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군주민수 (3)
시골 농군들이 역적질에 대해 잘 알면 얼마나 알겠냐만 – 너무 잘 안다면 그 또한 문제였다 – 적어도 반역은 대개 시골서 한양으로 올라가며 벌이는 것임은 알았다.
임금 바꾸려고 하는 게 반역이라던데, 임금은 한양에 있으니 그것이 당연하였다.
하면 지금 황해도 절반을 뒤엎는 의민당은 무엇을 원하는가? 조정이 잘못 크다고 말하면서도, 언뜻 보기에 그 조정을 뒤엎으려 넘어가지는 않고 예성강 강줄기따라 지키기만 할 뿐이니,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 어느새 여름이 된 지금은 궁금하게들 여기곤 했다.
임 당수가 출정하여 관군을 한 번 파하고, 어디선가 나온 쌀을 여기저기 흩뿌리기까지 했으니, 당분간 망하지는 않겠구나 생각하게 되었지만 그뿐.
그렇게 당장 세상이 아니 뒤집힘을 깨달은 뒤에는 누가 따로 안 시켰는데도 하나둘씩 나아와 이렇게 조나 기장, 수수 따위 잡곡 농사를 시작하였다.
아무리 올해 농사가 오월 서리로 망했다지만, 그래도 정말 멀쩡한 땅을 가만히 묵히는 것은 조선 사람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라, 이 기회에 병정놀이 하겠다며 의민당 따라나서는 이들 제외하면 다들 이렇게 나와 평소처럼 논밭을 일구었다.
“새참 드시고들 하시오!”
“아고고, 잘 맞춰 왔구만그래.”
뜨끈한 밥 한가득 머리에 이고서 아낙 하나가 걸어와, 거목 아래에 대충 내려놓았다.
흉년 때문에 몇몇 고을에서는 술도 마음대로 못 담그게 한다는데, 이곳 봉산은 풍흉(豐凶) 막론하고 술은 지난 삼 년 내내 담가 왔다. 더구나 장시에 사람 줄어드니 – 몰래 오가는 이들이 적지 않아 아예 끊기지는 않았다 – 이미 담근 술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
그리하여 대충 담근 농주도 새참 먹는데 따라와, 다들 한 사발씩 하곤 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 모이면 늘상 나오는 얘기는 세상 돌아가는 사정 이야기였다.
“좋은 세상 온다더니 그렇게 좋은 줄도 모르겠네그려.”
“뭐, 그래도 난리 끝날 때까지는 전세(田稅)랑 군포(軍布)만 걷고 방납미는 아니 내도 된다더군그래.”
군포라 하면, 의민당 서리들이 대립군 세우는 값 대신 걷어가는 베를 말했다. 아무리 흉년에 논밭 버리고 유랑하는 이들 많다지만, 그에 비해 대립군 부리는 값은 좀체 떨어지지 않았으므로, 군포 내는 데 불만 품는 이들은 없었다.
“에이, 나라에 들고 일어난다길래 아예 세곡도 폐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구만.”
“아이고, 요즘 젊은 것들은 고마운 걸 몰라요. 중간에 떼먹는 건 없지 않은가. 그것만 해도 어디야.”
나라가 (더) 망가지기 전을 기억하는 노인이 나무 아래서 눈 붙이고 있다 느닷없이 끼어들었다.
“아니, 언제부터 와 계셨소? 야야, 감돌아, 어르신께도 한 잔 따라드려라.”
아낙 따라온 감돌이가 그 말대로 찌그러진 밥그릇 하나 꺼내어 탁주를 따랐다. 역병에 아비어미 잃고 떠돌던 아이인데 어떻게 이 마을에 흘러들어와서는, 이렇게 머슴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놈이 뭔가를 흥얼거리고 있는 것 아닌가.
“야, 감돌아, 뭐가 좋다고 노래를 부르고 있느냐?”
