던 조현범의 아들로, 성품이 교만하고 무능하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도적을 잘 잡은 것인지, 아니면 아부를 잘한 것인지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군사에 밝다는 평이 붙었지요. 이후 을묘왜변 당시 경상좌도방어사로 복무하며 무능한 지휘로 탄핵을 받았으나, 결국 몇 년 지나 복직됩니다.

이억근은 임꺽정에게 살해당한 개성 군관으로, 1559년 시점에서 체포한 도적만 수십에 달하는 ‘베테랑’이었습니다. 임꺽정이 신계에서 활동한다는 첩보가 들어오자 군사를 거느리고 출동하게 되었는데, 이때 임꺽정의 세력을 알았기에 많은 병력으로 들이칠 것을 건의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불과 20여 명의 군사만을 거느린 채 산속에 들어간 이억근은 화살 일곱 대를 맞고 사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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