“아고, 요새 읍내 안 나가보셨습니까. 황씨 마님께서 워낙 노래를 잘 하셔야지요.”
나이 마흔을 넘겼다는데, 스물만 넘겨도 여기저기 자글자글해지는 시골 농군들 눈에는 겨우 새색시 티를 벗은 것처럼 보이는 황진이였다.
대체 어떤 스승을 두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임 당수도 그이를 사저라 부르며 깍듯이 대하고, 군수의 안사람 되는 신씨 부인도 그이를 퍽 가까이 여긴다 하니, 모두가 높은 사람인 줄 알았다.
“황씨 마님이? 허.”
“듣기로는 개성인가 어딘가에서 유명한 기생이었는데, 저 화담 선생 아래서 도술 배우고서는 기생 노릇은 관뒀다지. 그 놀던 가락 어디 안 간 게로군그래.”
“거 한 번 들어나 보세. 감돌아, 한 가락 뽑아봐라.”
그간은 봉산 일대 살 만한 집의 부녀들에게 칼춤 따위 가르치는 것 정도만 하며 평범하게 살았는데 – 그것을 평범하다 부르는 것부터 조금 이상했지만, 의민당 뿌리 내린 지 오래인 봉산군의 사람들은 다들 조금씩은 이상해져 있었다 – 지난 잔칫날 이후로 읍내에서 거문고 타며 노래 부르니, 목소리 워낙 곱고 곡조는 부드러우면서도 쉬워 지나가는 이들 귀 속을 파고들었다.
나중에 한 서너 번쯤 부른 뒤에야 가사 범상치 않음을 깨달았지만, 그때가 되면 이미 입에 익은 뒤였다.
“헴헴, 아, 아.”
감돌이가 목청 한 번 다듬고는 곧장 한 곡 부르기 시작했다.
“저기 가는 저 나리 / 우리더러 절하라 마오
우리 농군 허리 굽혀 / 뼈 빠지게 일해서는
우리 거둔 곡식으로 / 그대 먹여 살리거늘
임자가 절해야지 / 어찌 우리가 절을 할까.”
“얼쑤!”
“야, 잘 부른다.”
다들 노래 좋고 흥겹다곤 생각하지만 노랫말에 대해서는 그리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허나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나, 겨우 군량과 군사 모은 이윤경이 예성강 건너편에 진을 쳤을 무렵에는, 가사가 무슨 뜻인지를 알면서도 그것이 이상하다 여기지 않게 되었다.
“하늘 아래 땅 위에 / 사람으로 태어났네
만물 중의 으뜸이니 / 스스로 귀하구나.”
황진이가 거기까지 한 소절 부르고, 이제 다음 소절 지어보려 하고 있는데, 문 열리고 꺽정이가 들어왔다.
“이야, 사저 누님 노래 잘 하는 줄은 알았는데, 이런 재주 있는 줄은 또 몰랐소. 그간 이리 숨기고 계셨다니 섭섭할 지경이구려.”
“뭐, 사람 잘난 것을 못 알아본 네 잘못이지.”
황진이에게 노랫말 어찌 짓자고 말해주기 위해 먼저 찾아와 있던 이지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가 동문 아니랄까봐, 저 잘난 맛에 사는 것은 황진이와 꺽정이가 비슷하였다. 허나 그 유유상종이라는 논리에 따르면 자신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오므로, 이지함은 따로 더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둘 다 천한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성격 한 군데씩은 비틀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런 데까지는 천한 사람으로 지낸 적 없는 이지함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다.
“흠흠, 그 다음에는, 어디 보자...
그렇게 다 같이 귀한 사람으로 태어난바 마땅한 의권(義權)을 지니며...”
“의권? 그게 뭐요?”
황진이와 꺽정이 둘 다 처음 듣는 말에 고개 갸우뚱하고 있었는데, 꺽정이가 선수를 쳐서 물었다.
“아차, 이제 생각해보니 이것도 내가 제자 녀석하고 이야기하면서 만들어낸 말이구나. 그런 게 있다.”
“아니, 그런 게 있다고만 하면 어떻게 노래를 지어내란 말이오. 우리한테도 설명 못하는데 백성들이 퍽이나 알아듣겠네.”
“누가 역적들 대장 아니랄까 봐 성질만 급해졌구나.”
“역적으로 지낸 시기만 따지면 사형이 나보다 한참 선진(先進, 선배)이오. 그리고 이제 보니 누님도 못 들어본 말인 듯한데, 얼른 해설해 주시오.”
이지함이 옆에 있는 황진이를 보니, 어느새 아웅다웅하는 두 사제를 보며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그러나 꺽정이 말에 일리가 있었으므로, 잠시 머리 긁적이다 말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권(權)이란 본디 권세, 그리고 그것으로 누리는 이익, 이런 것을 이르는데, 권세 중에는 남의 것을 빼앗아 누리거나 속여서 얻는 것도 있지만, 사람이 응당 누려야 하는 것도 있기 마련이지.
헌데 생각해보아라. 네 말대로 선비가 도적이고 인군(人君)마저 도적이라 하면, 그들이 누리는 권세는 어디서 왔겠느냐?”
이번에는 꺽정이가 머리 긁적일 차례였다. 황진이에게는 다행히, 옛날에 이이 옷에 서캐가 묻은 일로 신씨에게 거하게 푸닥거리 당한 이래로 이지함과 꺽정이 모두 꽤 신경을 쓰고 있었으므로 지저분한 꼴은 나지 않았다.
“어... 그 자리에서 나오는 것 아니오? 그러니까 다들 그렇게 임금 되려 모반도 하고, 아니면 그 권세 대신 누리려 권신 짓도 하고...”
“아니지, 조금 더 깊게 생각해 보거라. 대우모(大禹謨)에 이르기를 임금이 임금됨을 어렵게 여기고 신하는 신하됨을 어렵게 여겨야 비로소 백성이 덕에 이른다 하였고, 또한 백성의 뜻을 거스르면서 임금이 바라는 것을 따르지 말라 하였다.
또한 하늘이 명(命) 내려 사해(四海) 모두 거느리는 임금이 된다 하였는데, 무릇 왕자이민위천(王者以民爲天,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여긴다)인즉, 임금을 임금으로 만드는 것은 백성 아니겠느냐.
이게 따지고 보면 네가 제자 녀석 데리고 찾아와 천하공물(天下公物) 이야기 한 데서 흘러나온 일이니, 아마 말 꺼낸 네가 들어도 쉬이 이해가 될 것이다.”
자신이 언제 그런 말을 했던가? 여전히 고개 갸웃거리는 꺽정이었다.
그러나 꺽정이보다 화담 선생 문하에 오래 있으면서, 글도 꽤 가까이 했던 황진이는 무언가 떠오르는 바가 있었는지 씩 웃었다.
“하하, 이것 참. 신씨 부인께서 아들분 스승이 혹 괴이한 논변을 가르치지 않을까 걱정을 하시던데, 그 걱정이 헛된 게 아니었던 모양이지.”
“말 똑바로 합시다. 이 ‘괴이한 논변’ 절반은 그 아들분에게서 나온 거요.”
“어머, 제자 잘못을 스승이 뒤집어써주지 못할 망정 그 반대라니. 우리 스승님께서는 안 그러셨는데.”
황진이가 놀리기를 그치지 않았는데 – 따지고 보면 양반들 놀려먹는 데는 도가 튼 황진이였다 – 다행히 꺽정이가 중간에 제멋대로 끊었다.
“자, 자. 우리 사형 그만 놀리시오. 내가 찾아온 데는 나름 급한 연유가 있다 이 말이오.”
“아니, 애초에 네가 의권이라는 말 트집 잡은 것 아니냐? 내 설명은 마저 해야...”
“후, 좋소. 그러면 짧게 끝내시오. 관군이 우리 또 토벌하러 온다고 첩정(첩보)이 들어왔단 말이오.”
“알았다. 알았어. 그러니까 사람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권세가 있는데, 선비가 화 당하지 않고 저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도, 양천 구분 없이 사람이라면 동등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모두 이것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가한 일이다, 이 말이다. 되었냐?”
“얼추 알 것도 같소.”
그런 권세가 모이고 모여 임금의 권세가 된다고 한다면, 그 말이 나라 다스리는 데 어떤 거대한 함의가 있을 것인가. 거기까지는 생각 닿지 않은 꺽정이가 대충 알았다며 손을 휘휘 저었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네 사형과 실컷 얘기 나누려무나. 지금 저 말 듣고 보니, 노랫말을 아예 새로 써야 할 듯하니.”
“아니, 우리가 비켜드리겠소. 자, 사형, 갑시다.”
그렇게 이지함은 뒷마당으로 끌려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문고 소리가 대신 들려왔다.
“이놈아. 언제는 대계(大計) 논할 때마다 자리가 영 형편없다 불평하지 않았더냐?”
졸지에 황진이네 집 뒷마당 장독대 사이에서 관군 토벌하러 오는 대책을 논하게 되었으니, 이지함 입에서 가벼운 볼멘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땐 그랬고 지금은 아니오. 자, 내 지도도 가져왔소. 보면서 얘기하십시다...”
아직 아침이슬 다 마르지 않은 장독 뚜껑 위에 털썩 지도 펼치니, 그 지도 공들여 그린 이지함만 울상이 되었다.
“일전에 조운선 훔쳐서 거기에 쌀 그득 싣고 온 적 있지 않았소? 그것이 어느새 도성까지 소문이 퍼진 모양이오. 그래서 강대(現 마포~용산 일대)에서 몰래 배 타고 빠져나와 배천 쪽으로 들어오는 이도 한둘씩 있더이다.”
사정은 이러하였다. 의민당이 역적이라 하니 어느 욕심 많은 포도청 군관이 생각하기를, 저의 꼴보기 싫은 이웃이 언제고 성 밖에 나가 의민당 완장 받아오고서 거들먹거린 적이 있었으니 이를 고변하고 그 집 가산을 빼앗으려 하였다.
그런데 그 말 듣고 대경실색한 윤원형이 정말 샅샅이 색출을 시작하니, 여기저기서 비슷한 고변이 튀어나왔다.
물론 한양과 그 일대 백성도 바보는 아니므로 소문 들려오자마자 문제의 완장을 태우거나 묻거나 했지만, 오래 전도 아니요 고작 한두 해 전 그 임 처사가 직접 상경했을 때 그 모임에 나가서 받아왔던 것을 자랑하였으니 이웃들 기억도 그만큼 생생하였던 것이다.
물론 윤원형은 윤원형 나름대로, 저토록 의민당과 내통한 자가 많았다는 데 경악하였고, 저의 성명방 저택 불탈 때에도 반드시 내응한 자들이 많았으리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윤원형이 수족처럼 부린다는 얼자 출신 윤형민(尹亨敏)이 한양 저자를 마구 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불안해하던 이들 몇몇은 그럴듯한 말로 사람을 꼬드겨, 배 타고 한양 탈출해 이쪽으로 넘어오곤 하였던 것이다.
“아마 윤형민이라 하면 사형 배에 구멍 뚫었던 두리손이 그놈이 이름 고친 것일 테요. 허나 그것보다 중한 일은, 그렇게 넘어온 자 중 하나가 이런 소식 전하였다는 것이오.”
상주목사를 지내다가 새로 토포사를 맡게 된 이윤경은 곧장 상경하여 저의 동생과 함께 경군의 상태를 살폈다.
본디 윤원형은 날랜 북병을 주(主)로 삼아, 오천 중 이천은 평안도 군사로 채우려 했다.
이준경과 이윤경이 함께 고민하기로는, 그리하여 승리하면 북병을 거느리고 왔을 무장 – 열에 아홉은 권세 따라 충정 바꾸는 무리였으므로 이쪽이 훨씬 다루기 쉬웠다 – 의 공으로 돌리고, 만에 하나 패배하면 이윤경의 잘못으로 돌리려는 심산 아니겠느냐 짐작할 뿐이었다.
사실 윤원형도 윤원형이지만 우선 조정의 위엄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이준경이 보기에도 그나마 군사 구실을 하는 북병을 많이 끌어오는 것이 합당하였다. 황주 고을은 아직 의민당에게 넘어가지 않았으므로 산 하나만 넘으면 바로 봉산을 칠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윤원형과 달리 이준경은 조선 바깥의 돌아가는 사정에도 밝았다. 이윤경이 토포사로 천거된 후 이곳저곳 수소문을 해보았는데, 들려오는 바가 썩 좋지 못하였으므로 윤원형을 만류하였다.
‘선왕대에 대국을 어지럽게 했던 엄답아불해(俺答阿不孩, 알탄 칸)이 다시 군세를 내어 대국 경조(京兆)에 육박하였다 하오. 여진 야인들이 이를 틈타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으니, 북병은 오백만 내어 압박하는 형세만을 갖춤이 마땅하겠소.’
그리하여 당초 계획보다 천오백 명을 더 많이 뽑아내야 했는데, 도성 경군이야 그나마 군의 모양은 갖추었으나 잡색군은 그저 잡배들일 뿐 군(軍)이라는 말은 차마 붙일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하여 고육지책으로 경창을 열고, 출정한 그들이 먹어야 할 곡량을 대신 장정들 초모하는 데 쓰게 되었으니, 비로소 온 도성이 관군이 새로이 출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속사정까지는 몰라도, 이윤경이라는 이가 상경하여 대장을 맡게 되었고 경군과 잡색군 합쳐 사천오백이 북상할 것임이 그렇게 꺽정이와 이지함 귀에까지 들려오게 된 것이다.
“이윤경이라...”
“사형도 아는 이요?”
꺽정이는 을묘년 일 때문에 그 이름을 들어본 바 있었다.
“그 동생 되는 동고 대감과 더불어 사류(士類) 사이에도 잘 알려져 있다. 덕행 두터우면서 기국(器局, 도량과 재간)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하곤 하지.”
“여간내기 아니라, 그 말씀이시구려.”
“그렇지. 내 그이가 무재 있다는 말은 못 들어봤으나, 반드시 기계(奇計) 낼 것이니 주의함이 마땅하겠다.”
“사천오백... 사천오백이라.”
그때, 바깥에서 부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당수님, 모주님, 계십니까!”
“여기 뒤쪽에 있다.”
흑의군 들어온 이래 모양새가 제법 사내다워진 밤이가, 그 덩치에 안 맞게 호다닥 달려왔다.
“아니, 왜 여기에...”
“사정이 있다. 할 말이나 얼른 말해봐라.”
“배천 고을에 관군이 닿았답니다! 읍치는 그대로 넘어가고, 지금 검동(黔同)이가 무리 거느리고 빠져나오는 중이랍니다!”
“무어라? 어떻게?”
배천은 지금 의민당이 차지한 땅의 끄트머리였다. 아직 의민당 당세가 그리 강하지도 않고, 기껏 차지해본들 옆의 연안이나 경기·황해 양도의 수군이 들어오면 막기 어려웠으므로, 고작해야 흑의군 몇몇과 배천 고을 당원들로 이백 명 정도 되는 무리를 꾸려 강 건너오는 이를 검문하는 것이 전부였다.
만약 벽란도 쪽으로 관군이 넘어온다면, 저 이백으로 막는 것은 당연히 언감생심이었다. 허나 그들이 배를 모으려면 반드시 시일이 걸릴 터. 그사이 꺽정이가 이끄는 본대가 나타나 차단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강을 건널 때까지 아무런 소식을 못 들었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 문제였다.
“강을 건넌 게 아니라, 연안(延安) 쪽에서 나타났다 합니다! 그래서 속절없이 당했다고...”
“그래서 어찌하였다 하느냐?”
“검동이 우선 돈개(錢浦)와 배개(梨浦) 쪽에서 우리가 거둔 나룻배를 모조리 부수고 비봉산(飛鳳山)에 숨겠다 하였습니다. 섣불리 빠져나오다가 모두 붙잡힐 수 있으니, 흑의군 이끌고 오시면 그때 나와 합류하겠다 하였습니다.”
“허, 제법이로구나.”
이윤경 재간이 제법이라는 말로 알아듣고 꺽정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통하는 누군가를 통해서건, 도성 빠져나가는 백성을 통해서든 아마 한양에서 말이 새어나갈 수밖에 없음을 알고 일부러 요란하게 병력을 모은 것이리라.
그리고 병력 모으는 동안은 관도 가만히 있으리라 방심하고 있을 의민당 뒤통수를 치기 위해, 당장 보낼 수 있는 경군 중 일부를 추려, 강화도 쪽에서 연안으로 강을 건너온 것일 테다.
“그렇소. 사형 말씀마따나 여간내기가 아니오.”
“아니, 그 검동이라는 자 말이다. 이름 들어보니 한미한 이들 가운데서도 더욱 한미할 터인데, 네가 훈련을 잘 시켰는지 그리 군략에 밝으니.”
차마 사형 앞에서 ‘주먹은 답을 알고 있더이다’ 할 수는 없었다. 작정하고 모으면 삼천 넘게 불어날 의민당 병세에서, 각자 수십씩 거느릴 소두령 노릇 할 수 있도록 열심히 (즉 졸개들 입장에서 보면 죽을 지경으로) 가르치기는 했는데, 그것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꺽정이도 몰랐다.
“내 꼭 잘 챙겨주리다. 그건 그렇고, 당장 그놈들 쳐죽이러 가야 할 듯한데, 어찌 생각하시오?”
“내 생각에는, 저들도 그리 준비가 되지는 않았을 테다.”
“어찌 그렇소?”
“만약 정말로 만반의 준비 갖추고 출병했더라면, 우리 귀에 도성에서 병력 모은다는 소리 들려온 뒤 한참 지나서 바다를 건너왔을 테다. 그리해야 우리가 방심한 것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으니 말이다.
헌데 우리 귀에 도성 소식 들려오자마자 배천을 들이쳤으니, 아마 군관 중 공에 눈이 뒤집힌 자가 군령을 적당히 어기고서 손을 쓴 것일 테다.”
“아, 그렇다면...!”
“그렇지. 네가 이를 이용할 수도 있겠지.”
꺽정이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것을 알 리 없는 사랑채의 황진이가, 영감이 떠올라 듣기 좋은 곡조를 연주하기 시작하였는데, 마침 때가 딱 맞았다.
연이은 흉년에 쌀값까지 올랐으나, 그런 상황에서 등 떠밀려 온 자가 멀쩡한 무리일 리 없었다. 애초에 한양에서 초모할 잡색군이 실제로는 군적에 이름만 올린 서리와 유생 무리임을 알았으니, 이준경과 이윤경 모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경군은 나름대로 병장기 다룰 줄은 안다지만, 막상 실제 싸움 겪게 되면 등 돌려 도망칠 때까지 조금 더 걸린다는 것 정도를 제하면 어지간한 각 도 병영 병사들보다 그리 낫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한 두 번 싸움을 거치면 그래도 닦아둔 무예가 있으니 꽤 쓸만하게 되겠지만, 도적을 잡는 데 싸움이 한두 번을 넘어가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갑사(甲士)의 제도가 퇴락한 이래 경군 가운데 정말 쓸만한 이들이라면, 오위에 딸린 사용(司勇), 사맹(司猛) 등 말직이나마 벼슬살이 하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수가 적을 뿐 아니라, 일반 군졸로 쓰기에는 너무나 아까웠다.
그 대신 이윤경과 이준경이 모으는 데 힘을 쓴 것은, 바로 산계(散階) 벼슬 지닌 한량들, 그리고 무과 준비하는 이들이었다. 머릿수로는 이백이 채 안 되었으나, 그나마 밥값은 할 이들이요, 개중에는 무재(武才)가 있어 가히 군교(軍校, 하급 장교)로 부릴 만한 자도 적지 않았다.
가령 지금 비보(悲報) 들고서, 조읍포 바로 앞까지 나아온 사천 명 군세의 주장(主將) 이윤경을 찾아와 군례 갖추는 이정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토포사 영감, 배천 고을로부터 마침내 소식이 전해져 왔습니다.”
“말이 배천이지, 실지로는 연안에서 건너온 소식이지 않겠는가?”
비록 세파(世波)에 많이 닳기는 했으나 여전히 갑주보다는 선비의 도포가 훨씬 잘 어울리는 이윤경이, 이정의 보고를 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과연 그렇습니다, 영감. 어찌 아셨는지요...?”
오백 명 경군을 미리 내어, 강화에서 배 타고 건너가 배천을 공략하게 하였는데, 그때 이후로 아무런 소식이 없다가 보름이 지난 지금에야 전해져 왔다.
“군관 신희(申僖)는 내 그때 보니 성정이 급하고 욕심이 많은 것처럼 보였네. 오백 명 경군을 모두 데리고 넘어가기보다는, 우선 소선에 나누어 타고 건너가 배천 고을을 들이치려 하였겠지.”
“그 말씀대로입니다. 삼백을 데리고 배천 읍치에 들어간 뒤, 그중 이백만 데리고 강음을 점거하려 나아가다가 귀양치(貴陽峙) 고개에서 대패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남았다는가?”
“군관 안사형(安士亨)이 남은 이백 군사를 이끌고 연안에 들어가, 뿔뿔이 흩어진 군사를 다시 모았습니다. 죽고 다친 이는 그리 많지 않으나, 산길에서 도망치던 중 도적에게 붙잡힌 자가 적지 않아, 지금 남은 병력은 삼백칠십사 인이라 합니다.”
“바로 회답하게. 그 병력을 데리고 벽란도 건너편 금곡조창, 그리고 배천 읍내, 이 두 곳만 지키고, 그 외의 모든 움직임은 반드시 본관의 승낙을 득할 것이며, 경거망동할 시 적당에게 결탁한 것으로 간주하고 본인과 그 일가에게 마땅한 죄를 물을 것이라고.”
마치 선비가 시회(詩會)에서 저의 글을 읊듯, 이윤경이 조곤조곤 늘어놓았다.
“예, 영감. 바로 그리 령(令)을 전하여 글을 부치겠습니다.”
“차라리 잘 되었네.”
나가려는 이정이 궁금함을 못 참고 이내 묻고야 말았다.
“송구하오나, 어찌 그러한지 여쭈어도 될지요?”
“저들이 그만큼 경군을 가볍게 여기지 않겠는가? 그만큼 교병(驕兵, 교만한 군사)이 되었으니, 계략에도 잘 넘어오겠지.”
이윤경 형제가 머리 맞대고 궁구한바, 의민당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하나였다.
당 전체에 이름난 사람이 오직 임거정 하나라는 사실. 한 사람이 한양에도 나타나고, 몇 달 전 우봉에도 나타났다. 이지함은 그저 죄 받고 비뚤어진 선비니 무명(武名)은 없고, 설령 있다 한들 대단치는 않을 테다. 그나마 손수 충주 감영을 부수었다는 평양 향리 서림이 있기는 하나, 그때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이준경은 그 말이 거짓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의민당의 소위 ‘흑의군’이 직접 나타나 대적할 수밖에 없게 한 뒤, 이를 붙잡으면 의민당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저들도 그것을 알기에, 이곳저곳에 관군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온 강의 배를 훔쳐가거나 불태운 것일 테다.
그러나 이렇게 이윤경이 직접 군세를 이끌고 강음 건너편에 와 있으니, 임거정은 호기(好機)라 여길 테다.
자신이 직접 몰래 쳐서, 이윤경 한 사람만 잡으면 관군도 그것으로 끝이라고.
“이 사람이 자네들 별군(別軍)에게는 기대하는 바 적지 않네. 오늘 밤이 고비이니, 그르치지 않도록 하게.”
“예, 영감.”
이러다 정말 임 당수와 대적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정은 슬쩍 걱정하였는데, 이미 해가 슬슬 저물고 있던 고로 그늘이 져서 그런 이정의 얼굴이 이윤경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해가 저물었다.
이윤경이 직접 데려온 사천 군사 대부분은 주변에 골고루 흩어지고, 특히 경군과 별군은 뒤편 고성산(古城山) 자락에 매복하였다. 그리하여 이윤경이 손수 거느리는 중군(中軍)은 일천 명 가량 밖에 남지 않았다.
마치 와서 날 쳐달라 청하는 듯한 모양새.
임거정이 건너오면 바로 못 견디고 도망치는 시늉 하라고 별군은 수십씩 쪼개어진 채 강둑을 지키고 있었다.
“놈들이 건너올까요?”
“글쎄다.”
부디 건너오지 않기만을 바라며 이정이 말했다.
자신이 각미사 드나드는 것 때문에 혹여 문제 생길까 싶어, 저는 죽더라도 가족에게는 화 닿지 않게 할 요량으로 초모에 응하여 이렇게 왔다.
그러나 병력이 오천이니 설마 자신에게까지 의민당과 정면에서 싸우는 일이 생길까 했건만, 이리 되고야 말았다.
“엇, 저쪽에 횃불입니다?”
“그리고 이건... 거문고 소리 아니냐?”
건너편 조읍포 나루에 횃불 한둘이 켜지더니, 노랫소리 들려오기 시작했다.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이라.”
그리고 그것을 신호로, 조읍포 전체가 횃불로 메워졌다. 하늘을 울리는 노랫말과 함께.
“물 벗어난 배는 쓸모 없지만,
배 없어도 물은 그저 물일 뿐.”
그와 함께, 금곡조창에서 빼돌린 조운선 열 척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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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란한 처세로 윤원형의 서슬 퍼런 권세를 버텨내고 끝내 최후의 승리자가 된 동생 이준경처럼, 이윤경도 상당히 처세에 능했던 듯합니다. 을사사화 당시 소윤의 편에 살짝 섰기에, 공신 3등에까지 책록되었으나, 이를 탓하는 기록이 거의 전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그 아들이 양재역 벽서 사건에 휘말려 사사당하고, 이기를 탄핵한 뒤에 아들의 죄상까지 더하여 ‘괘씸죄’로 잠시 삭탈관직까지 당하는 등, 원 역사에서는 큰 부침을 겪었습니다.
일전에 언급된 것처럼, 16세기 중엽 도성의 경군은 많이 부실해진 상태였습니다. 오위 경군이 약화되면서, 그 대책으로 도성 주민들을 동원한 일종의 예비군인 잡색군이 창설되었으나, 이 제도 역시 사실상 유명무실해졌지요. 임란 당시 군사를 모았더니 태반이 서리와 유생이어서 유성룡이 ‘멘붕’했다는 것은, 이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을묘왜변 당시에도 이런 문제가 있었기에, 이준경은 대신 작중에 나온 것처럼 한양 내의 한량들을 초모하여 병력으로 동원하게 됩니다.